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 다시는 이 땅에 오지 말아라  
겨울에 쓰러진 은사시나무  
한번 지나간 바람과  
한번 지나간 노래의 그 모든 풍금들처럼  
내 사랑 흘러 흘러 다시는 
이 낯선 목숨 안에 오지 말아라  
떨어진 꽃 다시는 피지 말아라  
새벽새는 새벽으로 가고  
봄비는 봄날에만 소록소록 내려라  
슬픔을 견디며 지나가는 황혼녘  
주홍의 시간들 곁에서 나 문득 길을 잃고  
눈물보다 환한 내 사랑의 끝을 보네  
어둠에 잠기는 한 시절의 열망을 보네  
그러므로 이제 지나가거라  
고통으로 날려 보내는 이승의 꽃잎 하나  
앓고 난 눈시울 위로 날이 밝을 때  
고통도 없이 스러지는 새벽별처럼  

 

 

 

황혼근처 / 류근

 

 

 La Califa - Milva

 

 

 

 

 

 

 

 

 

 

 

 

출처 : 아트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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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무엇인가를 안다고 생각할 때 _문정희


오래 전 읽은 시 한 편이 되살아나 불현듯 나를 깨울 때가 있다.
이 시는 단순한 표현의 문제를 뛰어넘어 인간을 바라보는 근본을 뒤흔들어놓음으로써 나의 가슴을 감동으로 몰아넣는 그런 시이다.
혹시 아시는 분도 있을 것이다. 「바우리히 중사」라는 매우 특이한 제목을 가진 독일의 의사시인 케스트너의 시이다.

    "바우리히 중사, 그가 우리 중대로 배속되어 온 것은 그 일로부터 여섯 달 전입니다. 우리는 그에게 참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받들어 총" "엎드려 쏴" "거총" "발사"

