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시냇가 / 장석남 



내가 반 웃고
당신이 반 웃고
아기 낳으면
돌멩이 같은 아기 낳으면
그 돌멩이 꽃처럼 피어
깊고 아득히 골짜기로 올라가리라
아무도 그 곳까지 이르진 못하리라
가끔 시냇물에 붉은 꽃이 섞여내려
마을을 환히 적시리라
사람들, 한잠도 자지 못하리
 



*

물 첩첩 산 첩첩 강원도 정선 골짜기에서 온 전화.

들어가다 보면 산신령 돼 영영 다시 못 나올 것 같은

인제 진동 계곡에서 날아든 소식.

진달래 꽃망울 맺어 이제야 봄이 막 시작됐다고.

언 산들 몸 풀어 봄나물들 삐죽삐죽 내밀고 있다고.

세월도 물안개에 갇혀 천천히 흐르는 곳.

꽃 다 진 도회 일상에서도 반쯤은 깊고 아득한 골짜기

그런 삶 살고 있진 않느냐고.

 

/ 이경철·문학평론가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 장석남

 

 

1

찌르라기떼가 왔다

쌀 씻어 안치는 소리처럼 우는

검은 새떼들

 

찌르라기떼가 몰고 온 봄 하늘은

햇빛 속인데도 저물었다

 

저문 하늘을 업고 제 울음 속을 떠도는

찌르라기떼 속에

환한 봉분이 하나 보인다 

 

2

누가 찌르라기 울음 속에 누워 있단 말인가

봄 햇빛 너무 뻑뻑해

오래 생각할 수 없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나는 저 새떼들이 나를 메고 어디론가 가리라,

저 햇빛 속인데도 캄캄한 세월 넘어서 자기 울음 가파른

어느 기슭엔가로

데리고 가리라는 것을 안다

찌르라기떼 가고 마음엔

누군가 쌀을 안친다

아무도 없는데

아궁이 앞이 환하다

 

 

 

 


배를 밀며 / 장석남

 

 

배를 민다

배를 밀어보는 것은 아주 드문 경험 

희번덕이는 잔잔한 가을 바닷물 위에 

배를 밀어넣고는 

온몸이 아주 추락하지 않을 순간의 한 허공에서 

밀던 힘을 한껏 더해 밀어주고는 

아슬아슬히 배에서 떨어진 손, 순간 환해진 손을 

허공으로부터 거둔다

 

사랑은 참 부드럽게도 떠나지

뵈지도 않는 길을 부드럽게도

 

배를 한껏 세게 밀어내듯이 슬픔도

그렇게 밀어내는 것이지

 

배가 나가고 남은 빈 물 위의 흉터

잠시 머물다 가라앉고

 

그런데 오, 내 안으로 들어오는 배여

아무 소리 없이 밀려들어오는 배여  

 

 

 

 

 

 

방 / 장석남

 

 

동백꽃이 피었을 터이다

그 붉음이 한 칸 방이 되어 나를 불러들이고 있다

나이에 맞지 않아 이제 그만 놓아버린 몇 낱 꿈은

물고기처럼 총명히 달아났다

발 시려운 석양이다

이제 나는 온화한 경치처럼 나지막이 기대어 섰다

아무도 모르는 사랑이 벽을 두른다

동백이 질 때 꽃자리엔 어떤 무늬가 남는지

들여다보는, 큰 저녁이다

문 없어도 시끄러움 하나 없이

들끓는 방이다

 

 

 

 

 

 

석류 익는 시간 / 장석남

 

 

당신은 내게 비단을 주어

비단을 딱 한 필만 주어

그걸 눈에 두르고

더듬어서 내 맘 속 둥그런 항아리 속으로나 들어가 보게

그 항아리에 늘 허공이나 담아두는 당신의 뜻을 모르니

붉은 비단이나 두 눈에 곱게 두르고 들어가면 알려나?

