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강원일보 신년특집 신춘문예 시 당선작

 

목다보

 

송하담

 

 

  아버지는 목수였다

 

  팔뚝의 물관이 부풀어 오를 때마다 나무는 해저를 걷던 뿌리를 생각했다. 말수 적은 아버지가 나무에 박히고 있었다.

 

  나무와 나는

 

  수많은 못질의 향방을 읽는다

 

  콘크리트에 박히는 못의 환희를 떠올리면 불의 나라가 근처였다. 쇠못은 고달픈 공성의 날들. 당신의 여정을 기억한다. 아버지 못은 나무못. 나무의 빈 곳을 나무로 채우는 일은 어린 내게 시시해 보였다. 뭉툭한 모서리가 버려진 나무들을 데려와 숲이 되었다. 당신은 나무의 깊은 풍경으로 걸어갔다. 내 콧수염이 무성해질 때까지 숲도 그렇게 무성해졌다. 누군가의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박히는 게 아니라 채우는 것. 빈 곳은 신의 거처였고 나의 씨앗이었다.

 

  그는 한 손만으로 신을 옮기는 사람

 

  나무는 노동을 노동이라 부르지 않는다. 당신에겐 노동은 어려운 말. 그의 일은 산책처럼 낮은 곳의 이야기였다. 숲과 숲 사이 빈 곳을 채우기 위해 걷고 걸었다.

 

  신은 죽어 나무에 깃들고

 

  아버지는 죽어 신이 되었다

 

  나무가 햇살을 키우고

 

  나는 매일 신의 술어를 읽는다

 

  목어처럼 해저를 걷는다

 

 

 

 

[당선소감]송하담 보이지 않는 장벽에 '라는 못 박을 것

 

 

 

 

송하담(본명 송용탁·45) 부산  학원 국어강사

 

 

  긴 채굴의 시간이었습니다. 탄차의 여정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시 쓰는 일밖에 없었습니다. 세상이 거리두기를 외칠 때 저는 무엇보다 나와의 거리두기가 중요했고 그 거리 언저리에 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출구가 저기 보이는 듯합니다. 이번에 강원일보에서 부족한 글꾼에게 손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고대하던 등단은 또 다른 나와의 거리두기가 될 것이고 힘든 싸움의 시작임을 알고 있기에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지치지 않고 한 걸음씩 걷겠습니다. 당선작의 첫 구절처럼 아버지는 목수이셨고 막노동의 현장 한가운데 서 계시던 분이었습니다. 쉼 없이 못과 망치를 쥐시던 거친 두 손처럼 저 역시 보이지 않는 벽에 시라는 못을 박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엔 벽이 너무 많습니다. 보이지 않는 벽과 싸우는 많은 계층의 사람들을 대신해서 못을 박겠습니다. 조금 더 겸손하게 더 낮은 곳을 바라보며 나의 아픔뿐만 아니라 다른 이의 무거운 옷들을 걸 수 있도록 열심히 시라는 못을 박겠습니다. 쉬지 않는 목수가 되겠습니다. 힘든 시간 옆에서 응원해 주신 전다형 시인님, 황윤현 시인님, 김선미 시인님, 활연 시인님, 세상에 나갈 물꼬를 터주신 용인문학회에 감사 인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심사위원분들과 강원일보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심사평-목다보]“상상의 폭 넓게 두고 적확한 시어 찾아내

 

 

 

 이영춘·이홍섭 시인

 

  예심을 거친 작품들은 대부분 오랜 습작의 내공들을 보여주고 있었으나, “왜 이 시를 쓰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흔쾌한 답을 주는 작품은 드물었다. 달아나기만 하는 언어를 붙잡아 내 존재의, 삶의 숨결을 불어넣으며 시 고유의 장르적 힘을 보여주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선자들이 마지막까지 논의한 작품은 이용원의 무심하게 미시령'  4편과 송하담의 목다보'  4편이었다. 이용원의 시들은 마치 베틀로 피륙을 짜내려가는 듯한 직조의 맛이 돋보였으나, 이러한 정성이 오히려 시를 단조롭고 밋밋하게 만드는 아쉬움을 남겼다.

 

  송하담의 시들은 이용원의 시들에 비해 좀 더 과감한 면이 있었다. 거친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다보'를 당선작으로 뽑은 이유는 이 작품이 이러한 응모자의 특성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상상의 폭을 넓게 두면서도 적확한 시어를 찾아내고자 하는 노력, 그리고 이 상상과 언어 속에 삶의 비의와 존재의 근거를 담아내고자 하는 치열함이 그를 좋은 시인으로 우뚝 서게 만들 것이라 믿는다.

 

2022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엽록체에 대한 기억

 

이경주

 

숲을 떠난 푸른빛의 기억이 갇힌 방으로 들어간다

형광등 불에 달궈진 자갈과 모래알들이 바닥에 깔리어

전갈이 지나는 길을 만들고 있다

마른 바람이 눈에 익거나 때로는 낯선 발자국들을 지우는 한낮에는

미세한 먹이사슬들이 잠깐 잠을 자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하얗다

종일 내리쬐는 빛은 벽에 박힌 나무들의 뿌리와

그걸 바라보는 죽은 새들의 밥상과

좁은 틈새를 뚫고 머리를 든 작은 벌레들의

핏줄까지 하얗게 만든다

한번이라도 불빛에 닿은 것들은 제 본래의 색깔을 잃어버리고

오후가 저물 때면 변색의 관성은 더욱 강해져

누구도 아침을 기억하지 못한다

방의 움직임이 멈출 때까지 나갈 수 없다

아무렇게 발을 들여 놓았다가

깊은 사막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폭풍에 갇히어 돌아설 수 없다

여전히 문은 굳게 닫혀 있고

표정이라고는 창백한 빛뿐인 고요한 방이

암흑 속을 빠르게 날고 있는 소리가 들린다

이상하다 분명 하루가 지난 거 같은데

눈을 뜨면 다시 그 자리에 와 있고

녹색이 사라진 방으로 계속 나비들이 날아 들어온다

 

 

[2022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소감]

 

 

 

 

내 삶의 단 하나의 길, 시의 한가운데로 들어가겠다

 

  로맹 가리의 단편소설들은 늘 긴 여운을 남깁니다. 그 여운을 감당할 힘이 없어 한동안 그의 소설을 읽는 것이 두려워질 때도 있었지요.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꺼냈습니다. 새들은 진짜 비상을 위해 머나 먼 바다의 섬을 떠나 조그만 해변으로 날아와서 자신들의 몸뚱이를 던져 버리는 것일까요. 나에게 떠나야 할 섬은 무엇인지, 그리고 마지막 몸을 던져야 할 곳은 어디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언제부터인지 젊은 시절 굵은 노트에 적어 댔던 시들이 나와는 너무나 멀리 떨어진 추억이 되어버린 것을 알았습니다. 먹고사는 일에 몰입해온 현실을 핑계로 시의 바깥에서 기웃거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나갈 수 없는 사막에 갇혀 버렸다는 절망감도 컸습니다. 그러나 시를 쓰면서 운명적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을 그 지독한 외로움, 고통, 무엇보다도 지켜내야 할 영혼의 투명함과 순수성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음이 솔직한 고백일 겁니다.

 

  작년에는 참으로 많이 걸었습니다. 끝도 없는 길을 걸으면서 내가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생각했습니다. 결국 시를 쓴다는 것이 나에게는 세상을 사랑하는 강력하고 유일한 방식이자 수단이 되어야 함을 길이 끝날 어느 즈음에야 알게 되었지요. 시는 갈수록 희미해지는 내 존재의 가치와 의미를 되살리고, 내가 살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입니다. 그래서 오래 전에 멈추어 버렸던 시를 다시 끄집어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시의 바깥에서 기웃거리지 않고, 시의 한가운데로 들어가겠습니다. 고립된 섬을 벗어나 내 몸을 던질 마지막 해변을 향해 날아가겠습니다. 긴 망설임의 여정에서 내 안에 생겨 난 상처를 치유하고, 나의 치유로서 사막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에도 작은 위로와 희망이 될 수 있기를 감히 꿈꾸겠습니다.

