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이 없는 삶은 빈 그릇이다
라고 네가 말했을 때
우리는 천천히 저수지를 돌고 있었다.
앞 벼랑 끝에 V자형 진달래꽃 뭉치
뛰어내릴까 말까 아슬아슬 걸려 있고
저수지 수면은 온통 새파란 물비늘,...
아주 정교히 빚은 그릇일 수도 있겠군, 나는 생각했다.


네가 없는 삶은 빈 그릇이다
라고 말하려다 화들짝 놀란다.
수위(水位) 낮아진 저수지에 어느샌가 가을이 깊어
색채들이 모두 나무에서 뛰어내려
물가까지 내려와 누워 있고
아예 물속에 든 놈도 있었다.
마지막 순간 마음 돌려
물가에 서 있는 술병도 있었다.


물새 한 마리 쓸쓸히 자맥질하고 있는 물에는
물속 땅에 박힌 건지 물 위에 뜬 건지
조그만 배 하나 멎어 있고
하늘이 통째 빠져 있는 수면엔
밝은 조개구름 한 떼가 지나가고 있었다.
문득 가까이 사람 소리
아끼듯 조용히 나누는 말소리, 한참 잠잠하다
이윽고 차 떠나는 소리.
물새 어디 갔다, 자취 없고
조개구름 흘러가버리고
무덤덤한 배가 혼자 떠 있다.

 

 

      네가 없는 삶 / 황동규

 

 시집<사는 기쁨>.

 

 

 

 


 

 

 

 

 

 

 

 

 

 

 

 

 

 

 

 

 

 

 

 

 

사진출처; 바람의 궁전

 

 

 

 

출처 : 아트힐
글쓴이 : 꽃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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