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여성 시인 사라 티즈데일은 서정적인 연애시를 많이 남겼다. 사랑에게 무엇을 준다는 문구의 반복, ‘눈물’ ‘노래’ ‘침묵’ 같은 단어들은 그녀의 다른 시 ‘아말휘의 밤 노래’를 연상시킨다.
“나는 그에게 울음을 주고 / 노래도 줄 수 있으련만-/ 어떻게 내 온 생애가 담긴 침묵을 주리오?”로 끝나는 ‘아말휘의 밤 노래’를 줄줄 외다시피 좋아했었다. 첫사랑이 (이 시에서처럼) 웃음과 노래로 시작하는 인생은 축복받은 거 아닌가. 시에서는 마지막 세 번째 사랑에 방점이 찍혀있다. 웃음과 눈물 뒤에 오는 침묵. 내가 그에게 오래된 침묵을 주었더니 그는 내게 영혼을 주었다! 그를 만나기 전에도 나는 (육체는) 살아 있었지만, 내 영혼을 내게 돌려준 이는 그이야. 그러니 소중하지 않겠는가. 이처럼 달콤한 사랑의 찬가를 쓴 그녀가 남편과 헤어진 뒤, 50세에 수면제를 먹고 죽었다니. 어떤 사랑은 선물이 아니라 저주이다.
침대에게 몸으로 물을 주는 건,그에게서 달콤한 봄 냄새가 나기 때문이지 내 주변엔 봄이 너무 많아 침대도 나에겐 봄이야,그건 아마도 침대를 향한 나의 일방적인 편애일지도 모르겠어 침대는 해마다 겨울이 알려주는 장례관습 따위엔 관심 없어 꿈과 현실 사이에서 철없이 스프링을 쿨렁거려도 푸른 봄은 여전히 아지랑이처럼 오고 있을테니까 침대 위에서 휴대폰 속 이미지나 사건들을 클릭하고 닫는 동작은 무의미해 그때마다 끝이 보이지 않던 내일이 침대 커버처럼 단순해질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해 침대의 생각은 참으로 명료해 홀쭉하게 들어간 배를 쓰다듬으며,지난밤 겹의 무게 뒤에 펼쳐진 피로를 걷어내고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날 힘을 얻지,그건 내일이 던져줄 공복을 향한 강한 의지인 거야 공복은 채움의 예비의식이기도 해 그러므로 내 침대는 늘 비어서 오늘 아침이 봄,때때로 난 널 사랑해 내 생각대로 꽃피게 하고 싶어 레시피는 간단해 갖가지 감정의 재료들을 봄흙으로 만든 황토침대에 쏟아부으면 끝,그럼 우린 하루 한 끼 제대로 된 꽃밭의 식사를 할 수 있어 사계절은 한결같아 언제나 내 침대는 오늘 아침이 봄,불쑥 깨진 거울을 들이미는 봄의 손을 보고 있으면 거울 속의 내가 보여 나인 듯 내가 아닌 듯,너무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는 거울의 트릭이 보여 그래도 방언 같은 아지랑이의 말을 기억하는 내 침대는 여전히 오늘 아침이 봄
[2022신춘문예]시-박재숙 씨 당선 소감 혹독한 겨울 흔들어 봄을 일깨워준 시
나의 오늘은 어제와 닮아있다.그날이 그날인 것 같은 오후,나는 핸들을 잡고 서울 외곽순환도로를 달리고 있었다.차창 밖에는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와이퍼를 작동시켜도 앞이 흐려 답답하다고 생각하던 그 순간 휴대폰 벨이 울렸다.국제신문 최승희 기자라고 했다.갑작스런 당선 소식에 잠시 귀를 의심했다.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왈칵 눈물이 흘렀다.자동차가 어디로 움직이는지 알 수 없었다.갓길에 잠시 나를 정차시키고 심호흡을 해야 했다.가만히 있는 나를 자동차가 어디론가 끌고 가는 것처럼 그 순간 나는 자동차 대신 구름 모양의 시를 타고 있었다.그동안 오래 문학과 시에 목이 말라 있었다.그래서 늦게 시작한 공부였고, 2021년8월에‘허수경 논문’이 통과되면서 중앙대 일반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과정을 졸업했다.늦은 공부에도 응원해주고 끝까지 등을 밀어준 가족에게 감사한다. 시의 압축미를 강조하셨던 이승하 지도교수님과 시가 잘 안 풀릴 때는 미술관을 가라고 말씀하셨던 이수명 교수님,대학원 분과 수업시간에‘시를 쓴다는 행위는 하나의 세계를 제시하는 것이다’고 묘사의 중요성을 말씀하셨던 조동범 선생님,좌절을 느끼며 시를 포기하고 싶어질 때마다 계속 쓸 수 있는 용기를 주셨던 박남희 선생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시를 쓰면서 나만의 독창성으로 남이 할 수 없는 걸 내가 할 수 있다는 기쁨이 생겼다.