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 가며
서글픈 옛 자췬 양 흰 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을 하고
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 김광균, <설야>


---

  '그리운', '서글픈', '잃어진 추억', '싸늘한 추회' 등 도처에 애상적인 정조가 깔려 있다. 으레 눈 내리는 밤의 정경이 그러하다. 그리움, 그러나 돌아갈 수 없는 그 안타까움을 시인은 노래하고자 한 것. 그렇다면 이 시의 꽃은 역시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 한 구절을 위해 이 시가 존재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정도다.

  그러나 현재 중등 교과서에실린 문학 작품 가운데 가장 도발적이고 관능적인 이미지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이 표현이 주는 매혹을 제대로 음미해 볼 여유도 없이 안타깝게도 주로 기법적인 측면에서만 공부를 하게 될 뿐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 대목을 두고, 바로 '시각의 청각화', '공감각적 이미지' 등을 운위하는 것이다. 헌데 명색이 시 전공자인 나 자신도 도대체 그런 설명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모르겠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먼 곳에서 여인의 옷 벗는 소리가 귀에 들리겠는가. 왈가닥 처녀 아이도 아니고 여인이, 그것도 옆방에서가 아니라 먼 곳에서 옷을 벗는데 그 소리가 들릴 수 있겠는가. 더구나 그 옷은 하늘하늘한 실크 잠옷이거나 곱고 단아한 한복이거나 어딘가 그런 이미지가 아니겠는가.

  그렇다. 아무래도 안 들린다. 김광균이 주목한 것은 바로 밤눈의 이러한 속성, 곧 '소리 없음', '고요함'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눈은 소리 없이 내릴 뿐 아니라 눈 내리는 밤은 평소보다 더 고요하기까지 하다. 이는 과학적으로도 설명이 가능한데, 눈의 입자가 육각형 흡음 구조라서 밤에 눈이 쌓이면 사위가 고요해진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우리 모두가 경험해 보았듯이 밤눈은 눈치도 못 채고 있다가 무심코 창밖을 보거나 방을 나서야 알 때가 많다. 그때의 감동과 설렘을 떠올려 보라. 어쩌면 이 시의 화자도 방 안에 있다가 눈을 맞이했고 그래서 뜰에 내려갔을지도 모른다. 소리 없이 흩날리는 눈이었으니 정녕 그는 눈 오는 줄 미처 몰랐으리라.

  하지만 소리가 나는 것은 청각적 이미지로 표현할 수 있겠으나 소리가 나지않는다는 것은 과연 어찌 표현할까? 시냇물이 '졸졸' 흐른다고 하는 것은 달리 어찌 표현하겠는가? 바로 이 지점에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라는 표현의 묘미가 숨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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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재찬 지음.   <시를 잊은 그대에게>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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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이 밤 너무 신나고 근사해요
내 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떠오르고
산 아래 작은 마을이 그려집니다
간절한 이 그리움들을
사무쳐 오는 이 연정들을
달빛에 실어
당신께 보냅니다

세상에
강변에 달빛이 곱다고
전화를 다 주시다니요
흐르는 물 어디쯤 눈부시게 부서지는 소리
문득 들려옵니다

 


시집《그대, 거침없는 사랑》(푸른숲) 中
맛있는 음식이 앞에 있거나 멋진 풍경을 만나면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지금은 같은 자리에 없어 아쉬운 마음에, 달처럼 떠오르는 당신 생각에 전화기를 들었습니다. 당신의 눈썹 같은 예쁜 초승달이 강 위에 떠올라서, 그리워서 전화를 걸었지만 이야기를 할수록 더 그리워지는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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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데기는 가라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난 1894년

*곰나루: 공주의 옛 이름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아사달 아사녀 -> 한국민속대백과사전 링크

*초례청: 전통 혼례를 치르는 장소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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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비

                  정 호 승

 

고비 사막에 가지 않아도

늘 고비에 간다

영원히 살 것처럼 꿈꾸고

내일 죽을 것처럼 살면서

오늘도 죽을 고비를 겨우 넘겼다

이번이 마지막 고비다

 

                       (시집 <밥값>에 수록된 시) 

 

**

몽골의 고비사막은 어릴 적부터 알아왔지만

'고비'라는 말이 몽골어로 '풀이 자라지 않는 거친 땅'이란 것은 몰랐습니다.