 

  이제까지 혼자 써 왔던 시였기에 세상에 내놓기가 참 부끄러웠습니다. 채 다듬지 못한 나무처럼 거칠고 틀어진 저의 작품을 선정해 주신 심사위원님과 귀한 지면을 허락해주신 경남신문사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저를 응원해 준 아내와 가족들, 그리고 제가 어디를 가든 늘 함께 해 준 친구들에게도 고마운 인사를 전합니다. 아름답고 따뜻한 언어로 부지런히 좋은 시를 씀으로써 저를 사랑해 준 숱한 인연들에 보답하겠습니다.

 

시 부문 당선자 이경주 씨 (1963년생 충남 홍성 출생, 서울 거주 서울대 농경제학과 졸업 신한금융투자 근무)

 

 

 

[2022 경남신문 신춘문예  심사평] 울림 큰 문장들 시적 틀 만들어가는 상상력 돋보여

 

 심사위원 이성모·배한봉

 

  코로나19로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다. 단계적 일상회복으로 접어들면서 코로나 19 종식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으나 다시 확진자가 급증해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되는 등 여러 어려움이 많은 때이다. 이런 시대적 상황 때문인지 예년보다 신춘문예 시부문 투고량이 많이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수백명의 시인 지망생이 경남신문 신춘문예에 응모해 와 뜨거운 문학적 열기를 느끼게 했다.

 

  올해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응모작에는 신춘문예에 응모한다는 강박 때문인지 시적 역량을 보여준다는 것이 오히려 과도한 수사에 매몰되어 시적인 깊이와 사유의 넓이를 놓치고

 

  있는 작품들이 눈이 많이 띄었다. 한 사물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집중력이나 정서를 짜임새 있게 압축하여 끌고 가는 긴장감이 부족한 경우도 많았다

 

  숙고 끝에 심사위원들은 김난(김향숙), 김휼, 나영채, 노수옥, 이경주, 이동우, 임승환, 최수안 제씨의 작품들을 본심에 올려 논의하였다.

 

  몇 분은 이주노동자들이 처한 현실 등 사회에 대한 인식을 담아내어 보여주기도 했지만 시대 정신을 새롭게 해석하거나 깊은 정서적 울림을 주지 못했다. 또 몇 분은 토속적인 정서에 기대어 서정의 영역을 파고 든 경우도 있었지만 새로운 세계를 발견해내지 못하고 익숙한 어법에 머물러 있었다. 또 시적 발화가 너무 무성하여 이미지를 응집시키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이것이다, 하고 단숨에 손꼽을 작품을 만나지 못한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그런 속에서 노수옥씨와 이경주씨의 작품을 만난 것은 기쁜 일이었다. 노수옥 씨의 응모작 가운데 심사위원들의 눈길을 끈 작품은 입관이다. 언어를 세공하는 솜씨가 우수했다. 주제에 대한 집중도가 높고 문장을 끌고 가는 힘도 좋았다.

 

  이경주씨의 엽록체에 대한 기억은 현대인들의 고뇌를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시적인 틀을 만들어나가는 능력과 상상력이 돋보였다. 퇴색되고 변해가는 자아와 만나는 방의 풍경은 흡인력이 있다. “눈을 뜨면 다시 그 자리에 와 있고, 녹색이 사라진 방으로 계속 나비들이 날아 들어온다는 환상성을 보여주는 문장이기도 해서 울림이 크다.

 

  심사위원 두 사람은 노수옥씨의 입관과 이경주씨의 엽록체에 대한 기억을 놓고 숙고하고 논의했다. 논의한 끝에 응모작 전편이 편차 없이 고르다고 판단된 이경주씨를 당선자로 합의했다.

 

  축하하며, 한국시단을 이끄는 큰 시인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안타깝게 당선을 놓친 노수옥씨에게 심심한 격려와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2022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조퇴


강희정
 
 
드르륵 교실문 열리는 소리
 
슨상님 야가 아침만 되믄
밥상머리에서 빗질을 했산단 말이요
긴 머리카락 짜르라 해도 안 짜르고
구신이 밥 달라 한 것도 아니고
참말로 아침마다 뭔 짓인지 모르것어라
 
킥킥 입을 가리고 웃어 대는 책상들
아버지는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고
낮술이 뺀질뺀질 빨갛게 웃고 있는
4교시 수업 시간
 
덩달아 붉어진 내 얼굴은 밖으로만
내달리고 싶어
 
아버님 살펴가세요 어서가세요
얘들아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일찍 점심 먹고 운동장 나가 놀아라
나보다 먼저 교실 밖으로 나가버린 선생님
 
달걀 프라이가 들국화처럼 피어 있는
생일 도시락이
아버지 손을 잡고 산들산들 집으로 걸어간다
 
 
 
[시 당선 소감-강희정 씨] “시의 길에선 남과 다른 내가 더 나일 수 있다


 


  눈을 가리고 귀를 닫았다. 의지가 개입할 겨를이 없이 바깥을 향해 열린 모든 세포를 걸어 잠갔다. 물속에 오랫동안 잠겨 있었다.
 
  정지된 시간을 다독여 수면 위로 올라와 녹슨 세포를 깨우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갇혀 있던 감각 촉수가 언어와 결합하며 나를 한 걸음씩 움직이게 했다.
 
  기억처럼 지워졌다가 되살아난 진실이 시어가 되어 꿈틀거린다. 하얀 종이 위에서 먹고 마시고 잠이 든다.
 
  행복과 불행이 서로 곁눈질하면서 달린다. 이 둘에게서 언제나 허둥대지만, 그래도 나는 나아간다. 시와 사랑을 향해. 세상을 향해...
 
  시의 길에서는 남들과 다름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큰 위안이 됩니다. 다르니 내가 더 나일 수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광주일보와 이병률 시인께 감사드립니다. 서울디지털대학교 이재무, 오봉옥 교수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정윤천, 이대흠 시인님께 감사드리고 첫눈 시빚기반 회원들, 시를 향해 탄탄한 근육을 보여준 선배 시인들과 기쁨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작년과 올해 바삐 곁을 떠나신 부모님께 영예를 안겨 드립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신춘문예 시 심사평-이병률 시인]


 


쨍하고도 명징한 시, 탁한 세상에 차려놓는 기쁨
 
  시가 반드시 고통을 통과한 형태의 무엇은 아닐 것이다. 번민과 고뇌를 통과한 흔적을 날것의 형태로 그려 놓을 필요는 어디에도 없다. 꼭 그래야 하는 것처럼 누구나 쓸 수 있을 것 같은 시라거나 더군다나 그 누구도 홀릴 수 없는 시라면 신춘문예 같은 공모에선 감점법으로 접근하게 된다. 장점이 충분한 작품을 두고 고민을 했다.
 
  진영심의 꾸미지오 미용실은 제목부터 즐거운 이야기의 향을 품고 있는 것 같아 여러번 읽게 되었다. 잘려나가는 머리카락을 바늘에 비유했다는 사실에 일단 선자는 놀랐다. 하지만 바늘을 연상하고 바늘귀까지 끌어와 착상에 성공했다면 바늘귀에 뭐라도 꿰어야 하는데 그것이 빠진 채 후루룩 시를 맺고 말았다.
 
  결국 강희정의 조퇴를 당선작으로 선한다.
 
  새해에 여는 시 한 편으로서의 자격과 미덕을 찾자면 단연 양명함이었다.
 
  동시(童詩)의 마스크를 쓴 시라고 가볍게 평할 수 있겠으나 이 시의 아름다움은 시 속에서 자기 자신이 들어갈 자리를 과감할 정도로 배제시키는 능력으로 완성도를 일으켰고 그것은 어떻게든 자신을 과잉하게 드러내려는 수많은 응모작들 속에서 분명한 빛을 발하는 지점이기도 하였다. 멋진 다이빙이었다. 쨍하고도 명징한 시 한 편을 골라 탁한 세상의 공기에 차려놓는 기쁨이 나만의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
 
 

2022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숲에 살롱 / 최은우




 
 


 
숲에 살롱


최은우
 
  자꾸 이야기하다 보니 말이 생깁니다 기분이 달라지고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요 기분 탓인가요? 그러자고 한 건 아닌데 수다장이가 돼서 오물조물 오래 씹어 쉴 새 없이 꺼냈어요 이야기라면 해도 해도 할 게 많아요 귀를 여는 자가 없다면 저 무성한 나뭇잎들이 있잖아요 이리 와서 들어봐요 늘 같은 이야기지만 오늘은 하나 더 추가시킬 예정이에요 극적인 요소는 늘 있어요 마녀들이 밤에 모여 항아리에 대고 떠들던 주문 같은 것도 있다니까요 인생은 재미 아니겠어요? 문밖 무성한 화분들은 신경 쓰지 마세요 이야길 엿듣고 흉내 내느라 줄거리가 아니 줄기가 생겨서 풍성해졌어요 염치도 없이 나무 옆에 나무를 낳네요 자꾸만 나무들이 생기는 오후에 하나 더 있다고 하나 더 없다고 나무가 나무 아닌 것은 아니겠지요 비 오는 오후에도 어김없이 이야기에 중독된 여자들이 똑같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감수분열하듯 옆에서 옆으로 다음 손님을 부르네요
 
