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종/김진수



저보다 더 큰 입이 어디에 있으랴! 하늘로 향하면 욕심이 커질까 당초문 치맛단 아래 없는 듯 숨기고 세계를 품는다.

저물녘, 새벽에 풀어 놓았던 것을 불러드려 다시 품는다. 밤새 품은 세계가 소리가 되는

한밤중, 귀 기울이면 생황, 수공후* 소리 들리는 듯 들리지 않아 요사채 문고리는 몇 번이고 달그락거렸다.

 

새벽녘, 밤새 품어 숙성시킨 세계를 풀어 놓는다. 퍼져나가

하늘이 하늘 되고,

바람이 바람 되고,

새가 새 되어 날갯짓하는

하루.

 

귓전에 맴도는 소리 한 움큼 잡아 맛을 본다.

밤새 문밖이 자그락거리더니 저 종도 나와 같이 잠을 설쳤는지 덜 익어 떫다.

 

새벽을 밟아 달마산** 넘어가야 하는 걸음은 헉헉거리고

큰 입 아래 묻혀있는

작은 항아리 속에는 소리가 되지 못한 마음만 그득하다.

 

* 범종 몸체에 새겨진 비천상이 연주하는 악기

** 전남 해남군에 있는 산. 미황사가 있음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과와 벌레의 함수관계/노기정  (0) 2019.08.08
골목의 생존 방식/김효정  (0) 2019.08.08
북항/권수인  (0) 2019.08.08
베들레햄별꽃/ 구녹원  (0) 2019.08.08
비 모음시 8월 6일 프란시스코 비켜갈까?  (0) 2019.08.07


북항/권수인


북적거리던 북항이 고요하다

벽에 걸린 마지막 달력처럼,

 

간간이 파도 울음 사이로 꼬리만 남은 겨울이 서표처럼 꽂힌다

열리고 닫히는 수많은 페이지

모래밭에 찍힌 활자를 물결이 지우고

그 틈으로 소리만 드나든다

 

바다는 겨울의 마지막 장을 남겨두고

차마 넘길 수 없다는 듯

다 읽지 못한 파도의 호흡을 다시 덮는다

 

동안거에 들 수 없는 파도는

차가운 바람에 머리를 식히며

끊임없이 모래밭에 밑줄을 긋는다

끝장까지 정독을 하고 나면 또 한해가 바뀔까

 

저 깊은 수심을 건너

수평선을 넘어간 나의 꿈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물수제비를 날린다

서너 번 물꽃이 핀다

 

물살에 떠밀려 마침표로 서 있는

저 폐선은 바다의 아픈 손가락이다

 

갈매기 한 마리 출항을 알리던 낡은 깃대에 앉아

먼 하늘을 바라본다

북항의 하루가 저물고 있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골목의 생존 방식/김효정  (0) 2019.08.08
법종/김진수  (0) 2019.08.08
베들레햄별꽃/ 구녹원  (0) 2019.08.08
비 모음시 8월 6일 프란시스코 비켜갈까?  (0) 2019.08.07
매미  (0) 2019.08.07


베들레햄별꽃/ 구녹원


별을 바라보면 종소리가 쩡하고 울린다

별이 부딪히는 소리, 귀를 기울이면 꽃 속에선 별이 움직이고 나는 매일 금요일 밤이 된다 천만년이 흐른 별의 기억, 고개를 들면 목젖이 환하게 아파온다 온몸이 당신의 주기를 흉내 내고 있었던 걸까

 

당신은 흠뻑 스며있다 오래전에 메시지가 차단된 듯 괘도를 버리고 이끼풀과 함께 지구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깊게 젖은 땅이 누구의 의지인 것을 알기에 정착을 탓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어른이 되는 동안 베들레햄별꽃이 핀 것은

빛의 안쪽이 궁금했기 때문

물음표의 세계에선 신화가 꿈틀거린다

별이 집을 지었다는 이야기를 당신에게서 처음 듣는다

새벽이면 무릎을 꿇고 하늘을 바라보는 것은

개밥바라기별이 슬밋, 은빛 생으로 흩어지기 때문

맹골수도 노을 너머로 별의 문장이 된 아이들 얼굴에도

1분에 400번의 날개 짓을 하는 퍼핀 에게도 별이 머물고 있다

안개가 지운 풍경이 다시 안개를 낳듯이

그 집은 무럭무럭 자라나

어른보다 먼저 아이들 얼굴에 별꽃을 피운다

 

내 안에 또 하나의 별꽃으로 살고 있는 당신을 바라본다

가벼워진다

이번엔 당신 안에 살고 있는 나를 볼 차례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법종/김진수  (0) 2019.08.08
북항/권수인  (0) 2019.08.08
비 모음시 8월 6일 프란시스코 비켜갈까?  (0) 2019.08.07
매미  (0) 2019.08.07
정희성 시모음  (0) 2019.08.01


비 내리는 오후 세 시

 

 

박제영

 

 


그리움이란
마음 한 켠이 새고 있다는 것이니
빗 속에 누군가 그립다면
마음 한 둑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니

