벗 하나 있었으면 / 도종환


마음이 울적할 때 저녁 강물 같은 벗 하나 있었으면
날이 저무는데 마음 산 그리메처럼 어두워 올 때
내 그림자를 안고 조용히 흐르는 강물 같은 친구 하나 있었으면
울리지 않는 악기처럼 마음이 비어 있을 때
낮은 소리로 내게 오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 노래가 되어 들에 가득 번지는 벗 하나 있었으면
오늘도 어제처럼 고개를 다 못 넘고 지쳐 있는데
달빛으로 다가와 등을 쓰다듬어주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라면 칠흑속에서도 다시 먼 길 갈 수 있는 벗 하나 있었으면.

 

- 시집『당신은 누구십니까』(창작과비평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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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에서 서울까지 가장 빠르게 가는 방법은 비행기도 고속철도 축지법도 아닌 좋은 벗과의 동행이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술은 좋은 친구와 마시는 술이며, 그 때의 술은 장소나 주종에 관계없이 그윽하고 깊다. 자본을 신봉하며 도회에 사는 사람은 우선 세 부류의 친구, 즉 금융인, 법조인, 의료인을 한 명씩은 곁에 두고 요긴할 때 도움 받으라고 처세술에서는 조언한다. 하지만 여행을 하거나 함께 술을 마실 때 유효한 벗은 무엇보다 말의 소통이 잘 되어야 하며, 그래야만 일단 지루하지 않고 술도 술술 잘 넘어가는 법이다. 그러자면 화제도 한두 영역에 갇혀서는 재미없고 경계와 문턱 없이 자유로이 넘나들 수 있어야겠다. 김수영의 시를 이야기 하다가 돌연 남편의 잠버릇 흉을 보기도 하고 아이들 교육을 걱정하다가 대통령의 오만과 독선을 성토할 수도 있는 것이다.    

 

 게다가 감성의 주파수까지 딱 들어맞으면 더할 나위 없이 고맙겠지만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 이견이 있을 때 상대의 생각을 꼭 내게 맞추려 고집하다보면 우정은 멀어지고 애정은 더 멀리 달아난다. 정치적인 견해도 진실에 기반했다면 차이를 인정할 수 있다. '똘레랑스'하면 그만이다. 우리는 흔히 '그 친구 그런 점만 아니면 참 괜찮은 친군데'라고 말한다. 그러나 누구나 단점이 있으면 장점이 있고 그 단점은 대체로 장점과 같은 세포군 안에 존재하는 속성이기에 단점을 제거하면 장점마저 사라져 버린다. 어떤 친구가 성격이 너무 급해서 문제가 있다면 그만큼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장점이 있기 마련이고, 성격이 느긋해서 탈이라면 사려 깊음이 장점이기 십상이다. 장점만으로 조합된 인간을 기대하기란 하느님의 재림만큼이나 어려우므로, 우리는 다만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부족함을 보완하고자 노력할 뿐이다.

 

 그리고 '저녁 강물 같은 벗'은 말을 해도 알고 하지 않아도 아는 친구이다. 좋은 일엔 초대해야만 오지만 어려울 때는 부르지 않아도 나타나는 친구다. '날이 저무는데 마음 산 그리메처럼 어두워 올 때' '내 그림자를 안고 조용히 흐르는 강물 같은 친구'는 돈이 필요할 때 꼭 돈을 꾸어주지 않아도 되고, 내가 송사에 휘말렸을 때 굳이 조언을 해주지 않아도 무방하며, 비밀스런 내 병의 주치의 노릇을 하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그러다 관계의 밀도가 느슨해질 염려도 있겠지만 관계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다만 '울리지 않는 악기처럼 마음이 비어 있을 때' 분답하지 않게 '낮은 소리로 내게 오는 벗'이면 그만이다. 인디언 말로 친구인 '나의 슬픔을 자기 등에 업고 가는 사람'이 된다면, 그 사람이 바로 ‘칠흑 속에서도 다시 먼 길 갈 수 있는’ 가장 낮은 강물이면서 높은 벗이 아니랴. 

