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을 놓치다/ 이해원
실꾸리처럼 풀려버린 퇴근 길
오늘도 졸다가 역을 놓친 아빠는
목동역에서 얼마나 멀리 지나가며
헐거운 하루를 꾸벅꾸벅 박음질하고 있을까
된장찌개 두부가 한껏 부풀었다가
주저앉은 시간
텔레비전은 뉴스로 하루를 마감하고 있다
핸드폰을 걸고 문자를 보내도
매듭 같은 지하철역 어느 난청지역을 통과하고 있는지
연락이 안 된다
하루의 긴장이 빠져나간 자리에
졸음이 한 올 한 올 비집고 들어가 실타래처럼 엉켰나
헝클어진 하루를 북에 감으며 하품을 한다
밤의 적막이 골목에서 귀를 세울 때
내 선잠 속으로
한 땀 한 땀 계단을 감고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
현관문 앞에서 뚝 끊긴다
안 잤나
졸다가 김포공항까지 갔다 왔다
늘어진 아빠의 목소리가
오늘은 유난히 힘이 없다
- 2012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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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마감이 임박했다. 이미 중앙 일간지는 거의 마감되었고 일부 지방 신문사만 몇 곳 남았는데 그것도 이번 주에 마감시한이 몰려있다. 문학 불황가운데도 문예지들은 넘쳐나서 등단의 기회는 확대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신춘문예는 문학을 꿈꾸는 사람들에겐 화려한 등용문이자 가장 상징적인 관문이다. 시의 경우 상금은 3백~5백만 원 정도이다. 그 이하도 있을 것이다. 그보다 새해 첫날 일간지의 지면을 화려하게 장식하면서 존재감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렇고, 형식상 가장 객관적이고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는 유서 깊은 등단제도란 점에서도 신춘문예 당선은 선망의 월계관이다.
그러므로 치열한 경쟁은 불가피하고, 수많은 응모작품 가운데 단 한편에 뽑히려면 그만큼 도드라져야함은 당연한 노릇이다. 그래서 나같은 사람은 단 한번의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심사자들은 우선 얼개의 공법이 안정적이고 문학적 기초체력이 잘 다져져 시인으로서의 역량이 있는지를 살핀다. 다음으로 기성시인들의 시풍을 안일하게 흉내 내지 않고 신인만의 패기와 신선함이 느껴지는지를 본다. 하지만 한 편이 흠잡을 데 없이 빼어나도 함께 투고한 다른 작품들의 수준이 고르지 못할 때는 신뢰를 얻기 힘들다. 물론 운도 따라야 하고 심사자가 누구냐에 따라 명암이 바뀌는 것도 사실이다.
이 시는 유종호 평론가와 신경림 시인이 심사하여 뽑은 2012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여러 면에서 오늘의 정서를 잘 대변하고 있다. 가난하지만 평화스럽고 행복한 서민의 가정 풍경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새롭고 예리한 느낌을 주지 못하는 흠을 가졌다.’고 평가했지만 따듯하고 애달픈 시라면서 시의 완성도에 무게를 두고 뽑았다고 한다. 그러나 개성이나 참신성 측면에서는 솔직히 미흡하다는 생각이 없지 않으며 안이한 느낌마저 준다. 이는 심사위원들이 이른바 '신춘문예용' 난삽한 시를 작정하고 배제시킨 결과이며 그분들의 정서적 성향이 반영된 당선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실은 '행복한 가정풍경'이라기 보다는 내 눈엔 간당간당하면서도 무탈한 풍경 쯤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가장의 고단한 일상을 통해 가족의 끈끈한 정을 잘 농축한 한편의 공익광고 같은 이 시에서 오히려 문학의 진정성이 느껴진다. 당시 예순을 훌쩍 넘긴(48년생) 여성시인의 연륜도 아울러 감지된다. 이분 역시 처음엔 수필로 문학에 발을 들여놓았다고 한다. 한때 적당히 낯선 상상력에다가 과잉 수사를 입힌 신춘문예용 시 공법이 유행했었고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신춘문예라 해서 모조리 심오하고 난해할 필요는 없다. 신인의 패기와 실험성을 높이 사는 관문도 필요하지만, 이처럼 현실적 소재를 설득력있게 다룬 시를 더 쳐주는 신춘문예가 서너 곳쯤 있어도 괜찮겠다.
권순진
Winter Rose - George Davidson & Eugenia L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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