이 시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바우리히 중사는 누군가 몸의 균형을 잃고 넘어지기라도 하면 메마른 땅에 침을 뱉으며 "이런 병신같은 원숭이 새끼, 대가리 박아" 하며 훈련병들을 황무지로 끌고 가서 무릎과 팔꿈치에서 피가 나올 때까지 엉금엉금 기어다니게 만들었다.
말하자면 그는 어린 병사들이 그를 통해 인간에 대한 증오라는 것을 배웠다고 할 정도로 몹시 혹독한 인간이었다. 병사들은 그래서 숨을 헐떡이며 그에게 대답했고 그는 하늘을 향해 뻐꾸기처럼 웃었다.
그리고 그가 침을 뱉고 고함을 지르고 욕을 할 때면 속으로 그를 짐승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시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그를 생각하면 지금도 내 마음은 찌르는 듯 아파오고 / 내 심장은 놀란 듯 두두둑거립니다 / 견디기 힘들 만큼 어려운 일 / 힘겨운 일이 생기면 / 나는 언제나 바우리히 중사를 생각합니다 / 참호 속으로 날아 들어온 수류탄을 / 몸으로 덮어 우리를 살리고 / 그는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정말 우리가 무엇인가를 안다고 생각할 때 사실은 얼마나 모르고 있는 것인지……?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서늘해진다.
유난히 춥고 눈이 많이 내렸던 겨울이었다. 나는 모처럼 벼르던 여행을 가족과 함께 떠났다. 이것저것 계획을 세워보다가 결국 여행사에서 제공하는 단체여행을 택하기로 했다.
여행이란 낯선 시간 속에 노출되면서 자유롭게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것인데 개인의 자유와 호기심을 적당히 차단해버린 안전과 실비 위주의 여행코스가 못마땅했지만 그래도 가족이 함께 쉽게 움직이면서 여러 곳을 둘러볼 수 있다는 장점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 여행은 어쩌면 여행이라기보다 관광이라고 불러야 옳은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첫날부터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일어났다.
나는 일행 중에 한 중년 여자가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절에 가면 부처님만 보면 되지 왜 쓸데없이 다른 것을 보느냐고 스스로를 말렸지만 그러나 그 여자는 여행 내내 나의 신경을 건드렸다.
파리의 호텔에서는 아침식사용으로 나온 빵들을 독점한 후 슬쩍 몇 개를 잼과 함께 핸드백에다 넣기도 했다. 비대한 몸으로 매번 시간에 늦었으며 빈 의자가 있으면 놓칠세라 달려가서 선점했다. 무엇보다도 아무 데나 끼어들어 말을 보태고 농담을 걸었다. 돈을 내었으니 절대로 즐거워야 하고 그것으로 여행비의 본전을 뽑자고 드는 것 같았다.
문제는 그녀의 남편에게도 있었다. 베레모를 예술가처럼 눌러 쓴 남편은 경제적인 여유가 한껏 있어 보였고 교양도 있었으나 아내의 그런 부분을 전혀 제지하거나 충고하지 않았다.
오히려 선물가게마다 발을 멈추고 별 소용에도 없는 물건을 그녀가 골라놓으면 기꺼이 지갑을 꺼내 값을 치렀다.
결국 참을 수 없는 순간이 왔다. 일주일을 참고 견디다가 버스가 드디어 잘츠부르크를 향하고 있을 때였다.
사방의 풍경은 천국처럼 완벽했다. 더구나 흰 눈에 덮인 중세의 성들과 수도원과 지붕들은 모차르트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다웠다.
그런데 거기서 그 아주머니는 안내원을 붙잡고 큰 소리로 말했다. 마이크를 건네주며 유행가를 한 곡 부르라는 것이었다.
강원도 소양강에만 가도 손벽을 치고 노는데 여기까지 큰돈 주고 와서 심심하게 갈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할 수 없이 다음 휴게소에서 조용히 안내원을 불럿다.
"모차르트의 고향이 잘츠부르크에까지 와서 <소양강처녀>를 박수치며 부르고 흥청대야 한다면 나는 차라리 여기서 내리고 싶다"고 단단히 일렀다.
나의 강력한 제지 탓인지 다행히도 버스 안에서 마이크를 잡고 유행가를 부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다음 날 새벽이었다.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있는데 인근마을 소년들이 찾아와 성가를 부르고 모금함을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크라스마스 날인 것 같기도 했다.
그날따라 아주머니는 보이지 않고 그녀의 남편이 우리 곁에 있었다. 그는 얼마의 돈을 모금함에 넣더니 노래를 부르는 소년의 손을 잡고 문득 눈물을 글썽거렸다.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그는 나에게 말했다.
아들이 죽었다는 것이다. 이북에서 내려와 천신만고 끝에 경제적 기반을 닦았고 아들 하나가 꿈에 그리던 대학의 법대에 들어갔는데 얼마 전 그만 군대에 가서 의문의 사고사를 당했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분들의 이번 여행은 그 참혹한 슬픔을 받아들이는 아픈 새출발의 여행이었던 것이다.
멀리 알프스의 빙설이 보이는 새벽 한 호텔에서 나는 모차르트나 괴테를 입에 올리며 오만했던 자신이 부끄러워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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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있고 꽃이 있는 동안에도 깊은 산속 강대나무를 생각한다

허리를 잡고 웃고 푸지게 말을 늘어놓다가도 나는 불쑥 강대나무를 화제 삼는다

비좁은 방에서 손톱 발톱을 깎는 일요일 오후에도 나는 강대나무를 생각한다

몸이 검푸르게 굳은 한 꿰미 생선을 사 집으로 돌아갈 때에도 강대나무를 생각한다

회사의 회전의자가 간수의 방처럼 느껴질 때에도 강대나무를 떠올린다

강대나무를 생각하는 일은 내 작은 화단에서 죽은 화초를 내다 버리는 일

마음에 벼린 절벽을 세워두듯 강대나무를 생각하면 가난한 생활이 비로소 견디어진다

던져두었다 다시 접어 읽는 시집처럼 슬픔이 때때로 찾아왔으므로

우편함에서 매일 이별을 알리는 당신의 눈썹 같은 엽서를 꺼내 읽었으므로

마른 갯벌의 소금밭을 걷듯 하루하루를 건너 사라졌으므로

건둥건둥 귀도 입도 마음도 잃어 서서히 말라죽어갔으므로

나는 초혼처럼 강대나무를 소리내어 떠올려 내 누추한 생활의 무릎으로 삼는 것이다

내가 나를 부르듯 저 깊은 산속 강대나무를 서럽게 불러 내 곁에 세워두는 것이다

 

 

 

                                                                *강대나무: 선 채로 말라죽은 나무.

