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탁/ 이정록
어미의 부리가
닿는 곳마다
별이 뜬다
한 번에 깨지는
알 껍질이 있겠는가
밤하늘엔
나를 꺼내려는 어미의
빗나간 부리질이 있다
반짝, 먼 나라의 별빛이
젖은 내 눈을 친다
- 시집『제비꽃 여인숙』(민음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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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탁’은 본시 불가에서 나온 말로 ‘줄’은 닭이 알을 깔 때 병아리가 막 껍질을 깨고 밖으로 나오려고 안에서 쪼는 것을 말하며, ‘탁’은 같은 때에 어미 닭이 밖에서 껍질을 쪼아 깨뜨리는 것을 이른다. 생명기운의 우주적 순환과 탄생의 신비를 묘사하고 있는 ‘줄탁’이란 말은 세상에 첫발을 디딜 때 안팎의 관계가 이러해야 하듯이 깨침을 위한 단계에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이를 때 주로 쓰는 말이다. 요즘은 이 말이 종교불문 기독교에서도 인간을 찾아오시는 하느님과 응답하는 인간이 만나는 지점을 두고 인용하며 정치권에서도 가끔 인용되는 것을 듣는다.
모든 일에는 순서와 시기와 최적의 방법이 있다. 그 시기를 놓치면 일이 성사되기 어려운 게 세상 이치다. 새 역사를 쓰고 새 시대를 만들어 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도 바로 이 타이밍이다. 때를 놓치거나 너무 앞서게 되면 공연히 기운만 빼거나, 때로는 많은 희생이 따르고 비극적 상황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음을 우리는 역사적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참으로 세상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가르침이자 매력적인 이치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협업의 관계에서 일이 잘 풀리려면 장단이 맞아야 하듯이 타이밍을 교감하고, 시그널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서로 채널을 공유하고 경청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번 민중총궐기는 박근혜 정권 내내 독선과 오만, 실정에도 불구하고 무력감에 빠졌던 민중진영이 다시 뭉쳐 부글부글 끓었던 분노를 한꺼번에 표출했다는데 의의가 크며, ‘나쁜 대통령’을 두고만 보지 않겠다는 결기를 보여준 것도 성과라 하겠다. 다만 여러 단체의 요구를 담아야했던 점을 이해하면서도 11개 요구사항은 지나치게 산만하여 선택과 집중, 그리고 절제의 전술전략적인 측면에서 효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으며, ‘줄탁’의 신묘한 기회를 얻는데도 부족해 보였다. 두루 확장성을 가진 대중의 정서를 감안하여 규탄 내용을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노동시장 구조개악' 정도로 집약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안타깝고 답답한 것은 정작 줄탁동기의 한 축이 되어야할 야권이 완전히 뒤로 빠져 제 역할을 못했다는 점이다. 작금의 지리멸렬한 제1야당은 현장에서 전혀 존재를 드러내지 못했으며 문재인 대표가 위중한 상태에 있는 백남기 씨를 문병한 뒤 경찰의 과잉진압을 맹렬히 질타했지만 힘이 실려 있다는 느낌을 받진 못했다. '낡은 진보' 타파를 외치는 안철수 의원은 더 딱했다. 안 의원측은 이번 시위가 ‘박근혜 정부의 오만한 국정운영 탓’이라면서도 ‘폭력시위·과잉진압에 대한 사실 확인이 되지 않아 말하기 어렵다’는 모호한 입장만 밝혔을 뿐이다. 어디에도 ‘탁’의 껍질 깨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경찰과 경찰버스도 모두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고 유지된다. 경찰이 박근혜 정부의 호위 사병 노릇을 해서도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쇠파이프로 버스를 때려 부수는 것도 대중의 폭 넓은 지지를 받기는 어렵다. 그 타격은 줄탁의 ‘줄’이 되지 못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잠언처럼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에 더하여 집중력과 자제력 또한 필요하다. 이 절망의 장막은 누가 거두어줄 것이며 단단한 껍질은 누가 깨트릴 것인가. 며칠 전 역사의 방향을 돌려놓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열사의 45주기를 맞았지만 그 한 사람의 힘보다 세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미룰 시간도 실패할 시간도 없다.
시기는 적기인데 ‘줄’의 야무진 집중력이 부족하고 ‘탁’의 조응이 누락되었다. 야당과 시민사회가 힘을 합쳐 제2의 민주화 운동을 범국민적으로 전개하지 않으면 껍질을 깨고 새로운 탄생을 기대하기는 어려우리라. 같이 힘을 모아 한 방향으로 매진해도 시원찮을 판에 덮어놓고 문재인 사퇴만 요구한다고 능사이겠는가. 대통령이 야당의 나약함을 간파하고 오만하게 나오는 것이라고 했지만 야당의 약화는 당 지도부를 흔들고 문재인을 끌어내리려는 집요한 어깃장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한 번에 깨지는 알 껍질이 있겠는가’ ‘빗나간 부리질’도 있을 것이다. 부디 마침맞은 줄탁으로 '반짝, 먼 나라의 별빛이 젖은 내 눈을 치'며 별이 뜨는 그날이 오길 소망한다.
권순진
Time / Alan Parsons Proj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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