 
비가 내린다, 그대 부디, 조심하기를
심하게 젖으면, 젖어들면, 허물어지는 법이니


비 내리는 오후 세 시
마침내 무너진 당신, 견인되고 있는 당신


한 때는 '나' 이기도 했던 당신
떠나보낸 줄 알았는데


비가 내리는 오후 세 시
나를 견인하고 있는 당신
 

 

-『뜻밖에』 (애지, 2008)

 

 

 

 



 

 

+ 우현(雨絃)환상곡

빗줄기는 하늘에서 땅으로 이어진 현(絃)이어서
나뭇잎은 수만 개 건반이어서
바람은 손이 안 보이는 연주가여서
간판을 단 건물도 고양이도 웅크려 귀를 세웠는데
가끔 천공을 헤매며 흙 입술로 부는 휘파람 소리

화초들은 몸이 젖어서 아무데나 쓰러지고
수목들은 물웅덩이에 발을 담그고
비바람을 종교처럼 모시며 휘어지는데
오늘은 나도 종교 같은 분에게 젖어 있는데
이 몸에 우주가 헌정하는 우현환상곡.
(공광규·시인, 1960-)

 



+ 나뭇잎을 닦다

저 소나기가 나뭇잎을 닦아주고 가는 것을 보라
저 가랑비가 나뭇잎을 닦아주고 가는 것을 보라
저 봄비가 나뭇잎을 닦아주고 기뻐하는 것을 보라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가 고이고이 잠드는 것을 보라
우리가 나뭇잎에 얹은 먼지를 닦는 일은
우리 스스로 나뭇잎이 되는 일이다
우리 스스로 푸른 하늘이 되는 일이다
나뭇잎에 앉은
먼지 한번 닦아주지 못하고 사람이 죽는다면
사람은 그 얼마나 쓸쓸한 것이냐
(정호승·시인, 1950-)

 

 



+ 소나기

저물 무렵
소나기를 만난 사람들은
알지
누군가가 고즈넉이 그리워하며
미루나무 아래 앉아 다리쉼을 하다가
그때 쏟아지는 소나기를 바라본
사람들은 알지
자신을 속인다는 것이
얼마나 참기 힘든 걱정이라는 것을
사랑하는 이를 속인다는 것이
얼마나 참기 힘든 분노라는 것을
그 소나기에
가슴을 적신 사람이라면 알지
자신을 속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속이는 것이
또한 얼마나 쓸쓸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곽재구·시인, 1954-)

 

 



+ 비 오는 날

아침 깨니
부실부실 가랑비 내린다.
자는 마누라 지갑을 뒤져
백오십 원을 훔쳐
아침 해장으로 나간다.
막걸리 한 잔 내 속을 지지면
어찌 이리도 기분이 좋으냐?
가방 들고 지나는 학생들이
그렇게도 싱싱하게 보이고
나의 늙음은 그저 노인 같다
비오는 아침의 이 신선감을
나는 어이 표현하리오?
그저 사는 대로 살다가
깨끗이 눈감으리오.
(천상병·시인, 1930-1993)

 

 

+ 비 오는 날에

내 우산살이 너를 찌른다면, 미안하다
비닐 우산이여
나의 우산은 팽팽하고
단단한 강철의 부리를 지니고 있어
비 오는 날에도 걱정이 없었거니
이제는 걱정이 된다
빗속을 함께 걸어가면서 행여
댓살 몇 개가 엉성하게 받치고 선
네 약한 푸른 살을 찢게 될까 두렵구나
나의 단단함이 가시가 되고
나의 팽팽함이 너를 주눅들게 한다면
차라리 이 우산을 접어 두겠다
몸이 젖으면 어떠랴
만물이 눅눅한 슬픔에 녹고 있는데
빗발이 드세기로
우리의 살끼리 부대낌만 하랴
비를 나누어 맞는 기쁨,
젖은 어깨에 손을 얹어
따뜻한 체온이 되어줄 수도 있는
이 비 오는 날에
내 손에 들린 우산이 무겁기만 하다
(나희덕·시인, 1966-)

 

+ 우산 속으로도 비 소리는 내린다

우산은 말라가는 가슴 접고
얼마나 비를 기다렸을까
비는 또 오는 게 아니라
비를 기다리는 누군가를 위해
내린다는 생각을 위하여
혼자 마신 술에 넘쳐 거리로 토해지면
우산 속으로도 빗소리는 내린다
정작 술 취하고 싶은 건
내가 아닌 나의 나날인데
비가와 선명해진 원고지칸 같은
보도블록을 위를
타인에 떠밀린 탓보단
스스로의 잘못된 보행으로
비틀비틀 내 잘못 써온 날들이
우산처럼 비가 오면
가슴 확 펼쳐 사랑한번 못해본
쓴 기억을 끌며
나는 얼마나 더 가슴을 말려야
우산이 될 수 있나
어쩌면 틀렸을지도 모르는 질문에
소낙비에 가슴을 적신다
우산처럼 가슴한번
확 펼쳐보지 못한 날들이
우산처럼 가슴을 확 펼쳐보는
사랑을 꿈꾸며
비 내리는 날 낮술에 취해
젖어오는 생각의 발목으로
비가 싫어 우산을 쓴 것이 아닌
사람들의 사이를 걷고 또 걸으면
우산 속으로도 빗소리는 내린다
(함민복·시인, 1962-)

