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경상일보 시 당선작 

 

 

 표제·일러스트=주한경

 

 

눈사람과 돌멩이와 한낮 

 

 

신춘희

 

눈사람 한쪽 눈이 삐뚤게 붙어 있다

돌멩이 하나 머금었다

 

지금 조금씩 녹고 있는데

눈두덩이가 시릴 만큼 너를 오래 붙잡고 싶어

미안하지만 나는 점점 온기를 갖고

안타깝지만 너는 점점 부피를 줄이고

한동안 우린 밀착된 결빙으로 중력을 버티지

눈송이들 모여 숨겨둔 방

이곳은 해의 꼬리가 닿지 않아 심장을 두기 좋지

두근대는 돌멩이가 감정이라면

겨울은 안전한 밀실이야

사람들은 그저 눈빛을 얹어주거나

손끝으로 훑어볼 뿐

녹아내려야 하는 운명엔 관심이 없지

내가 너를 지키는 방법은

구름을 불러 모으는 일

눈이 자꾸 짓물러지고 있어

눈 속에 갇힌 마음이 죄다 흘러내리고 있어

우리가 견뎌야 했던 것들을 생각해

처음 눈덩이 궁글렸을 때의 설렘 같은 거

아이들 모두 돌아간 뒤 입꼬리를 움직여본 거

별들이 싱싱해서 우리는 하나였던 거야

이제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한낮이야

돌멩이와 눈덩이가 분별되어야 하는 시간이야

마지막 냉기가 사라지면

너는 나를 놓아줄 테지

그때까지 나는 너의 공중이 될 거야

머리가 기울고 있어

몸에 금이 가고 있어

물의 장례가 시작되고 있어

 

, 돌멩이 하나 그렁그렁 쏟아져 내린다

 

 

당선소감 / 신춘희

 

  

 

봄같은 소식늦게 핀 꽃 늦게 질 것

 

  뜻밖에 봄이 찾아왔다. 당선 소식을 듣고 다리에 힘이 빠져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겨울과 봄 사이, 차가운 얼음 속에 있던 노란 복수초가 내 가슴에서 활짝 꽃을 피웠다.

  눈 녹은 물인지, 눈물인지 몸 밖으로 흘러내렸다.

 

  시의 씨앗을 뿌려놓고 한참을 기다렸다. 얼마 전에 다녀온 설악산 공룡능선의 날카로운 봉우리들, 공룡의 등을 내려올 때도 시를 생각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기록할 힘을 길러준 열정이 내 안에도 있었다.

 

  어느 날은 생의 에너지를 가득 채워주기도 하고, 어느 날은 시가 사라져 눈앞이 캄캄할 때도 있었다.

 

  늘 허기가 졌다. 그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워준 마경덕 선생님, 윤성택 선생님, 하린 선생님, 박지웅 선생님께 고마움을 전한다.

 

  시의 길을 열어주신 심사위원님과 경상일보 관계자님께도 감사를 드린다. 문우들과 친구들 나를 믿어준 가족과 기쁨을 나누고 싶다.

 

  늦게 핀 꽃은 늦게 질 것을 믿는다.

 

 

 

 문정희

심사평-문정희 / 예술의 완성 향한 치열성 확인 반가워

 

  위험하고 슬픈 시대, 고립과 폐쇄의 시간을 밀치고 희망처럼 피어날 새로운 언어를 기다리며 예심을 통과한 응모작들을 깊이 읽었다. 언어에 대한 탐색과 예술의 완성을 향한 치열성을 확인할 수 있어 매우 반가웠다.

 

  행과 연을 무시한 산문성의 경향, 여백의 문제에 고민해 본적이 없는 소통 불가의 작품은 줄었지만 외래어에 대한 무자각과 상상력 보다는 사소한 현실과 현상에 대한 묘사에 치우친 경향은 여전했다.

 

  오늘날 지구를 위협하는 생태 문제로서 썩지 않는 플라스틱의 현실을 주제로 한 ‘5 5 500’, 오래된 소나무를 통하여 역사와 인간의 발자국을 읽는 나무 실록과 함께 응모한 눈사람과 돌멩이와 한낮’, 혼자가 시대의 모습이 된 오늘날의 자화상 같은 고독에 물리지 않는 방법을 따라함과 감각적인 포착이 돋보이는 가베라에 대한 경배 천사를 만나는 날은 오늘이 선자의 손에 오래 남았다. 숙고 끝에 눈사람과 돌멩이와 한낮을 당선작으로 정했다. ‘나무 실록이 완성도는 높았지만 신인답지 않은 사유와 안정된 진술이 오히려 긴장을 줄이고 있었다.

 

  신춘문예란 새해 아침 가장 신선하고 새로운 언어가 등 푸른 용처럼 뛰어 오르는 것이 아닐까. 등용문(登龍門)이라는 말도 다시 떠올려 보게 된다. 한국 시단의 강한 수압(水壓)을 잘 견디어 부디 좋은 시인이 되기를 바란다.

 

 

 

2022년 서울신문 신춘 시 당선작

 

 

 

반려울음 이선락

 

슬픈 시를 쓰려고 배고프다, 썼는데 배으다라 써졌다

뒤에 커서를 놓고 백스페이스키를 누르자 정말 배가 고팠다

 

뱃가죽이 등에 붙어버렸나? 배가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고프다, 쓰자 배가 없어졌다. 등이 구부러지는, 굴절된 뼈 같은 오후

 

그래, 슬픔은 늘 고프지

어딘가가 고파지면 소리 내어 울자, 종이 위에 옮겼다

 

*

 

세면대 위에 틀니를 내려놓듯 덜컥, 울음 한마디 내려놓고 왔습니다

그뿐인가 했더니

옆구리 어디쯤에 쭈그리고 있던 마음, 굴절되어 있네요

 

거품을 집어삼킵니다 씹어도 건더기라곤 없는 튀밥

혓바닥이 마르고, 버썩거립니다

 

그래요, 뭐든 버썩거릴 때가 있어요 잠깐 눈 돌리면

쏟아지기도 하고

 

난 수년 전 아이 몇몇 쏟아버린 적도 있어요

 

그땐 내 몸도 깡그리 쏟아졌던 것 같아요 마지막 손톱을 파낼 땐

눈에도 금이 가고 있었죠

 