 

 

권순진 

 


You Need Me / The King's Singers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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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생각...고정희
 


그대 따뜻함에 다가갔다가
그 따뜻함 무연히 마주할 뿐
차마 끌어안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대 쓸쓸함에 다가갔다가
그 쓸쓸함 무연히 마주할 뿐
차마 끌어안지 못하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어떤 것인지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내가 돌아오는 발걸음을 멈췄을 때,
내 긴 그림자를 아련히 광내며
강 하나가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거리에서 휘감고온 바람을 벗었을 때
이 세상에서 가장 이쁜 은방울꽃 하나가
바람결에 은방울을 달랑달랑 흔들며
강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이후
이 세상 적시는 모든 강물은
그대 따뜻함에 다갔다가
그 따뜻함 무연히 마주할 뿐
차마 끌어안지 못하고 돌아서는
내 뒷모습으로 뒷모습으로 흘렀습니다.

 

 

 

 

 

 

 

 

 

 

 

그대 생각 ...고정희


너인가 하면 지나는 바람이어라

너인가 하면 열사흘 달빛이어라

너인가 하면 흐르는 강물소리여라

너인가 하면 흩어지는 구름이어라

너인가 하면 적막강산 안개비여라

너인가 하면 끝모를 울음이어라

너인가 하면 내가 내 살 찢는 아픔이어라

 

 

 

 

 

 

 

 

 


출처 : 시가 있는 동네
글쓴이 : 봉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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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쓰네/ 고정희

 

 

그대 보지 않아도 나 그대 곁에 있다고

하늘에 쓰네

그대 오지 않아도 나 그대 속에 산다고

하늘에 쓰네

 

내 먼저 그대를 사랑함은

더 나중의 기쁨을 알고 있기 때문이며

내 나중까지 그대를 사랑함은

그대보다 더 먼저 즐거움의 싹을 땄기 때문이리니

 

가슴속 천봉에 눈물 젖는 사람이여

억조창생 물굽이에 달뜨는 사람이여

끝남이 없으니 시작도 없는 곳

시작이 없으니 멈춤 또한 없는 곳

 

수련꽃만 희게 희게 흔들리는 연못가에

오늘은 봉래산 학수레 날아와

하늘 난간에 적상포 걸어놓고

 

달나라 광한전 죽지사 열두 대의 비파에 실으니

천산의 매화향이 이와 같으랴

수묵색 그리움 만리를 적시도다

만리에 서린 사랑 오악을 감싸도다

 

그대 보지 않아도 나 그대 곁에 있다고

동트는 하늘에 쓰네

그대 오지 않아도 나 그대 속에 산다고

해지는 하늘에 쓰네

 

- 시집 『아름다운 사람하나』(푸른숲,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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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을 하면 상대도 내만큼 나를 사랑할까? 애달아하고 확인하고픈 마음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그대 보지 않아도 그대 곁에 있다고’ ‘그대 오지 않아도 그대 속에 산다고’하니 이 무슨 거룩하고 초월적인 사랑인가. 더구나 세상사람 다 올려다보는 ‘동트는 하늘’과 ‘해지는 하늘’에다 대자보로 쓰다니 그밖에 다른 시선이나 소문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태도이다. 저 혼신의 사랑과 믿음은 다짐이고 맹세이면서 어떠한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겠다는 의지적 표현이다. '가슴속 천봉에 눈물 젖'고 '억조창생 물굽이에 달뜨는 사람'이라니 그럴만도 하다.

 

 오늘날 우리의 사랑은 실시간 서로 확인 가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뱃속을 까뒤집어서라도 그 믿음을 확인하려 들고 또 확인시켜 주어야 한다. 그걸 대신하기 위한 방편으로 물질적 증표를 나눠 갖기도 하는데 때로는 완벽한 알리바이와 물증이 필요한 경우까지 있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사랑의 기쁨만을 온전히 노래하고 있다. ‘내 먼저 그대를 사랑’하고, ‘내 나중까지 그대를 사랑’하여 얻는 더 큰 즐거움을 알기 때문이란다. 내 사랑으로 내 기쁨이 되는 이 사랑의 대상은 어쩌면 시인이 평생 흠모했던 하느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짐짓 모른 척 해야겠다.

