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

 

 

이성선

 

 

산은 제 초상화를

강에게 맡겼다.

강은 그의 얼굴을 구겼다 폈다

지웠다 그렸다

진종일 그냥 두지 않고 괴롭혔다.

아침에는 맑게 씻어

가라앉은 마음 안에 두고

저녁에는 갑자기

황혼밭에 홀로 벌거숭이로 내쫓았다.

강은 그러나 산을

버리지 않았다.

더구나 비싼 값으로

거리에 내다 팔지 않았다.

언제나 가슴속에 들여놓고

가장 외로운 시간 눈물겨운 밤이면

그의 높은 봉우리 끝에

제 마음 깊은 곳과 맞대고

조용히 울었다.

 

강은 비웃었다.

눈 먼 세상을.

그리고 아직 기다린다. 언젠가

물 속 산 음악 들으러 찾아올 현자賢者.

 

 

이성선 시집벌레 시인,

               ​고려원 1994에서


이성선 시인의 시 초상화를 읽다 보면 동심과 어른의 마음을 오고 가는 오작교 같은 길이 하나 놓여 있다. 그 길이 강물이다. 산이 제 초상화를 강이 그리게 맡겨 놓고 강이 그리는 초상화를 바라만 보고 있다. 세상 바람이 심술궂게 불고 지나가면 찡그린 얼굴을 하고, 고요한 밤이면 가장 깊은 마음을 서로 맞대고 울고 있다고 말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관계인가. 그림을 그려도 시장에 내다 팔지 않고 제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다. 사람의 마음속에도 누군가의 마음의 초상화 하나씩 그려져 있을 것이다. 항상 곁에 있는 사람일 수도 있고 다시는 알굴을 볼 수 없는 그런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나를 끝까지 버리지 않고 가슴속으로 진정한 모습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훌륭한 화가는 그 사람의 마음을 그리는 화가라 한다. 겉모습이야 수많은 색으로 감출 수 있지만 내면의 마음속에 있는 진실은 세월이 가면 산의 나무들처럼 헐벗기도 하고 안개에 싸여 사라지기도 하고 황혼의 빛에 스며들어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줄 때가 있다. 이 변화무쌍한 일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그림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성선 시인은 언제가 찾아올 현자賢者를 기다리며 산의 아름다운 모습을 항상 제 가슴 깊이 그려 간직하고 있다고 바라본다. 산이 강에게 제 모습을 그리라 말한 이유가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현자가 찾아오게 제 마음을 다 내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것이 산이고 강인지 구분되지 않는 그려놓고 현자를 부르고 있기에 눈먼 세상이라 말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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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소리

- 조정권  


“그럼 저녁 6시 마로니에에서 보십시다”
퇴근 후 식어가는 찻잔을 앞에 두고
두 시간 여를 기다리다가
한 시간을 더 기다려보다가
어둠 속으로 나와 전철 타러 공원을 가로질러 가는데
그 밤 어둠 속 마로니에 나무 밑에. 아!
이성선 시인이었다.
“조형이 마로니에라 하기에 이 나무 아래서 만나자
는 줄 알았지요.”
속초에서 예까지 짊어지고 온 몸이
계곡물소리를 쏟아내는 것이 아닌가.
그 물소리가 나를 씻어주고 있었다.
그 밤, 몸은 내게 무슨 말을 전하려고 했을까
갯벌처럼 무겁게 누워 밤새도록 뒤척이다 그냥 간
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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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47) 조정권 〈고요로의 초대〉

진정한 고요를 만난 적 있나요?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잔디는 그냥 밟고 마당으로 들어오세요 열쇠는 현관문 손잡이 위쪽 / 담쟁이넝쿨로 덮인 돌벽 틈새를 더듬어 보시구요 / 키를 꽂기 전 조그맣게 노크하셔야 합니다 적막이 옷매무새라도 고치고 마중나올 수 있게 / 대접할 만한 건 없지만 벽난로 옆을 보면 /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장작이 보일 거예요 그 옆에는 / 낡았지만 아주 오래된 흔들의자 / 찬장에는 옛 그리스 문양이 새겨진 그릇들 / 달빛과 모기와 먼지들이 소찬을 벌인 지도 오래되었답니다 / 방마다 문을, 커튼을, 창을 활짝 열어젖히고 / 쉬세요 쉬세요 쉬세요 이 집에서는 바람에 날려 온 가랑잎도 손님이랍니다 / 많은 집에 초대를 해 봤지만 나는 / 문간에 서 있는 나를 / 하인(下人)처럼 정중하게 마중 나가는 것이다 / 안녕하세요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 그 무거운 머리는 이리 주시고요 / 그 헐벗은 두 손도
 
 
  자, 어느 날 고요로의 초대장을 받았다고 하자. 고요가 사는 집 마당에는 잔디가 깔려있고, 돌벽은 담쟁이넝쿨로 덮여 있다. 우리는 문 앞에서 인기척을 내야 한다. 그래야만 거기 사는 적막이 옷매무새라도 만지고 우리를 마중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고요는 옛날이다. 옛날 속의 스러짐이다. 고요가 지나간 자리는 황폐하다. 그 폐허 속에서 달빛과 모기와 먼지들이 소찬을 벌이기도 한다. 고요에 초대받는다면, 우리는 무거운 머리와 헐벗은 두 손은 고요에 맡겨도 좋으리라.
 