얘야, 눈빛이 많이 말랐구나 눈을 새뜨고 있는 게 아니었어 내가,

 

손가락을 흘리고 다니지 말랬잖아요 근데 왜 까마귀 목소리가 흘러나오는지 보송보송 털이 난 꿈속에서

 

*

 

배가 고프단 얘긴 줄 알았는데, 그림자 얘기였어

 

부품해진 그림자론 날아오를 수 없다, 어떤 돌은 그림자도 생겨나지 않는다, 죽은 후론 배꼽도 떠오르지 않는다, 쏟아졌던 아이들이

 

처음으로 수면에 떠올라

배꼽은 어디 있을까?’ 찾고 있을지도 모르는

 

깨지지 않는 것도 깨진 것이 돼 버린 오후

이렇게 비좁고, 나는 깎아지른 맘뿐이었나

 

몇 줄 적지 못한 종이 한 장 찢어, 공중에 날리는

 

 

 

신춘문예 시 당선소감 이선락

 

 

  나이는 숫자일 뿐 더 많이 생각하고 노력해야죠

 

  농막에서 돌아와 막 책상 앞에 앉았을 때 낯선 번호의 전화가 왔다. “서울신문 기자인데요.” 나는 금방 자리에서 일어서고 말았다. 내 속의 내가 한 길쯤 공중으로 솟아올랐던 걸까? 아내가 진정하라고 어깨를 내려주었을 때서야 참으로 많이 놀랐구나, 기뻤구나, 실감이 났다. 전화기 속으로 절이라도 겹쳐 넣고 싶었다.

 

  수 해 전 아내는 농막 하나를 지어 내어주며 하고 싶은 것 많이 해 보라고 권했다. 이튿날 바로 읽고 있던 시집 10여권을 들고 가 종일토록 읽었다. 토요일 오후엔 동리목월문예창작대에서 수강했다. 구광렬 시인의 첫 수업 때 망치로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시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게 된 계기였다.

 

  그 후에도 손진은 시인, 전동균 시인, 유종인 시인의 열강을 놓치지 않고 들었다.

 

  제법 몇 해가 흘렀을 때에서야 약간씩 눈이 뜨이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내 속의 내가 말을 걸기도 했고, 주위의 사물들이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써 보라고 권하는 듯했다.

 

  시가 되는지 뭐가 되는지도 모르고 즐겁게 썼다. 여러 시집을 읽었다. 수백여 권쯤 될까? 세 번, 네 번, 열 번, 스무 번쯤 좋아지는 시집을 더 많이 읽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좋아하게 됐다.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노력하겠다, 다짐해 본다.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리며, 노심초사 나를 지켜봐 주신 여러 지인들께도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문우님들께도, 시목문학회 회원들께도 깊이 감사를 드린다. 아내를 다시 한번 껴안아 주고 싶다. 마스크를 벗고 사는 시간이 얼른 왔으면. 기다려진다.

 

이선락 1957년 경북 경주 출생 건국대 수의과대학 졸업 동리목월문예창작대 재학

 

 

 

심사평

고픔과 아픔 외면하지 않는 시, 질문을 그치지 않는 시

 

 

 

[2022 신춘문예 시 심사평신해욱 오은 박연준

 

  올해도 많은 분들이 새봄을 향해 시를 보내 주셨다. 오랜 시간을 들여 차근차근 읽었다. 예년보다 더 오래 숙고했는데, 손에서 쉽사리 내려놓을 수 없는 작품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단단하게 짜인 세계를 횡단하며, 심사자들의 눈과 손이 시종 천천히 움직였다.

 

  ‘오픈이 보여 준 감춤과 들킴의 미덕, ‘물과 풀과 건축의 시에서 감지한 조용한 폭발, ‘비닐하우스가 만들어 낸 미묘한 긴장, ‘온몸일으키기가 일으킨 위트와 블랙 유머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같이 머리와 가슴을 두드리는 시편이었다.

 

  당선작과 끝까지 경합한 저기 저 작은 나라 외 네 편은 독특한 시적 세계관으로 심사자들의 고른 지지를 받았다. 자기만의 세계가 이미 상당 부분 구축돼 있어 앞으로 그 세계가 어디로 어떻게 뻗어 나갈지 궁금했다. 토씨 하나도 허투루 사용하지 않는 문장들은 묘한 리듬감을 자아내 읽을 때마다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열띤 토론 끝에 반려울음 외 두 편을 당선작으로 뽑는다. 젊음은 젊은 상태, 혹은 젊은 기력을 가리킨다. 젊은 시가 있다면 그 상태를 잊거나 잃지 않고자 기력을 쏟아붓는 시일 것이다. ‘고픔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시, 질문을 그치지 않는 시일 것이다. 일상의 한 장면에서 지나간 시간을 길어 올리고 작금의 감정을 그 위에 내려놓는 시일 것이다. ‘반려울음은 쓰면서 고파지는 시, 배가 뱃가죽과 배꼽을 소환하는 시, 마침내 쏟아버리면서 동시에 쏟아지는 시였다. “버썩거리는 일상을 비집고 다른 존재를 향한 유일한 감정이 솟아오르며 빛나는 시였다. 울음을 껴안으면서 울음과 함께 살겠다고 다짐하는 시였다.

 

  시 쓰는 데 있어 이른 시간과 늦은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를 쓰는 시간은 모두 제시간이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응모자 모두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202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경유지에서 / 채윤희

 

 

 

 

 

 

당선소감

 

 

 

괜히 글 쓰고, 괜히 혼자 여행하고 괜히 그랬다 싶은 일들이 시가 됐다

 

 

  당선 연락을 받았다. “엄마!” 비명을 지르며 따뜻한 품을 끌어안았다. 엉엉 울기에 이상적인 순간이었고 거의 그럴 뻔했다. 그러나 끓는 물에 들어간 지 10분을 훌쩍 넘긴 파스타를 걱정하는 마음이 울컥 치미는 마음을 기어코 짓눌렀다. 퉁퉁 불어버린 파스타를 소스가 담긴 팬으로 옮겨 담았다. “어휴, 비명이 들리기에 사실 벌레가 나온 줄 알았다.”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새우가 그릇마다 세 마리씩 배분되었는지 살폈다. 지금 새우가 문제인가. 그러나 새우가 문제이기는 했다. 내가 네 마리를 먹으면 누군가는 두 마리를 먹게 될 테니까. 회심의 파스타였는데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새우가 세 마리이기는 했다, 다행히도.