이제야 시의 끝자락에 빗방울 같은 나를 들여놓는다.앞으로 보다 깊이 있는 시 세계를 보여줄 수 있도록 노력하는 시인이 되겠다. 끝으로 혹독한 겨울을 통과하고 있던 제 시를 신춘의 봄 뜨락으로 성큼 불러내주신 강은교 권정일 문태준,세분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약력=1967년 전북 부안 출생.중앙대 일반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졸업. 2018년‘열린시학’신인상 수상. [2022신춘문예]시 심사평
유쾌한 상상으로 생명의 의지 캐낸 수작 국제신문 신춘문예 공모에 보내온 작품들을 읽었다.어느 해보다 전반적으로 서정적 색채가 두드러져보였으며, ‘어머니’의 존재를 포함한 가족의 이야기를 노래한 작품들이 많아 눈에 띄었다.코로나 장기화로 인해 가족이라는 두터운 관계와 그 관계에서 오가는 정감에 시심(詩心)이 쏠린 것이 아닐까 싶었다.마지막까지 심사위원들이 토론을 이어간 작품들은‘서부도서관 열람실에서의 중얼거림’외4편, ‘흔들렸다’외2편, ‘내 침대는 오늘 아침이 봄’외2편이었다. 시‘서부도서관 열람실에서의 중얼거림’은 너무나 질서 있게 꽂힌 도서관 서고와 검색대가 있는 열람실의 풍경을 보여주면서 그 공간에서의 작은 균열과 소란과 술렁거림과 이탈 욕망을 긴장감 있게 그려낸 작품이었다.시상 자체가 빛처럼 번득였으나 시어들의 선택과 활용이 다소 평이해 아쉬웠다. 시‘흔들렸다’는 하나의 존재에 투영되어 있는 다른 존재,즉 존재들 사이의 유기적 연결에 주목한 작품이었다.시의 마지막 대목에서 돌연한 충격을 주어 신선했지만,함께 보내온 작품들이 이 작품과는 편차가 있어 당선작으로 내는 데에 주저하게 했다. 심사위원들은 시‘내 침대는 오늘 아침이 봄’을 당선작으로 선정하는 데에 모두 동의했다.이 시는 회복되는 어떤 생명력의 강인한 힘을 사물인 침대에서 발견해내는 수작(秀作)이었다.봄의 절기가 갖고 있는 환함과 꽃핌과 탄력을 침대의 공간과 끊어지지 않게 미묘하게 연결시키는 솜씨가 돋보였다.함께 보내온 작품들에서도 개성적인 신예의 출현을 충분히 기대할 수 있게 했다.시단에서 특별한 시의 목소리를 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당선을 축하드린다.
“정말 원하는 빛깔의 시 나올 때까지 정진” 삶 속 어둠이 시 자양분 돼 스승과 가족·문우들에 감사
광부이자 농부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의 고단한 삶을 다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새벽녘 낡은 자전거를 타고 막장으로 가던 바퀴 소리를 어렴풋이 기억합니다. 주말에는 사과밭에 농약을 치던 그의 젖은 등이 선연합니다. 노동의 무게로 아버지의 등은 늘 굽어 있었지만 그런 아버지에게 배운 건 게으름 피우지 않는 성실이었습니다. 그저 말없이 묵묵히 일하시는 모습이 평범한 나에게 시를 붙잡고 있게 했습니다.
살면서 어둠이 나를 늘 따라다닌다 생각하여 피하려고만 했던 지난날이 떠오릅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어둠 속에 있을 때 가장 밝았던 것입니다. 희망이라는 등불이 있었으니까요. 어둠을 끄면 밝음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당선되고서 알게 되었습니다. 시와 나의 관계는 이런 게 아니었나 싶습니다. 어둠이 시를 짓는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천연염색은 여러 번의 색 입힘이 필요합니다. 고운 색을 얻으려면 먼저 불순물을 걸러내야 원하는 색이 나옵니다. 저는 겨우 초벌염색을 통과하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공을 들여야 정말 원하는 빛깔의 시가 나올지 모르겠으나 앞으로 더 정진하며 늘 남은 염색을 생각하겠습니다.
