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쓰네/ 고정희
그대 보지 않아도 나 그대 곁에 있다고
하늘에 쓰네
그대 오지 않아도 나 그대 속에 산다고
하늘에 쓰네
내 먼저 그대를 사랑함은
더 나중의 기쁨을 알고 있기 때문이며
내 나중까지 그대를 사랑함은
그대보다 더 먼저 즐거움의 싹을 땄기 때문이리니
가슴속 천봉에 눈물 젖는 사람이여
억조창생 물굽이에 달뜨는 사람이여
끝남이 없으니 시작도 없는 곳
시작이 없으니 멈춤 또한 없는 곳
수련꽃만 희게 희게 흔들리는 연못가에
오늘은 봉래산 학수레 날아와
하늘 난간에 적상포 걸어놓고
달나라 광한전 죽지사 열두 대의 비파에 실으니
천산의 매화향이 이와 같으랴
수묵색 그리움 만리를 적시도다
만리에 서린 사랑 오악을 감싸도다
그대 보지 않아도 나 그대 곁에 있다고
동트는 하늘에 쓰네
그대 오지 않아도 나 그대 속에 산다고
해지는 하늘에 쓰네
- 시집 『아름다운 사람하나』(푸른숲, 1997)
...................................................................
사랑을 하면 상대도 내만큼 나를 사랑할까? 애달아하고 확인하고픈 마음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그대 보지 않아도 그대 곁에 있다고’ ‘그대 오지 않아도 그대 속에 산다고’하니 이 무슨 거룩하고 초월적인 사랑인가. 더구나 세상사람 다 올려다보는 ‘동트는 하늘’과 ‘해지는 하늘’에다 대자보로 쓰다니 그밖에 다른 시선이나 소문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태도이다. 저 혼신의 사랑과 믿음은 다짐이고 맹세이면서 어떠한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겠다는 의지적 표현이다. '가슴속 천봉에 눈물 젖'고 '억조창생 물굽이에 달뜨는 사람'이라니 그럴만도 하다.
오늘날 우리의 사랑은 실시간 서로 확인 가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뱃속을 까뒤집어서라도 그 믿음을 확인하려 들고 또 확인시켜 주어야 한다. 그걸 대신하기 위한 방편으로 물질적 증표를 나눠 갖기도 하는데 때로는 완벽한 알리바이와 물증이 필요한 경우까지 있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사랑의 기쁨만을 온전히 노래하고 있다. ‘내 먼저 그대를 사랑’하고, ‘내 나중까지 그대를 사랑’하여 얻는 더 큰 즐거움을 알기 때문이란다. 내 사랑으로 내 기쁨이 되는 이 사랑의 대상은 어쩌면 시인이 평생 흠모했던 하느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짐짓 모른 척 해야겠다.
연시의 온도를 애써 식혀 서늘하게 만들 필요는 없겠다. 알싸한 감동의 물결을 부러 차단시킬 이유는 없는 것이다. 좀 더 냉정한 눈으로 시를 읽는 사람들은 그 사랑하는 이가 이승을 떠난 사람일 것이라고도 한다. '가슴속 천봉에 눈물 젖는' '억조창생 물굽이에 달뜨는 사람‘ 등의 시구가 그런 추측을 가능케 한다. '끝남이 없으니 시작도 없는 곳' '시작이 없으니 멈춤 또한 없는 곳' 무변광대한 사랑이니 이승이든 저승이든 무슨 상관이랴. 뚝뚝 흘린 눈물을 찍어 쓴 이 연시에서 시시때때로 떠오르는 그대 생각, 사무치는 그리움, 그리고 멈출 수 없는 지극한 사랑이 찌릿찌릿하게 전이되어 소름으로 돋는다.
권순진
'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벗 하나 있었으면 / 도종환 (0) | 2015.12.12 |
---|---|
[스크랩] 그대 생각...고정희 (0) | 2015.12.12 |
[스크랩] 이별한 자가 아는 진실/ 신현림 (0) | 2015.12.10 |
[스크랩] 겨울 편지 /박세현 外 .Reciter story /이미선 (0) | 2015.12.09 |
[스크랩] 겨울 사랑 / 박노해 (0) | 2015.1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