 

  당선작의 제목을 알려드렸다. “, 너 비행기 놓친 곳!” 아니라고 답하면서도 그편이 재미있었을 텐데 괜히 정정했나 싶었다. 괜히 그랬다 싶은 일들은 늘 일어났다. 괜히 글을 쓴다 그랬다, 괜히 다른 공부를 한다 그랬다, 괜히 혼자 여행한다 그랬다. 그렇게 괜히 그랬다 싶은 일들이 시가 되었다. 조촐한 당선소감을 읽고 있는 당신도 당신만의 괜한 순간을 긍정하게 된다면 좋겠다.

 

  감사할 사람들이 많다. 우선 언제나 응원해준 엄마와 아빠, 할머니와 동생에게 사랑을 보낸다. 예술을 한답시고 빌빌거리는 친구 셋의 술값을 턱턱 내준 이 선생. 이제 갚을게. 나의 6. 응어리진 애정을 풀기엔 나의 언어가 모자라다. 마지막으로, 항상 무언가를 그르치고 있다는 감각으로 살아가면서도 스스로를 사랑하는 걸 멈추지 않은 나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열심히 쓰겠다.

 

1995년 부산 출생 명지대 문예창작과 졸업

 

 

심사평 시

시간-공간 넘나드는 활달한 상상력, 매력적으로 다가와

 

 

 

정호승 씨(왼쪽)와 조강석 씨.

 

  최종심에 올라온 작품들은 대체로 무난했다. 달리 말하면 위험도 모험도 드물었다는 말이다. 안정적 기량이 우선인 것은 틀림없지만 개성적인 목소리가 많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균일함은 우리가 보낸 한 해의 격동과도 거리가 있어 보였다. 시가 삶의 불안을 고스란히 드러낼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시대의 삶의 환경과 동떨어진 기예를 겨루는 경연도 썩 유쾌한 것만은 아니다. 본심 심사위원들이 만나서 가장 먼저 나눈 얘기는 바로 이 의아함에 대한 것이었다.

 

 오래 논의한 세 작품은 남겨진 여름’, ‘씨앗의 감정’, ‘경유지에서였다. ‘남겨진 여름은 문장의 신선함이 눈에 띄었고 근경과 원경을 오가며 사유를 전개하는 리듬도 흥미로웠다. 다만 긴장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고 시의 마지막 연에서 상투형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아쉬웠다. 압축과 절제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씨앗의 감정은 이질적인 이미지를 하나의 시상을 중심으로 그러모으는 솜씨를 보여줬다. 씨앗을 소재로 한 사유가 다양한 이미지를 통해 변주되는 양상은 신선했다. 그러나 시의 마지막 대목에서 대사를 그르쳤다. 모든 시가 기승전결과 대미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심사위원들은 긴 논의 끝에 경유지에서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활달한 상상력이 매력적인 작품이다. 나아가 찰나적 순간을 자신의 삶에 대한 사유로 길어오는 기량도 믿음직스럽다. 함께 투고된 작품들이 고른 기량을 보인 것은 아니었지만 한 작품을 고르라면 이 작품일 수밖에 없다는 것에 대한 동의가 있었다. 기대와 더불어 축하의 마음을 전한다.

 

 정호승 시인·조강석 문학평론가(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2022년 문화일보 신춘 시 당선작 




상자놀이 / 김보나




내 방엔 뜯지 않은 택배가
여러 개 있다
 
심심해지면
상자를 하나씩 열어 본다
 
오래 기다린 상자는
갑자기 쏟아지는 풍경에 깜짝 놀라거나
눈을 떴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건 착각이야
세계는
 
누군가 눈을 뜨기 전에
먼저
빛으로 눈꺼풀을 틀어막지
 
나는 상자가 간직한 것을 꺼내며 즐거워한다
 
울 니트의 시절은 지났고
이 세제는 필요하다
 
새로 산 화분을 꺼내
덩굴을 옮겨 심으면
내 손은 순식간에 흙투성이가 된다
 
그래도 돼
뮤렌베키아 줄기가 휘어지는 방향을 따라가도 돼
 
친구는 이것을 선물하면서
식물은
쏟아지는 빛의 자취를 따라가며
자란다고 말했지
 
방을 둘러보면
여전히 상자가 수북하다
 
이삿짐이거나
유품 같다
 
빈 상자가 늘고
열 만한 것이 사라져 가면
 
나는 이 방을 통째로 들어
리본으로 묶을 궁리를 해 본다
 
 


[문화] 2022 신춘문예 당선소감 
다르게 말하는 방법 활자가 열어준 세계








  겨울의 초입, 갑상선암 진단을 받았다. 완치 가능성은 높지만 갑상선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마음이 얼어붙었다. 출퇴근길, 바삐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각했다. 단단한 빙하가 된 것 같다고, 점점 부서지고 작아질 얼음이 되어 먼 하류로 떠내려가는 것 같다고.
 
  막막한 그때, 당선 전화를 받았다. 거짓말처럼 생일에 걸려 온 전화는 이렇게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엔딩 크레디트가 내려진 것처럼 살지 말라고, 너는 이제 활자의 세계에서 다시 태어날 거라고.
 
  언젠가, ‘얼음의 노래를 들은 적이 있다. 촬영감독 요나 인톤은 팽팽한 빙판이 호수 한가운데에서 깨지는 순간을 영상으로 포착했다. 길고 깊은 균열이 생기는 그때, 얼음은 노래한다. 나는 무언가를 잃어 가는 사람들의 곁에 있고 싶다. 그러한 방식으로 노래하는 법을 배우기로 하면서.
 
