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읽은
시 한 편이 되살아나 불현듯 나를 깨울 때가 있다.
이 시는
단순한 표현의 문제를 뛰어넘어 인간을 바라보는 근본을 뒤흔들어놓음으로써 나의 가슴을 감동으로 몰아넣는 그런 시이다.
혹시 아시는
분도 있을 것이다. 「바우리히 중사」라는 매우 특이한 제목을 가진 독일의 의사시인 케스트너의 시이다.
"바우리히
중사, 그가 우리 중대로 배속되어 온 것은 그 일로부터 여섯 달 전입니다. 우리는 그에게 참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받들어 총" "엎드려
쏴" "거총" "발사"
이 시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바우리히
중사는 누군가 몸의 균형을 잃고 넘어지기라도 하면 메마른 땅에 침을 뱉으며 "이런 병신같은 원숭이 새끼, 대가리 박아" 하며 훈련병들을 황무지로
끌고 가서 무릎과 팔꿈치에서 피가 나올 때까지 엉금엉금 기어다니게 만들었다.
말하자면 그는
어린 병사들이 그를 통해 인간에 대한 증오라는 것을 배웠다고 할 정도로 몹시 혹독한 인간이었다. 병사들은 그래서 숨을 헐떡이며 그에게 대답했고
그는 하늘을 향해 뻐꾸기처럼 웃었다.
그리고 그가
침을 뱉고 고함을 지르고 욕을 할 때면 속으로 그를 짐승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시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그를
생각하면 지금도 내 마음은 찌르는 듯 아파오고 / 내 심장은 놀란 듯 두두둑거립니다 / 견디기 힘들 만큼 어려운 일 / 힘겨운 일이 생기면 /
나는 언제나 바우리히 중사를 생각합니다 / 참호 속으로 날아 들어온 수류탄을 / 몸으로 덮어 우리를 살리고 / 그는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정말 우리가
무엇인가를 안다고 생각할 때 사실은 얼마나 모르고 있는 것인지……?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서늘해진다.
유난히 춥고
눈이 많이 내렸던 겨울이었다. 나는 모처럼 벼르던 여행을 가족과 함께 떠났다. 이것저것 계획을 세워보다가 결국 여행사에서 제공하는 단체여행을
택하기로 했다.
여행이란 낯선
시간 속에 노출되면서 자유롭게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것인데 개인의 자유와 호기심을 적당히 차단해버린 안전과 실비 위주의 여행코스가 못마땅했지만
그래도 가족이 함께 쉽게 움직이면서 여러 곳을 둘러볼 수 있다는 장점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
여행은 어쩌면 여행이라기보다 관광이라고 불러야 옳은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첫날부터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일어났다.
나는 일행
중에 한 중년 여자가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절에 가면 부처님만 보면 되지 왜 쓸데없이 다른 것을 보느냐고 스스로를 말렸지만 그러나 그
여자는 여행 내내 나의 신경을 건드렸다.
파리의
호텔에서는 아침식사용으로 나온 빵들을 독점한 후 슬쩍 몇 개를 잼과 함께 핸드백에다 넣기도 했다. 비대한 몸으로 매번 시간에 늦었으며 빈 의자가
있으면 놓칠세라 달려가서 선점했다. 무엇보다도 아무 데나 끼어들어 말을 보태고 농담을 걸었다. 돈을 내었으니 절대로 즐거워야 하고 그것으로
여행비의 본전을 뽑자고 드는 것 같았다.
문제는 그녀의
남편에게도 있었다. 베레모를 예술가처럼 눌러 쓴 남편은 경제적인 여유가 한껏 있어 보였고 교양도 있었으나 아내의 그런 부분을 전혀 제지하거나
충고하지 않았다.
오히려
선물가게마다 발을 멈추고 별 소용에도 없는 물건을 그녀가 골라놓으면 기꺼이 지갑을 꺼내 값을 치렀다.
결국 참을 수
없는 순간이 왔다. 일주일을 참고 견디다가 버스가 드디어 잘츠부르크를 향하고 있을 때였다.
사방의 풍경은
천국처럼 완벽했다. 더구나 흰 눈에 덮인 중세의 성들과 수도원과 지붕들은 모차르트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다웠다.
그런데 거기서
그 아주머니는 안내원을 붙잡고 큰 소리로 말했다. 마이크를 건네주며 유행가를 한 곡 부르라는 것이었다.
강원도
소양강에만 가도 손벽을 치고 노는데 여기까지 큰돈 주고 와서 심심하게 갈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할 수
없이 다음 휴게소에서 조용히 안내원을 불럿다.
"모차르트의
고향이 잘츠부르크에까지 와서 <소양강처녀>를 박수치며 부르고 흥청대야 한다면 나는 차라리 여기서 내리고 싶다"고 단단히
일렀다.
나의 강력한
제지 탓인지 다행히도 버스 안에서 마이크를 잡고 유행가를 부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다음
날 새벽이었다.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있는데 인근마을 소년들이 찾아와 성가를 부르고 모금함을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크라스마스 날인 것 같기도
했다.
그날따라
아주머니는 보이지 않고 그녀의 남편이 우리 곁에 있었다. 그는 얼마의 돈을 모금함에 넣더니 노래를 부르는 소년의 손을 잡고 문득 눈물을
글썽거렸다.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그는 나에게
말했다.
아들이
죽었다는 것이다. 이북에서 내려와 천신만고 끝에 경제적 기반을 닦았고 아들 하나가 꿈에 그리던 대학의 법대에 들어갔는데 얼마 전 그만 군대에
가서 의문의 사고사를 당했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분들의
이번 여행은 그 참혹한 슬픔을 받아들이는 아픈 새출발의 여행이었던 것이다.
멀리 알프스의
빙설이 보이는 새벽 한 호텔에서 나는 모차르트나 괴테를 입에 올리며 오만했던 자신이 부끄러워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