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에서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최영미(崔泳美, 1961 ~ )

시인. 소설가.서울 출생. 1992년 “창작과 비평” 겨울호에 ‘속초에서’ 등 8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1980년대를 경험한 젊은이들의 상처와 고독을 도시적 감수성과 솔직한 표현으로 그려 내고 있다.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섬세하면서 대담한 언어, 지금 이곳에서의 삶을 직시하는 신선한 리얼리즘으로 한국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문학평론가 최원식에 따르면 "최영미는 첫 시집이 너무 성공한 탓에 문학 외적인 풍문에 휩싸여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불행한 시인이다”. 1992년 등단 이후 시와 소설, 에세이를 넘나들며 6권의 시집을 펴내고, 장편소설 《흉터와 무늬》, 《청동정원》을 출간하고 미술과 축구에 대한 산문을 많이 썼지만, 한국에서 그녀는 여전히 시인으로 더 알려져 있다.

 

 

괴물

 

 최영미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박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나는 소리쳤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감히 30년 선배를 들이받고 나는 도망쳤다.

En이 내게 맥주잔이라도 던지면

새로 산 검정색 조끼가 더러워질까 봐

코트자락 휘날리며 마포의 음식점을 나왔는데

100권의 시집을 펴낸

"En은 수도꼭지야. 틀면 나오거든.

그런데 그 물이 똥물이지 뭐니"

(우리끼리 있을 때) 그를 씹은 소설가 박 선생도

En의 몸집이 커져 괴물이 되자 입을 다물었다.

자기들이 먹는 물이 똥물인지도 모르는

불쌍한 대중들

노털상 후보로 En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En이 노털상을 받는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이 나라를 떠나야지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

괴물을 키운 뒤에 어떻게

괴물을 잡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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