  고마운 사람들의 이름이 어둠 속에서 하얗게 떠오른다. 서툰 나를 받아 주는 아네스와 베드로, 오빠와 두 동생과 다투고 또 사랑하며 살아갈 것이다. 삼십 대가 되면 좋은 일이 더 많이 찾아온다고 한 혜지 언니, 초등학생 때부터 서로 곁을 지켜 준 미혜와 수인, 평생 미더운 눈빛 서우종 선생님, 널 믿는다는 말 대신 말없이 손을 잡는 진희, 언니는 시인이 될 거라고 나보다 앞서 믿은 윤혜, 함께 글을 쓰고 사계절의 풍경을 여행한 지혜, 혜배, 혜라에게 고맙다. 무지개책갈피와 상처를 드러내지 않는 글쓰기 친구들, ‘SOH’가 있어 일하는 나날 가운데에서도 마음을 가다듬으며 읽고 쓸 수 있었다. 쭈뼛대며 수업에 찾아온 사범대생을 격려한 한영옥 시인님,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는 법에 대해 알려 준 김상혁, 황인찬, 김소연, 김언 시인님과 첫걸음을 응원해 준 심사위원님들께 갓 우린 차처럼 따뜻한 감사를 전하고 싶다.
 
  모두에게 행운이 깃들었으면 좋겠다. 숨은 씨앗을 어떻게든 찾아내 싹을 틔우는, 햇빛을 닮은 힘이 이 글에 어리면 좋겠다. 앞으로도 활자를 믿고 쓰면서, 어쩌면 날 녹일지도 모를 빛과 사랑을 따라 흔들리며 나아가고 싶다.
 
 김보나. 1991년 서울 출생. 성신여대 교육학과 졸업.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시 심사평


평범한 소재서 리듬감 이끌어낸 상상력 서정시 품격 한층 높여
 
  심사는 예심과 본심을 통합해 진행됐고, 논의를 거쳐 10여 편의 작품이 본심에 올랐다. 이 중에서 가뭄’ ‘포도’ ‘청년 희망 회복’ ‘상자 놀이가 경합한 끝에 상자 놀이가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마지막에 아쉽게 수상의 영예에서 밀려난 다른 작품들 역시 서정적 울림과 개성을 지닌 높은 수준을 보여줬다는 것이 심사위원들의 중론이었다.
 
  ‘가뭄은 자연어의 결합을 통해 영혼의 갈증과 슬픔을 형상화해내는 언어 감각이 눈에 띄었다. ‘포도는 도입부의 돌발적인 이미지가 끝까지 유지되는 흡인력과 의미의 여운을 증폭시키는 간결한 시상 전개가 인상적이었다. ‘청년 희망 회복은 변두리 재개발지와 도시계획 차원에서의 개발행위의 상관관계를 통해 사회적 관심을 환기해내는 시선의 힘이 돋보였다. ‘상자 놀이는 평범한 일상의 소재에서 운문적 리듬감을 이끌어내는 풍부한 상상력과 감성이 감탄을 자아냈다.
 
  이 작품들에 대한 심사위원들의 일차 의견 교환이 있고 난 다음 가뭄은 언어 감각의 화려함에 비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불투명하다는 점, ‘포도는 돌올한 언어 배치가 인상적이지만 한편으론 그것이 행간의 깊이를 모호하게 만든다는 점이 각각 지적돼 제외됐다. 최종적으로 청년 희망 회복 상자 놀이가 남았다. ‘청년 희망 회복은 재개발지에 꽂힌 깃발을 통해 세계가 재편되고 그 안으로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지적하는 사회적 비판의식과 구체적 사실감이 코로나19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다소 시가 직설적이고 산문적이라는 점이 고심케 해 당선작이 되지 못했지만 이 응모자의 앞날을 기대하게 한다. 결국 끝까지 남은 상자 놀이가 별다른 이견 없이 만장일치로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우선 상자 놀이는 간결하면서도 풍부한 여백의 미가 서정시로서 갖춰야 할 품격을 한층 높인다. 시상을 전개하는 맑고 순수한 시행의 흐름이 행과 행, 연과 연 사이에서 막힘없이 운용돼 운문적 리듬감으로 충일하다. 또 시행과 시행을 건너뛰는 간결함과 담백함으로 우리 마음의 여백에 잔잔한 파문을 남기는 풍부한 상상력이 여운을 자아낸다. 이 시는 뜯지 않은 택배라는 평범한 일상의 소재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것을 구태의연하게 쓰지 않고 현실에 발을 댄 독특한 시선으로 변주하는 공간 변용 능력과 감정의 안배가 뛰어나다. 상자의 닫혀 있음과 열림, 그를 통해 드러나는 어둠과 빛이 팬데믹 시대의 도시적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속내를 주거 공간에 집약해낸다. 무엇보다 당선작과 함께 보내온 응모작들의 수준이 고른 점도 안심케 하는 대목이다. 산문화와 장식적인 수사가 대세를 이루는 오늘날의 시적 풍경 속에서 이 신예시인이 현실 세계와 상상 세계를 덧대어 어떤 삶의 박동과 리듬을 우리에게 선물해줄지 큰 기대를 가지며,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나희덕·박형준·문태준
 
 
 




2022년 매일신춘문예 시 당선작

 

왜소행성 134340

 

유진희

 

 

왜소행성 134340*

 

우주는 조금씩 부풀고 있고

 

우리는 같은 간격으로 서로 멀어지고 있어요

 

사방이 우주만큼 트여 있어도 어쩔 수 없는 일

 

좌표만 같은 비율로 커지는 세계에서

 

시간만이 변수라고 한다면

 

아득한 게 쓸쓸한 일이 되고 맙니다

 

다시 올 것 같지 않게 멀어지다가

 

어느 계절엔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오는 별을

 

찌그러진 궤도를 가진 별을

 

사람들은 무리에서 내쫓았습니다

 

이로써 우리 행성계는

 

완벽하게 끼리끼리 어울리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공전 주기를 늦추고 싶은

 

사람들은 서둘러 여행을 떠나지만

 

매진 행렬이 더 빠르게 이어지고

 

출발을 위한 서류는 늘어납니다

 

서류가 늘어날수록 안심하는 사람들을 위해

 

늘 거기 여기의 세계에서

 

서류는 잠식하는 불안처럼 불어납니다

 

모든 항의에는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는 답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관료의 심장을 뚫어버릴 별빛은

 

어느 블랙홀에 갇혀버렸을까요

 

다른 시간 속에서 유영하던 우주비행사는

 

돌아오자마자 순식간에 늙어버립니다

 

 

*태양계에서 퇴출된 명왕성이 받은 새 이름

 

 

 

 

 

시 부문 당선자 유진희

 

[2022 매일신춘문예 당선소감] 

 

  중복 투고 여부에 대한 확인 전화를 받은 지 11일이 지나서야 당선 통보 전화를 받았다. 확인 전화 이후 거의 바로 당선 고지 전화가 오는 줄 알았던 나는 이 큰 행운이 스쳐 지나간 줄 알고 꽤 힘든 시간을 보냈다.