스승은 어둠에 있는 나에게 빛을 주는 존재라 여깁니다. 빛을 좇아가려고만 했던 저에게 빛이 찾아오게끔 길을 만들어준 존재였습니다. 평소에 많은 시를 읽어주시던 울산 중구문화의전당 조숙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응원해준 가족과 문우님께 고마운 마음을 드립니다. 서툰 저에게 고마운 빚을 남겨준 농민신문사와 심사위원님의 숙제를 풀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강영선
▲1969년 경북 문경 출생 ▲문경고등학교 졸업 ▲울산 중구문화의전당 시 창작교실
[심사평]담백한 시어지만 행간에 깊은 사유 담아
<농민신문>신춘문예는 다른 일간지와는 변별되는 특성이 있는 듯하다.전통적 서정이나 생활의 실감이 전반적으로 강한 편이고,실험적인 경향의 작품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그리고 도시 풍경보다는 농촌 현실에 대한 묘사나 자연과의 교감이 두드러진 편이다.그야말로 대지에 뿌리내린 시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330명이 응모한1943편의 투고작 가운데 다음 네명의 시를 두고 마지막까지 논의를 이어갔다.결이 곱고 섬세한 언어로 자연의 상징성을 잘 살린<꽃누르미-그들의 압화>외4편,활달한 상상력과 구수한 입담으로 농본적 세계를 재미있게 표현한<주걱을 읽어주시겠습니까>외6편,슬픔과 상실의 풍경조차 감정의 절제와 발랄한 언어감각으로 새롭게 조형해낸<어떤 필기체>외4편,담백하고 간결한 시어와 리듬으로 생활의 단상을 묵직하게 펼쳐낸<그러면 그러라고 할지>외4편 등은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웠다.
당선작으로 뽑은<그러면 그러라고 할지>는 제목에서부터 묻어나는 어떤 무심함이 오히려 감정과 의미 과잉의 시대에서 신선하고 돋보이는 면이 있었다.투고한 작품 전체가 얼핏 무심하고 담담해 보이지만 행간에 많은 이야기와 깊은 사유를 거느리고 있다.아무도 살지 않는 시골집이 많은 이의 터전이 돼주고 서로 연결해주는 따뜻한 풍경이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이 시는 생활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시선과 타자를 따뜻하게 감싸 안는 태도에서 나온 것이다.바로 그 점이 이 시인의 미덕이고 가능성이라는 생각이 든다.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슬픔이 무엇인지 모르거든요. 사람들은 내가 슬픔에서 나오길 바란다고 해요. 난 당신을 생각해요. 당신 입안에선 머리카락이 자라고 있었어요. 머리카락은 슬픔 대신 Coffee Tea Drink Flower Gift Shop를 먹어요. 바구니에 담아요. 안에는 발가락들이 꼼지락거리고 있어요. 누가 넣었냐고요. 슬픔을 좋아하는 당신이잖아요. 잊었군요. 여기 동명리가 존재하는 이유예요. 망각하지 말라고요. 당신이 문을 열어 두신 것처럼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다시 읽으며 새벽 문을 연다"
당선 소식을 전해주신 뉴스N제주와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더 정진하겠습니다.
지도해주신 선생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동행하는 문우들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뒤에서 묵묵히 응원해주는 동생, 고맙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이 기쁨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한 어린이가 자라는 데 온 마을이 길러주셨습니다.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다시 읽으며 새벽 문을 엽니다.
이정은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 석사.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 전문가과정 수료.
교육문예창작회 회원.
시 부문 심사평
"전인적 인식과 반응을 포괄한 창조적 작품“
본심 윤석산 시인
한 20년 전만 해도 신춘문예에 응모하는 분들은 대개 20대 안팎이었다. 그런데 상당수가 50대 이상인 것을 발견한 우리 심사 위원 일동은 구시대의 가치관에 의한 작품들뿐이면 어찌하나 걱정했다.
그런데 예심을 거쳐 넘어온 작품들 대부분이 의외로 해체적이었다. 그로 인해 우리는 테마 면에서는 ‘일원(一元)과 다원(多元)’, 구성 면에서는 ‘인과와 해체’, 표현 면에서는 ‘전인적(全人的) 인식과 반응’에 고루 초점을 맞추되 유기적(有機的)’인 작품을 뽑기로 합의했다.
어느 한 쪽에만 맞춘 작품들은 잘 읽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제 이들을 융합해 새로운 가치관과 시학을 마련할 시대가 되었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런 기준으로 살펴본 결과 황현자씨의 「현관」이 눈에 들어왔다. 생선 장수인 엄마에 대한 추억을 제재로 삼은 작품으로, 이런 제재를 택할 경우 흔히 그리움이나 효를 내세우기 마련인데, 끊겼다 다시 이어지는 무의식의 흐름을 따라 상반된 욕망을 드러내 상당히 입체적인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 주목을 끈 것은 김용천씨의 작품이다. 「탁란 청춘」은 취업을 위해 여기 저기 자기 소개서를 써 내고 기다리다가 우리 사회가 뱁새 둥우리에 알을 낳아 대신 부화시키고, 둥지까지 뺏는다는 뻐꾸기 사회라는 걸 깨닫고 절망스러워 거리로 뛰쳐나가는 젊은이를 화자로 내세운 작품이고, 「꿀벌 나라」는 어느 일벌이 꿀 따는 사람 하나가 등장했다며 다 뺏기기 전에 나눠 갖자고 제안 하자 계층 별로 분열을 일으켜 애벌레들이 다른 벌레들의 먹이 감이 되었는 데도 못 보는 모습을 고발하는 작품이다.