 

하늘이 온통 노을로 꽃 핀

이 부러진 듯 시디 신 석류 익는 시간

 

 

 

 

  

 

길  / 장석남

 

 

바위 위에 팥배나무의 하얀 꽃잎들이 앉아 있습니다

바위 속이 훤히 들여다보입니다

 

팥배나무와

바위

사이

꽃잎들이 내려온

길들을

걸어보고 싶습니다

 

 

 

 

距離 / 장석남

 

 

너와 나 사이의 거리가

꽃이요 꽃밭이지

꽃밭이 크군

너와 나 사이의 거리가

꽃이고 향기지

멀면 멀수록

너와 나 사이가

큰 꽃이요

큰 향기지

 

거리가 거리를 들고 도망하고

거리가 거리를 몰아 사랑이라고

사랑이라고 말하고

 

거리가 거리를 향하고

거리가 거리를 파묻고

 

진실히

진실히

꽃밭은 너무나도 커서 차라리

푸른 멍의 가을 하늘이라고나 해야 하겠다

그 하늘하고도 이승과 저승을 잇는

저녁 종소리라고나 해야 하겠다

 

 

 

  

 

봄비 / 장석남

 

 

풀린

물결이여 네 고요 위에

둥글게 둥그렇게

서로서로 몸을 감고 죽는다

둥그런, 둥그런 물의 棺들

물 위로 물 속의 푸른 어둠이 솟아올라와

둥근 그 소리에까지도 푸른 어둠이 스민다

풀린

물결이여

네 몸 위에 받는 봄비는

먼데 골짜기까지도 봄이게 하며 몸을 터서 죽는다

아 너와 내가 잠들었던

이 한 덩어리 기슭의 바위에도 봄비는 와서

둥글게 둥그렇게

앉음새를 고쳐준다

 

 

 

 

인연 / 장석남

 

 

어디서 봤더라

어디서 봤더라

오 그래,

네 젖은 눈 속 저 멀리

언덕도 넘어서

달빛들이

조심조심 下棺하듯 손아귀를 풀어

내려놓은

그 길가에서

오 그래,

거기에서

 

파꽃이 피듯

파꽃이 피듯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 장석남

 

 

죽은 꽃나무를 뽑아낸 일뿐인데
그리고 꽃나무가 있던 자리를 바라본 일뿐인데
목이 말라 사이다를 한 컵 마시고는
다시 그 자리를 바라본 일뿐인데
잘못 꾼 꿈이 있었나?

인젠 꽃이름도 잘 생각나지 않는 殘像들
지나가는 바람이 잠시
손금을 펴보던 모습이었을 뿐인데

인제는 다시 안 올 길이었긴 하여도
그런 길이었긴 하여도

이런 날은 아픔이 낫는 것도 섭섭하겠네

 

 

 

 

여름산 / 장석남

 

 

둥글게 흰 풀잎의 둥?
둥? 위에 앉은 잠자리의 투명
투명 위에 앉은 여름산

 

비 온 뒤
이목구비 뚜렷한
여름산 메아리 속으로
먼 훗날 살 집을 걸려 보낸다

 

둥글게 흰 풀잎의 둥?
둥? 위에 앉은
이슬과 해와,
발자국 
 

 

 

 


마당에 배를 매다 / 장석남

 

 

마당에
綠陰 가득한
배를 매다

 

마당 밖으로 나가는 징검다리
끝에 몇 포기 저녁별
연필 깎는 소리처럼
떠서

 

이 世上에 온 모든 生들
측은히 내려보는 그 노래를
마당가의 풀들과 나와는 지금
가슴 속에 쌓고 있는가

 

밧줄 당겼다 놓았다 하는
영혼 혹은,
갈증

 

배를 풀어
쏟아지는 푸른 눈발 속을 떠갈 날이
곧 오리라

 

오, 사랑해야 하리
이 세상의 모든 뒷모습들
뒷모습들 

  

 

 

 

 

 

 