 

 연시의 온도를 애써 식혀 서늘하게 만들 필요는 없겠다. 알싸한 감동의 물결을 부러 차단시킬 이유는 없는 것이다. 좀 더 냉정한 눈으로 시를 읽는 사람들은 그 사랑하는 이가 이승을 떠난 사람일 것이라고도 한다. '가슴속 천봉에 눈물 젖는' '억조창생 물굽이에 달뜨는 사람‘ 등의 시구가 그런 추측을 가능케 한다. '끝남이 없으니 시작도 없는 곳' '시작이 없으니 멈춤 또한 없는 곳' 무변광대한 사랑이니 이승이든 저승이든 무슨 상관이랴. 뚝뚝 흘린 눈물을 찍어 쓴 이 연시에서 시시때때로 떠오르는 그대 생각, 사무치는 그리움, 그리고 멈출 수 없는 지극한 사랑이 찌릿찌릿하게 전이되어 소름으로 돋는다.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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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한 자가 아는 진실/ 신현림 

 

 

담배불을 끄듯 너를 꺼버릴 거야

다 마시고 난 맥주 캔처럼 나를 구겨버렸듯

너를 벗고 말 거야

그만, 너를, 잊는다고 다짐해도

북소리처럼 너는 다시 쿵쿵 울린다

오랜 상처를 회복하는 데 십년 걸렸는데

너를 뛰어넘는 건 얼마 걸릴까

그래, 너는 나의 휴일이었고

희망의 트럼펫이었다

지독한 사랑에 나를 걸었다

뭐든 걸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 생각했다

네 생각없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너는 어디에나 있었다 해질녘 풍경과 비와 눈보라,

바라보는 곳곳마다 귀신처럼 일렁거렸다

온몸 휘감던 칡넝쿨의 사랑

그래, 널 여태 집착한 거야

사랑했다는 진실이 공허히 느껴질 때

너를 버리고 나는 다시 시작할 거야

 

 

- 시집『세기말 블루스』(창작과비평,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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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다면서, 정확히는 일방적으로 차인 거라며 훌쩍거리는 한 가련한 여인을 보았다. 세상이 절반쯤 무너진 양 푹푹 한숨을 쉰다. 하지만 이별을 했다고 누구에게나 무차별적으로 불행이 찾아오지는 않는다. 시대어로 '쿨한 이별' 뒤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별' 그 자체가 유쾌하지 않은 상황이 분명하다면 그 불행은 나플레옹이 말한 "언젠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일 가능성이 높다. 상처와 아픔은 스스로 만든 족쇄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오래 끌어서 좋을 것은 없다. 

 

 문제는 치유이며, 다시 살아가며 사랑하는 것이겠지만 물론 쉽지 않다. 그리움으로 둘 것이냐 뭉개버릴 것이냐를 두고도 자극과 반응은 쉴새없이 뒤척인다. 오랫동안 '싱글맘'이란 수식어가 붙어다녔던 신현림 시인은 '그놈'이 그랬듯이 담뱃불을 비벼끄듯 확 꺼버리고자 결연한 의지를 불태우지만 그것 역시 여의치 않았던 모양이다. 북소리처럼 다시 쿵쿵 울리며, 희망의 트럼펫 소리가 환청처럼 들린다. 잊는다는 게 아무려면 꽃이 지는 것 보다 더 쉬울 리가 있으랴.

 

 그놈이 처음 몸속에서 피어날 때가 순간이었다 해도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일 수는 없을 것이다. 몸부림이 치열해지면 그리움도 따라 짙어지리라. 그래, 어쩌면 지금 흘러나오는 이은미의 노래처럼 '그리움'을 거듭 되내이며 해바라기씨 같이 촘촘한 사랑을 추억하기도 하겠지. 그러다 '어쩌면 그대 다시 돌아와 나를 안을지도 몰라'라며 바보 미련공탱이 같은 상상을 할지도 몰라. 이별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 너를 더욱 그리워하는 것이라도 되는 양. 