 

  확인 전화와 당선 고지 통화 사이 열흘 남짓한 시간, 앞으로 해나가야 할 작업들을 정리했다. 그 중에 가장 큰 성과라면 '계속 쓸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다다른 것이다. 확인 전화를 받고도 떨어진 줄 알았던 나는 그 불운을 이겨내기 위해 언제라도 쓰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완전히 백기투항을 하게 되었다. 다른 방도는 없었다.

 

  최근에 '사무사'(思毋邪)에 대해 생각도 많이 했다. 이 말이 맑고 고운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예술가의 진심'에 관한 것이라고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니 진심이 담긴 시를 앞으로 계속 쓰도록 하겠다.

 

  나의 시에 성장시라는 이름을 붙여주시고 묵묵히 행로를 지켜봐 주셨던 최두석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교수님은 모르셨겠지만 나는 속으로 기대에 부응하고 싶다는 생각에 자주 조바심이 났었다. 시어 하나하나 세세하게 지도해 주셨던 임동확 교수님, 생각을 많이 깨우쳐 주신 서영채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문학은 언어 예술이란 정의에 조금은 어울릴 수 있는 시를 쓸 수 있도록 함께 공부해온 나의 선배님들 권오영, 엄기수, 신성률 시인께도 감사를 드린다. 사당에서 함께 한 시간이 없었다면 시를 어떻게 익혀가야 하는지 몰라 오래 헤매었을 것이다.

 

  당선 소식을 들은 날 시를 부모님께 보여드렸다. 엄마는 시간이 약이라는 말의 허망함으로, 아빠는 정치에 대한 이야기로 시를 읽으셨다. 그렇게 읽히는 것에 수긍이 가면서 이렇게 각자의 생각대로 시가 읽히는 것이 좋았다. 엄마, 아빠, 그리고 조카 규민이에게는 사랑을 전한다.

 

유진희

 

1976년 서울 출생

동국대 국어교육과 졸업. 한신대 문예창작대학원 졸업

 

 

2022 매일신춘문예 심사평

 

응모자 연령, 지역의 다양함에 심사 내내 놀라 다양성이 우리 시가 가진 가능성

 

심사위원: 강성은(시인), 김문주(영남대 교수·문학평론가), 정호승(시인)

 

 

  이번 매일신문 신춘문예에는 총 1785편이 응모되었다. 응모자들의 연령과 지역의 다양함에 심사 내내 놀랐다. 이러한 다양성이야 말로 우리 시가 가진 가능성이라고 생각해 설레는 마음으로 심사에 임했다.

 

  '도미노'  4편의 응모자는 사유의 집중력과 점착력이 돋보였다. 오랜 시간 시를 쓰며 응시한 세계를 완성도있게 쌓아올릴 줄 아는 시인이었다. 그러나 이 시가 갖는 깨달음의 형식이 신선하고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는 의견이 있었다.

 

  '천사를 만나는 날은 오늘'  4편의 응모자는 시가 젊고 감각적이어서 최근의 경향과 발맞추어 기대감을 갖게 하는 시인이었다. 그러나 젊은 시인들의 감각들 사이에서 자신만의 변별점을 찾으려는 노력이 조금 더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견과 분위기를 넘어서는 지점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었다.

 

  '왜소행성 134340'  4편의 응모자는 자기만의 목소리가 돋보이는 시인이었다. 우주와 지구와 이국과 모국의 거리를, 익숙하면서 새로운 감각들을 발견하는 시선이 재미있게 그려졌고 각 시마다 마지막 문장에서 시적 분위기를 다시금 낯설게 만드는 감각도 좋았다. 그러나 문체에 대해 아쉽다, '습니다' 종결어미가 변주 없이 쓰이고 있다는 문제도 제기되었다.

 

  세 분 다 수준 이상의 시를 쓰고 있었기에 당선자를 선정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세 분의 시를 두고 심사위원 셋이 고심을 거듭했다. 문청, 패션, 트렌드 및 시쓰기 감각에 대한 상당한 논의가 있었다.

 

  '왜소행성 134340'의 유진희 씨를 당선자로 선정한 것은 다른 두 분에 비해 이견의 격차가 크지 않았다는 점과 유진희 씨가 응모한 다른 시들 모두 편차 없이 고루 좋았다는 점이 크게 작동했다. 유진희 씨의 시가 보여주는 매력적인 세계가 여기서 출발해 어디로든 멀리로 잘 떠날 수 있기를. 그가 꿈꾸던 여행이기를 기쁜 마음으로 응원한다.

 

202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시드볼트’ / 오산하

 

  눈을 감았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국가를 떠올리면서 습한 냄새를 맡으면서 안개 속으로 뛰어들면서 길거리의 새를 하나둘 세면서 걸어

 

  눈이 마주쳐도 날아가지 않는 새 발로 바닥을 밟아도 도망가지 않는 새 까만 눈동자를 쳐다보다가 넘어졌어 까맣게 피멍이 들었다

 

  하루가 지나서 생일 축하해 문자를 받고 시차가 생겼어 하루 늦게 생일을 맞이하면서 종말을 말하는 사람들과 선물 받은 오르골을 돌리면 모르는 노래가 나온다 노래는 언젠가 끝나겠지

 

  전쟁과 전쟁이 끝나고 난 후 언제가 가장 끔찍할 거 같아

 

  라는 노르웨이에 가고 싶대 거기에 자신을 묻을 거라고 했어 나는 Green Day Holiday를 들으면서 반역자! 반역자! 죽어버린 사람들의 피가 흘렀어 아 곧 종말이구나 그래서 라는 노르웨이에 가고 싶구나

 

  두 개의 음 두 개의 박자 머리 위로 떨어지는 15층의 사람과 다리 밑으로 떨어지는 차 사람의 바싹 마른 피부와 솟구칠 힘도 없는 피 물 물 물 전쟁이 끝나지 않은 곳에 다 녹아버린 얼음의 흔적과 끈적한 더위가 있어