+ 빗소리 듣는 동안

1970년대 편물점 단칸방에 누나들이 무릎 맞대고 밤새 가랑가랑 연애 얘기하는 것처럼
비가 오시네

나 혼자 잠든 척 하면서 그 누나들의
치맛자락이 방바닥을 쓰는 소리까지 다 듣던 귀로 나는
빗소리를 듣네

빗소리는
마당이 빗방울을 깨물어 먹는
소리

맛있게, 맛있게 양푼 밥을 누나들은 같이 비볐네
그때 분주히 숟가락이 그릇을 긁던 소리
빗소리

삶은 때로 머리채를 휘어 잡히기도 하였으나
술상 두드리며 노래 부르는 시간보다
목 빼고 빗줄기처럼 우는 날이 많았으나

빗소리 듣는 동안......

연못물은 젖이 불어
이 세상 들녘 다 먹이고도 남았다네
미루나무 같은 내 장단지에도 그냥, 살이 올랐다네.
(안도현·시인, 1961-)

+ 가랑비 오는 날

가랑비가 촉촉이 내렸어요.
꽃들 머리를 어루만지며
우리 머리를 어루만지며

하느님이 오늘만큼은 우리를
꽃으로 여기셨나 봐요.
꽃같이 여기셨나 봐요.

모처럼 오늘은
나도 한 송이 꽃이 아니었을까?
(박두순·아동문학가)

+ 풀밭에서

여우비
그친 뒤
풀밭에 갔더니
빛들은
풀잎으로
알몸을 가리고
젖은 몸을 말리고 있었다.
부끄러운 아기 얼굴로
배시시 웃고 있었다.
(박유석·아동문학가)

+ 빗방울의 더하기

톡톡톡
잎새에 더해
초록빛 키우고

톡톡톡
꽃잎에 더해
꽃잎 웃음 키우고

톡톡톡
냇물에 더해
물소리 키운다

톡톡톡
더하면서
남은 키우고

톡톡톡
더하면서
제 모습은 뺀다.
(박소명·아동문학가)

 

+ 빗방울은 둥글다

만약에
빗방울이
세모나 네모여 봐

새싹이랑
풀잎이
얼마나 아프겠니?
(손동연·아동문학가)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 조병화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과거가 있단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의 과거가...
비가 오는 거리를 혼자 걸으면서
무언가 생각할줄 모르는 사람은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란다
낙옆이 떨어져 뒹구는 거리에
한줄의 시를 띄우지 못하는 사람은
애인이 없는 사람이란다
함박눈 내리는 밤에 혼자 앉아 있으면서도
꼭 닫힌 창문으로 눈이 가지지 않는 사람은
사랑의 멋을 모르는 가엾은 사람이란다

 
 
빗소리 / 주요한

비가 옵니다
밤은 고요히 깃을 벌리고
비는뜰위에 속삭입니다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 같이

이지러진 달이 실날같고
볕에서도 봄이 흐를듯이
따뜻한 바람이 불더니
오늘은 이 어둔밤을 비가 옵니다

비가옵니다
다정한 손님같이 비가옵니다
창을 열고 맞으려 하여도
보이지 않게 속삭이며 비가 옵니다

비가옵니다
뜰 위에 창밖에 지붕에
남 모를 기쁜 소식을
나의 가슴에 전하는 비가 옵니다


비1             이성복

                        가라고 가라고 소리쳐 보냈더니

                        꺼이꺼이 울며 가더니

                        한밤중 당신은 창가에 와서 웁니다

 

                        창가 후박나무 잎새를 치고

                        포석을 치고

                        담벼락을 치고 울더니

 

                       창을 열면 창턱을 뛰어 넘어

                       온 몸을 적십니다

                                     

                              시집<그 여름의 끝> 문지. 2000년

                

 

                         

                              비            김사인

                                  가는 비여 가는 비여

                                  가는 저 사내 뒤에 비여

                                  미루나무 무심한 둥치에도

                                  가는 비여

                                  스물도 전에 나는 이미 늙었고

                                  바다는 아직 먼 곳에 있다

                                  여윈 등 지고 가는 비

                                  가는 가을비

                                  잡지도 못한다 시들어 가는 비

                                                                  

     

         

     비                나해철

비오는 날을

젖었다

 

함께라면 기쁨에

따로라면 그리움에

젖었다

 

시간이 흐르고

비 오는 날은 젖었다

 

당신은 뼈아픔에

나는 슬픔에

젖었다

 

당신 얼굴에 흐르는 비로

멀리서도

내 얼굴 젖었다

 

 

 

