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시냇가 / 장석남
내가 반 웃고
당신이 반 웃고
아기 낳으면
돌멩이 같은 아기 낳으면
그 돌멩이 꽃처럼 피어
깊고 아득히 골짜기로 올라가리라
아무도 그 곳까지 이르진 못하리라
가끔 시냇물에 붉은 꽃이 섞여내려
마을을 환히 적시리라
사람들, 한잠도 자지 못하리
*
물 첩첩 산 첩첩 강원도 정선 골짜기에서 온 전화.
들어가다 보면 산신령 돼 영영 다시 못 나올 것 같은
인제 진동 계곡에서 날아든 소식.
진달래 꽃망울 맺어 이제야 봄이 막 시작됐다고.
언 산들 몸 풀어 봄나물들 삐죽삐죽 내밀고 있다고.
세월도 물안개에 갇혀 천천히 흐르는 곳.
꽃 다 진 도회 일상에서도 반쯤은 깊고 아득한 골짜기
그런 삶 살고 있진 않느냐고.
/ 이경철·문학평론가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 장석남
1
찌르라기떼가 왔다
쌀 씻어 안치는 소리처럼 우는
검은 새떼들
찌르라기떼가 몰고 온 봄 하늘은
햇빛 속인데도 저물었다
저문 하늘을 업고 제 울음 속을 떠도는
찌르라기떼 속에
환한 봉분이 하나 보인다
2
누가 찌르라기 울음 속에 누워 있단 말인가
봄 햇빛 너무 뻑뻑해
오래 생각할 수 없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나는 저 새떼들이 나를 메고 어디론가 가리라,
저 햇빛 속인데도 캄캄한 세월 넘어서 자기 울음 가파른
어느 기슭엔가로
데리고 가리라는 것을 안다
찌르라기떼 가고 마음엔
누군가 쌀을 안친다
아무도 없는데
아궁이 앞이 환하다
배를 밀며 / 장석남
배를 민다
배를 밀어보는 것은 아주 드문 경험
희번덕이는 잔잔한 가을 바닷물 위에
배를 밀어넣고는
온몸이 아주 추락하지 않을 순간의 한 허공에서
밀던 힘을 한껏 더해 밀어주고는
아슬아슬히 배에서 떨어진 손, 순간 환해진 손을
허공으로부터 거둔다
사랑은 참 부드럽게도 떠나지
뵈지도 않는 길을 부드럽게도
배를 한껏 세게 밀어내듯이 슬픔도
그렇게 밀어내는 것이지
배가 나가고 남은 빈 물 위의 흉터
잠시 머물다 가라앉고
그런데 오, 내 안으로 들어오는 배여
아무 소리 없이 밀려들어오는 배여
방 / 장석남
동백꽃이 피었을 터이다
그 붉음이 한 칸 방이 되어 나를 불러들이고 있다
나이에 맞지 않아 이제 그만 놓아버린 몇 낱 꿈은
물고기처럼 총명히 달아났다
발 시려운 석양이다
이제 나는 온화한 경치처럼 나지막이 기대어 섰다
아무도 모르는 사랑이 벽을 두른다
동백이 질 때 꽃자리엔 어떤 무늬가 남는지
들여다보는, 큰 저녁이다
문 없어도 시끄러움 하나 없이
들끓는 방이다
석류 익는 시간 / 장석남
당신은 내게 비단을 주어
비단을 딱 한 필만 주어
그걸 눈에 두르고
더듬어서 내 맘 속 둥그런 항아리 속으로나 들어가 보게
그 항아리에 늘 허공이나 담아두는 당신의 뜻을 모르니
붉은 비단이나 두 눈에 곱게 두르고 들어가면 알려나?