 

  라는 붙잡아도 부서진다 길을 걷다가 쪼그려 앉아서 새를 가만히 쳐다봤어 새가 내 눈알을 파먹으려고 해도 가만히 있었어 계속 굴러가다가 영원히 남도록 그곳은 마치 도서관 같다

 

  추워 라는 시드볼트로 들어가 문을 닫았어 이건 한 세기 전 살아있던 사람의 눈알이구나

 

  계속 걸었어 뚝 뚝 흘리면서 걸었어 끊어진 다리 뒤집어진 배 치지 않는 파도 하늘에서 떨어진 새 검은 새 검은 눈동자 뽑힌 눈알 굴러가는 심장 굴러 떨어지는 법을 배운 나 깔깔 웃는다

 

  오산하

 

 

 당선소감 / 오산하 

 

 

 

 

2022 한국일보 신춘문예

"잠겨 있다고 믿었던 문을 어떻게든 열어보는 일"

 


  어떻게 시작하고 끝맺어야 할지 모르는 날들이 많았습니다. 정말 이렇게 해도 되는 거야? 이렇게 써도 되는 거야? 스스로를 끝없이 의심하게 만드는 곳에서 작은 틈새를 찾아내는 일. 그 사이를 기어코 비집고 들어가려고 애써보는 일. 잠겨 있다고 믿었던 문을 어떻게든 열어보는 일. 작은 시작이 모이고 모여 큰 우리가 된다고 믿습니다.

 

  저의 시를 읽어주는 사람들 사이에서 언제나 언어 하나를 던져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모두들 제가 건네는 처음을 꼭꼭 씹어 주기를, 출렁이고 경계를 지우고 명명하고 다시 경계를 지우며 건넨 이야기의 다음과 그 다음을 만들어주기를 바랍니다.

 

  계속 시를 쓸 수 있게 지탱해준 모든 분들에게 고맙습니다. 모두의 이름을 말해야하나 고민했습니다만 이름 부르기에서 오는 감사함이 전해지기를 소망해봅니다. 언제나 함께 해준 희빈, 서정, 은비에게 함께 시를 써준 태의, 예진에게 함께 웃어주는 정음, 지현, 선영에게 여성의 목소리를 전하기 위해 오랜 기간 전시를 준비한 여:2단 친구들에게 주말을 함께한 세원에게 기쁨을 함께 나누는 현지와 나의 가장 오랜 친구 희연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이 모든 함께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김은희, 오인호에게 가장 큰 기쁨을 나눕니다. 저를 가르쳐주신 모든 선생님들이 있었기에 쓸 수 있었습니다. 이 수상소감을 전할 수 있게 해주신 송재학 선생님, 김소연 선생님, 김상혁 선생님 감사합니다.

 

  오래도록 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나와 당신과 우리의 이야기를. 문장 하나하나를 새기며. 내달리는 멋진 호랑을, 존재하는 여성인 라의 이야기를 들어 봐주세요. 계속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쓰겠습니다.

 

1998년 경기도 성남 출생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예정

 

 

 

심사평

 

"시류에 민감하면서도 그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개성을 보여주는 시"

 

 

 

송재학(왼쪽부터) 시인, 김상혁 시인, 김소연 시인이 2022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을 심사하고 있다.

 

  

  본 심사평은 시의 어디어디가 부족하다는 식의 충고를 담고 있지 않다. 자기 작품에 관한 엄혹한 평가를 원하는 분도 있겠고, 적절한 지적은 실제로 창작과 퇴고에 도움이 된다. 다만 투고자에게 필요한 건 비판보다 응원이라고 믿는다. 계속 시를 써도 좋다, 이런 말을 누가 해주었으면 하고 바랐던 날이 내게도 있었다. 시가 나를 부른 적도 없고, 그래서 나 없이도 시가 행복하게 잘 사는 것 같아 싫고 무서웠다. 이번 심사평을 통해 당신들 없이는 우리 시가 별로 안녕하지 못하리라는 예견과 확신을 전하고 싶다.

 

  '랠리'의 건조한 문체는 대상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한때 마음을 쏟았던 대상이 로부터 문득 동떨어져 존재하게 되었기에, 그렇게 어쩔 수 없거나 어쩌지 못하는 거리감이 건조한 문장 사이사이로 유출된다. '날개 뒤에는 근육이 있습니다'  4편은 한마디로 거침없다. 하지만 거침없는 중에도 시의 언어는 산만하지 않다. 넘칠 듯 넘치지 않게 제어되는 정념이 놀라웠다. '베네수엘라'는 강렬한 도입부와 여운 깊은 결구로 독자를 매혹한다. 이 작가는 자기 세계를 어느 정도 구축한 듯하다. 작품이 조금만 더 쌓이면 그가 좋은 시를 쓴다는 사실에 누가 토를 달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치카의 숲'은 앞으로도 손해를 볼지 모른다. 신인상 심사는 단정한 정념보다는 떠들썩한 감수성에 후한 점수를 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등단이라는 문턱을 넘고 나면 이처럼 넉넉한 분량에 담긴 유려한 문장이 외면당하는 일은 없다. 지치지 않았으면 한다. '스로디카즈'  4편은 수많은 소년소녀가 등장하고, 위악적인 정황과 대화가 난무하며, 엄청나게 수다스럽다. 당연하게도 몇몇 기성 시인이 떠올랐으나 그럼에도 투고자의 연작은 여전히 새로웠다. 이 새롭고 좋은 작품을 다른 지면에서 곧 만나리라 본다.

 

  '시드볼트'  4편은 비참한 죽음과 살아남음에 관한 이야기를 일관되게 풀어낸다. 아포칼립스를 예감하고 노르웨이 시드볼트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린 와 종말에 남겨진(혹은 종말을 목도 중인) ‘, 어느 쪽이 살아남았는지와 상관없이 비슷하게 비참할 뿐이다. 삶과 죽음을 공평하게 끔찍한 것으로 만드는 저 압도적 절망감은 때로 산불, 때로는 깨진 도자기 폭풍우로 형상화된다. 시인은 간신히 우연으로 살아가는 사람들”('폭풍우')로서 분명히 어떤 현실의 환유일 비극적 사태를 생생히 기록한다. 비슷비슷한 분위기를 지닌 투고작이 많았음에도 오산하 씨의 활달한 리듬은 단연 돋보였다. 시류에 민감하면서도 그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개성을 보여주기가 쉽지 않음을 알기에 더 믿음이 갔다. 심사위원단을 대신해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김상혁 시인

 
2022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일 잘하는 요즘 애들/ 전예지  시창고   
2022. 1. 4. 16:44


https://blog.naver.com/gulsame/222612773777
 
 

[2022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일러스트/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

 

일 잘하는 요즘 애들

 

전예지

 

 

프린터기가 또 말썽이다

 

이 애물단지를 버리든가 고치든가 이게 대기업의 수준인가요?