  여자는 거미 다리 같은 손가락으로 사뿐사뿐 머리카락을 잘라요 몸이 생기기 전부터 손가락만 있었던 것처럼 손은 여자를 떠나 가위를 들고 허공에서 춤을 춰요 원피스에서 요란하게 싸우고 있던 꽃무늬들이 살짝 얼굴을 빼자 잎사귀들이 떨어져요 떨어져서 허공으로 떠다니는 꽃들. 차를 마시던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요 알지 못해요 가위질 소리에 맞춰 간간이 웃음소리를 끼워 넣을 뿐. 유리문이 밀릴 때마다 들어오세요 붙여진 팻말에서 글자들이 살짝 떨어졌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비밀을 지켜주기 위해서죠 비밀과 상처는 오늘은 괜찮고 내일은 거대해지다 모레면 잊고 글피엔 주저앉게 만드니까요 쉽게 묻는 게 좋을까요 쉽게 말하는 게 좋을까요 수다장이들이 수다스럽게 찻잔을 부딪치며 그런 건 관심 없다고 하네요
 
 


시 당선 소감 / 최은우
 
모든 봄은 언제나 첫 번째였다는 걸 이젠 압니다
 
 
  이 겨울이 지나면 또 봄이 올 겁니다. 누군가에게는 첫 번째 봄이고 누군가에게는 마지막 봄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때마다 똑같이 피어나는 꽃들을 기를 쓰며 보러 가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왜 꽃들 앞에서 같은 포즈를 취하며 그곳에 그날, 그 시각 거기 있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사진을 찍는지를 말이지요.
 
  아주 오랜 시간 낙방하고 이제 신춘문예는 봄이 오기 전 우체국에 들르는 작은 행사가 되었습니다. 그 많은 연례행사를 치르며 나이를 먹고 왜 봄이 오면 사람들이 꽃을 보러 가는지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 모든 봄은 언제나 첫 번째였고 짧은 진통으로 낳은 둘째도 결국은 내 처음의 아이였다는 것을요. 어느 순간 핸드폰 카메라 앨범엔 꼭 찍혀야 할 단풍이 있고, 꼭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길고양이가 있으며, 재개발을 기다리는 골목의 장미여관이 가지 말라며 제 발을 붙들었습니다. 그 골목을 찍고 있는 순간도 다시 오지 않을 그 하루의 처음이었다는 것을요.
 
  시와 함께 한 살 더 나이 먹을 수 있게 해주신 부산일보사와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과거와 현재 미래에서 나의 아픈 손을 잡아 주어 나의 한쪽, 나의 시가 되어가는 사람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약력 : 1980년 전북 순창군 출생, 원광대 문예창작과 졸업.
 
 
 
 
시 심사평


읽고 있어도, 읽고 나서도 얼굴에 웃음이 번지는 시


   
        전동균 시인                       유홍준 시인 


  506명이 보내온 1903편의 작품에 깃들어 있는 무게감. 당선작을 결정하는 일은 그것을 이겨내는 일이었다. 마지막까지 심사자의 눈길을 끈 것은 모두의 잠깐’ ‘뱉은 씨앗’ ‘숲에 살롱 세 편이었다.
 
  ‘모두의 잠깐은 잘 쓴 시다. ‘우리는 중요한 일일수록/일의 틈틈마다 그 잠깐을 배치시켜 놓아요/하루가 연속성의 과정이라면/하루엔 얼마나 많은, 다양한 잠깐들이 있을까요라는 진단은 휴식 없이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마땅하고 옳다. 그러나 후반부로 갈수록 그 진단의 힘은 약해지고, 잠깐의 목록들을 호출, 나열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있었다.
 
  ‘뱉은 씨앗 오물거리는 입속에서 톡톡 내뱉어지는/수박씨들, 저것은 아마도 최초의 농법이자 직파법이라는 발상이 뛰어났다. 그러나 이 발상이 인간에게로 향하는 심화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시를 닫아버린 것이 못내 아쉬웠다.
 
  ‘숲에 살롱은 재미있다. 읽고 있어도, 읽고 나서도,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어느 동네나 있을 법한 살롱(미장원)과 어느 동네나 떠돌만한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요리조리 이야기의 잎사귀들, 시의 잎사귀들을 갖다 붙였다.
 
  시가 독자를 억압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대면이 어려운 이 시대에, 이런 재미난 이야기의 광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즐겁다.


 첨언 한 가지. 이 시가 만약 잎사귀가 아니고 꽃을 이야기했다면 얼마나 끔찍했을까. 아무쪼록 좋은 시는 꽃이 아니라 잎사귀를 보기 좋게 매다는 일이다.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 전동균·유홍준
 

2022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인주 묻은 태양의 행방 김종태

 

  뉴타운 소문을 태우고 마을버스가 들어왔다

 

  미숫가루처럼 흙먼지만 내려놓고 폐교를 한 바퀴 돌더니

 

  제비처럼 고샅길을 빠져나갔다

 

  언젠가부터 절개지 묵정밭엔 어린 의혹들이 심겨지기 시작했다 깨진 항아리 속에 갇혀있던 뻐꾸기 소리에 둔덕 까마중 몇, 복부인 같은 선글라스를 끼고 귀고리를 흔든다 전과자인양 담장 안을 기웃거리던 햇살, 굴다리 밑으로 잠입하고 배 밭으로 달려간 그림자 하나가 이른 아침부터 풍선 불 듯 바람의 평수를 후후- 부풀린다

 

  두부장수 확성기에 귀를 열던 도토리들 일제히 상수리나무를 버린다 선거벽보 어지럽게 붙어있는 축대 아래, 사방치기 놀이를 하던 아이들 오후가 오랜만에 찾아온 밀짚모자 주위로 몰려든다

 

  뻥튀기 소리에 놀란 해바라기, 발밑에 검은 태양들을 투투둑- 파종하고 늦게 외출한 채송화는 발뒤꿈치를 높이 꺼내 분꽃의 망설임을 흔든다 태양이 시작되면 빨간 인주통이 열렸다 몇 평 봄이 처분되는 계약서 그 끝, 마을경로당에선 코스모스와 금잔화가 형광빛 포스트잇처럼 끝도 없이 유예되고 있었다

 

  이장 집 옆 모과나무가 늙은 귀띔이라도 들은 걸까 오래된 우물 속에다 노란 주먹을 툭툭 박았다 내가 헐값에 처분했던 그 시절 변두리 네온사인과 외딴집에 세를 든 귀뚜라미의 지하 방엔 오래도록 해가 들지 않았다 지난밤 거처를 잃은 두견새와 갑작스레 약수터에서 쫓겨난 달빛은 창문 틈에 허리가 끼어 아침까지 웅웅거렸다

 

  누가 분실한 것일까

 

  공사 중인 안테나처럼 힘껏 꼬리를 세운 고양이 한 마리

 

  방금 눌러 찍은 붉은 태양이 채 마르지도 않은 부동산 계약서를 입에 물고서

 

  인적 드문 논밭을 검은 천 조각처럼 가로질러 어디론가 재빨리 구겨지고 있다

 

 

[당선소감]

 

  

 

앞으로는 내가 세상을 로 위로할 차례

 

  패딩점퍼처럼 눈을 껴입은 세상이 고딕체로 서 있었다. 애타게 기다리던 삶의 목록들이 연착되고 있었다. 측은지심의 영혼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시 쓰기. 내 가냘픈 노래는 원고지 속에서 자주 익사했다. 악보의 실루엣이 보이면 음정이 삐걱거렸다. 부러지고 흔들리는 것들이 시가 된다고 믿었기에 앞만 보고 계속 노를 저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몇 년 전의 내가 나에게 웃으며 손을 내민다. 살고 싶어서 시의 소맷자락을 간절히 붙들었다. 시는 나를 살려주시려고 보내준 그분의 언약궤였다. 이제는 내가 세상을 위로할 차례이다.