 

 실제로 신현림 시인의 경우는 '당신 생각하는 힘으로' 라는 시를 쓸 때의 기분만 같다면야 "배가 고프면 밥지어 먹고  쓸쓸해지면 달무리에 감싸인 달처럼 당신 팔에 휩사여 깊은 잠을 자리. 가슴의 갈대밭에 달아오르는 당신 심장 그 아늑한 노을을 느끼며 함께 있는 것에 새삼 놀라리. 가슴 속으로 산비둘기 한 마리 날아오면 밤새도록 눈이 내린 길을 보며 나는 일어나 다시 살리" 그러고서 '당신 생각하는 힘으로' 당연히 살 수도 있겠지요만 적어도 지금은 아닌 것 같다.

 

 참속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동안 냉소적이면서 자학적이고 허무의 깊은 어둠이 깔린 부정적 세계에 스스로 많이 길들여진 신현림 시인에게 이제 더이상 그놈은 집착의 대상이 아닌 것 같다. '갈 테면 가라지요' 에서 진실이 하나 더 보태어진다. '사랑했다는 진실이 공허히 느껴질 때 너를 버리고 나는 다시 시작할 거야'라고. 마지막 아날로그 세대가 뒤늦게 '쿨한 이별'의 카드를 빼들었다. 이별의 아픔은 감기와 같다는 식의 말은 못하겠지만, 훌쩍거리는 그 가련한 여인도 상처의 치유기간을 따질 필요 없이 얼른 '온몸 휘감던 칡넝쿨'에서 빠져나왔으면 좋겠다.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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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을 맞으며
세상의 나이를 잊으며
저벅저벅 당신에게 걸어가
기다림의 사립문을 밀고 싶습니다

겨울밤 늦은 식사를 들고 있을 당신에게
모자를 벗고 정중히 인사하고 싶습니다

우리들 해묵은 안부 사이에
때처럼 곱게 낀 감정의 성에를
당신의 잔기침 곁에 앉아 녹이고 싶습니다

부당하게 잊혀졌던 세월에 관해
그 세월의 안타까운 두께에 관해
당신의 속상한 침묵에 관해
이제 무엇이든 너그러운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첫눈을 맞으며
세상의 나이를 잊으며
저벅저벅 당신에게 걸어가
당신의 바람벽에 등불을 걸고 싶습니다

 

겨울 편지 / 박세현

 

연애 시절 그때가 좋았는가

들녘에도 바닷가에서도 버스 안에서도

이 세상에 오직 두 사람만 있던 시절

사시사철 바라보는 곳마다

 

진달래 붉게 피고

비가 왔다 하면 억수비

눈이 내렸다 하면 폭설

오도 가도 못하고, 가만있지는 더욱 못하고

길거리에서 찻집에서 자취방에서

쓸쓸하고 높던 연애

그때가 좋았는가

 

연애 시절아, 너를 부르다가

나는 등짝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 같다

무릇 연애란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기에

문득문득 사람이 사람을 벗어버리고

아아, 어린 늑대가 되어 마음을 숨기고

 

여우가 되어 꼬리를 숨기고

바람 부는 곳에서 오랫동안

흑흑 울고 싶은 것이기에

연애 시절아, 그날은 가도

두 사람은 남아 있다

우리가 서로 주고 싶은 것이 많아서

오늘도 밤하늘에는 별이 뜬다

 

연애 시절아, 그것 봐라

사랑은 쓰러진 그리움이 아니라

시시각각 다가오는 증기기관차 아니냐

그리하여 우리 살아 있을 동안

삶이란 끝끝내 연애 아니냐.