"전인적 인식과 반응을 포괄한 창조적 작품“
나정욱씨의 「다족류의 인간들에게」와 「랭보의 행보」는 화자 자신도 해체적임을 고백하는 작품이다. 앞의 작품에서는 다리가 열한 개인 사람과 열두 개인 사람들이 싸우는 걸 못마땅해 하지만, 자신도 아침에는 열두 개였다가 저녁에는 열한 개라며 그 까닭을 알려 줄 사람이 없느냐고 절망한다. 그리고 뒤의 작품에서는 ‘시는 인생을 닮았고’, 그래서 앞뒤가 없다면서 ‘행보’라는 단어를 읽다가 ‘랭보’가 생각났다는, 말장난(pun)으로 비판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정은씨의 「다섯 개의 물의 장면」을 당선작으로 뽑기로 했다. 결혼식 부케나 장례식 때 관을 장식하는 ‘카라꽃 조화’를 11년씩이나 기르면서 … 생화가 아니라 조화다 … ‘빈 화병’에 물을 주고, 그 물이 흘러내려 지하 보일러실 아저씨의 잠을 깨우고, 자궁의 ‘양수’로 이어 가는 줄거리 역시 해체적이지만 새 생명의 탄생 쪽으로 지향하고, 상상과 환상과 무의식적 본능과 의지와 비판을 한 작품에 담기 위해 연작시 형식을 취하는 점은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경지를 여는데 기여할 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걸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부탁드린다. 현대 사회에서 ‘일원’은 낡은 느낌이 들고, ‘해체’는 혼란스러워 절망을 가중시킬 뿐이다. 삶도 작품도 ‘통합ㆍ조절’ 쪽으로 지향하는 게 자기를 완성하는 길이니 참고하시기 빈다.
나는 휠체어를 밀어주면서 한 바퀴 즐거운 나의 집,두 바퀴 세 바퀴 현(絃)을 타 봅니다 눈감고 오물오물 따라하는 어르신 핑 돌아 떨어지는 눈물 한낮의 요양원 창밖으로 찔끔 찍어 냅니다 사람들은 먼 나무위에 앉아 졸고 가을 강은 나를 자꾸 떠밀고 갑니다 알 없는 안경너머로 두 다리 유니폼의 건장한 날이 있습니다 서슬 퍼런 기백이 있습니다 백지로 두고 떠나자고 말한 적 있답니다 구절초 강아지풀 억새 어우러진 둔덕 제 모습에 반해 석양을 품은
비록 비위관(脾胃管)에 연명하지만 포르르 동박새 동백나무에 오르고 옛 기억 하나둘 돌아옵니다 참 맑은 하늘이 도리질 치다가 풀썩 잠이 들라 합니다 퐁당 물구나무를 서거나 물비늘을 따라 멀리멀리 헤엄쳐가기도 하는
가을 강은 심하게 몸살을 앓는 중입니다
소실점 잘방잘방 아스라이 붉은
[당선소감]
"그늘진 곳 들여다보며 따뜻한 시 쓰겠다"
멀리서 오신 이름,보름달보다 크고 둥근 뽀얀 박으로 덩그렇게 오신,아무리 많은 보석이 쏟아진대도 저는 슬근슬근 톱질을 아낄 거예요.
아버지가 말씀하셨죠,초록초록 옛날 옛날에 말들이 뛰놀던 곳이라서 마리뜰이라고,나는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떠나 살고 마리뜰을 그리워합니다.
까만 말고 하얀 나비고무신을 조르던 여름.아버지 지게 위에 다소곳 따라오던 까만 머루와 어머니의 정갈하게 널린 하얀 빨랫줄,오동나무에 걸린 하얀 눈 냄새,참새 떼 날아오르던 닭장…아버지는 눈 가래로 나는 싸리비로 눈을 치웠죠,쓸다보면 어느새 다시 와서 살포시 앉던 녀석들 늦깎이 공부를 합니다.한 번도 펴보지 못한 교과서의 잉크냄새가 미안해 휴학을 결심한 적 있지요.감히 말하라면 저의 시는 오롯이 고향으로부터 옵니다.
홍유릉 둘레 길을 걷다가 당선 소식을 받았습니다.방방 뛰다가,뛰다가 날다가,이렇게 덜컥,오시다니요.조용히 설레다가 처절하게 허기지다가 그러기를10여 년,많이 기쁩니다.내일이 동지입니다.일부러 느긋하게 하얀 밤을 샙니다.동글동글 새알심을 만들며 빕니다.제 곁에 있는 모든 이들이 건강하고 무탈하기를 소원합니다.나의 버팀목 경진 현진 성후 고맙고 사랑해,동생들아,조카들아,이제라도 고봉밥을 차려보자.도향스님!존경합니다.불 켜놓고 자면 해롭다고 새벽마다 불꺼주고 가는 그 정성,알지요.