                       비     문인수

                         흐린 날은, 바람 한 점 없는 날은 비

                         젖은 것들의 몸이 잘 보인다 치잉 칭 감기는

                         빗줄기의 한쪽 끝을 물고 새 날아간다 건물과 건물 사이

                         세뼘 잿빛 하늘 가로질러 짧게 사라진다

                         창유리 창유리들이,

                         나무 나무의 이파리 이파리 풀잎들이

                         모두 그쪽을 보고 있다

                         잘 보이는, 뇌리 속의 새 길게 날아가는 아래,

                         젖어 하염없이 웅크린

                         몸, 섬 같구나 그의 유배지인 몸

 

 

 

                            비       백석

                          아카시아들이 언제 흰 두레방석을 깔았나

                          어데서 물쿤 개비린내가 온다


 

                비        이병기

짐을 매어놓고 떠나려 하시는 이날

어둔 새벽부터 시름없이 나리는 비

내일도 나리오소서 연일 두고 오소서

 

부디 머나먼 길 떠나지 마오시라

날이 저물도록 시름없이 나리는 비

저윽이 말리는 정은 날보다도 더하오

 

잡었던 그 소매를 뿌리치고 떠나신다

갑자기 꿈을 깨니 반가운 빗소리라

매어둔 짐을 보고 눈을 도로 감으오

 

 

 

                          비      이승훈

                           갈매기 하나 유리창에 부딪쳐 피를 흘린다

                           비 오는 날엔 술을 파는 상점에서도 술 대신 비를 팔고,

                           비 오는 날 거리로 나가는 건 나가지 않는거나 같다

                           벌판에 서 있는 정신병원만 유독 비에 젖는다

                           비 오는 날엔 누가 찾아와도 이내 더나 버린다

                           그가 떠나 버린 자리엔 그의 레인코트만 비에 젖을 뿐

                           아아 육체는 어디 갔는가

                           정신은 기아는 빵은 , 모르겠다

                           비 오는 날의 빵은 비, 술도 비이다

 


말할 수 없는 비밀   2007년   주걸륜. 증개현. 

 

 

 

 

                 비               이진명

그녀는 엷은 돌빛의 옷을 입고 왔다

기다란 치마 흐르며 왔다

멀리 고향의 산간 지방에서 왔다

산나리처럼 고개 꺾으며 오래 걸어서 왔다

제비똥 떨어진 그루터기에서 신발을 고쳐 신으며 왔다

일요일, 점심 때도 훨씬 지나 도착한 그녀는

내 집마당 대추나무 아래 조그만게 서있었다

눈밑 그늘진 곳이 더 파랬다

오는대로로 나를 불러 깨우지 않고 참!

언제까지 서 있으려고 바로 깨유지 않고 참!

 

 

                                

                                                

 

 

 

 

              비           정지용(1902 ㅡ ?)옥천

돌에

그늘이 차고,

따로 몰리는

소소리 바람

앞 섰거니 하여

꼬리 치날리어 세우고,

종종다리 까칠한

산새 걸음걸이.

여울 지어

수척한 흰 물살

갈갈이

손가락 펴고

멎은 듯

새삼 듣는 빗낯

붉은 감잎

소란히 밟고 간다

 

 

                                                                             

 

        

 

 

  

     

 

 

                    비     황인숙

                           아, 저, 하얀, 무수한, 맨종아리들,

                           찰박거리는 맨발들,

                           찰박 찰박 찰박 맨발들,

                           맨발들, 맨발들, 맨발들.

                           쉬지 않고 찰박 걷는

                           티눈 하나 없는

                           작은 발들

                           맨발로 끼여들고 싶게 하는                                            

          

 

                            

                                소나기     박용래

                                    누웠는 사람보다 앉았는 사람

                                    앉았는 사람보다 섰는 사람

                                    섰는 사람보다 걷는 사람

                                    혼자 걷는 사람보다 송아지 두, 세 마리 앞세우고

                                    소나기에 쫓기는 사람                                            

            

                                               

                          소나기           전남진

                             지난 날 내 비겁함이

 

                             오늘은 종일 구름으로 글썽인다

                             때 늦은 후회처럼 비 내린다

                             두둑두둑 산이 부러지고

                             길이 거칠게 튀어오른다

                             피할 수만 있다면 어디든 상관 없다고

                             함부로 뛰어가는 신발에 꽃잎이 묻어왔다

                             가을이 끝나는 길, 네 마음에 묻은 내가

                             비를 피해 뛰어가고 있었다                                

                               

 

                              소나기       정희성

                         날 기울고 소소리바람 불어 구름 엉키며

                         천둥 번개 비바람 몰아쳐 천지를 휩쓸어오는데

                         앞산 키 큰 미루나무 숲이 환호작약

                         미친 듯 몸 뒤채며 운우의 정 나누고 있다

 

                        나도 벌거벗고 벼락 맞으러 달려나가고 싶다                                           

                   

  

                               소나기     황순원(1915 - 2000)

                  글쎄 말이지 이번 앤 꽤 여러 날 앓는 걸 약두 변변히 못 써 봤다드군

                  지금 같아서는 윤 초시네두 대가 끊긴 셈이지...

                  참 이번 기집애는 어린 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어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어?

                  자기가 죽거든 자기 입은 옷을 그대루 입혀서 묻어 달라구 ...