 

 

 

 

 

 


江 1 / 장석남


- 흘러감

 

 

어느 깨달음이 저보다 더 어여쁜 자세가 될 것이고
무엇이 저렇듯 오래 젊어서 더더욱 찬란할 것인고
강을 건너는 것이 어디 나뭇잎들이나
새들뿐이던가 봄이나 안개들뿐이던가
저 자세
저 --- 밑바닥에서 지금 무엇이 가라앉은 채 또한 강을 건너고 있는지
때로 강의 투명은 그것을 보여주려는 일
이 세상에 나온 가장 오랜 지혜를 보여주려는 일

가장 낮은 자가 가장 깊이 삶을 건너는,
가장 가벼운 자가 가장 높이 이승을 건너는,

어느 깨달음이 저보다 더 어여쁜 자세가 될 것인고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 장석남

 

 

저 새로 난 꽃과 잎들 사이
그것들과 나 사이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무슨 길을 걸어서
새파란
새파란
새파란 미소는,
어디만큼 가시려는가
나는 따라갈 수 없는가
새벽 다섯 시의 감포 바다
열 시의 등꽃 그늘
정오의 우물
두세 시의 소나기
미소는,
무덤가도 지나서 저
화엄사 저녁 종 지나
미소는,
저토록 새파란 수레 위를 앉아서

 

나와 그녀 사이 또는
나와 나 사이
미소는,
돌을 만나면 돌에 스며서
과꽃을 만나며 과꽃의 일과로
계절을 만나면 계절을 쪼개서
어디로 가시려는가
미소는,

 

 

 

 

自畵像 / 장석남

 

 

무쇠같은 꿈을 단념시킬 수는 없어서

구멍난 속옷 하나 밖에 없는 커다란 여행 가방처럼

종자로 쓸 녹두 자루 하나밖에 아무 것도 없는 뒤주처럼

그믐 달빛만 잠깐 가슴에 걸렸다 빠져 나가는 동그란 문고리처럼

나는 공허한 장식을 안팎으로 빛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모두 외롭다는 것을 알았어도

밥을 먹고, 걸음을 걷고, 산을 보곤 하는 것이 모두 외롭다는 것을 알았어도

저 빈 잔디밭을 굴러가는 비닐봉지 같이

비닐봉지를 밀고 가는 바람같이 외로운 줄은 알았어도

알았어도

다시 외로운,

새로 모종한 들깨처럼 풀 없이 흔들리는

외로운 삶

 

은하수에 새털구름아 어디만큼 가느냐

배거번드(vagabond)처럼 함께 흐르고 싶다

만도린처럼 외로운 삶

고드름처럼 외로운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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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부끄러움’이다,


시인의 고향은 인천 앞바다 덕적도이다.

바닷가는 고즈넉했고 섬마을 그의 동네는 사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어린 시인이 하루 종일 벗하는 사람은 또래가 아닌 할머니였다.

뭍에 나가지 않으면 친구들을 만날 길도 없는 그곳에서 할머니는

손자에게 끊임없이 옛날 얘기를 들려주며 심심함을 달랬다.
얘깃거리가 떨어지면 눈앞에 펼쳐지는 바다가, 그 바닷가 돌멩이가,

돌멩이도 구르게 하는 큰 바람이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덕분에 시인은 일찍부터 물과 섬과 꽃들을 알았다.

아홉 살 꼬마는 할머니가 그런 것처럼, 달이 차고 기우는 것으로

날짜를 세었고 꽃이 피고 지는 것으로 계절을 셈하며 혼자 놀았다.
그래서일까. 시인은 유난히 부끄러움을 많이 탔다.

친구를 사귀는 일도 낯설어했고 선생님 물음에도 손들어 대답하는

일이 쑥스럽기만 했다.