 

 한 시도 의 램프를 끄지 않는 시시각각(詩視刻各) 스승님과 따뜻하고 치열했던 나의 도반들과도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지치지 않도록 응원해준 아내와 두원, 예은 고맙고 사랑합니다. 지난해 하늘로 가신 어머니, 늘 막내아들을 자랑스럽게 믿어주셨는데, 하늘 향해 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벼랑 끝에 선 제 시의 손을 기꺼이 잡아주신 전북문인협회장 김영 시인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마음이 춥고 외로운 이들에게 손난로가 되어줄 그런 시로 보답하겠습니다.

 

 


 

시 부문 심사평

 

2022 전북도민일보의 신춘문예 응모작을 읽는 시간은 어떻게 시를 써야 울림이 깊은가에 대해 다시 되짚어보는 시간이었다.

 

 천 편이 넘는 응모작에는 막 시를 쓰기 시작한 듯한 사람의 작품도 있었고, 시적 완성도와 문장의 긴밀도가 만만치 않은 작품도 있었다.

 

 각주와 외래어가 난무하는 작품과 언어의 유기적인 연결이 아쉬운 작품도 많았다. 패기나 참신성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 적었고, 그만그만한 내용이나 익숙한 수사가 버무려진 작품도 많았다.

 

 주제 면에서는 개인의 서정을 노래한 작품부터 시대의 불합리에 대한 작품까지 스펙트럼이 넓었다. 시국의 영향인지 사회의 어두운 면과 개인의 어두운 시간을 직조한 작품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편이었다.

 

 최종까지 남은 작품으로 김선호 님의 빙하의 숲을 걷다’, 조희 님의 파울라가 있는 풍경과 김종태 님의 인주 묻은 태양의 행방’, 장성희 님의 폭우’, 김수형의 포스트잇이었다.

 

  모두 우리의 일반적인 인식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작품들이었으나, 제목이 내용을 끌고 가지 못하거나 내용이 제목을 받쳐주지 못하기도 했다. 시상을 직조하는 솜씨가 매끄럽지 못하기도 하고 제출 작품의 수준이 고르지 못하기도 했다.

 

  마지막까지 경합한 작품은 조희 님의 파울라가 있는 풍경이었다. 시상을 전개하는 힘이나 주제를 끝까지 밀고 가는 힘이 좋았으나 아쉽게 되었다. 조금 더 힘을 내면 다음을 기약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선작으로 선정한 김종태 님의 인주 묻은 태양의 행방은 자신만의 언어로 시대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능력이 수준급이다. 삶의 현실에서 시의 뿌리가 발아했으나 주관에 휩쓸리지 않고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확보하는 솜씨가 시의 밭을 오래 가꾼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응모한 다른 작품들도 고른 수준을 보인 점과 앞으로의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다.

 

 

 

김영(시인, 전북문학관장)

 

 

2022년 전남매일 신춘문예 시 당선작

 

 

삽화=이형우

 

미역국 / 강일규

 

 

산부인과 병원 근처엔 혼자 우는 울음이 많다

 

팔을 벌리고 부를 이름이 없어

한낮에도 울음이 바람을 끌어안고 멸망을 낳는다

 

저만치 뒤따라오던 아내가

전봇대를 붙잡고 이름 없는 이름을 부르며 울고 있다

 

미안

미안

 

건너편 정류장에서도

한 여인이 어리어리한 앳된 딸아이를 끌어안고 있다

 

괜찮아괜찮아

 

대기실에서 마주쳤던

한 남자와 한 남자가 보호자란 인연으로

눈빛이 스칠 때마다 놓친 연과 놓은 연을 위로했다

 

아내의 울음이

자궁 밖으로 다 빠져나가길 기다렸다가

 

돌아오는 길에

소고기 반 근을 샀다

 

 

 [2022 전남매일 신춘문예]시 당선자 강일규

"아픈 이들 보듬는 따뜻한 시 쓰겠다"

 

 


 

 

  시클라멘 화분에 영희 씨 젖꼭지만한 붉은 망울이 맺히기 시작했습니다. 꽃을 터트리기 전 베란다에서 햇살을 즐긴다는 그녀, 피고 지면 또 다른 꽃대가 올라온다 했습니다. 더 이상 꽃이 피지 않을 때가 여름이라고 했습니다.

 

  “물을 너무 많이 주면 뿌리가 썩어요 라는 말에 물기 어린 글을 썼다 지우고 다시 또 쓰고.

 

  오늘, 꽃이 피었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첫눈이 내리는 퇴근길이었지요. 한겨울에 이토록 화사한 꽃을 피우다니. 올해를 넘기지 않아 다행입니다. 눈발이 바로 땅에 닿지 못하고 공중에 부유하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저들도 심장이 뛰는구나.’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운전을 멈춰야 했습니다. 눈의 방향을 따라 걸었습니다. 큰길의 환한 불빛을 의지한 골목은 차갑고 희미했지요. 내 시작의 지향점과 닮아 있습니다. 삶의 무게를 시의 무게로 받아들일 때까지 겸허한 자세로 정진하겠습니다. 어두운 곳에서 아프고 힘든 이들을 보듬어 주는 따뜻한 시를 쓰겠습니다. 그런 글들이 모여 내 자신을 표현하는 수식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기쁨에 가장 빨리 전염된 나의 영희 씨, 연수와 지연이 사랑해. 그동안 응원해 줘서 고마워.

 

  첫 걸음을 올곧게 일깨워 준 강희안 교수님, 인문학 강의로 시적 사유를 확장 시켜 준 소설가 연용흠 교수님, 좌절과 절망으로 방황할 때마다 시의 연을 단단하게 붙잡아 준 이돈형 시인님, 시의 길에서 만난 수레바퀴문학회와 시깡패들께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제게 따뜻한 손 내밀어 주신 강대선 심사위원님과 전남매일에게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2022 전남매일 신춘문예]시 심사평

고통받은 이들에게 보내는 위로

 

 

강대선 시인

 

  책상 위에 쌓인 응모작을 읽었다. 정성을 다해 보내온 시들이라 허투루 읽을 수 없었다. 코로나19 시대에 혼자 있게 되는 시간이 많아서인지 고독과 우울한 내면을 다룬 시가 많았고 가족 서사와 함께 일상을 소재로 한 시들도 적지 않았다. 사유의 깊이를 언어로 형상화한 시에 먼저 눈이 갔다.

 

  그중에 뒷모습’, ‘여우야 여우야’, ‘미역국 등이 시적 완성도를 갖추고 있었다. ‘뒷모습은 시장의 노파를 새우로 비유하는 부분이 눈길을 끌었다. 어시장에서 노파의 삶을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부분이 좋았으나 너무 쉽게 풀린 부분이 있고 함께 제출한 시들의 수준이 고르지 못해 아쉬움을 주었다.

 

여우야 여우야는 코로나19로 격리된 상황을 동요로 표현한 발상이 신선했다. 하지만 몇몇 시어들이 전체적인 시적 긴장감을 반감시켜 작품을 선정하는 데 망설이게 했다.

 

  ‘미역국은 아기를 잃은 아내를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이 다른 이들의 아픔과 함께하는 지점에 마음이 갔다. 코로나19 시대에 고통받는 현대인들에게 공감과 연민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울림이 컸다. 나머지 작품의 수준이 고른 점도 신뢰를 주었다. 축하드린다. 깊은 울림을 주는 참신한 서정성을 기대한다. 당선되지 못한 분들도 빛을 발하리라 믿는다

 

 

◇강대선 시인 

 

  ‘동아일보신춘문예 시조와 광주일보신춘문예 시에 당선, ‘시와사람에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광주전남작가회원이며 시집으로 메타자본세콰이어 신전  4권이 있다. 한국해양문학상, 한국가사문학상, 여수해양문학상 소설부문 대상, 김우종 문학상, 8회 직지소설문학상 대상 등을 수상했다.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럭키슈퍼 / 고선경


농담은 껍질째 먹는 과일입니다
전봇대 아래 버려진 홍시를 까마귀가 쪼아 먹네요


나는 럭키슈퍼 평상에 앉아 풍선껌 씹으면서
나뭇가지에 맺힌 열매를 세어 보는데요
원래 낙과가 맛있습니다


사과 한 알에도 세계가 있겠지요
풍선껌을 세계만큼 크게 불어 봅니다
그러다 터지면 서둘러 입속에 훔쳐 넣습니다
세계의 단물이 거의 다 빠졌어요


슈퍼 사장님 딸은 중학교 동창이고
서울에서 대기업에 다닙니다
대기업 맛은 저도 좀 아는데요
우리 집도 그 회사가 만든 감미료를 씁니다


대기업은 농담 맛을 좀 압니까?
농담은 슈퍼에서도 팔지 않습니다


여름이 다시 오면
자두를 먹고 자두 씨를 심을 거예요
나는 껍질째 삼키는 게 좋거든요
그래도 다 소화되거든요


미래는 헐렁한 양말처럼 자주 벗겨지지만
맨발이면 어떻습니까?
매일 걷는 골목을 걸어도 여행자가 된 기분인데요
아차차 빨리 집에 가고 싶어지는데요


바람이 불고 머리 위에서 열매가 쏟아집니다
이게 다 씨앗에서 시작된 거란 말이죠


씹던 껌을 껌 종이로 감싸도 새것은 되지 않습니다
자판기 아래 동전처럼 납작해지겠지요 그렇다고
땅 파면 나오겠습니까?