 

 

 

 

 

 

   강대나무를 노래함/문태준

 

 

 

 

 

 

 

 

 

 

 

 

 

 

 

 


 

 

 

 

 

 

 

 

 

 


-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백석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의 마지막 구절이다. 피붙이와 지기로부터 떨어져 혼자가 된 화자는 자신의 어리석음과 슬픔을 연하여 되새긴다. 시름과 고투의 장소가 된 방안에서 몹시 괴로워하면서 또한 그걸 견디어 내던 화자는 마침내 긴 어둠에서 조금씩 빠져나올 기미를 보인다. 갈매나무가 바로 그런 느낌을 갖게 해주는 상징물로 작용하고 있다.

  문태준의 강대나무는 백석의 갈매나무와 꽤나 닮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백석이 절망의 끝을 지나오면서 갈매나무를 떠올렸다면 문태준은 삶을 지나오면서 수시로 강대나무를 생각한다는 것이다. 물론 더 절실하게 강대나무를 생각하게 될 때가 있을 것이다. 때때로 찾아오는 슬픔이나 이별을 알리는 엽서를 읽게 될 때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화자는 강대나무를 ‘죽은 화초를 내다 버리는 일’과 ‘가난한 생활을 견디는 일’과 관련짓는다. 죽은 화초는 생산적이지 못하면서도 자신을 과거에 붙들어 놓은 어떤 대상일진대 그걸 깨끗하게 털어버리고 싶은 것이다. 쓸데없는 것을 다 버리고 가난해져서 오히려 편안해진 삶이 강대나무가 표상하는 삶인 게다. 이런 연유로 말라죽은 나무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 오히려 위로가 되는 것이다. 

  갈매나무나 강대나무는 곁에 일상으로 있는 존재는 아니다. 산 속 깊이 자리 잡고 있으면서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나타나는, 이름을 부르는 자체로 위로가 되고 구원이 되기도 하는 그런 존재이다. 그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는 데 든든한 백이 될 것이다. 갈매나무가 있는 백석이, 강대나무가 있는 문태준이 부러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의 백이 되어줄 나무도 어디에선가 자신을 불러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지 않겠나.(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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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에게/ 문정희



아들아


 

너와 나 사이에는


 

신이 한 분 살고 계시나보다


 



 

왜 나는 너를 부를 때마다


 

이토록 간절해지는 것이며


 

네 뒷모습에 대고


 

언제나 기도를 하는 것일까?


 



 

네가 어렸을 때


 

우리 사이에 다만


 

아주 조그맣고 어리신 신이 계셔서


 



 

사랑 한 알에도


 

우주가 녹아들곤 했는데


 



 

이제 쳐다보기만 해도


 

훌쩍 큰 키의 젊은 사랑아


 



 

너와 나 사이에는


 

무슨 신이 한 분 살고 계셔서


 

이렇게 긴 강물이 끝도 없이 흐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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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똥별 


강은교 (1945~, 함남 흥원)

 

 

 

 

밤하늘에 긴 금이 갔다

너 때문이다

 

밤새도록 꿈꾸는

때문이다

 

 

 

 

 

* / by 백미현 (조관우 작사 ,오동석 작곡)

 

 

https://youtu.be/TLxsGXi7ldA

 

 

 

 

 

 

 

 

 

 

 

 

13/10/2015/水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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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아침의 역사

 

 

겨울이 오면 이 땅의 어머니들은 누구나 한두 번쯤 아침 밥상을 차리다 말고 무슨 액땜이라도 하는 양, "야, 밤새 눈이 하얗게 쌓였네" 하고 들릴락말락하게 내뱉는다. 그릇 부딪는 소리, 얌전한 도마 소리에 취해 두툼한 솜이불 한 귀퉁이씩 붙들고 늦잠을 즐기던 아이들은 무엇엔가 홀린 듯 단잠을 훌훌 벗어던지고 내복 바람으로 성에 낀 창가에 매달려 그 맑고 찬란한 겨울 아침을 맞곤 했다는데, 이런 거짓말의 풍습은 밤새 눈 내린 춥고 컴컴한 첫새벽에 삶은 눌은밥 한사발 들이켜고 홀로 먼 길 떠난 사람들의 안녕을 비는 이 눈물겨운 족속의 오랜 전통이라고.