대답 없이 왔다갔다만 하는 파도와 놀던 아이였으니 수다쟁이

뭍 친구들 앞에서는 한없이 소심해지고 겁이 날 밖에.
친구들과 부대끼는 게 싫었던 어린 시인은 덕분에 혼자 책을 읽는

시간이 많았다. 다른 이들보다 시도 일찍 만났다.

소월의 시를 읽으며 아, 이런 게 있구나, 했고 부끄러워 전하지

못하는 내 마음도 시가 대신해줄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시인의 부끄러움은 그렇게 시가 되었다. 부끄러움을 몰랐다면

시도 몰랐을 것이라고, 시인은 아직도 부끄러워하며 말한다.


 

시인이 골라준 시인의 시

 

 

水墨정원9-번짐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번-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 채 번져서
봄 나비 한 마리 날아온다
 

 


옛 노트에서

 

 

그때 내 품에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
바람이 풀밭을 스치면
풀밭의 그 수런댐으로 나는
이 세계 바깥까지
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
만들 수 있었던가
물 위에 뜨던 그 많은 빛들,
좇아서
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까지 내려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때는 내 품에 또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
옹색하게 살았던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

 



시인이 일러준 이 시를 느끼는 법


옛 노트는 자신을 묻은 화석과 같다.

옛날의 자신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래서 옛 노트를 펼치면 된다.

지나간 시간이란 얼마나 안타깝고도

애닯던가.

젊음이 지나갈 때, 모퉁이를 돌듯이

되돌아 보는 시간이 있다.

그 안타까움!
나이가 들면서 깨닫게 되는 한 가지는 모든 것
껴안는 것이라야

사랑이라는 사실. 맺고 끊는 것은 비즈니스지 결코 사랑이라 할 수

없다. 미련이 남고 애처로움이 남고 마침내 미움까지도 받아들여

환하게 밝히는 것이 사랑이라는 발견. 초월하려면 꽉 껴안아야 한다.

그렇게 번져가는 것이 초월이다. 

 

시인의 말


장석남 시인은 시를 쓰는 일이 자기 최면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말 한마디만 툭 던져도 시가 되어 나올 것 같은, 우리 시대 대표적인

서정시인의 한 사람인 시인도 시를 쓸 때는 분위기를 좀 잡는다고

합니다. 분위기 잡고 들여다보는 사물은 그 어떤 것도 시가 되어

나올 수 있다고 말합니다. 자연과 사물, 타인에게는 시어로 옮길,

배울 것이 분명 있다는 얘기입니다. 시 한 편 쓰고 싶은 오늘,

여러분도 분위기 한번 잡아보십시오.

 

 

 

 

******************************************

 

장석남 시인

 

인천 덕적도 출생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1992년 김수영문학상. 1999년 현대문학상 수상

현재 한양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젖은 눈>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

 

 

 

 

출처 : 淸韻詩堂, 시인을 찾아서
글쓴이 : 동산 원글보기
메모 :

 

 

 

 

어떤 마을 / 도종환

 

 

람들이 착하게 사는지 별들이 많이 떴다.

개울물 맑게 흐르는 곳에 마을을 이루고

물바가지에 떠 담던 접동새 소리 별 그림자

그 물로 쌀을 씻어 밥 짓는 냄새 나면

굴뚝 가까이 내려오던

밥티처럼 따스한 별들이 뜬 마을을 지난다.

 

사람이 순하게 사는지 별들이 참 많이 떴다.

 

* 위 시는 2001년 <중학교> 국어 1 - 2 에 실린 시

 

 

 

 

 

흔들리며 피는 꽃 /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 교과서에 실린 시 - 2009년 이후

 

 

 

 

 

담쟁이 /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종례시간 / 도종환

 

 

얘들아 곧장 집으로 가지 말고

코스모스 갸웃갸웃 얼굴 내밀며 손 흔들거든

너희도 코스모스에게 손 흔들어 주며 가거라

쉴 곳 만들어 주는 나무들

한 번씩 안아주고 가거라

머리털 하얗게 셀 때까지 아무도 벗해 주지 않던

강아지풀 말동무 해주다 가거라

 