나는 행운을 껍질째 가져다줍니다


▲1997년 안양 출생
▲한양여자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경유지에서 / 채윤희


중국 부채를 유럽 박물관에서 본다
초록색을 좋아하는 나는
딱정벌레 날개 위에 누워 있다


한때 공작부인의 소유였다는 황금색 부채
예수는 얼핏 부처의 형상을 하고 있다
약속의 땅은 그림 한 뼘
물가로 사람을 인도한다는 뿔 달린 짐승은 없다


한 끝이 접혔다가 다시 펼쳐진다
떨어진 금박은 지난 세기 속에 고여 있고
사탕껍질이 바스락거린다
잇새로 빠져나와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받아 적을 수 없는 소리


파란색을 좋아하는 나는
물총새 깃털을 덮고 잠든다
멸종에 임박한 이유는 오직 아름답기 때문
핀셋이 나를 들어올리고
길이 든 가위가 살을 북, 찢으며 들어간다


기원에 대한 해설은 유추 가능한 외국어로 쓰여 있다
따옴표 속 고어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오랜 세월 파랑은 고결함이었고 다른 대륙에 이르러 불온함이 되었다


존재하지 않던 한 끈 열릴 때
나, 아름다운 부채가 되기
열망은 그곳에서 끝난다


▲1995년 부산 출생
▲명지대학교 문예창작과졸업




■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하이퍼큐브에 관한 기록 / 백가경


1920년 변호사 세바스챤 힐튼은 어린이들에게 3차원 공간에 대한 기초적 이해를 돕고자 정글짐을 발명했다


*
x가 머리 위에 달린 축을 오른손으로 잡고 있다 높이를 미처 재지 못한 x의 발이 바닥에 거의 닿을락 말락 누군가 실컷 타다 뛰어내린 그네처럼 어안이 벙벙하다
x의 팔과 다리가 점점 빠르게 버둥거린다 x는 하나의 커다랗고 검은 점이 되는가 싶더니 그 어떤 축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고 x값이 무한 증폭된다


y님 행복을 주는 치과 생일 축하드립니다. 임플란트 10% 할인 1
어떻게, 잘 지내? 1
은평구도서관 ‘세상의 끝’ 연체 49일 빠른 반납 요망 1
소액 대출 최저 이율로 신용등급 모두 가능


y는 몸을 정육면체 안으로 구겨 넣는다 점점 y값을 잴 수 없고 그럴수록 y는 생각한다
이 모든 되풀이는 나의 결과 값 “(경제적) 자유”를 위한 것


z의 미래 값: 직사각형 화장실 천장에 도시가스 공급관이 노출돼 있음 장판과 텐트 사이 혈액이 말라붙어 표백제와 기타 용액을 계산한 것보다 한 통 더 사용함 청구 예정
z의 현재 값: 중위소득 85% 이하 가정에서 자란 3학년 C반


*
발가락 하나로 자신의 목숨을 지탱한 x는 같은 위치 옥상에 사는 주민이자 애인 z를 찾아 창백한 타일로부터 그를 무한 증식시킨다 열화 과정에서 z는 기체로 변할 수 있게 되고 y가 연체한 ‘세상의 끝’을 대신 반납한 후 49일을 1초 만에 앞당겨 ‘세상의 끝 역자 후기’를 대출한다 y가 연탄과 소주를 담아 온 마트 봉지를 쓰레기통에 넣을 때 자연스럽게 제목을 볼 수 있도록 책을 비스듬히 세워놓는 것을 잊지 않는다


*
범우주아카이빙센터 12호 연구소장은 x, y, z 세 어린이를 한 차원에 모아 두고 질문을 시작한다
말을 끊어서 미안하지만 여러분 어떻게 연결되었으며 이런 건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세 어린이 동시에 말한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연구소장은 웃음을 잃지 않는다 어린이들 모르게 언어 변환 버튼을 누른 후 짧게 욕을 한다
그렇다면 당신들의 능력은 어떤 문헌에서 찾은 것인가요?
어린이 일동, 문헌에서 찾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 Hypercube 4차원에서 모든 변의 길이가 같은 도형, 10개 이상의 처리기를 병렬로 동작시키는 컴퓨터의 논리 구조


▲1991년 생




■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시드볼트 / 오산하


눈을 감았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국가를 떠올리면서 습한 냄새를 맡으면서 안개 속으로 뛰어들면서 길거리의 새를 하나둘 세면서 걸어


눈이 마주쳐도 날아가지 않는 새 발로 바닥을 밟아도 도망가지 않는 새 까만 눈동자를 쳐다보다가 넘어졌어 까맣게 피멍이 들었다


하루가 지나서 생일 축하해 문자를 받고 시차가 생겼어 하루 늦게 생일을 맞이하면서 종말을 말하는 사람들과 선물 받은 오르골을 돌리면 모르는 노래가 나온다 노래는 언젠가 끝나겠지


전쟁과 전쟁이 끝나고 난 후 언제가 가장 끔찍할 거 같아 라는 노르웨이에 가고 싶대 거기에 자신을 묻을 거라고 했어 나는 Green Day의 Holiday를 들으면서 반역자! 반역자! 죽어버린 사람들의 피가 흘렀어 아 곧 종말이구나 그래서 라는 노르웨이에 가고 싶구나


두 개의 음 두 개의 박자 머리 위로 떨어지는 15층의 사람과 다리 밑으로 떨어지는 차 사람의 바싹 마른 피부와 솟구칠 힘도 없는 피 물 물 물 전쟁이 끝나지 않은 곳에 다 녹아버린 얼음의 흔적과 끈적한 더위가 있어


라는 붙잡아도 부서진다 길을 걷다가 쪼그려 앉아서 새를 가만히 쳐다봤어 새가 내 눈알을 파먹으려고 해도 가만히 있었어 계속 굴러가다가 영원히 남도록 그곳은 마치 도서관 같다


추워 라는 시드볼트로 들어가 문을 닫았어 이건 한 세기 전 살아있던 사람의 눈알이구나


계속 걸었어 뚝 뚝 흘리면서 걸었어 끊어진 다리 뒤집어진 배 치지 않는 파도 하늘에서 떨어진 새 검은 새 검 눈동자 뽑힌 눈알 굴러가는 심장 굴러 떨어지는 법을 배운 나 깔깔 웃는다


▲1998년 경기도 성남 출생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예정




■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반려울음 / 이선락


슬픈 시를 쓰려고 배고프다, 썼는데 배으다라 써졌다
뒤에 컷서를 놓고 백스페이스 키를 누르자 정말 배가 고팠다


뱃가죽이 등에 붙어버렸나? 배가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고프다, 쓰자 배가 없어졌다. 등이 구부러지는, 굴절된 뼈 같은 오후


그래, 슬픔은 늘 고프지
어딘가 고파지면 소리내어 울자, 종이 위에 옮겼다


*
세면대에 틀니를 내려놓듯
덜컥, 울음 한마디 내려놓고 왔습니다.
그뿐인가 했더니
옆구리 어디쯤에 쭈그리고 있던 마음, 굴절되어 있네요


거품을 집어 삼킵니다 씹어도 건더기라고 없는 위밥
혓바닥이 마르고, 버썩거립니다


그래요 뭐든 버썩거릴때가 있어요 잠깐 눈 돌리면 쏟아지기도 하고...