사유의 힘,치열하게 들여다보라,운율 속으로 우렁우렁 명 강의 이지엽 교수님 고맙습니다.김동찬 교수님,시와 길 선생님들,회장님 덕분입니다.인사를 빠뜨려서 늘 죄송한 분이 계십니다.꼭 뵈러 갈게요.이런 큰 기쁨의 자리 마련해주신 광남일보와 관계되시는 선생님들께 깊이 감사드리며 부족한 제 시(詩)를 선해주신 심사위원님께 큰절 올립니다.
이 순간도 양로원에서,요양원에서 고독으로 뒤척이고 계실 어르신들의 안녕을 빌어봅니다.얼굴도 모르는 시아버님,늘 다독여주시던 시어머님,그리고 저희7남매 곁을 일찍 떠나가신 친정 부모님께 이 영광된 상(賞)을 바칩니다.춥고 어둡고 그늘진 곳을 들여다보며 따뜻한 시를 오래도록 열심히 쓰겠습니다.
차곡차곡,다시 시작입니다.
이정임
△전북 임실 출생 △한국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3학년 휴학 중 △현재 남양주시 장애인복지관 근무(사회복지사)
[심사평]
"균일한 울림…따스하고 섬세한 서정 기대"
밤을 새워 영혼의 즙을 짠 문청들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언제나 가슴 설레는 일입니다. ‘시를 쓰면 굶어 죽는다’는 말을 듣지 않고 시를 쓴 이는 없습니다.그럼에도 세상엔 끊임없이 시를 쓰는 이들이 태어나고 그들의 시에서 영혼의 위로를 받는 이들도 있습니다.삶과 시.지극히 이질적인 두 존재의 병치야말로 현생 인류를 설명하는 가장 따스하고 지적인 방식 아닐는지요.
‘점자책’외4편, ‘트라이앵글’외4편, ‘내 안의 붙박이장’외4편, ‘귓바퀴 꽃 하얀 가을 강’외4편의 작품을 읽는 동안 마음 안이 따뜻해졌습니다.현실과 유리되지 않았고 난해시의 범람에서도 거리를 두고 있었지요. ‘시가 어느 정도 현실을 반영해야하지?’하는 의문에 대한 답이라도 하듯 삶을 붙들고 있는 섬세한 현의 긴장이 느껴졌지요.
‘점자책’의 주인은‘손으로 세상을 읽을 수 있는 이들의 꿈을 새들이 부리 끝으로 톡톡톡 문 열어 달라’ ‘혹등고래가 허공을 유영하듯 지느러미를 펄럭인다’고 묘사했습니다.세계를 인식하는 차이를 결핍감이 아닌 자신만의 이해로 받아들였지요. ‘트라이앵글’은 작은 타악기를 통해 인간의 의미에 다가가는 인식의 바다가 있었지요‘인간은 사랑을 이해하는 데 일생을 바친다’와 같은 범상한 인식이 트라이앵글의 진동을 통해 다가오는 순간 시의 본질이 은유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내 안의 붙박이장’은 함께 응모한‘별주부전이 생각날 때 쯤’과 함께 우리 시의 고질적인 난해성을 극복한 좋은 예라는 생각이 들었지요.낡은 가구와 고전을 통해 삶과 죽음,사랑과 이별 같은 인간의 본성을 쉬운 언어로 표현한 미덕이 있었습니다. ‘귓바퀴 꽃 하얀 가을 강’을 읽어가는 동안 제목이 주는 일시적인 번거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심성이 맑고 착한 시였지요.휠체어를 밀며 휠체어 안의 어르신에게 조용조용 가을 강을 얘기해 주는 모습이 따스했습니다.쉬운 언어가 갖는 촉촉한 질감이 강 건너 무지개처럼 펼쳐지는 신비한 느낌이 있었지요, ‘내 안의 붙박이장’과‘귓바퀴 꽃 하얀 가을 강’모두 당선작이 될 시의 품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귓바퀴 꽃 하얀 가을 강’을 당선작으로 정한 이유는 함께 응모한‘숙부’, ‘내가 꽃을 들여다보는 동안’, ‘그 봄 언저리 호박벌이 맨땅에서 구를 때’와 같은 시편들이 지닌 균일한 울림 때문이었습니다.