얘들아 곧장 집으로 가

만질 수도 없고 향기도 나지 않는

공간에 빠져 있지 말고

구름이 하늘에다 그린 크고 넓은 화폭 옆에

너희가 좋아하는 짐승도 그려 넣고

바람이 해바라기에게 그러듯

과꽃 붓꽃에 입맞추다 가거라

 

얘들아 곧장 집으로 가 방안에 갇혀 있지 말고

잘 자란 볏잎 머리칼도 쓰다듬다 가고

송사리 피라미 너희 발 간지리거든

너희도 개울물 허리에 간지럼 먹이다 가거라

잠자리처럼 양팔 날개하여

고추밭에서 노을지는 하늘 쪽을 향하여

날아가다 가거라

 

 

 

 

 

수제비 / 도종환

 

 

둔내 장으로 멸치를 팔러 간

어머니는 오지 않았다

미루나무 잎들은 사정없이 흔들리고

얇은 냄비에선 곤두박질치며

물이 끓었다

동생들은 들마루 끝 까무룩 잠들고

1군 사령부 수송대 트럭들이

저녁 냇물 건져 차를 닦고 기름을 빼고

줄불 길게 밝히며

어머니 돌아오실

북쪽길 거슬러 달려가고 있었다

경기도 어딘가로 떠난 아버지는 소식 끊기고

이름 지을 수 없는 까마득함들을

뚝둑 떼어 넣으며 수제비를 끓였다

어둠이 하늘 끝자락 길게 끌어

허기처럼 몸을 덮으며 내려오고 있었다

국물이 말갛게 우러나던 우리들의 기다림

함지박 가득 반짝이는 어둠을 이고

쓰러질 듯 문 들어설 어머니 마른 멸치 냄새가

부엌 바닥을 눅눅히 고이곤 하였다.

 

 

 

 

 

여백 / 도종환

 

 

언덕위에 줄 지어 선 나무들이 아름다운 건

나무 뒤에서 말없이

나무들을 말없이 받아 안고 있는 여백 때문이다

나뭇가지들이 살아온 길과 세세한 잔가지

하나하나의 흔들림까지 다 보여주는

넉넉한 허공 때문이다

빽빽한 숲에서는 보이지 않는

나뭇가지들끼리의 균형

가장 자연스럽게 뻗어 있는 생명의 손가락을

일일이 쓰다듬어 주고 있는 빈 하늘 때문이다

여백이 없는 풍경은 아름답지 않다

비어 있는 곳이 없는 사람은 아름답지 않다

여백을 가장 든든한 배경으로 삼을 줄 모르는 사람은.....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 도종환

 

 

견우직녀도 이 날만은 만나게 하는 칠석날

나는 당신을 땅에 묻고 돌아오네

안개꽃 몇 송이 함께 묻고 돌아오네

살아 평생 당신께 옷 한 벌 못 해 주고

당신 죽어 처음으로 베옷 한 벌 해 입혔네

당신 손수 베틀로 짠 옷가지 몇 벌 이웃께 나눠 주고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돌아오네

은하 건너 구름 건너 한 해 한 번 만나게 하는 이 밤

은핫물 동쪽 서쪽 그 멀고 먼 거리가

하늘과 땅의 거리인 걸 알게 하네

당신 나중 흙이 되고 내가 훗날 바람 되어

다시 만나지는 길임을 알게 하네

내 남아 밭 갈고 씨 뿌리고 땀 흘리며 살아야

한 해 한 번 당신 만나는 길임을 알게 하네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시

 

 

 

 

 

가을비 / 도종환

 

 

어제 우리가 함께 사랑하던 자리에

오늘 가을비가 내립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동안

함께 서서 바라보던 숲에

잎들이 지고 있습니다.

 

어제 우리 사랑하고

오늘 낙엽 지는 자리에 남아 그리워하다

내일 이 자리를 뜨고 나면

바람만이 불겠지요.