 

 

―이창기(1959~ )

 

 

 

 

 

 

 

 

 

 

 

 

 

 

 

 

 

 

세상이 참 눈부시게 순백으로 빛나는 겨울 아침의 풍경이 여기에 있다. 방학을 맞은 아이들은 솜이불을 끌어당기며 게으른 늦잠을 즐기고 있다. 부엌에서는 어머니가 아침 밥상을 한창 차리고 있다. 일정하고 단정한 도마질 소리와 그릇 부시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온다. 어머니는 아이들을 깨우는 소리로 밤새 흰 눈이 소복하게 쌓였다고 말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허옇게 서릿발이 얼어붙은 창가에 매달려 바깥을, 집 밖을 본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이들을 창가로 불러 모으는 어머니의 이런 거짓말은 참으로 뜻이 깊다. 추운 한데에 있는 것들을 보라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눈물겨운 삶들을 보라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눌은밥을 들이켜고 홀로 길 나서는 사람들이 이 겨울 아침엔들 왜 없겠는가.

        

 

                                                                                              문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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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무 ... 장석주


잠시 들렀다 가는 길입니다.
외롭고 지친 발걸음 멈추고 바라보는
빈 벌판
빨리 지는 겨울 저녘 해거름
속에
말없이 서 있는
흠 없는 혼
하나

당분간 폐업합니다, 이 들끊는 영혼을.
잎사귀를 떼어 버릴 때
마음도 떼어버리고
문패도 내렸습니다.


그림자
하나
길게 끄을고
깡마른 체구로 서 있습니다.

 

 

 

 

 

 

 

 

 

겨울나무 ... 나태주



빈손으로 하늘의 무게를
받들고 싶다

빈몸으로 하늘의 마음을
배우고 싶다


벗은 다리 벗은 허리로
얼음밭에서 울고 싶다.

 

 

 

 

 

 

 

 

 

 

겨울나무 ... 도종환



잎새 다 떨구고 앙상해진 저 나무를 보고
누가 헛살았다 말하는가 열매 다 빼앗기고
냉랭한 바람 앞에 서 있는
나무를 보고 누가 잘못 살았다 하는가

저 헐벗은 나무들이 산을 지키고
숲을 이루어내지 않았는가

하찮은 언덕도 산맥의 큰 줄기도
그들이 젊은 날 다 바쳐 지켜오지 않았는가

빈 가지에 새 없는 둥지 하나 매달고 있어도
끝났다 끝났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실패했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이웃 산들이 하나씩 허물어지는 걸 보면서도
지킬 자리가 더 많다고 믿으며

물러서지 않고 버텨온 청춘
아프고 눈물겹게 지켜낸 한 시대를 빼놓고

 

 

 

 

 

 

 

 

 

 

겨울 나무로부터 봄 나무에로 ... 황지우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 13도
영하 20도 지상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으로 서서

아 벌받은 몸으로, 벌받는
목숨으로 기립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魂)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 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에서 영상으로
영상 5도 영상 13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 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나무 ... 김현승


하느님이 지으신 자연 가운데
우리 사람에게 가장 가까운 것은
나무이다.

그 모양이 우리를 꼭 닮았다.
참나무는 튼튼한 어른들과 같고
앵두나무의 키와 그 빨간 뺨은
소년들과 같다.

우리가 저물녘에 들에 나아가 종소리를
들으며 긴 그림자를 늘이면
나무들도 우리 옆에 서서 그 긴 그림자를
늘인다.

우리가 때때로 멀고 팍팍한 길을
걸어가면
나무들도 그 먼 길을 말없이 따라오지만,
우리와 같이 위으로 위으로
머리를 두르는 것은
나무들도 언제부터인가 푸른 하늘을
사랑하기 때문일까?

가을이 되어 내가 팔을 벌려
나의 지난날을 기도로 뉘우치면,
나무들도 저들의 빈손과 팔을 벌려
치운 바람만 찬 서리를 받는다, 받는다.

