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에서 고등학교 올라갈 때 아버지가 우겨서 딴 이름의 학교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나는 친구들 보기 창피하다고 밥도 안 먹고 울었습니다 아버지가 원하시던 학교에 들어가 처음 교복 입고 노란 교표 달린 모자 쓰고 찍은 사진을 아버지는 늘 지갑 안에 넣고 다니셨습니다 점심값 아끼느라 떡이나 오뎅 사먹고 동대문에서 서대문까지 그 먼 퇴근길 걸어오시던 아버지는 그토록 내가 자랑스러웠던가 봅니다 시험 잘 보고 와도 칭찬 한번 안 하던 아버지, 뭘 좀 잘못하면 눈만 흘기시던 아버지, 정말 내가 크게 잘못한 날에는 자기 종아리 걷고 혁대 풀어, 나보고 때리라고만 하셨습니다 올여름 지나면 아버지 돌아가신 지 오 년, 언제까지 아버지가 내 사진을 지갑 속에 넣고 다니셨는지 모르지만, 지금 내 지갑에는 이십 년도 더 지난 우리 애들 사진이 들어 있습니다 어느 봄 아파트 정원에서 둘째는 쪼그리고 앉아 깔깔 웃고, 첫째는 동생 목을 휘어 감고 있습니다 지금 그 아이들 군대 갔다 오고 대학 졸업하고 취직도 않고 빈둥거리지만, 나는 녀석들이 지갑 속에서처럼 언제까지나 자라지 않기를 바라는지 모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그 애들을 보듯이 육십 년대 후반, 경리 일 그만두고 집에서 쉬는 동안 아버지는 이따금 내 사진을 들여다보셨겠지요 빳빳한 교복 칼라에 단정하게 모자 쓴 그 아이가 언젠가 그의 가난과 실직과 시들한 살림살이를 하루아침에 바꿔주길 바라셨겠지요 평생 울컥, 화내는 취미밖에 없었던 아버지,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도 경로당 두루마리 휴지를 한 움큼 뜯어 오다 동네 노인들한테 창피당한 아버지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냉동고 유리문 너머 입관하실 때도, 영정사진 모시고 산을 오를 때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린 독한 아들이었습니다 사진/ 이성복 2013년 '문학과 지성사'에서 낸 첫 시집이 이성복 시인의 일곱번 째 시집『래여애반다라』입니다. 시인이 10년 만에 펴낸 시집인지라 그 사실만으로도 문단의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지요. 수필체의 언술로 인해 시가 맞긴 한 것이냐는 작은 얘깃거리도 있었고요. 장석주 시인은 추천사에서 “무엇을 써도 시가 되는 경지에 들어섰구나, 하는 느낌이다. 사물의 구체성은 명징하고, 묽은 슬픔과 괴로움은 갑자기 까칠해지고 날카로워진다. 그 명징과 묽음이 만나 아득한 생의 풍경을 이룬다"라고 했습니다. 독특하면서도 낯선 제목 '래여애반다라(來如哀反多羅)’는 신라 향가의 한 구절로, 이 여섯 음절의 이두는 '오다, 서럽더라'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신라 백성들이 불상을 빚기위해 쉼 없이 흙을 나르면서 그 공덕으로 세상살이의 고됨과 서러움을 위안하고자 불렀던 노래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곳에 와서(來), 같아지려 하다가(如), 슬픔을 보고(哀), 맞서 대들다가(反), 많은 일을 겪고(多), 비단처럼 펼쳐지고야 마는 것(羅)"이 바로 우리들의 부박한 삶이라 말합니다. 3년 전 이순을 맞은 시인은 모두 여든두 편의 시를 여섯 개의 장에 나눠 실은 시집에 자신의 육십 년 인생과 이미 발표한 여섯 권 시집의 자취를 고루 담아내려 했다고 합니다. 시집에 실린 시들에 촘촘히 박힌 시어들 사이와 이야기의 숲을 거닐다보면 사람들이 왜 그의 시에서 '충동과 좌절감'을 말하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고향인 상주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이성복은 반에서 1등을 도맡아놓고 했다고 합니다. 워낙 똑똑하기도 했겠지만 무엇이든 지기 싫어하는 그의 성격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일찍이 작문에 소질을 보여 각종 백일장에서 상을 휩쓸었다고 합니다. 당시 상주초등학교에는 아동문학가 신현득, 김종상 선생 이 글짓기를 지도하였고, 하청호 선생이 같은 학교에 계셨던 스승이었습니다. 5학년 2학기 때 이성복은 동경해마지 않았던 서울로 올라가 효창 초등학교로 전학을 가면서 고모집에서 더부살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에서 '아버지가 원하시던 학교'란 바로 경기고를 지칭하는데, 그는 서울중학교를 거쳐 '딴 이름의' 경기고등학교로 진학하였습니다.
훗날 그의 고백에 따르면 경기고를 진학한 가장 큰 이유는 ‘출세하기 위해 유력층의 자제를 사귀어야 한다는 덜 영근 시근없는 생각 탓’이라고 했습니다. 내게도 자식을 별로 자랑스럽게 생각하진 않으셨지만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머저리 같은 자식, 차홍국이 아들은 서울의대에 단박에 붙었는데...'라시며 친구의 아들과 비교하며 못난 자식을 구박하던 아버지였습니다. 어쨌거나 나도 이 시를 읽으며 내 아버지와 아버지의 사진을 어렵지 않게 추억할 수 있었습니다. 앨범의 사각 사진 사이 미로를 따라가다 길을 잃었습니다. 과거와 과거의 과거를 넘실대다 아버지와 단 둘이서 찍은 흑백사진 한 장이 홍채 안으로 빨려 들어왔습니다.
이제 곧 아버지 가신지 27년, 얼핏 원 없이 자유분방하게 사신듯하지만 생각하면 가련한 대목이 없지 않습니다. 평생 하급공무원으로도 너무나 거침없고 호방하셨던, 나와는 코드고 스타일이고 무조건 달랐던 아버지. 당신은 그 자식이 몹시 마음에 안 들어 툭하면 '머저리'란 함경도식 욕을 퍼부었고, 나는 그런 아버지가 미웠습니다. 한때 아마추어 사진작가랍시고 누드촬영대회에서 찍은 사진을 지갑에 넣어다니기도 했습니다. 마구 찍어댄 필름 값의 추정액만으로 아버지를 비위공무원쯤으로 의심하기도 했지요. 내 사진은 본 일이 없지만 방실대는 손자 사진은 지갑 안에 곱게 담아 다니셨습니다. 그 아이들이 서른을 훌쩍 넘겨 제 새끼를 가진 놈도 있지만, 가끔 밉상으로 보이는 이즈음에서야 문득 혈연의 윤회와 업이 두렵기 시작합니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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