 

 

늘, 혹은 때때로
생각 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생기로운 일인가..

늘, 혹은 때때로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카랑카랑 세상을 떠나는
시간들 속에서

늘, 혹은 때때로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인생다운 일인가.

그로 인하여
적적히 비어 있는 이 인생을
가득히 채워가며 살아갈 수 있다는 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가까이, 멀리,
때로는 아주 멀리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라도
끊임없이 생각나고, 보고싶고,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지금, 내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명확한 확인인가..

아, 그러한 네가 있다는 건
얼마나 따사로운 나의 저녁 노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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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하나 강물 하나 산 하나 / 나태주


꽃 하나 가슴속에
숨긴 사람은
남몰래 아름다워서
세상의 온갖 꽃을 보면서도
외로워하지 않습니다


강물 하나 가슴속에
흐르게 한 사람은
저 혼자도 부드러워서
함부로 조바심이 없습니다


산 하나 가슴속에
간직한 사람은
스스로 가득하여서
세상의 온갖 산을 두고서도
함부로 흔들림이 없습니다


이제 내게
꽃이고 강물이고
산이고 그대여


그대 내게 있는 날까지 나는
가난하지도 외롭지도 않으렵니다
아무것에도 부끄럼 없는
하늘아래 당당한 사람
사람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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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지붕 / 이준관



어머니는 지붕에
호박과 무를 썰어 말렸다
고추와 콩꼬투리를 널어 말렸다

지붕은
태양과 떠도는 바람이
배불리 먹고 가는 밥상이었다

저녁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초승달과 서쪽에 뜨는 첫 별이 먹고 나면
어머니는 그것들을 거두어들였다

날씨가 맑은 사나흘
태양과 떠도는 바람
초승달과 첫 별을 다 먹이고 나서

성자의 마른 영혼처럼
알맞게 마르면
어머니는
그것들을 반찬으로 만들었다

우리들 생의 반찬으로!

 

정 진 규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는 말씀을 아시는가 이것은 나락도 다 거두어 갈무리하고 고추도 말려서 장에 내고 참깨도 털고 겨우 한가해지기 시작하던 늦가을 어느날 농사꾼 아우가 무심코 한 말이다 어디 버릴 것이 있겠는가 열매 살려내는 햇볕, 그걸 버린다는 말씀이 당키나 한가 햇볕이 아깝다는 말씀은 끊임없이 무언갈 자꾸 살려내고 싶다는 말이다 모든 게 다 쓸모가 있다 버릴 것이 없다 아 그러나 나는 버린다는 말씀을 비워낸다는 말씀을 겁도 없이 지껄이면서 여기까지 왔다 욕심 버려야 보이지 않던 것 비로소 보인다고 안개 걷힌다고 지껄이면서 여기까지 왔다 아니다 욕심도 쓸모가 있다 햇볕이 아깝다는 마음으로 보면 쓸모가 있다 세상엔 지금 햇볕이 지천으로 놀고 있다 햇볕이 아깝다는 뜻을 아는 사람은 지금 아무도 없다 사람아 사람아 젖어 있는 사람들아 그대들을 햇볕에 내어 말려라 햇볕에 내어 말려 쓰거라 끊임없이 살려내거라 놀고 있는 햇볕이 스스로 제가 아깝다 아깝다 한다

 

 

 

시인과 아우는 모든 존재를 살려내서 그들과 생생한 교감의 관계를 맺고 싶어 하고 있다. 그런데 시의 제목인 놀고 있는 햇빛이 아깝다고 한 시인의 의도는 무얼까. 그것은 그들의 마음 속에 햇볕과 더 오래 , 더 깊이, 상생의 관계를 맺고 싶다는 소망의 표현이리라. 동시에 더 많은 존재를 살려내고 싶다는 소망이기도 한 것이리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신비로운 광경은 어떤 존재와 상생의 관계 속에서 살림의 일에 참여하는 일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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