                                     

                                           1953년 작품

                                  

 

                         소나기,융단폭격     김동호

                                    자전 아니다 자전이다

                                    지상의 젖 적게 먹은 아이들

                                    하늘의 젖 많이 먹도록 지구가

                                    돌며 돌며 들려주는 말씀이다

 

                                    멀리 폭격기 소리 들려온다

                                    가까이 폭탄 터지는 소리 들려온다

                                    와작짝 하늘 찢어지는 소리 들려온다

                                    천지를 집어 삼킬 듯 번득이는 적룡의

                                    혓바닥을 신호로 마침내 융단폭격이 시작된다

 

                                   온천지가 암흑이다 눈을 뜰 수가 없다

                                   한 발자국도 나갈 수가 없다 쓰러지는 것들

                                   나둥그라지는 것들 점점 커지고 빨라지고

                                   숨가쁘게 일어나는 무서운 ...

 

                                   쏟아지는 탄알들에 지붕이 펑펑 뚫린다

                                   아스팔트 차도가 퐁퐁 패인다 보도가

                                   피투성이다 폭탄보다 무서운 바람 폭풍

                                   거목이 쓰러진다 지붕이 날아간다

 

                                   그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견디다 못한 사람들이 방탄 조끼도 없이

                                   포화 속으로 달려간다 사생결단 집으로

                                   향하는 것이다 죽어도 집에 가서 죽겠다며

 

                                  그러나 거짓말처럼 폭격 갑자기 멎고 햇살

                                  환히 비쳐온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푸른 하늘 열리고 매미들 일제히 공습해제

                                  싸이렌 울린다

 

                                  그 많은 ..들 모두 어디로 갔을까

                                  뻥 - 뚫린 것은 나의 두 눈뿐 지붕 멀쩡하다

                                  길 멀쩡하다 나무들 멀쩡하다

 

                                 가로수 사이로 빨간 피자통 오토바이가 나타난다

                                 초록 가방 멘 단발머리 소녀가 나타난다

                                 롤러 스케이트 타고 오는 저 아이는?

                                 우리 옆집 꼬마!  육이오 전쟁 때 B 29폭격에

                                 온 가족 다 잃고 고아가 된 그분의 아들의 아들!

 

                                 그렇다 결국 아무 일도 없었다

                                 그렇지 않으냐

                                  꼬마야 나의 친구 꼬마야 나의 사랑 꼬마야

 

 

 

              

 

 

                             소낙비            유금(1741-1788)

                                소낙비 굵기는 우박과 같고

                                사나운 바람은 말이 내닫는 듯하네

                                하늘에선 가늘게 내리더니만

                                땅에 닿으면 무섭게 튀어오르네

                                종일 비가 내릴 참인데

                                저녁까지 비 온다고 뭘 근심하나

                                낙숫물 줄줄 처마에 떨어지니까

                                부엌여종 동이에 가득 찬 물 기뻐하누나


 

 

 

밤비 소리를 듣다

김문억

 

 

문득 어두컴컴한 동굴 속으로 들어간 나

 

고대 바빌로니아 상형문자를 해독하며  이집트 신전에 그려진 벽화를 더듬다 보면 수화로 다가 오는 아득하기만 한

말씀들이 호롱불빛 아래서 가물가물 흔들린다

 

도무지 판독은 안 되지만

이 편안한 옛 이야기

 

 

 


김문억



돈 받지 말고 그냥 주어라 그냥 주어라


하늘에서 내리는 것은 눈이나 진눈개비 비바람 햇빛까지 모두 공짜니라

물 값 받지 말고 그냥 주어라 그냥 주어라

물을 너무 팔아먹어서 빙하가 다 무너지고 지구 온난화로 하늘님도 이젠 힘이 부친다고

요즈음 자주 말씀 하시네 

소나기로 말씀 하시네


사랑도 값 매기지 말고 이렇게 듬뿍

그냥 주어라 그냥 주어라

 

 

 

 밤비

                         김문억

 

너 오는 발자욱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지만

내가 지금 너에게 어찌하면 좋겠느냐

부글거리며 넘실거리며

너는 애처럽게 게 끓어 넘치는데

자칫 죄가 될 수 있는  몸둥아리 밖에는

나는 지금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구나

 

             

 

        밤비 

김문억  

 

내가 어찌해야 너를 다 채우겠느냐

 

토닥토닥 초저녁부터 투정으로 시작한 비가

 

잠 한 숨 안 재우면서 밤새도록 보채네.

 

 

 

소낙비 5

김문억

 

그렇게 성질 부리고  얻은 것이 뭐 있니

 

패이고 무너지고 다 떠내려 보내 놓고

 

속 한 번 후련하겠지만 남은 것은 상처 뿐.

 

 

 

 

소낙비 2

김문억  

 

장엄한 오키스트라

지휘자는 누구냐

 

물 막대로 현弦을 켜는 관현악의 앙상불,

연주자의 가슴에서는 태풍 일고 천둥 치고

오선지는 하늘 땅 사이에서 비 바람 번개 치며 뒤집어지며 고꾸라지며

사랑이여

이별이여

죽음이여

통곡이여  

휘몰아치는 휘몰이 악장이 거듭거듭 너머가고 있다.