따스하고 섬세한 서정의 물결이 세계를 향한 큰 울림이 될 수 있음을 당당히보여주는,멋진 시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철든 애가 그리는 그림 속에선 닭 날개가 셔터를 내리고 오토바이를 탄 새가 매운 바다에서 속옷과 영양제를 건져 올렸다 첫사랑의 정기구독은 해지했다
꽃병에 심야버스를 꽂았다 팔다리가 습관적으로 생겨나는 월요일,아플 때마다 키가 자라는 일은 선물이었다
불꽃이 튀어도 겁나지 않은 나이는 이벤트였지
단풍 들지 않는 우리를 단양이 부른다 스페인은 멀고
안전벨트를 매고 접힌 색종이처럼 사진을 찍는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누군가 멀리 떠난다
당선소감 – 이신율리
“이 세상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감사합니다”
까마귀가 얼어붙은 목청을 녹이자 유자나무가 등불을 켭니다. 노랑은 빨리 달려오는 발목을 가졌다고 생각할 때 벨이 울렸습니다. 편두통은 어느 계절을 돌아 여기 와서 끝이 되었을까. 손끝에 모은 0도에서 바닐라 라떼를 만들어 오래된 연인들에게 나눠주는 상상을 합니다.
희망이 텅텅 비었던 정오의 숲에서 길을 잃고 나를 잃었던 시간들 쓸모없는 것에 관심이 많아 세계를 건너 너에게로 간다고 썼습니다. 우주가 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깨어나 또 다른 나를 찾아 젤리를 뿌리고 스티커를 붙여 내 안에 어떻게 나를 배치할까 궁리합니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말들이 새 이마를 가지고 수천 번의 질문을 하는 상상로를 걸어옵니다.
초승달에 그네를 매 하늘을 날았다는 당신의 태몽이 맞았습니다. 죽은 가지를 부러뜨리면서 나는, 밤나무 숲을 걸어 나옵니다.
길 열어주신 나의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이 세상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게 감사합니다. 선해주신 심사위원님, 세계일보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1959년 충남 부여 출생·용인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악과 졸업·제8회 오장환 신인문학상 당선
“인생론적 깊이 함축…언어적 안정감 탁월” /심사평–안도현·유성호
2022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응모작들은 예년에 비해 숫자는 조금 줄었지만 그 수준과 내실은 더욱 탄탄해졌다고 할 수 있다.역량 있는 신인들이 이렇게 다양한 작품을 투고해주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기쁘게 다가왔다.심사위원들은 예심을 통과한 작품들을 읽어가면서 다수 작품이 빼어난 언어와 안목을 보여주었다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다.시단의 주류 시풍이나 관습적 언어를 답습하지 않고,스스로의 경험적 언어에 오랜 시간과 정성을 쏟았을 작품들이 많았다.침체기에 있는 한국 시는 이들의 언어를 통해 새로운 개진을 해갈 것이다.
심사위원들은 그 가운데 김하미,이신율리,조민주씨의 작품을 오래도록 주목하였는데,숙의 끝에 상대적으로 균질성과 언어적 안정감을 가진 이신율리씨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하게 되었다.이신율리씨의‘비 오는 날의 스페인’은,비가 내리는 풍경 속에서 구성해가는 사람살이의 외관과 생태와 속성이 인생론적 깊이를 함축하고 있는 수작이다.그 안에는 음식들에 관한 숱한 기억의 구체성과 함께,스페인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어도 더 멀리 떠나 있어도 좋을 사랑과 불꽃과 시간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수없는‘사이’에서 벌어지는 생의 파노라마가 환상성과 역동성을 함께 거느리면서 그림처럼 사진처럼 다가온 선물이자 이벤트였다.더욱 성숙한 시편으로 세계일보 신춘문예의 위상을 높여주기 바란다.
당선작이 되지 못했으나 구체성과 심미성을 두루 갖춘 사례들이 많았다는 점을 부기한다.대상을 좀 더 일상 쪽으로 구체화하여 우리 주위에서 살아가는 타자들을 애정 깊게 응시한 결실도 많았다.다음 기회에 더 풍성하고 빛나는 성과가 있을 것을 기대하면서 응모자 여러분의 힘찬 정진을 마음 깊이 당부 드린다.
크리스마스 사흘 전, 학과 졸업시험을 마치고 하교하던 길에 당선 소식을 듣게 되었다. 대학로 구석진 담벼락 아래에 서서 전화를 받으며 오랫동안 조용히 울먹였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는 항상 혼자서 무언가를 끼적이고 있었다. 뭘 적고 싶은 건지도 잘 모르는 채로, 나는 노트를 펼쳐 삐뚤빼뚤한 글씨체로 끊임없이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곤 했다. 나는 멋대로 그것들을 시라고 불렀다. 시가 뭔지도 모르면서. 그건 어쩌면 철없는 바보의 짝사랑 같은 거였을까.
그동안 길을 잘못 들기도 하고, 혼자 컴컴한 시간 속에서 한없이 헤매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사실 나도 좀 더 멋진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시간의 빚만 뿌옇게 쌓여갔다. 힘든 시간 속에서 문득 내게 위안을 안겨준 것은, 대학 교양 수업에서 접하게 된 프랑스 시인들의 시편들이었다. 시를 읽으면 칙칙하게 말라가던 내 영혼의 색이 밝은 빛으로 환하게 칠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시란 참 따뜻한 거였구나.