 

하루에 기본 다섯 번을 1층에서 2층으로

걸어야 하는 에스컬레이터 아니면 계단으로

왼쪽 끝 후문 쪽에서 오른쪽 끝 정문 쪽으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프린터기를 하나 놔주면 이런 고생은 안 해도 될 텐데

 

겨우 몇 십 만원이 아까워서 사람을 갈아 버린다

두 여자는 욕이란 욕을 다 입에 담지만

차마 입을 벌리진 못한다 멋쩍게 서로 한숨만 쉴 뿐

 

낡고 늙은 마트에 새로 생긴 텅 빈 매장의 취급은 이 정도

 

[자리 비움]

 

자기는 왜 자꾸 마음대로 자리를 비워?

일하기 싫어?

 

하필 매니저가 없는 날

혼자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에게 본부장이 찾아온다

억울한 아르바이트생은 그나마 매니저보다 깡다구가 있다

 

프린터기가 2층에 있어서 왔다 갔다 하려면 어쩔 수,

 

말대꾸도 하고 참 요즘 애들 무섭다

 

눈이 순간 흰자로 뒤덮여진 아르바이트생을 보고

 

머리 빠진 본부장은 혀를 찬다

 

죄송합니다

 

속으로 본부장이 매장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입으론 여전히

 

 

 

[2022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소감

 


 

 

  "어둡고 좁은 공간에서 창백한 하루를 밤새 쓴다"저는 외출이 잦지 않습니다. 저만의 공간은 어둡고 좁습니다. 그 좁은 폐허 속에 저만의 규칙과 행복이 편안합니다. 고독은 바람으로 불어오고, 저는 점점 더 속으로 파고듭니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어간다는 게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저의 공간은 햇빛이 부족합니다. 햇빛이 싫어 숨은 대가는 사색(思索)과 현기(玄機)입니다. 겨울은 어느새 찾아오고, 저는 대신 비타민을 챙겨 먹습니다. 일어나자마자 먹는 비타민은 가장 흡수율이 좋습니다. 그렇게 채운 시리고 창백한 하루를 밤새 쓰고 시를 적습니다.

 

  이런 저의 시가 마음에 드셨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저에겐 빈 곳이 많고 그 부분들이 드러나는 게 부끄럽습니다. 저는 곧잘 틈을 흠으로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금방이라도 당선이 전부 꿈이라는 소식이 전해질까 봐 그 생각에만 사로잡혀 상처받지 않으려 상처받았습니다. 그러나 저의 불안은 헛된 꿈인 듯 하루하루가 선명하게 행복합니다. 이제 저는 부족함을 알고, 더 열심히 살며 나의 틈을 채우면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에게 틈이 존재해도 흠이 아니라고 깨닫게 해주신 경인일보와 심사위원분들에게 감사합니다.

 

  이번 겨울은 한동안 깨어나지 못할 것처럼 우울했습니다.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내 곁에 남아 있던 건 가족과 친구들이었습니다. 항상 곁에 있으면서도 가장 숨고 숨기는 딸을 믿고 응원해준 가족들 사랑합니다. 그리고 항상 자극제가 되는 글 잘 쓰는 나의 한신대 문창과 17학번 친구들. 글썽글썽 고마워! 마지막으로 2021년의 겨울에게. 나는 정말 노력하고 있어요. 믿어주세요. 사랑해요.

 

  틈을 주고 채워지는 것에 불편해하지 않는

 

  흠이 아닌 틈을 자랑하는

 

  그런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런 사랑을 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2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심사평

김윤배 시인·김명인 시인 "화려한 수사 없었지만 일상의 소중함 일깨우는 어법

 

 

  2022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의 관심은 뜨거운 편이었다. 비록 응모편수는 지난해보다 약간 줄었지만 응모작품의 수준은 상당히 높았다는 게 중론이다.

 

  우선 응모자들의 연령대가 20대부터 60대에 이르기까지 고루 분포되었지만 50~60대의 응모자가 많았다는 것도 특기할 만한 현상일 수 있다. 그만큼 사물을 응시하는 시각이 깊고 인식의 수준이 높았다고 보여진다.


  시가 죽었다고 말하는 시인들이 있기는 하지만 시는 여전히 살아 있는 문학의 영역인 것을 응모 편수를 통해 알 수 있다.

 

  응모작품의 가장 두드러진 경향으로는 거대담론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생명 문제라든가 환경 문제라든가 통일 문제라든가 코로나 팬데믹 문제라든가 하는 거대담론을 다룬 시편들이 눈에 띄지 않았다. 반면 개인의 일상생활에서 모티프를 얻거나 사소한 경험에서 소재를 찾는 경향이 도드라지고 있었다.

 

  실험적인 응모작을 만날 수 없었다는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 이는 안정된 작품으로 위험부담 없이 순항하고 싶다는 의지의 발현일 것이다.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예시영의 '카이트 서퍼', 김현주의 '그림자를 수집하는 방법', 전예지의 '일 잘하는 요즘 애들'이었다. 심사위원 두 사람은 쉽게 합의에 이르지 못해 장시간 토론과 논의를 거쳤다.

 

  '카이트 서퍼'는 활달한 상상력과 긴 호흡이 미덕이면서 '그리고 바람이 불면/이 연서(戀書)가 당신에게 도달할지 모른다'와 같은 당돌한 문장이 시선을 끌었지만 응모작 모두 숨 가쁘게 긴 호흡이 문제였다. 압축미를 보여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컸다.

 

  김현주의 '그림자를 수집하는 방법'은 어법이 새롭지 않다는 데 심사위원의 의견이 일치했다. 산문시의 군데군데 상투성의 혐의가 보이는 것도 문제일 수 있었다. 그러나 '푸른 별빛이 숨죽인 그들의 입속에서 검게 변해 자라졌다'와 같은 문장은 돋보였다.