 

만취한 객석에서는

그치지 않는 박수 소리. 

 

 

       

 

소낙비 3

김문억

 

환하고 밝기만 했던 지난 몇 년 동안

망설이고 서먹했던 우리 사이

검은 구름으로 하늘을 가려 놓고

이렇게 느닷없이 옷을 벗으면

소중했던 슬픔을 어이하려고

서럽고  미안해서 어이하려고.

 


 


 

 


  비

                   김문억

 

 

허공에 빗금 긋고

땅 위에 마침표 찍고

 

다 이루었느니라--

다 이루었느니라--

 

편안히 드러누워서

속절없이 흘러가네.

 

 

 

가을 비

김문억

 

상처가 그리울 때

아름다운 비밀이 소리치고 싶을 때

 

무슨 심술이냐  너 잊었다고 생각 되었을 때 잊고 싶은만큼 잊지 못하는 것까지 흔들어 깨우는 너 가슴 뼈 마디마다 금 간 자리 지우며 위험 수위까지 육박하는 집중 폭우로 비가 온다 가을 비 상처가 그리울 때 아름다운 비밀이 소리치고 싶을 때

 

기억의 맨 끝에서

포박되어 있는 너.

 

 

 

다시 소낙비

김문억  

 

그러지 마

그렇게 너무 비싼 감정 치르지 마

힘껏 쓸어간다고 해서 다 쓸리는 것도 아니고

뒤 끝만 허탈한거야

패인 자국만 남는거야

 

싫다는 것 그렇게 억지로는 끌지 마

이름모를 풀 한 포기도 다 번지 수가 있는거야

일순간 넘치는 것보다는

기다리며 사는 거야

 

 

 

소낙비

                  초정

 

누구냐

삭발을 하고 기갈난 허기를 끌고

상채기 투성이로 시위를 하는 이는

 

휘장을 휘두르며 휘청거리며 절룩거리며 포성이 번쩍이는 不可分의 운무 속으로 장대를 휘두르며 죽창을 내려 찍으며 사태진 분노를 끌어안고 울부짖다가

 

서로가 아무 일도 아니라면서

유감을 풀고 흘러 간다.

 

 

 

 

장마 1

김문억

 

네가 그리운 날은

날 밝은 대낮에도 벼락같이 비가 오고

비 오는 밤이면 달을 내다 걸었다

 

끊임없이 연일

큐우핏 화살이 가시울을 뚫고 꽂혀오면

뚫어진 가슴에서 선홍빛 꽃이 펑펑 피고 

청록빛 산정에서 불이 활활 탄다

아프게 바싹 타버린 잿더미에서

연소된 그리움이 물안개로 자욱한 날 

 

산은 하루에도 몇 번 씩 떠나고 돌아 오며

우리의 거리를 확인해보며

고백하는 소낙비가

참았던 말 초서로 단숨에 막 휘갈긴다

알 듯 모를 듯 판독하기 어지럽다

 

먼 산에 구름 가면

물 흐르는 소리

비 개이면 푸른 숲이 더 가깝게 다가 오겠구나.

 

 

장마

김문억  

 

열쇠를 잃어버린 것인가

몇 날째 하늘은 금고처럼 닫혀있다

어디서 잃어버린 열쇠를 찾아낼 수 있겠는가

누가 와서 자물통을 열어 줄 것인가

찢어진 구름 사이로 忘中이라 써 있다

 

흘러 내리는 눈꺼풀을 걷어 올리면서

여보---

집에 가야지

집에 가야지

길고 긴 목 구멍으로 간구의 기도가 너머 가고

끝내 긴 울음으로 통곡하던 이별의 시간 뒤에서

하늘은 대책없이 비만 퍼붓고 있다

 

싸우지 않고 그냥 살아도

지극하게 사랑하며 끌어 안고 살아도

이별은 저절로 오는 것이구나

완강한 힘으로 끌고 갔구나

 

산에 너를 묻은 후

너 없는 밥상에서 밥을 먹은 후 

밤마다 나는 산 속에서 잠들고

맨발로 흙을 밟는다는 일이 이렇게 송구스럽다

고맙다

 

책장 계속  넘기다 보면

영어의 긴 세월에서 출옥을 기다리는

빛나는 태양 하나 있을 것이며.

 

 

밤비

   김문억  

 

 

물이 타고 있다

밝혀서 환하게 불꽃이 되고 싶은 밤비

 

수시로 벙글어 오는 그리움 잠재우지 못하고

밤비의 땔감이 된 나의 잠은 깜깜한 재가 되어

추억은 낙하산 타고 빗줄기 따라 내려 오지만

한 번 떠난 물은 돌아 오지 않는다

맨 발로 서로 갈라진 후 역류하지 못한 물은 지금

어느 하구에서 서성이고 있을까

   자판기 소리를 타고 소낙비로 왔던 너

기억조차 목이 타는 밤 촛농처럼 흘러 내리며

심지뼈를 태우는 뜨거운 밤비

 

번개는 기억을 치고

천둥은 뺨을 때린다

 

 

 

봄비

                        김문억

 

종일 하늘에서 소주를 내리고 있다

만취한 나무들은 건들건들 가고 있는데

잔 권할 사람이 없어 날 장단만 치고 있다.