용기를 내어 다시 펜을 들고 내 멋대로 감히 시라는 걸 써봤는데, 우연히 교내 문학상에서 상을 받게 되었다. 시를 좀 더 알고 싶어서 여기저기 동아리도 전전해보고, 학과에서 열리는 시 수업도 들어보았다. 그리고, 계속 썼다.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멈추지 않고 계속.
시를 쓰는 법에 대해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다. 아직 많이 부족한데도 운 좋게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음을 알고 있다. 겸손한 자세로, 계속해서 열심히 써나가고 싶다. 모두가 많이 아프고 힘든 계절이다. 잔혹한 슬픔으로 가득한 이 추운 계절 속에서, 누군가에게 작고 따스한 위로를 전해줄 수 있는 상냥한 등불 같은 시를 쓰고 싶다.
사랑하는 가족들, 항상 곁에서 함께해준 고마운 친구들, 하연·진희·성은, 한 해 동안 함께 열심히 임용시험을 준비했던 우리 스터디원들, 하림· 주민·지성 그리고 경호, 한번 시를 써보라고, 그래도 된다고 제게 용기를 주셨던 이순욱 교수님과 국어교육과 시 동아리 '모임'의 학우분들에게도 모두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 아름답고 광활한 세계에 저를 초대해주신 영남일보사와 관계자분들,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22영남일보 문학상]詩심사평- "경쾌·발랄한 시어 구사…당찬 신인의 미래 기대“
손진은 시인 안상학 시인
본심에 올라온 스무 분의 시 가운데 장현숙씨의'뭉친 나이'외2편과 김지영씨의'뜨겁고 흰 유언'외16편,홍담휘씨의'카라멜마끼야또가 꽃피는 동안'외3편,손연후씨의'고양이 무늬로 웃는 연습하기'외2편이 선자의 눈길을 끌었다.장현숙씨의 작품은 시를 차분하게 끌고 가고 보이지 않는 부분을 만지는 솜씨도 있다.그러나 전체적으로 글에 생기가 부족하다는 점이 흠이었다.김지영씨의 시에서 두드러진 것은 현실 묘사 능력이었다.다만 완성도에서"이거다!"하고 내세울 수 있는 한 편이 보이지 않았다.
홍담휘씨와 손연후씨의 작품들을 놓고 장시간 논의가 있었다.
홍담휘씨의'젠가'는 젠가 게임을 통해 일상과 가족,현대성의 문제,지구온난화까지를 유머러스하고도 시니컬하게 담아내는 능력이 돋보였다. "마스크 쓴 계절도 빙하가 녹는 북극까지도 쌓아야 하는데/밤하늘이 하나둘 별빛을 빼내고 있었죠"를 비롯한 빼어난 표현이 촘촘히 박혀 있다.이 작품만으로 본다면 당선작으로 뽑아도 손색이 없다.그러나 투고한 다른 시편들의 질적 균질감이 편차가 있었다.
손연후씨의'고양이 무늬로 웃는 연습하기'를 당선작으로 밀기로 했다.이 시에서 유독 강조되는'노랑'은 삶의 어둠과 우울을 들어 올리는 힘이다.우리는"노란색 상자 안에 털실 뭉치 좋아하는"감자라는 이름의 고양이를 기른다.놀라운 건 감자와 교감을 하면서 마침내 그의 발소리를 들으며"노란색 상자 안에서/우리(도)털실 뭉치처럼 동그랗게 몸을 말게 된다"는 것이다.서두와 종결부의 아름다운 대응을 보라.
그건'감자'의 무늬에서 번지고 성장하는 사랑 때문이다.사랑은"유리잔과 식탁보 넥타이 구두에도"산다.그 사랑의 힘이"눅눅해진 하루를 보글보글 휘저으며"그때마다"볼을 삐죽 부풀린 거품들이 퐁퐁 터진다."이 당찬 신인은 자기만의 스타일로 경쾌한 시어와 발랄한 상상력을 구사한다.이 싱싱한 능력은 이 신인의 미래의 가능성을 예고한다.동봉한'여름의 아이들을 아세요'도 충분히 좋은 작품이었다.당선을 축하하며 아깝게 당선에서 밀려난 홍담휘씨에게도 힘찬 응원을 보낸다.
자신의 음악에 대해 지극히 개인적인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닌가싶었다고 한다.너에게서 내가 모르던 나를 발견하고 너의 상처가 나의 용기가 되고 너의 용기가 나의 기쁨이 되고 네가 지나친 너를 귀띔해준다.너로 하여 시간이 휘고 거리도 사라진다.우리는 우리를 먹이로 먹고 사는 종족인가.어떤 슬픔으로 벌어진 입은 잘 닫히지 않는다.입맛을 쩍쩍 다시며 어쩌면 영원히 닫히지 않는다.우리는 그 벌어진 입을 그곳에 버려두고 다른 입으로 살아간다.하지만 그 벌어진 채 버려진 입에 와 닿는 것들의 맛을 느끼게 된다.아니 그보다 벌어진 입들이 덜거덕거리는 소리를 달고 걸어간다.도망치려고 뛰어가면 그 소리가 더 커진다.