난 수년 전 아이 몇몇 쏟아버린적도 있어요


그땐 내 몸도 깡그리 쏟아졌던 것 같아요 마지막 손톱을 파낼 땐 눈에도 금이 가고 있었죠
'얘야, 눈빛이 많이 말랐구나 눈을 새 뜨고 있는게 아니었어' 내가,


'손가락을 흘리고 다니지 말랬잖아요 근데 왜 까마귀 목소리가 흘러나오는지...' 보송보송 털이 난 꿈속에서


*
배가 고프단 얘긴줄 알았는데. 그림자 얘기였어
부품해진 그림자론 날아오를 수 없다, 어떤 돌은 그림자도 생겨나지 않는다, 죽은 후론 배꼽도 떠오르지 않는다, 쏟아졌던 아이들


처음으로 수면에 떠올라
'배꼽은 어디 있을까' 찾고 있을지도 모르는


깨지지 않는 것도 깨진 것이 되어버린 오후
이렇게 비좁고, 나는 깎아지른 맘뿐이었나


몇 줄 적지 못한 종이 한 장 찢어, 공중에 날리는


▲1957년 경북 경주 출생
▲건국대 수의과대학 졸업




■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비 오는 날의 스페인 / 이신율리


죽는 사람들 사이로 날마다 비가 내린다
사과는 쓸모가 많은 형식이지 죽음에도 삶에도


수세미를 뜬다 사과를 뜬다
코바늘에 걸리는 손거스러미가 환기하고 가는 날씨
를 핑계로 미나리 전이나 부칠까


미나리를 썰 때 쫑쫑 썰어대는 말이 뒤섞인들 미나리
탕탕 오징어를 치며 바다가 보인대도 좋을


다행히 비 내리는 날이 많아 그 사이로 사람이 죽기도 한다
올리브 병에서 들기름이 나오면 핑계 삼아 한판
사과나무에서 다닥다닥 열린 복숭아를 다퉈도 되고
소금 한 주먹 넣으며 등짝도 한 대


단양과 충주 사이에 스페인을 끼워 넣는다
안 될 게 뭐 있어 비도 오는데
스페인보다 멀리 우린 가끔 떨어져도 좋을 텐데


철든 애가 그리는 그림 속에선 닭 날개가 셔터를 내리고 오토바이를 탄 새가 매운 바다에서 속옷과 영양제를 건져 올렸다 첫사랑의 정기구독은 해지했다


꽃병에 심야버스를 꽂았다 팔다리가 습관적으로 생겨나는 월요일, 아플 때마다 키가 자라는 일은 선물이었다


불꽃이 튀어도 겁나지 않은 나이는 이벤트였지


단풍 들지 않는 우리를 단양이 부른다 스페인은 멀고
안전벨트를 매고 접힌 색종이처럼 사진을 찍는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누군가 멀리 떠난다


▲1959년 충남 부여 출생
▲용인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악과 졸업




■ 한국경제 신춘문예 시 당선작


이것은 이해가 아니다 / 박규현


친애하는 메리에게
나는 아직입니다 여기 있어요


​불연속적으로 눈이 흩날립니다 눈송이는 무를 수도 없이 여기저기 가 닿고요 파쇄기 속으로 종이를 밀어 넣으면 발치에 쌓이던 희디 흰 가루들 털어도 털어도


​손가락은 여전합니다
사람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 사람은 가장 보편적인 성격을 갖게 될 것입니다


​녹지 않으니까
착하다고 말해도 되나요


​의심이 없을 때
평범한 사람을 위해


​젖은 속눈썹 끝이 조금씩 얼어가는게 느껴졌습니다 극야로부터 멀어지고 싶고


​장갑을 끼지 않아 손가락이 아팠습니다 나에게도 손이 있다니 나무들을 베어 버릴 수 있을 만큼 화가 났습니다


​메리에게 답장을 씁니다
천사 혹은 기원이 있을 곳으로 눈은 그칠 줄 모르고 눈밭에 글씨를 써도 잊혀지는 곳으로 우리가 전부여서 서로에게 끌려다니는 곳으로


​눅눅한 종이뭉치를 한 웅큼취고 있었는데
눈을 뭉쳐 사람을 만듭니다 우리가 소원하고 희망해온 사람


​무겁고 불편한 폭설입니다 사람들은 여기저기 쓰러져 있어 그들의 눈을 빌립니다 그는 천 개의 눈을 가진 이가 될 것이에요 제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메리, 나는 겨우 있어요
내일과 같이 여전히


▲1996년 서울 출생
▲서울과학기술대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재학




■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내 침대는 오늘 아침이 봄 / 박재숙


침대에게 몸으로 물을 주는 건, 그에게서 달콤한 봄 냄새가 나기 때문이지 내 주변엔 봄이 너무 많아 침대도 나에겐 봄이야, 그건 아마도 침대를 향한 나의 일방적인 편애일지도 모르겠어


침대는 해마다 겨울이 알려주는 장례관습 따위엔 관심 없어 꿈과 현실 사이에서 철없이 스프링을 쿨렁거려도 푸른 봄은 여전히 아지랑이처럼 오고 있을테니까


침대 위에서 휴대폰 속 이미지나 사건들을 클릭하고 닫는 동작은 무의미해 그때마다 끝이 보이지 않던 내일이 침대 커버처럼 단순해질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해


침대의 생각은 참으로 명료해 홀쭉하게 들어간 배를 쓰다듬으며, 지난밤 겹의 무게 뒤에 펼쳐진 피로를 걷어내고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날 힘을 얻지, 그건 내일이 던져줄 공복을 향한 강한 의지인 거야


공복은 채움의 예비의식이기도 해 그러므로 내 침대는 늘 비어서 오늘 아침이 봄, 때때로 난 널 사랑해 내 생각대로 꽃피게 하고 싶어 레시피는 간단해 갖가지 감정의 재료들을 봄흙으로 만든 황토침대에 쏟아부으면 끝, 그럼 우린 하루 한 끼 제대로 된 꽃밭의 식사를 할 수 있어


사계절은 한결같아 언제나 내 침대는 오늘 아침이 봄, 불쑥 깨진 거울을 들이미는 봄의 손을 보고 있으면 거울 속의 내가 보여 나인 듯 내가 아닌 듯, 너무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는 거울의 트릭이 보여


그래도 방언 같은 아지랑이의 말을 기억하는 내 침대는 여전히 오늘 아침이 봄


▲1967년 전북 부안 출생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졸업




■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빈집 / 박수봉


빗속에 집이 잠겨있다
태풍이 온 나라를 휩쓸었지만 빈집은
날개를 접고 흔들리지 않았다
식구들은 모두 전주로 떠나버리고
덩그러니 혼자 남은 빈집
퇴행성관절염에 어깨 한쪽이 내려앉은 채
기울어 가는 생을 붙들고 있다
빈집의 담장을 지나다보면 허옇게 바랜 집이
손을 저으며 말을 걸어온다
평생 걸어온 길의 기울기와 그 길로 져 날랐던
가난과 고단함에 대해서 빈집은
미처 다 하지 못한 말들을 빈 방에다 새긴다
행간마다 피어나는 유폐의 점자들
마당 우물터로 목마른 잡초들이 조촘조촘 들어서고
버리고 간 장독대엔 혼잣말이 웅얼웅얼 발효 중이다
죽은 참가죽나무에 앉아 종일 귓바퀴를 쪼아대던
새소리도 날아가고 귀가를 서두르는 골목
일몰의 욕조에 몸을 담근 빈집이
미지근한 어둠으로 눈을 닦는다
종일 입술을 다문 대문을 빈집은
몇 번이고 눈에 힘을 주어 밀어 보지만
끝내 대문 여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마당 깊은 곳까지 어둠이 차오르면 빈집은
눈을 들어 별자리를 더듬는다
식구들이 몰려 간 서남쪽 하늘
별이 기울 때까지 눈을 떼지 못한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들쥐가
들어앉아 새끼를 낳았다
이따금 달빛이 새끼들의 털을 핥아주고 갔다
들쥐는 빈집의 뒷다리를 갉아 먹으며 자라고
집은 제자리에서 우물처럼 늙어간다
빈집의 늑막 아래로 어둠이 점점 차오른다