 

 

소낙비

      김문억

 

 

소낙비가 내린다

 

우산 하나를 두 사람이 쓰고 간다

기둥 하나를 두 사람이 잡고 간다

여자의 몸을 가리고 가는 남자의 한 쪽 어깨가 다 젖었다

 

한여자를 보호하기 위해

젖은 어깨가 따듯해 보인다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다.

 

남자의 어깨가 흠뻑 젖고부터

멀리 사라지고 있는 두 사람을 따라가며 소낙비가 퍼붓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따뜻한 빗속으로 들어가서

가슴 깊은 곳까지 젖고 있었다.

 

 

장마

     김문억

 

평택평야 우리땅에 철조망을 둘렀다

 

지루하다

가뭄으로 갈라져 금간 틈, 틈 사이에서

美軍은 집을 짓고 農軍은 모를 심고

아니오

아니오

단답형 쇠막대로

단답형 물대포로

한냉전선 난기류 집중호우 퍼부으며

범람하는 홍수경보

다듬잇돌, 반닫이, 징검다리 다 떠내려가네.

 

 

장맛비 그치고 나면

복구 비나 주느냐?

 

 

 

소낙비

김문억

 

모름지기 이렇게 한 번 울어 본적 있느냐

발가벗고도 부끄럽지 않게 통곡한 적 있느냐

맨발로 저리 고꾸라지며 달려본 적 있느냐

 

 

밤비 소리에  잠을 깨다

                             김문억

 

 

철벅철벅 중랑천 저 아랫녁에서 누가

오고 있는 것인가

가고 있는 것인가

아무도 보이지 않네

보이는 듯 했는데

 

짐짓 아닌 체 하면서

너는 왜 알몸이 되어 

외줄 타고 내려와서

내 잠결을 밟고 가느냐

물꽃을 만들어 놓고

울고 웃고 하느냐

 

집시처럼 곡예사처럼

불쌍해야만 행복했던

내 안식의 쉼표를 모아

징검다리 놓고 있다

물꽃이 환한 꽃밭을 건너 오실

다리 하나 놓고 있다

 

 

소낙비

김문억

 

 

게 섯거라

게 섯거라 이 놈

거기 서지 못하겠느냐

 

준마를 몰아 쫓아가며 호통을 치지만

숨 넘어가게 호통 치지만

 

달아날 길을 터주고 있다

쫓는자가 울고  있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북항/권수인  (0) 2019.08.08
베들레햄별꽃/ 구녹원  (0) 2019.08.08
매미  (0) 2019.08.07
정희성 시모음  (0) 2019.08.01
답청(踏靑) / 정희성  (0) 2019.08.01







매 미

 

         - 황동규

 

 

저 매미 소리

어깨에 날개 해달기 위해 십여 년을 땅속에서 기어다닌

저 매미의 소리

어깨 서늘한,

 

나도 쉰 몇 해를 땅바닥을 기어다녔다.

매년 이삿짐을 싸들고

전셋집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꿈틀대며 울기도 고개 쳐들고 소리치기도 했다.

어두운 봄꽃도 환한 가을산도 있었다.

이제 간신히 알게 된 침묵,

쉰 몇 해 만의 울음!

 

 


- 시집 『꽃의 고요』 (문학과지성사, 2006)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베들레햄별꽃/ 구녹원  (0) 2019.08.08
비 모음시 8월 6일 프란시스코 비켜갈까?  (0) 2019.08.07
정희성 시모음  (0) 2019.08.01
답청(踏靑) / 정희성  (0) 2019.08.01
이파리의 저녁 식사 / 황병승  (0) 2019.07.30





옹기전에서/정희성-

나는 웬지 잘 빚어진 항아리보다

좀 실수를 한 듯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아내를 따라와 옹기를 고르면서

늘 느끼는 일이지만

몸소 질그릇을 굽는다는

옹기전 주인의 모습에도

어딘다 좀 빈데가 있어

그것이 그렇게 넉넉해 보였다

내가 골라놓은 질그릇을 보고

아내는 곧장 화를 내지만

뒷전을 돌아보면

그가 그냥 투박하게 웃고 섰다

가끔 생각해보곤 하는데

나는 어딘가 좀 모자라는 놈인가 싶다

질그릇 하나를 고르는 데도

실수한 것보다는 차라리

실패한 것을 택하니






내 시는 나와 함께/정희성-


나 떠나는 날 내 시도 데리고 가리
시는 언어 구조물이라지만
서울의 아파트 같은 콘크리트 건물과는 달라서
그 속에 들어가 즐겁게 혹은 서럽게 살다가
아무도 없는 방 안 휘이 한번 둘러보고
침대에 몸을 눕힌 채 조용히 눈을 감고
그렇게 오랜 세월 흘러도 흉물스럽지는 않으리
나 죽고 나면 내 시를 읽을 사람 없고
평생 두고 지은 언어 구조물은 무너지고
아무도 들어가 사는 이 없고
기쁨이나 슬픔도 형용 할 수 없는 표정으로 남았다가
모래처럼 흩어지고 혹은 허공 속에 증발되어
자연으로 고스란히 돌아갈 테니까