 

 

연애/안도현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 곳에서 발견(見)한 내 사랑의

풀잎 되어 젖어 있는

비애(悲哀)를

지금은 혼미(昏迷)하여 내가 찾는다면,

사랑은 또 처음의 의상(衣裳)으로

돌아올까

우체국에 오는 사람들은

가슴에 꽃을 달고 오는데

그 꽃들은 바람에

얼굴이 터져 웃고 있는데

어쩌면 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

얼굴을 다치면서라도 소리내어

웃고 싶은 것일까

사람들은

그리움을 가득 담은 편지(便紙) 위에

애정(愛情)의 핀을 꽂고 돌아들 간다

그 때 그들 머리 위에서는

꽃불처럼 밝은 빛이 잠시

어리는데

그것은

저려오는 내 발등 위에

행복(幸福)에 찬 글씨를 써서 보이는데

나는 자꾸만 어두워져서,

읽지 못하고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 곳에서 발견(發見)한 내 사랑의

기진(氣盡)한 발걸음이 다시

도어를 녹크

하면,

그 때 나는 어떤 미소(微笑)를 띄워

돌아온 사랑을 맞이 할까

 

우울한 샹송/이수익

 

강물이 풀리다니

강물은 무엇하러 또 풀리는가

우리들의 무슨 설음 무슨 기쁨 때문에

강물은 또 풀리는가

기러기 같이

서리 묻은 섣달의 기러기같이

하늘의 얼음짱 가슴으로 깨치며

내 한평생을 울고 가려했더니

 

뭐라 강물은 다시 풀리어

이 햇빛 이 물결을 내게 주는가

저 민들레나 쑥니풀 같은 것들

또 한번 고개숙여 보라 함인가

 

황토언덕

꽃상여 떼과부의 무리들

여기서서

또 한번 더 바라보라 함인가

강물이 풀리다니

강물은 무엇하러 또 풀리는가

우리들의 무슨 설음 무슨 기쁨 때문에

강물은 또 풀리는가.

 

풀리는 한강가에서/서정주

 

 

RECITER /이미선

 

KBS 아나운서.한국 방송예술 진흥원 전임교수

1956년 3월 3일 생

1980년 입사 클래식 음악 전문 라디오채널인

KBS 1FM(93.1㎒)의 프로그램 '당신의 밤과 음악'(밤 10~12시)이 오는 7일 방송 30년을 맞는다.

현재 DJ는 16년째 마이크 앞을 지키고 있는 이미선(56) 아나운서.

그는 1983년 '음악의 산책' 진행을 맡은 이후 30년째 클래식 음악 프로그램을 전문적으로 맡고 있다.

우리나라의 '최장수 클래식 전문 DJ'인 셈이다

 




 

 

 

 

26.NOVEMBER.2015.정효(JACE)

FOEM:겨울 편지 / 박세현. 연애/안도현.우울한 샹송/이수익.풀리는 한강가에서/서정주

RECITER :이미선

 

 

 

 

 

 

 

 

 

 

 

 

 

 

출처 : ♣ 이동활의 음악정원 ♣
글쓴이 : 丁曉(정효) 원글보기
메모 :

    겨울 사랑 / 박노해

    사랑하는 사람아
    우리에게 겨울이 없다면
    무엇으로 따뜻한 포옹이 가능하겠느냐
    무엇으로 우리 서로 깊어질 수 있겠느냐

    이 추운 떨림이 없다면
    꽃은 무엇으로 피어나고
    무슨 기운으로 향기를 낼 수 있겠느냐
    나 언 눈 뜨고 그대를 기다릴 수 있겠느냐

    눈보라 치는 겨울밤이 없다면
    추워 떠는 자의 시린 마음을 무엇으로 헤아리고
    내 온몸을 녹이는 몇 평의 따뜻한 방을 고마워하고
    자기를 벗어버린 희망 하나 커 나올 수 있겠느냐

    아아 겨울이 온다
    추운 겨울이 온다
    떨리는 겨울 사랑이 온다

                 

                          출처 : ♣ 이동활의 음악정원 ♣
                          글쓴이 : 雲鈺 원글보기
                          메모 :

                           

                           

                           

                          겨울사랑 / 고정희

                           