▲전북 장수 출생
▲경기대학교 졸업




■ 전남매일 신춘문예 시 당선작


미역국 / 강일규


산부인과 병원 근처엔 혼자 우는 울음이 많다


팔을 벌리고 부를 이름이 없어
한낮에도 울음이 바람을 끌어안고 멸망을 낳는다


저만치 뒤따라오던 아내가
전봇대를 붙잡고 이름 없는 이름을 부르며 울고 있다


미안
미안


건너편 정류장에서도
한 여인이 어리어리한 앳된 딸아이를 끌어안고 있다


괜찮아
괜찮아


대기실에서 마주쳤던
한 남자와 한 남자가 보호자란 인연으로
눈빛이 스칠 때마다 놓친 연과 놓은 연을 위로했다


아내의 울음이
자궁 밖으로 다 빠져나가길 기다렸다가


돌아오는 길에
소고기 반 근을 샀다


▲1958년 충북 영동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 중문과졸업




■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왜소행성 134340* / 유진희


우주는 조금씩 부풀고 있고
우리는 같은 간격으로 서로 멀어지고 있어요
사방이 우주만큼 트여 있어도 어쩔 수 없는 일
좌표만 같은 비율로 커지는 세계에서
시간만이 변수라고 한다면
아득한 게 쓸쓸한 일이 되고 맙니다
다시 올 것 같지 않게 멀어지다가
어느 계절엔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오는 별을
찌그러진 궤도를 가진 별을
사람들은 무리에서 내쫓았습니다
이로써 우리 행성계는
완벽하게 끼리끼리 어울리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공전 주기를 늦추고 싶은
사람들은 서둘러 여행을 떠나지만
매진 행렬이 더 빠르게 이어지고
출발을 위한 서류는 늘어납니다
서류가 늘어날수록 안심하는 사람들을 위해
늘 거기 여기의 세계에서
서류는 잠식하는 불안처럼 불어납니다
모든 항의에는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는 답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관료의 심장을 뚫어버릴 별빛은
어느 블랙홀에 갇혀버렸을까요
다른 시간 속에서 유영하던 우주비행사는
돌아오자마자 순식간에 늙어버립니다


*태양계에서 퇴출된 명왕성이 받은 새 이름


▲1976년 서울 출생
▲한신대 문예창작대학원 졸업. 국어교사




■ 광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귓바퀴 꽃 하얀 가을 강 / 이정임


잘방잘방


가을 강은 할 말이 참 많답니다
저렇게 눈부신 석양은 처음이라고 내가 입을 열었습니다
참 오랜만에,
도무지 닫혀 있던 입
흰 귓바퀴 꽃을 봅니다
안개 짙은 그 하얀 꽃을요


나는 휠체어를 밀어주면서 한 바퀴 즐거운 나의 집, 두 바퀴 세 바퀴 현(絃)을 타 봅니다 눈감고 오물오물 따라하는 어르신 핑 돌아 떨어지는 눈물 한낮의 요양원 창밖으로 찔끔 찍어 냅니다 사람들은 먼 나무위에 앉아 졸고 가을 강은 나를 자꾸 떠밀고 갑니다 알 없는 안경너머로 두 다리 유니폼의 건장한 날이 있습니다 서슬 퍼런 기백이 있습니다 백지로 두고 떠나자고 말한 적 있답니다 구절초 강아지풀 억새 어우러진 둔덕 제 모습에 반해 석양을 품은


비록 비위관(脾胃管)에 연명하지만 포르르 동박새 동백나무에 오르고 옛 기억 하나둘 돌아옵니다 참 맑은 하늘이 도리질 치다가 풀썩 잠이 들라 합니다 퐁당 물구나무를 서거나 물비늘을 따라 멀리멀리 헤엄쳐가기도 하는


가을 강은 심하게 몸살을 앓는 중입니다


소실점 잘방잘방 아스라이 붉은


▲전북 임실 출생
▲한국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3학년 휴학중




■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엄마 달과 물고기 / 김미경


물고기는 내 오빠다
오빠가 물고기인줄 알면서도 내 엄마 달은 물살에 휩쓸려 떠밀려가는 물고기를 잡지 못한다
그러나 엄마는 달이다
눈물이 없는 달
우리가 잠든 밤마다 환하게 나타났다 사라졌다하면서 놀라고 걱정스럽게 만드는 달 말이다
이런 달의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생각만 많다
물거품이 이는 곳에 가면 은빛 곡선을 가진 오빠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아기가 발을 핥고 있어서 젖 물릴 때가 됐다고 한다
물고기의 얼굴은 내 얼굴
우리는 형제다
물속에 잠긴 달이 운구릉을 헤적거리다 곱은다리에서 암흑 속으로 내려간다
이번에는 검은 그림자에 싸여 비틀거리는 아빠도 함께다
그러나 엄마는 달이다
힘이 세다.


▲1964년 제주 출생
▲‘시와몽상' 동인
제3회 천강문학상 시부문 대상
  


공터의 풍경 / 오정순
 


공터에 내리는 비는 구겨진 절기의 줄기가 느릿합니다
버려진 액자가 있고
시든 난蘭 한 포기가 비에 젖고 있습니다
일직의 빗줄기가 지나가고 뿌리를 잡고 있는 바위에
푸른 이끼라도 살아 날듯합니다
깨어진 유리에는 깨어진 햇볕이 어울리겠지요
반짝, 비가 갠 공복의 허공엔 햇볕이 따뜻합니다
소슬하게 바람이라도 불었는지
흔들린 난蘭잎 주변에 먹물이 번져 있습니다
골목을 막 들어선 봄의 등 뒤로 아지랑이 배접이 구불구불하고
몇 년 아니, 몇 십 년 쯤 피어있었을
꽃대가 피곤해 보입니다
붉은 노을이라도 세 들어 있는지
낙관엔 오래 흔들린 악력握力이 흐릿합니다 
 
낡은 시선만 가득한 풍경,
떠나 온 벽의 경사가 누워 있습니다
어쩌면 저 풍경의 크기만 한 흰 공터를
벽에 남겨 놓았을지도 모르지요
상실의 흔적들이란 저렇듯 각이 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공터의 담 벽이 비스듬히 그늘을 만들고 있고
어쩌다 풍경화 한 점 걸리는 호사를 누리고 있는 담 벽
아이들의 웅성거림이
공터의 배접으로 드러눕는 시간
흔들리는 그늘들은 모두 저녁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이제, 그 어떤 풍경도 이 액자에 들어 갈 수 없다는 듯
캄캄해지고 있습니다
 




제3회 천강문학상 시 심사평

서정시는 단순성의 미학이다. 분석의 대상이 되는 구조의 틀, 혹은 주제를 구성하는 의미론적인 층이 비록 복잡성을 띠고 있는다고 해도, 적어도 발화 형식의 결에 있어선 그렇다는 얘기다. 시를 쓰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시를 산만한 사설(辭說)의 언술임을 착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생각된다. 하고 싶은 많다면 어쩔 수 없이 산문의 장르를 선택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한다. 시를 쓰는 사람은 다름 아니라 산문을 쓰는 사람이 하지 못하는 말을 부리는 사람이다. 그는 산문을 쓰는 사람이 쉽사리 할 수 없는 구석진 말의 물결 같은 흐름에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시는 사물의 이면을 꿰뚫어볼 수 있는 통찰의 상상적 결과가 아닌가 여겨진다.



 우리 심사위원 두 사람은 예선에 통과한 스무 명의 공모작 약150편 정도의 작품을 철저한 익명의 상황에서 면밀히 검토한 결과, 세 분의 응모자, 즉 한승엽, 임재정, 오정순의 시 작품들을 뽑는데 의견을 함께했다. 이 세 분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대상 한 편을 최종적으로  고르기로 했다.

 한승엽의 「붉은발말똥게」는 시의성(時宜性)이 있는 글감에다 독특한 발상으로 인해 가장 먼저 눈길이 가는 작품이었다. 우화적인 실존의 인격으로 투사하며 이를 현실의 장력(場力)으로 확대한 붉은발말똥게의 동선과 궤적을 바라보는 작자의 예리하면서도 주 · 객관적인 교차의 시선도 진지함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적 진술의 긴밀한 통사구조가 의도적인 탈문법이라기보다는 좀 미숙해 보이는 듯한 약점 때문에 이완되거나 해체되는 것 같아서 대상으로 미는 데 주저함이 앞섰다.