 

바람이 부는 동안

또 많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헤어져 그리워하며

한 세상을 살다가 가겠지요.

 

 

 

 

출처 : 淸韻詩堂, 시인을 찾아서
글쓴이 : 동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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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롱나무를 알기 전까지는
많은 나무들 중에 배롱나무가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장 뜨거울 때 가장 화사한 꽃을 피워놓고는
가녀린 자태로 소리없이 물러서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남모르게 배롱나무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 뒤론 길 떠나면 어디서든 배롱나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지루하고 먼길을 갈 때면 으레 거기 서 있었고
지치도록 걸어오고도 한 고개를 더 넘어야 할 때
고갯마루에 꽃그늘을 만들어놓고 기다리기도 하고

갈림길에서 길을 잘못 들어 다른 길로 접어들면
건너편에서 말없이 진분홍 꽃숭어리를 떨구며
서 있기도 했습니다

이제 그만 하던 일을 포기하고 싶어
혼자 외딴섬을 찾아가던 날은
보아주는 이도 없는 곳에서 바닷바람 맞으며
혼자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꽃은 누구를 위해서 피우는 게 아니라고 말하듯

늘 다니던 길에 오래 전부터 피어 있어도
보이지 않다가 늦게사 배롱나무를 알게 된 뒤부터
배롱나무에게서 다시 배웁니다

사랑하면 보인다고
사랑하면 어디에 가 있어도
늘 거기 함께 있는 게 눈에 보인다고

 

 

 

 

 

 

 

     배롱나무/ 도종환

 

 

 

 


* 시집 <부드러운 직선> 수록

 

 

 

 

 

 


 

 

 

 

 

 


출처 : 아트힐
글쓴이 : 꽃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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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 백반집

 



  문태준

 

 


논산 백반집 여주인이 졸고 있었습니다

불룩한 배 위에 팔을 모은 채

고개를 천천히, 한없이 끄덕거리고 있었습니다

깜짝 놀라며 왼팔을 긁고 있었습니다

고개가 뒤로 넘어가 이내

수양버들처럼 가지를 축 늘어뜨렸습니다

나붓나붓하게 흔들렸습니다

나는 값을 쳐 술잔 옆에 놔두고

숨소리가 쌔근대는 논산 백반집을 떠나왔습니다

            

     




시집『먼 곳』(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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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이 오면/안도현


그대

9월이 오면

9월의 강가에 나가

강물이 여물어 가는 소리를 듣는지요

뒤따르는 강물이

앞서가는 강물에게

가만히 등을 토닥이며 밀어주면

앞서가는 강물이 알았다는 듯

한번 더 몸을 뒤척이며

물결로 출렁

걸음을 옮기는 것을

때 강둑 위로

지아비가 끌고 지어미가 미는 손수레가

저무는 인간의 마음을 향해

가는 것을





 

그대

9월의 강가에서 생각하는지요

강물이 저희끼리만

속삭이며 바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젖은 손이 닿는 곳마다

골고루 숨결을 나누어 주는 것을

그리하여 들꽃들이 피어나

가을이 아름다워지고

우리 사랑도

강물처럼 익어가는 것을

 



그대

사랑이란

어찌 우리 둘만의 사랑이겠는지요

그대가 바라보는 강물이

9월 들판을 금빛으로 만들고 가듯이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사람과 더불어 몸을 부비며

우리도

모르는 남에게 남겨줄

그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을

9월이 오면

9월의 강가에 나가

우리가 따뜻한 피로 흐르는

강물이 되어

세상을 적셔야 하는 것을 


 

 

출처 : 아트힐
글쓴이 : 황씨아저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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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이 없는 삶은 빈 그릇이다
라고 네가 말했을 때
우리는 천천히 저수지를 돌고 있었다.
앞 벼랑 끝에 V자형 진달래꽃 뭉치
뛰어내릴까 말까 아슬아슬 걸려 있고
저수지 수면은 온통 새파란 물비늘,...
아주 정교히 빚은 그릇일 수도 있겠군, 나는 생각했다.