 

  전예지의 '일 잘하는 요즘 애들'은 사무실의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이다. 프린터기가 말썽이어서 1층에서 2층으로 오르내려야하는 고충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화려한 수사를 구사하지도 않았으며 다양한 은유를 보여주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역병의 시대에 이와 같은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깨닫게 하는 신선한 어법이 이 작품의 힘이다.

 

  일상의 수없이 많은 흐름 속에서 한 장면을 포착해서 성화해낸 전예지의 시적 감각이 예사롭지 않다는 데 두 심사위원은 공감하고 당선작으로 합의했다.

 

  당선을 축하하고 훌륭한 시인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한다.

 

 2022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일러스트=정윤성


빈집

 

박수봉

 

빗속에 집이 잠겨있다

태풍이 온 나라를 휩쓸었지만 빈집은

날개를 접고 흔들리지 않았다

식구들은 모두 전주로 떠나버리고

덩그러니 혼자 남은 빈집

퇴행성관절염에 어깨 한쪽이 내려앉은 채

기울어 가는 생을 붙들고 있다

빈집의 담장을 지나다보면 허옇게 바랜 집이

손을 저으며 말을 걸어온다

평생 걸어온 길의 기울기와 그 길로 져 날랐던

가난과 고단함에 대해서 빈집은

미처 다 하지 못한 말들을 빈 방에다 새긴다

행간마다 피어나는 유폐의 점자들

마당 우물터로 목마른 잡초들이 조촘조촘 들어서고

버리고 간 장독대엔 혼잣말이 웅얼웅얼 발효 중이다

죽은 참가죽나무에 앉아 종일 귓바퀴를 쪼아대던

새소리도 날아가고 귀가를 서두르는 골목

일몰의 욕조에 몸을 담근 빈집이

미지근한 어둠으로 눈을 닦는다

종일 입술을 다문 대문을 빈집은

몇 번이고 눈에 힘을 주어 밀어 보지만

끝내 대문 여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마당 깊은 곳까지 어둠이 차오르면 빈집은

눈을 들어 별자리를 더듬는다

식구들이 몰려 간 서남쪽 하늘

별이 기울 때까지 눈을 떼지 못한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들쥐가

들어앉아 새끼를 낳았다

이따금 달빛이 새끼들의 털을 핥아주고 갔다

들쥐는 빈집의 뒷다리를 갉아 먹으며 자라고

집은 제자리에서 우물처럼 늙어간다

빈집의 늑막 아래로 어둠이 점점 차오른다

 

 

[2022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 당선 소감 - ] 박수봉

 

 

 

시의 길은 말없이 인내하며 살아가는 삶의 뒷모습 따라가는 것

 

  보라색 공원관리 조끼를 입은 사내들이 나무 줄기를 자르고 있었습니다. 나무는 지난 계절을 잃고 바람을 흘리며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그런 나무 곁에서 문득 내가 줄기 잘린 나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퍼렇게 뻗어 가는 시의 줄기를 잃고 자꾸 움츠러드는 제 모습이 나무를 닮았다며 허전함의 지평을 늘이고 있을 때 당선 통보를 받았습니다.

 

  전화를 끊고, 다시 수변 공원 나무들을 보러 나섰습니다. 매서운 한파에 뭉툭하게 가지가 잘린 나무들이 즐비하게 어두워지고 있었습니다. 나무의 잘린 부분을 어루만지면서 저는 제 시가 가야할 길을 더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잘리고, 꺾이고, 찢겨가면서도 말없이 인내하며 살아가는 삶의 뒷모습을 따라가는 것이 시의 길임을 어렴풋이 느끼면서 천천히 공원을 걸었습니다.

 

  저의 움츠러든 손목에 힘을 실어주신 심사위원들께 머리 숙여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름이 더욱 무거워졌음을 염두에 두고 열심히 쓰겠습니다. 그리고 작년에 최종심에서 낙선하고 우울해 할 때 낙선주라며 담근 술을 따라주며 격려를 아끼지 않던 오산의 문우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를 사랑하는, 제가 사랑하는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박수봉 작가는 전북 장수 출생으로, 경기대학교를 졸업했다. 지난 2018년 최충 문학상에서 최우수상을, 2021년 중봉 조헌 문학상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2022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 심사평 - ] “주관적 정서의 객관화, 소통 잊지 않은 작품"

 

  

  전주에 펑펑 함박눈이 쏟아지겠다고 예보된 날 신문사로부터 본심에 올라온 14편의 시를 전달받았다. 이름을 지운 응모자의 시편들은 자아와 세계의 화해 불가능을 확신하는 비규범성이나 이질적인 것들의 혼돈 등을 과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혼종적 욕망이 들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지금의 시단 풍토와 다르게 뜻하는 바가 분명했고 시어들 개개의 인상과 소리 맵시가 어울려 새 형상을 짓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응모작 중에서 <괄호 밖의 사람들>, <빈집>, <편의점 라이프>, <오래 머무르는 풍경>, <바람의 건축> 등의 작품을 오래 들여다봤다. <괄호 밖의 사람들> 괄호 안의 사람들을 궁금하게 함과 동시에 모래가 환기하는 삶의 황폐성을 떠올리도록 하고, <오래 머무르는 풍경>에 적힌 경작금지라는 팻말 누군가는 스며들고 또 누군가는 닮아간다라는 구절은 시 읽는 즐거움을 주었다. <편의점 라이프> <바람의 건축>도 심사위원들의 시선을 끌었다.

 

  숙고 끝에 <빈집>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태풍을 피해서 모두가 떠난 빈집, 삶의 내력과 유폐된 시간을 감당하는 의인화는 고단한 시간을 견딘 타인의 이야기, 동시대 모두의 사연으로 읽혔다. ‘평생 걸어온 길의 기울기에 어울린 빈집의 서사는 시 공부를 열심히 한 흔적도 보였다. 시는 주관적 정서의 객관화이며, 소통이라는 점을 잊지 않고 시적 형상화에 공력을 들인 <빈집>의 시인, 당선을 축하한다. /심사위원 민윤기(서울시인협회 회장), 이병초(전북작가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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