                          그 한번의 따뜻한 감촉

                          단 한번의 묵묵한 이별이

                          몇 번의 겨울을 버티게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이 허물어지고

                          활짝 활짝 문 열리던 밤의 모닥불 사이로

                          마음과 마음을 헤집고

                          푸르게 범람하던 치자꽃 향기,

                          소백산 한쪽을 들어올린 포옹,

                          혈관 속을 서서히 운행하던 별,

                          그 한번의 그윽한 기쁨

                          단 한번의 이슥한 진실이

                          내 일생을 버티게 할지도 모릅니다

                           

                          - 시집『아름다운 사람 하나』(푸른숲,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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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퇴출된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식의 통속하고 니글거리기 짝이 없는 질문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유통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심심하던 시절의 '미팅'에선 어떤 계절을 좋아하냐는 간지러운 문답도 흔히 주고받았다. 지금도 순진무구한 학생들 사이엔 소품종으로 수줍게 유통되고는 있다. 그 대꾸에 따라 혈액형과 함께 그 사람의 성격을 대충 간본다든지, 자신과의 주파수를 맞춰보고는 했다. 그때 겨울이 좋다고 하면 순결하고 이성적인 이미지가 덧쒸워진 도도한 낭만파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은 계절간의 어떤 계량과 선호 조건의 면밀한 비교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두 가지 평범한 이유에 이끌려 즉흥적으로 내뱉는 경우가 많았다. 그저 느낌이 좋은 순백의 강하물 때문에, 혹은 긴 방학이 있어서, 성탄절의 해방공간이 주는 매력, 그리고 겨울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는 점 등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겨울의 가장 깊은 매력은 그 차가움으로 뜨겁게 사랑을 촉진시킨다는 데 있지 않을까. 고정희 시인과는 성만 다른 문정희 시인도 '겨울사랑'에서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고 했다. 고양된 격정은 고정희 시인의 ‘겨울사랑’과 별반 다를 바 없다. 확실히 겨울은 그 '따뜻한 감촉'으로 인하여 커피의 맛은 깊어지고 라면과 김치찌개도 훨씬 맛있어진다. 그리고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 난해한 말이 있듯이 겨울밤은 사랑의 역사가 무르익기 딱 좋은 계절이다. 고슴도치의 겨울나기 방식으로 연인은 가급적 밀착, 밀착 또 밀착이다. 이 겨울은 연인들 사이의 거리를 물리적으로 좁혀준다.

                           

                           이십대를 고스란히 통행금지 제도에 묶여 보내야 했던 겨울 밤. 유일하게 성탄전야와 한 해를 갈아치우는 날에만 사슬이 풀렸다. 넘쳐나는 명동의 인파, 그리고 광복동과 동성로와 충장로는 젊은이와 나이든 이가 함께 점령한 거대한 주둔지였다. 고성과 교성 뜨거운 홍소, 그럴 때 눈이라도 내리면 혼자라는 것은 죄악이고 수치였다. 하지만 사랑이 뜨거워지면 별사를 완성하고 노래부르기에도 마침맞은 계절 또한 겨울이다. 누구에겐들 이 겨울, 눈이 쌓이고 녹는 동안 더운 사랑과 아린 이별의 추억이 감긴 한 롤의 필름이 없겠으랴. 고정희 시인도 못 잊을 사랑 하나 품고서 몇 번의 겨울을 버티며 온 생을 떠받들었다고 하니 '이슥한 진실'의 더운 사랑 하나는 가졌나 보다. 지상에 없는 그녀는 지금 '치자꽃 향기 푸르게 범람하는' 어느 별에서 이 겨울과 입맞춤할는지.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메모 :

                           

                           

                          역을 놓치다/ 이해원

                           

                           

                          실꾸리처럼 풀려버린 퇴근 길

                          오늘도 졸다가 역을 놓친 아빠는

                          목동역에서 얼마나 멀리 지나가며

                          헐거운 하루를 꾸벅꾸벅 박음질하고 있을까

                           