 임재정의 「물속 경주 남산」과 오정순의 「공터의 풍경」을 두고 오랫동안 논의를 거듭하였다. 「물속 경주 남산」은 매우 환상적인 시다. 환상 그 자체가 주제이기 때문에 이 경우 주제를 현실로 환원시킬 필요가 없다. 이 밤은 어느 인연의 물속인가……화두를 튼 선객(禪客)의 격조 있는 어록과도 같다. 선(禪)의 세계로 약동하는 듯한, 꿈속처럼 아슴해 보이는 화려한 난센스의 언어! 여기에 서정시의 진경(眞境)이 있을 법하다.


 오정순의 「공터의 풍경」은  버려진 그림이 있는 공터의 풍경을 묘사해 가면서 추보식으로 구성한 현대적인 의미의 서경시다. 전통적인 의미의 선정후정이 없다. 시 쓰는 이의 주관적인 감정의 실마리를 끝내 배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제는 오래된 이미지즘 시를 연상하게 하는 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삶의 이면에 생기를 불어넣으며 버려진 의미를 탐색해 가는 가운데, 무언가 채워놓을 수 없는 삶의 아쉽고도 그리운 부분들을 여백처럼 남겨놓고 있다는 점에서 사뭇 다르고, 그래서 한결 인상적인 시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종이 한 장 차이의 독창성과, 여타의 작품들이 지닌 신뢰성의 한 뼘 높이에 있어서, 오정순의 「공터의 풍경」을 대상으로 결정하기로 했다. 천강문학상 시 부문 대상 수상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앞날에 문운이 왕성하기를 기원한다.

                                    
심사위원 : 김종해(시인) 송희복(문학평론가)





제3회 천강문학상 수필부문 대상
 
봄, 수목원을 읽다
 
 
윤 승 원
 
  
   봄, 수목원은 만연체다. 온갖 나무와 풀들이 저마다 화려한 문장을 쓰느라 술렁거린다. 노랗고 빨갛고 흰 색깔들이 나의 독서를 유혹한다. 나는 청명의 안개 속을 걸어 만화방창 꽃의 문장 속으로 들어간다. 병아리 깃털 같은 햇살이 민들레처럼 피어나는 낮 시간도 좋고, 청자 빛 하늘이 노을로 채색되는 저녁 무렵도 좋지만 나는 푸르스름한 이내가 깔린 여명의 수목원을 좋아한다.
  
   제비꽃, 족두리풀, 목련, 명자꽃들이 새 명찰을 달고 제 이름을 불러달라는 듯 손을 흔들고 서있다. 문고판 같은 야생화며 전집류의 나무들이 수목원도서관에 가지런히 꽂혀 있다. 이 푸른 도서관의 사서는 잠시 출타중인 모양이다. 바람이 먼저 책을 읽으려는지 팔랑팔랑 책장을 넘기고 있다. 나는 서둘러 달려온 마음을 옆에 내려놓고 형형색색으로 단장된 신간들을 골라 읽는다. 사춘기 때 밤늦게까지 도서관에 앉아 있던 생각이 나서 설핏 웃음이 난다. 깨알 같은 글씨들을 놓치지 않으려 쪼그려 앉았다 허리를 굽혔다 발뒤꿈치를 들었다하면 그 때마다 나무와 풀꽃들이 내 불편을 덜어주려 같이 쪼그려 앉았다 허리를 폈다 키를 낮추어준다.
  
   제자백가의 백가쟁명(百家爭鳴)이 이만큼이나 할까. 초신성처럼 노란별을 마구 터트리는 생강나무, 자주색튀밥을 펑 튀기처럼 튀겨내는 박태기나무, 개 불알을 덜렁덜렁 매달고 있는 개불알꽃, 초롱모양의 귀걸이를 흔들고 있는 히어리. 나는 꽃과 나무가 전하는 휘황찬란한 문장에 주-욱, 밑줄을 긋는다. 문장들은 내 마음의 텃밭에 새겨진다. 꽃의 문장은 화려하지만 현학적이지 않고 형이상학적이지만 난해하지 않고 단순하지만 무량한 깊이를 가진다.
  
   꽃의 문장은 넉 장이다가 다섯 장이다가 홑받침이다가 더러는 겹받침이다가 변화무쌍하다. 꽃들의 배색은 어떤 단청보다 곱고 정겹다. 어느 채색가나 디자이너도 따라가지 못할 만큼 독창적이다. 현호색은 보라의 농담(濃淡)이 아름답고 꿩의 바람꽃은 흰색과 노랑의 어우러짐이 다정하고, 깽깽이풀은 금방이라도 여우울음소리를 낼 것 같다. 꽃을 꺼내는 줄기와 그것을 감싸고 있는 꽃받침과 꽃잎의 황금비율의 기울기 등은 인위적인 힘으로는 결코 만들어낼 수없는 천연의 아름다움이다.
 
   야생화를 공부하는 나로서는 동물원처럼 야생의 식물을 가두어둔 것에 대해 내심 못마땅해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렇게나마 꽃을 가까이 두고서야 각박한 현실을 위로받을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꽃을 바라볼 때의 마음엔 악이 없다. 사람들은 꽃을 보는 순간 선해지고 샘물처럼 맑아지게 된다. 잠시 꽃을 바라보면서 세파에 찌든 자신을 정화시키는 것이다.
 
   꽃들은 피어날 때를 알고 져야할 때를 제대로 지킨다. 운명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에 순응한다. 명예와 부에 집착하지 않고 시들어 사라지는 것에 애달파하지 않으며 타자와 더불어 대동(大同)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가지면 더 가지려하고, 잡으면 놓지 않으려고 하고, 자신만을 고집하며 주변을 돌아보지 아니한다. 한낱 풀과 나무만도 못한 존재인 것이 사람이다. 그러니 꽃과 나무들은 우리를 가르치는 훌륭한 책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수목원에 오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삶의 고비를 넘어오느라 받은 상처와 아픔들을 치유 받는 것이다. 추위와 강풍을 인내한 꽃들이 피워 올리는 환희의 시간들을 보면서 내 삶의 고단들도 어느 순간 꽃을 피울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져보는 것이다. 나는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저 풀과 나무처럼 매순간마다 최선을 다한 적이 있었던가? 스스로 내가 나를 반성하는 때도 바로 이곳 수목원에서이다.
 
   혹, 도연명의 도원기(桃園記)에 나오는 무릉도원이 여기가 아닐까? 나는 고기잡이가 되어 길을 잃고 여기 수목원에 서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도 가도 온통 꽃으로 덮여있는 화원의 심연. 꽃잎은 푸른 잔디 위에 펄펄 눈처럼 날아 내리고 나는 그만 속세에서 실종되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꽃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꽃 속으로 내가 들어가고, 꽃이 내 안으로 들어오고, 나는 이제 꽃과 합일하여 한 몸이 된다.
  
   다산(茶山)은 죽란시사(竹欄詩社)를 만들어 친구들과 함께 시를 나누었다고 한다. 조선조 책벌레인 이덕무는 책을 켜켜이 쌓아놓은 자신의 방을 소완정(素玩停)이라 불렀다. 풀벌레며 새들의 죽란시사에 귀를 귀울여본다. 꽃책으로 울타리를 삼은 이곳을 가만히 나의 소완정이라 불러보기도 하는 것이다. 추사 김정희는 문자향 서권기(文字香 書券氣)라 했다. 무릇 글씨에서는 향기가 있어야 하고 서책에서는 기(氣)가 있어야 된다는 말이다. 벌, 나비며 햇살과 바람, 사람까지 찾아들게 하는 꽃들이야말로 자연이 쓴 최고의 금석문이 아닐까?
 
   어느새 해가 떠오른다. 꽃잎 끝에 매달려 있던 이슬 꽃들이 반짝 마지막 문장을 남기며 사라진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생을 살다가는 꽃. 생과 사를 한 몸에 담고 있는 저 촌철살인의 마지막 문장을 읽는 묘미 때문에 나는 여명의 수목원을 즐겨 찾아오는 것이다.
 
   봄, 수목원은 싱그럽고 향기로운 도서관이다. 저마다 제 몸 속의 붓을 꺼내 혼신의 힘으로 일필휘지하는 꽃과 나무들. 나의 독서는 초록의 묵향에 흠뻑 물이 들었다. 나는 무슨 문장으로 이 봄을 기록할까? 수목원을 걸어 나오는, 오늘은 내 몸이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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