선물/정희성- 



그에게 시간을 선물했네

나에게 남겨진 모든 시간을

심장이 멎은 뒤에도

두근대며 흘러갈 그 시간을

친구가 눈감던 날

나 문득 두려움 느꼈네

이 사랑 영원할 수 있을까

그에게 시간을 선물했네

나 죽은 뒤에도 끝없이 흐를

여울진 그리움의 시간을



 

물구나무서서 보다/정희성-



이것은 정말 거꾸로 된 세상*

집 잃은 시민들이 시위하다 불타 죽은 아침

억울해 울면서 항복하듯 다리를 들고

팔목이 시도록 맨손으로 우리는

이 땅을 디딜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가난이 제 탓만도 아닌데

우리들의 시대는 집이 헐린 채

제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을

도심 속의 테러리스트라 부르고 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 사람들한테 쫓겨 가자지구로 간

팔레스타인은 팔레스타인에만 있는 게 아니다

요르단에서 만난 팔레스타인 소년은

언젠가 조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장난감 총을 들고 전사의 꿈을 키우고 있고

아마 머지않아 테러리스트가 될 것이다

이것은 정말 거꾸로 된 세상, 이상한 나라의

황혼이 짙어지면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날기 시작하고

지금 집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죄를 지어

겨울이 더 깊어지기 전에 서둘러

촛불을 들고 어두운 감옥으로 가리라

감옥 밖이 차라리 감옥인 세상이기에

 

* 하이네의 시 「거꾸로 된 세상」의 첫 구절.



 

곰삭은 젓갈 같은/정희성-

  


아리고 쓰린 상처

소금에 절여두고

슬픔 몰래

곰삭은 젓갈 같은

시나 한수 지었으면

짭짤하고 쌉싸름한

황석어나 멸치 젓갈

노여움 몰래

가시도 삭아내린

시나 한수 지었으면


 

 

[ 정희성 시인 약력 ]

 

*1945년 경남 창원 출생.

*서울대 국문과 졸업 및 같은 대학원 졸업.

*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답청』『저문 강에 삽을 씻고』『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詩를 찾아서』『돌아다보면 문득』 『그리운 나무』.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 모음시 8월 6일 프란시스코 비켜갈까?  (0) 2019.08.07
매미  (0) 2019.08.07
답청(踏靑) / 정희성  (0) 2019.08.01
이파리의 저녁 식사 / 황병승  (0) 2019.07.30
백 점 맞은 연못/박승우  (0) 2019.07.20





답청(踏靑) / 정희성


풀을 밟아라

들녘엔 매맞은 풀

맞을수록 시퍼런

봄이 온다

봄이 와도 우리가 이룰 수 없어

봄은 스스로 풀밭을 이루었다

이 나라의 어두운 아희들아

풀을 밟아라

밟으면 밟을수록 푸른

풀을 밟아라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매미  (0) 2019.08.07
정희성 시모음  (0) 2019.08.01
이파리의 저녁 식사 / 황병승  (0) 2019.07.30
백 점 맞은 연못/박승우  (0) 2019.07.20
봉숭아/도종환  (0) 2019.07.19

 

이파리의 저녁 식사 / 황병승


시원스럽게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났어요

 어머니 빗소리가 좋아요

 머리맡에서 검정 쌀을 씻으며 당신은 소리 없이 웃었고

 그런데 참 어머니는 재작년에 돌아가셨잖아요


 나는 두 번 잠에서 깨어났어요

 창가의 제라늄이 붉은 땀을 뚝뚝 흘리는 여름 오후


 안녕 파티에 올 거니 눈이 크구나 짧고 분명하게 종이 인형

처럼 말하는 여자친구 하나 갖고 싶은 계절이에요 


 언제부턴가 누렇게 변한 좌변기, 에 앉아 열심히 삼십 세를 

생각하지만 개운하지 않아요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저 제라늄 이파리 어쩌면 시간의 것

이에요


 사람들과 방금했던 약속조차 까맣게 잊는 날들

 베란다에 서서 우두커니 놀이터를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하나 둘 놀던 아이들이 지워지고

 꿈속의 시계 피에로 들쥐들이

 어느새 미끄럼틀을 차지하는 사이………


 거울 앞에 서서 어느 외로운 외야수를 생각해요

 느리게 느리게 허밍을 하며…… 오후 네 시,


 바람은 꼭 텅 빈 짐승처럼 울고


 살짝 배가 고파요.




[여장남자 시코쿠], 문학과지성사, 2012.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희성 시모음  (0) 2019.08.01
답청(踏靑) / 정희성  (0) 2019.08.01
백 점 맞은 연못/박승우  (0) 2019.07.20
봉숭아/도종환  (0) 2019.07.19
시클라멘  (0) 2019.07.18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