                          된장찌개 두부가 한껏 부풀었다가

                          주저앉은 시간

                          텔레비전은 뉴스로 하루를 마감하고 있다

                          핸드폰을 걸고 문자를 보내도

                          매듭 같은 지하철역 어느 난청지역을 통과하고 있는지

                          연락이 안 된다

                          하루의 긴장이 빠져나간 자리에

                          졸음이 한 올 한 올 비집고 들어가 실타래처럼 엉켰나

                          헝클어진 하루를 북에 감으며 하품을 한다

                           

                          밤의 적막이 골목에서 귀를 세울 때

                          내 선잠 속으로

                          한 땀 한 땀 계단을 감고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

                          현관문 앞에서 뚝 끊긴다

                          안 잤나

                          졸다가 김포공항까지 갔다 왔다

                          늘어진 아빠의 목소리가

                          오늘은 유난히 힘이 없다

                           

                          - 2012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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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춘문예 마감이 임박했다. 이미 중앙 일간지는 거의 마감되었고 일부 지방 신문사만 몇 곳 남았는데 그것도 이번 주에 마감시한이 몰려있다. 문학 불황가운데도 문예지들은 넘쳐나서 등단의 기회는 확대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신춘문예는 문학을 꿈꾸는 사람들에겐 화려한 등용문이자 가장 상징적인 관문이다. 시의 경우 상금은 3백~5백만 원 정도이다. 그 이하도 있을 것이다. 그보다 새해 첫날 일간지의 지면을 화려하게 장식하면서 존재감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렇고, 형식상 가장 객관적이고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는 유서 깊은 등단제도란 점에서도 신춘문예 당선은 선망의 월계관이다.

                           

                            그러므로 치열한 경쟁은 불가피하고, 수많은 응모작품 가운데 단 한편에 뽑히려면 그만큼 도드라져야함은 당연한 노릇이다. 그래서 나같은 사람은 단 한번의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심사자들은 우선 얼개의 공법이 안정적이고 문학적 기초체력이 잘 다져져 시인으로서의 역량이 있는지를 살핀다. 다음으로 기성시인들의 시풍을 안일하게 흉내 내지 않고 신인만의 패기와 신선함이 느껴지는지를 본다. 하지만  한 편이 흠잡을 데 없이 빼어나도 함께 투고한 다른 작품들의 수준이 고르지 못할 때는 신뢰를 얻기 힘들다. 물론 운도 따라야 하고 심사자가 누구냐에 따라 명암이 바뀌는 것도 사실이다.

                           

                            이 시는 유종호 평론가와 신경림 시인이 심사하여 뽑은 2012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여러 면에서 오늘의 정서를 잘 대변하고 있다. 가난하지만 평화스럽고 행복한 서민의 가정 풍경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새롭고 예리한 느낌을 주지 못하는 흠을 가졌다.’고 평가했지만 따듯하고 애달픈 시라면서 시의 완성도에 무게를 두고 뽑았다고 한다. 그러나 개성이나 참신성 측면에서는 솔직히 미흡하다는 생각이 없지 않으며 안이한 느낌마저 준다. 이는 심사위원들이 이른바 '신춘문예용' 난삽한 시를 작정하고 배제시킨 결과이며 그분들의 정서적 성향이 반영된 당선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실은 '행복한 가정풍경'이라기 보다는 내 눈엔 간당간당하면서도 무탈한 풍경 쯤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가장의 고단한 일상을 통해 가족의 끈끈한 정을 잘 농축한 한편의 공익광고 같은 이 시에서 오히려 문학의 진정성이 느껴진다. 당시 예순을 훌쩍 넘긴(48년생) 여성시인의 연륜도 아울러 감지된다. 이분 역시 처음엔 수필로 문학에 발을 들여놓았다고 한다. 한때 적당히 낯선 상상력에다가 과잉 수사를 입힌 신춘문예용 시 공법이 유행했었고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신춘문예라 해서 모조리 심오하고 난해할 필요는 없다. 신인의 패기와 실험성을 높이 사는 관문도 필요하지만, 이처럼 현실적 소재를 설득력있게 다룬 시를 더 쳐주는 신춘문예가 서너 곳쯤 있어도 괜찮겠다. 

                           

                           

                          권순진

                           

                           

                          Winter Rose - George Davidson & Eugenia Leon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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