살금살금…우리가 하나의 영혼을 공유하던 때가 언제였을까.그 사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기를 읊조린다.내 상처에 아무리 약을 발라도 낫지 않던 것이 너의 상처를 어루만져 나아가는 임상을 겪으며 어디가 상처였는지 깨닫게 되기를 밤 하늘에 흩뿌려본다.알 수 없음과 실패라는 축복까지.나는 기억하지 못해도 별은 기억해주리라.어둠은 속삭여 주리라.
별들의 이름을 불러본다.내 친구 민슬기 뚜벅뚜벅 권미양 김병용 모스부호 노치성 김희섭 김경수 신애영 박경만 환한 서영채 최두섭 임철우 최수철 주인석 높은 먼먼 나희덕 안도현 박남준 복효근 이희중 가파른 장창영 한정화 최기우 미소 짓는 김의수 뜨끈한 전성진 섬세한 꾸준한 튼튼한 함한희 이정덕 예리한 윤중강 조명환 멋진 박윤지 빛나는 별들을 올려다본다.맑은 비스듬한 화사한 포근한 숯검댕이 먹먹한 그렁그렁한 무던한 칼칼한 글썽글썽한 부르지 않아도 서운타 않을 빛이 빚임을 안다.길이 아직 식
지 않았다
[무등일보 신춘문예ㅣ시 심사평]
뉴튼 사과와 이 시대 일상 적절한 시적 거리로 밀당
김동근 (전남대 국문과 교수)
시는 언어예술이다.그렇다고 해서 그 언어가 박제된 문장으로만 남아서는 시가 되지 않는다.언어는 화자의,그리고 시인의 목소리가 실린'말'이 되어야 한다.그래야만 그 말이 살아 독자를 향해 나아갈 수 있고,독자의 시가 될 수 있다.시는 언제나 정의할 수 없는 어떤 것이지만,시인이 되고자 꿈꾼다는 것은 또 언제나 이 언어와 말 사이에서 줄타기 하는 것이어야 한다.
한 사람의 새 시인을 찾기 위해1,000편이 넘는 응모작을 만났다.코로나시대의 불안증이 시 쓰기에도 가위 누르기를 한 까닭일까,전반적으로 활기차고 패기 넘친 작품보다는 사색적이고 관조적인 작품들이 많았다.또 상투적인 언어와 생경한 이미지의 나열로 인해 박제화 되어버렸거나,최소한의 형상화 과정도 거치지 않은 채 기억과 일상을 그대로 진술하고 있는 응모작도 적지 않았다.이들을 일차 걸러낸 후 남은 작품들을 다시 꼼꼼히 읽었다.
심사자의 감식안을 시험한 응모작에는 오랜 숙련의 흔적이 뚜렷하게 보이는 작품도 있고,새로운 감각으로 세상을 읽어낸 작품도 있었다.홍여니의〈를리외르〉는 자신의 지나온 삶을 책 제본 과정에 빗대어 쓴 작품이었다.그 상상력이 흥미로웠지만 묘사와 진술을 중첩시킨 어법에서 몇 군데 억지스러운 이미지가 정서적 몰입을 약화시킨 측면이 있었다.고경자의〈끈의 방식〉은 직장인의 삶의 방식과 애환을 진솔하게 담아내면서 체험과 사유를 잘 조화시키고 있었다.그러나 마무리 부분에서 시적 긴장이 유지되지 못한 채 느슨하게 풀려버린 아쉬움이 남았다.
마지막까지 심사자의 손에 남은 응모작은 최형만의〈새들의 삽화〉와 양승수의〈만유인력〉이었다.두 작품 모두 당선작으로 삼아 무방할 시품을 갖추고 있었다.〈새들의 삽화〉는 언어를 다루고 시상을 직조하는 능력이 대단히 숙련되고 단단하였다.굳이 흠을 잡자면 그 단단함 때문에 오히려 신인으로서의 활달함이 덜 느껴졌다는 것이다.고민 끝에〈만유인력〉을 당선작으로 선하였다.거기에는 인간 존재의 무게와 삶의 부피를 응축시키는 상상력의 힘이 있었다.뉴튼의'사과'와 이 시대의'일상'이 적절한 시적 거리로 밀고 당기고 있었다.특히 꽤나 긴 호흡으로 끌고 간 작품인데도 끝까지 시상에 흐트러짐이 없었다는 점이 앞으로의 시적 성취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하였다.당선인에게는 축하를 드리며,아깝게 선택되지 못한 분들에게도 심심한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