 

 

 

 

 

 

 

 

 

 

나무의 생애 ... 정연복

비바람 드센 날이면
온몸 치떨면서도
나지막이 작은 신음소리뿐

생의 아픔과 시련이야
남몰래
제 몸 속에
나이테로 새기며

칠흑어둠 속이나
희뿌연 가로등 아래에서도
고요히 잠자는 나무

보이지 않는
뿌리 하나
목숨의 중심처럼 지키면 그뿐
세상에 반듯한 집 한 칸
장만하지 못하고서도

햇살과 바람과 이슬의

하늘 은총 철석같이 믿어
수많은 푸른 잎새들의
자식을 펑펑 낳는다

제 몸은 비쩍 마르면서도
혼신의 힘을 다해
기른 것들과
늦가을 찬바람에 생이별하면서도
새 생명의 봄을 기약한다

나무는 제가 한세월
잘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기나 할까

 

 

 

 

 

 

 

 

 

 

커다란 나무... 김기택



나뭇가지들이 갈라진다
몸통에서 올라오는 몸을 찢으며 갈라진다


찢어진 자리에서 구불구불 기어나오며 갈라진다
이글이글 불꽃 모양으로 휘어지며 갈라진다
나무 위에 자라는 또 다른 나무처럼 갈라진다


팔다리처럼 손가락
발가락처럼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미 갈라져 있었다는 듯 갈라진다


오래 전부터 갈라져 있던 길을
거역할 수 없도록 제 몸에 깊이
새겨져 있는 길을
너무 많이 가보아서 훤히 알고 있는 길을
담담하게 걸어가듯이 갈라진다


제 몸통으로 빠져나가는 수많은 구멍들이
다 제 길이라는 듯 갈라진다
갈라지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는 듯
조금 전에 갈라지고 나서 다시 갈라진다
다시 갈라진다 다시 갈라진다 다시 갈라진다
다시 다시 다시 갈라진다


갈기갈기 찢어지듯 갈라진다
뱀의 혀처럼 날름거리며 쉬지 않고
갈라진다


갈라져 점점 가늘어지는데도 갈라진다
갈라져 점점 뒤틀리는데도 갈라진다


갈라진 힘들이 모인 한 그루 커다란 식물성
불이
둥글게 타오른다 제 몸 안에 난 수많은 불길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맹렬하게 갈라지고 있다

 

 

 

 

 

 

 

 

 

 

 

나무 ... 류시화


나에게 나무가 하나 있었다
나는 그 나무에게로 가서
등을 기대고 서 있곤 했다
내가 나무여
하고 부르면 나무는
잎들을 은빛으로 반짝여 주고,
하늘을 보고 싶다고 하면
나무는 저의 품을 열어 하늘을 보여 주었다

저녁에 내가 몸이 아플 때면
새들을 불러 크게 울어 주었다
내 집 뒤에
나무가 하나 있었다

비가 내리면 서둘러 넓은 잎을 꺼내
비를 가려 주고
세상이 나에게 아무런 의미로도 다가오지 않을 때
그 바람으로 숨으로
나무는 먼저 한숨지어 주었다

내가 차마 나를 버리지 못할 때면
나무는 저의 잎을 버려
바람의
의미를 알게 해주었다

 

 

 

 

 

 

 

 

 

 

나무처럼...오세영


나무가 나무끼리 어울려 살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가지와 가지가 손목을 잡고
긴 추위를 견디어
내듯

나무가 맑은 하늘을 우러러 살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잎과 잎들이 가슴을 열고
고운 햇살을 받아
안듯

나무가 비바람 속에서 크듯
우리도 그렇게
클 일이다.
대지에 깊숙이 내린 뿌리로
사나운 태풍 앞에 당당히
서듯

나무가 스스로 철을 분별할 줄을 알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꽃과 잎이 피고 질 때를
그 스스로
물러설때를 알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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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시가 있는 동네
글쓴이 : 봉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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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탁/ 이정록

 

 

어미의 부리가

닿는 곳마다

 

별이 뜬다

 

한 번에 깨지는

알 껍질이 있겠는가

 

밤하늘엔

나를 꺼내려는 어미의

빗나간 부리질이 있다

 

반짝, 먼 나라의 별빛이

젖은 내 눈을 친다

 

 

- 시집『제비꽃 여인숙』(민음사, 2001)

....................................................

 

 ‘줄탁’은 본시 불가에서 나온 말로 ‘줄’은 닭이 알을 깔 때 병아리가 막 껍질을 깨고 밖으로 나오려고 안에서 쪼는 것을 말하며, ‘탁’은 같은 때에 어미 닭이 밖에서 껍질을 쪼아 깨뜨리는 것을 이른다. 생명기운의 우주적 순환과 탄생의 신비를 묘사하고 있는 ‘줄탁’이란 말은 세상에 첫발을 디딜 때 안팎의 관계가 이러해야 하듯이 깨침을 위한 단계에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이를 때 주로 쓰는 말이다. 요즘은 이 말이 종교불문 기독교에서도 인간을 찾아오시는 하느님과 응답하는 인간이 만나는 지점을 두고 인용하며 정치권에서도 가끔 인용되는 것을 듣는다.