하늘이 온통 노을로 꽃 핀
이 부러진 듯 시디 신 석류 익는 시간
길 / 장석남
바위 위에 팥배나무의 하얀 꽃잎들이 앉아 있습니다
바위 속이 훤히 들여다보입니다
팥배나무와
바위
사이
꽃잎들이 내려온
길들을
다
걸어보고 싶습니다
距離 / 장석남
너와 나 사이의 거리가
꽃이요 꽃밭이지
꽃밭이 크군
너와 나 사이의 거리가
꽃이고 향기지
멀면 멀수록
너와 나 사이가
큰 꽃이요
큰 향기지
거리가 거리를 들고 도망하고
거리가 거리를 몰아 사랑이라고
사랑이라고 말하고
거리가 거리를 향하고
거리가 거리를 파묻고
진실히
진실히
꽃밭은 너무나도 커서 차라리
푸른 멍의 가을 하늘이라고나 해야 하겠다
그 하늘하고도 이승과 저승을 잇는
저녁 종소리라고나 해야 하겠다
봄비 / 장석남
풀린
봄
물결이여 네 고요 위에
둥글게 둥그렇게
서로서로 몸을 감고 죽는다
둥그런, 둥그런 물의 棺들
물 위로 물 속의 푸른 어둠이 솟아올라와
둥근 그 소리에까지도 푸른 어둠이 스민다
풀린
봄
물결이여
네 몸 위에 받는 봄비는
먼데 골짜기까지도 봄이게 하며 몸을 터서 죽는다
아 너와 내가 잠들었던
이 한 덩어리 기슭의 바위에도 봄비는 와서
둥글게 둥그렇게
앉음새를 고쳐준다
인연 / 장석남
어디서 봤더라
어디서 봤더라
오 그래,
네 젖은 눈 속 저 멀리
언덕도 넘어서
달빛들이
조심조심 下棺하듯 손아귀를 풀어
내려놓은
그 길가에서
오 그래,
거기에서
파꽃이 피듯
파꽃이 피듯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 장석남
죽은 꽃나무를 뽑아낸 일뿐인데
그리고 꽃나무가 있던 자리를 바라본 일뿐인데
목이 말라 사이다를 한 컵 마시고는
다시 그 자리를 바라본 일뿐인데
잘못 꾼 꿈이 있었나?
인젠 꽃이름도 잘 생각나지 않는 殘像들
지나가는 바람이 잠시
손금을 펴보던 모습이었을 뿐인데
인제는 다시 안 올 길이었긴 하여도
그런 길이었긴 하여도
이런 날은 아픔이 낫는 것도 섭섭하겠네
여름산 / 장석남
둥글게 흰 풀잎의 둥?
둥? 위에 앉은 잠자리의 투명
투명 위에 앉은 여름산
비 온 뒤
이목구비 뚜렷한
여름산 메아리 속으로
먼 훗날 살 집을 걸려 보낸다
둥글게 흰 풀잎의 둥?
둥? 위에 앉은
이슬과 해와,
발자국
마당에 배를 매다 / 장석남
마당에
綠陰 가득한
배를 매다
마당 밖으로 나가는 징검다리
끝에 몇 포기 저녁별
연필 깎는 소리처럼
떠서
이 世上에 온 모든 生들
측은히 내려보는 그 노래를
마당가의 풀들과 나와는 지금
가슴 속에 쌓고 있는가
밧줄 당겼다 놓았다 하는
영혼 혹은,
갈증
배를 풀어
쏟아지는 푸른 눈발 속을 떠갈 날이
곧 오리라
오, 사랑해야 하리
이 세상의 모든 뒷모습들
뒷모습들
江 1 / 장석남
- 흘러감
어느 깨달음이 저보다 더 어여쁜 자세가 될 것이고
무엇이 저렇듯 오래 젊어서 더더욱 찬란할 것인고
강을 건너는 것이 어디 나뭇잎들이나
새들뿐이던가 봄이나 안개들뿐이던가
저 자세
저 --- 밑바닥에서 지금 무엇이 가라앉은 채 또한 강을 건너고 있는지
때로 강의 투명은 그것을 보여주려는 일
이 세상에 나온 가장 오랜 지혜를 보여주려는 일
가장 낮은 자가 가장 깊이 삶을 건너는,
가장 가벼운 자가 가장 높이 이승을 건너는,
어느 깨달음이 저보다 더 어여쁜 자세가 될 것인고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 장석남
저 새로 난 꽃과 잎들 사이
그것들과 나 사이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무슨 길을 걸어서
새파란
새파란
새파란 미소는,
어디만큼 가시려는가
나는 따라갈 수 없는가
새벽 다섯 시의 감포 바다
열 시의 등꽃 그늘
정오의 우물
두세 시의 소나기
미소는,
무덤가도 지나서 저
화엄사 저녁 종 지나
미소는,
저토록 새파란 수레 위를 앉아서
나와 그녀 사이 또는
나와 나 사이
미소는,
돌을 만나면 돌에 스며서
과꽃을 만나며 과꽃의 일과로
계절을 만나면 계절을 쪼개서
어디로 가시려는가
미소는,
自畵像 / 장석남
무쇠같은 꿈을 단념시킬 수는 없어서
구멍난 속옷 하나 밖에 없는 커다란 여행 가방처럼
종자로 쓸 녹두 자루 하나밖에 아무 것도 없는 뒤주처럼
그믐 달빛만 잠깐 가슴에 걸렸다 빠져 나가는 동그란 문고리처럼