네가 없는 삶은 빈 그릇이다
라고 말하려다 화들짝 놀란다.
수위(水位) 낮아진 저수지에 어느샌가 가을이 깊어
색채들이 모두 나무에서 뛰어내려
물가까지 내려와 누워 있고
아예 물속에 든 놈도 있었다.
마지막 순간 마음 돌려
물가에 서 있는 술병도 있었다.


물새 한 마리 쓸쓸히 자맥질하고 있는 물에는
물속 땅에 박힌 건지 물 위에 뜬 건지
조그만 배 하나 멎어 있고
하늘이 통째 빠져 있는 수면엔
밝은 조개구름 한 떼가 지나가고 있었다.
문득 가까이 사람 소리
아끼듯 조용히 나누는 말소리, 한참 잠잠하다
이윽고 차 떠나는 소리.
물새 어디 갔다, 자취 없고
조개구름 흘러가버리고
무덤덤한 배가 혼자 떠 있다.

 

 

      네가 없는 삶 / 황동규

 

 시집<사는 기쁨>.

 

 

 

 


 

 

 

 

 

 

 

 

 

 

 

 

 

 

 

 

 

 

 

 

 

사진출처; 바람의 궁전

 

 

 

 

출처 : 아트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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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편지/나희덕



오래된 짐꾸러미에서 나온
네 빛바랜 편지를
나는 도무지 읽어낼 수가 없다

열정이 사라진 자리에 건포도처럼 박힌
낯선 기호들, 그 속삭임을
어둠 속에서도 소리내어 읽곤 했던 날들,
그러나 어두운 저편에서
네가 부싯돌을 켜대고 있다 한들
나는 이제 눈 멀어
그 깜박임을 알아볼 수가 없다

마른 포도나무 가지처럼
내 가슴에는 더 이상 너의 피가 돌지 않고
네게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렸다
온몸이 눈이거나
온몸이 귀가 되어도
가 닿을 수 없는 빛과 소리의 길을

오래된 짐꾸러미 속에
네 편지를 다시 집어 넣다가
나는 듣고 말았다
검은 포도알들이 굴러 떨어지는 소리를...

詩  / 나희덕
)

 

 

 

 

 

 

 

 

 

 

 

 

 

 




 

 

 

 

 

 

 

 

 

 

 

 

 

 

 

 

 

 

 

 

 

 

 

 

‘이제 나는 내가 아니야!’ 병원 침대에 누웠다가

세상 뒤로 몸을 감추기 전 친구의 말,

가면처럼 뜬 누런 얼굴, 더 이상 말을 아꼈다.

창틀에 놓인 화병의 빨간 가을 열매들이 눈 반짝이며

‘그럼 누구시죠?’

 

입원실을 나와 마른 분수대를 돌며 생각에 잠긴다.

조만간 나도 내가 아닌 그 무엇이 되겠지.

그 순간, 도대체 내가 뭐지? 묻곤 하는 조바심 홀연 사라지고

막혔던 속 뚫린 바보처럼 마냥 싱긋대지 않을까.

뇌 속에 번뜩이는 저 빛,

생각의 접점마다 전광 혀로 침칠하는 빛, 문득 사라지고,

생각들이 놓여나 무중력으로 둥둥 떠다니지 않을까.

내가 그만 내가 아닌 자리,

매에 가로채인 토끼가 소리 없이 세상과 결별한 풀밭이나

모르는 새 꼿꼿이 말라버린 춘란 갓 비워낸 화분처럼

마냥 허허로울까?

아니면 한동안 같이 살던 짐승 막 뜬 자리처럼 온기 남아

가까운 누구누구를 한동안 성가시게 할까?

 



 

 

 

무중력을 향하여 / 황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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