 

 모든 일에는 순서와 시기와 최적의 방법이 있다. 그 시기를 놓치면 일이 성사되기 어려운 게 세상 이치다. 새 역사를 쓰고 새 시대를 만들어 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도 바로 이 타이밍이다. 때를 놓치거나 너무 앞서게 되면 공연히 기운만 빼거나, 때로는 많은 희생이 따르고 비극적 상황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음을 우리는 역사적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참으로 세상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가르침이자 매력적인 이치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협업의 관계에서 일이 잘 풀리려면 장단이 맞아야 하듯이 타이밍을 교감하고, 시그널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서로 채널을 공유하고 경청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번 민중총궐기는 박근혜 정권 내내 독선과 오만, 실정에도 불구하고 무력감에 빠졌던 민중진영이 다시 뭉쳐 부글부글 끓었던 분노를 한꺼번에 표출했다는데 의의가 크며, ‘나쁜 대통령’을 두고만 보지 않겠다는 결기를 보여준 것도 성과라 하겠다. 다만 여러 단체의 요구를 담아야했던 점을 이해하면서도 11개 요구사항은 지나치게 산만하여 선택과 집중, 그리고 절제의 전술전략적인 측면에서 효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으며, ‘줄탁’의 신묘한 기회를 얻는데도 부족해 보였다. 두루 확장성을 가진 대중의 정서를 감안하여 규탄 내용을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노동시장 구조개악' 정도로 집약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안타깝고 답답한 것은 정작 줄탁동기의 한 축이 되어야할 야권이 완전히 뒤로 빠져 제 역할을 못했다는 점이다. 작금의 지리멸렬한 제1야당은 현장에서 전혀 존재를 드러내지 못했으며 문재인 대표가 위중한 상태에 있는 백남기 씨를 문병한 뒤 경찰의 과잉진압을 맹렬히 질타했지만 힘이 실려 있다는 느낌을 받진 못했다. '낡은 진보' 타파를 외치는 안철수 의원은 더 딱했다. 안 의원측은 이번 시위가 ‘박근혜 정부의 오만한 국정운영 탓’이라면서도 ‘폭력시위·과잉진압에 대한 사실 확인이 되지 않아 말하기 어렵다’는 모호한 입장만 밝혔을 뿐이다. 어디에도 ‘탁’의 껍질 깨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경찰과 경찰버스도 모두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고 유지된다. 경찰이 박근혜 정부의 호위 사병 노릇을 해서도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쇠파이프로 버스를 때려 부수는 것도 대중의 폭 넓은 지지를 받기는 어렵다. 그 타격은 줄탁의 ‘줄’이 되지 못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잠언처럼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에 더하여 집중력과 자제력 또한 필요하다. 이 절망의 장막은 누가 거두어줄 것이며 단단한 껍질은 누가 깨트릴 것인가. 며칠 전 역사의 방향을 돌려놓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열사의 45주기를 맞았지만 그 한 사람의 힘보다 세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미룰 시간도 실패할 시간도 없다.

 

 시기는 적기인데 ‘줄’의 야무진 집중력이 부족하고 ‘탁’의 조응이 누락되었다. 야당과 시민사회가 힘을 합쳐 제2의 민주화 운동을 범국민적으로 전개하지 않으면 껍질을 깨고 새로운 탄생을 기대하기는 어려우리라. 같이 힘을 모아 한 방향으로 매진해도 시원찮을 판에 덮어놓고 문재인 사퇴만 요구한다고 능사이겠는가. 대통령이 야당의 나약함을 간파하고 오만하게 나오는 것이라고 했지만 야당의 약화는 당 지도부를 흔들고 문재인을 끌어내리려는 집요한 어깃장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한 번에 깨지는 알 껍질이 있겠는가’ ‘빗나간 부리질’도 있을 것이다. 부디 마침맞은 줄탁으로 '반짝, 먼 나라의 별빛이 젖은 내 눈을 치'며 별이 뜨는 그날이 오길 소망한다.

 

 

권순진

 

Time / Alan Parsons Project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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