나는 공허한 장식을 안팎으로 빛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모두 외롭다는 것을 알았어도
밥을 먹고, 걸음을 걷고, 산을 보곤 하는 것이 모두 외롭다는 것을 알았어도
저 빈 잔디밭을 굴러가는 비닐봉지 같이
비닐봉지를 밀고 가는 바람같이 외로운 줄은 알았어도
알았어도
다시 외로운,
새로 모종한 들깨처럼 풀 없이 흔들리는
외로운 삶
은하수에 새털구름아 어디만큼 가느냐
배거번드(vagabond)처럼 함께 흐르고 싶다
만도린처럼 외로운 삶
고드름처럼 외로운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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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부끄러움’이다,
바닷가는 고즈넉했고 섬마을 그의 동네는 사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어린 시인이 하루 종일 벗하는 사람은 또래가 아닌 할머니였다. 뭍에 나가지 않으면 친구들을 만날 길도 없는 그곳에서 할머니는 손자에게 끊임없이 옛날 얘기를 들려주며 심심함을 달랬다. 돌멩이도 구르게 하는 큰 바람이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덕분에 시인은 일찍부터 물과 섬과 꽃들을 알았다. 아홉 살 꼬마는 할머니가 그런 것처럼, 달이 차고 기우는 것으로 날짜를 세었고 꽃이 피고 지는 것으로 계절을 셈하며 혼자 놀았다. 친구를 사귀는 일도 낯설어했고 선생님 물음에도 손들어 대답하는 일이 쑥스럽기만 했다. 대답 없이 왔다갔다만 하는 파도와 놀던 아이였으니 수다쟁이 뭍 친구들 앞에서는 한없이 소심해지고 겁이 날 밖에. 시간이 많았다. 다른 이들보다 시도 일찍 만났다. 소월의 시를 읽으며 아, 이런 게 있구나, 했고 부끄러워 전하지 못하는 내 마음도 시가 대신해줄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시인의 부끄러움은 그렇게 시가 되었다. 부끄러움을 몰랐다면 시도 몰랐을 것이라고, 시인은 아직도 부끄러워하며 말한다.
시인이 골라준 시인의 시
水墨정원9-번짐
번짐,
그때 내 품에는
옛날의 자신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래서 옛 노트를 펼치면 된다. 지나간 시간이란 얼마나 안타깝고도 애닯던가. 젊음이 지나갈 때, 모퉁이를 돌듯이 되돌아 보는 시간이 있다. 그 안타까움! 사랑이라는 사실. 맺고 끊는 것은 비즈니스지 결코 사랑이라 할 수 없다. 미련이 남고 애처로움이 남고 마침내 미움까지도 받아들여 환하게 밝히는 것이 사랑이라는 발견. 초월하려면 꽉 껴안아야 한다. 그렇게 번져가는 것이 초월이다.
시인의 말
말 한마디만 툭 던져도 시가 되어 나올 것 같은, 우리 시대 대표적인 서정시인의 한 사람인 시인도 시를 쓸 때는 분위기를 좀 잡는다고 합니다. 분위기 잡고 들여다보는 사물은 그 어떤 것도 시가 되어 나올 수 있다고 말합니다. 자연과 사물, 타인에게는 시어로 옮길, 배울 것이 분명 있다는 얘기입니다. 시 한 편 쓰고 싶은 오늘, 여러분도 분위기 한번 잡아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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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남 시인
인천 덕적도 출생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1992년 김수영문학상. 1999년 현대문학상 수상
현재 한양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젖은 눈>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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