  소음은 문명과 인위의 산물이지만, 고요는 자연의 선물이다. 소음은 악몽을 낳고 고요는 평화로운 마음을 낳는다. 소음 공장지대인 도시에 견줄 때 산골은 바위와 나무들의 은둔지이고 물소리 바람소리의 서식지이다. 문태준은 고요를 “족제비가 뒤를 돌아가는 소리도 들릴 만하게 조용하고 무섭고”(〈추운 옆 생각〉)라고 구체적 실감을 부여하지만, 조정권은 단지 고요의 서식지를 보여준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공간은 고요가 깃들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그 고요의 서식지에는 오랫동안 쓰지 않은 벽난로, 장작들, 흔들의자, 부엌과 찬장, 그릇들… 따위가 있다. 사람이 살지 않는 대신에 이 공간에는 달빛과 모기와 먼지들이 가끔씩 고요의 소찬을 벌인다. 어느 날 시의 화자는 이 고요로의 초대를 받는다. 이 초대를 받아 “문간에 서 있는 나”를 “하인처럼 정중하게 마중 나”간 건 다름 아닌 바로 ‘나’다. ‘나’는 고요의 서식지에 초대된 주인공이고, 동시에 초대의 주체다. 내가 고요의 객체이며 동시에 주체라는 암시다.
 
  고요는 욕망을 비운 뒤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마음이 번잡하고 욕심으로 차 있으면 고요는 들어서지 못한다. 욕망을 비운 마음자리에 그윽하게 서리는 게 바로 고요다. 고요는 감흥도, 파토스도 아니다. 고요는 사물들 사이의 평화고 질서고 리듬이다. 다른 한편으로 고요는 혼란의 살해이고 무질서의 파괴이며 견고한 강령들의 해체다. 그런 까닭에 사람은 삶에의 의지가 아니라 고요에의 의지로 더 고결해질 수 있다. 아무래도 고요와 고집은 친족이거나 이웃사촌이다. “고통과 대화를 하고 / 오랜 시간을 나눠도 / 고집을 꺾지 못했다 // 고집은 혼자 사신다. // 거식(拒食)하고 계신다. // 아무래도 나는 저 지독한 고집을 / 노인네처럼 강가에 혼자 버려두고 온 것 같다”(〈장벽〉). 고요가 그렇듯 고집도 떠들썩한 것 보다는 독거(獨居) 취향이 짙다. 고요가 스스로 욕망을 비움으로써 고요에 닿듯 고집 역시 거식으로써 제 안을 비운다. 비우고 혼자 꿋꿋하게 서려는 고요와 고집의 이 독거 본성은 꺾기 힘들다. 고요해진 뒤에 비로소 보게 되고, 보게 되어야만 사랑할 수 있다. 바라봄은 고요의 촉수들이 이 세계를 향해 내미는 수줍은 초대장이다. 사랑은 시끄러움이 아니라 마음의 고요 속에서 싹튼다. 차라리 사랑은 고요가 일으키는 시끄러운 사건이다.
 
  대개 정치는 시끄럽다. 고요가 단순함에서 발현된다면 정치는 복잡함의 소산이다. 아울러 정치는 맞섬이고 다툼이고 물어뜯음이다. 노자는 “맑고 고요한 것이 천하의 바름이다”(《도덕경》 제45장)라고 했다. 정치가 있는 곳이 늘 시끄러운 것은 정치가 애초부터 바름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바름이 없는 곳에 다툼이 잦고, 다툼이 잦은 곳에서는 욕망과 분노와 교만이 활개를 친다. 노자는 가장 좋은 정치는 그런 것이 있는 줄조차 모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정말 태평한 시대에는 군주의 존재 자체를 잊고 산다. 무위이치(無爲而治), 즉 무위의 정치를 펴기 때문이다. 무위의 정치는 비가 내려 마른 땅을 적시고, 햇빛이 내려 식물에 골고루 자양분을 주듯 한다. 그것은 늘 있으면서 없는 듯하다. 이게 바른 정치다. 정치에 바름이 없으니까 세상이 시끄럽다. 차라리 정치란 고요에서 달아나기고, 고요의 집어삼킴이기 때문이다.
 
  고요는 내적 혁명의 단초다. 왜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가. 고요가 내면의 동력학에서 나오는 능동 가치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 가만히 있는 자에게 고요는 다가오지 않는다. 고요는 능동의 산물이다. 고요한 자가 가장 혁명적이다. “고요 속에서 우리는 부단히 묻고 절망 속에 꿈꾸면서 변모되어간다. 꿈꾸는 자의 집은 고요이고, 그가 움직이는 방식은 성찰이다. 홀로 있는 고요함이 존재의 결핍을, 현존의 누락을 살펴 묻게 하는 것이다. 충일에 대한 자족이 아니라 결핍에 대한 이 절망적인 물음으로 하여 고요는 꿈꾸는 자의 실천적 에너지로 빛난다. 결핍에 대한 고요 속의 물음이 충일한 존재의 빛을, 그 빛에의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고요 속에서 묻는 한, 존재는 언젠가는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삶 전체의 충일적 질서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문광훈, 《숨은 조화》) 고요는 마음의 실천으로 이어질 때 제 존재를 파릇하게 드러내며 빛난다. 고요는 마음의 가능성을 열고, 실천의 계시(啓示)로 나아가며, 아직 아무것도 아님을 됨으로 갱신의 눈부심에 이르게 한다.
 
  고요는 욕심의 비움, 혹은 가난의 산물이기도 하다. 가난은 가진 것들이 적고 소박한 살림에 바탕을 둔다. 그런 까닭에 가난은 필연적으로 욕망을 줄이고 정화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2006년 3월 / 파리 남동쪽 70킬로미터 / 시골 마을 바르비종 / 쇠스랑을 든 채 / 저물어가는 들녘을 배경으로 부부가 / 흙 속에 누워 있는 나를 /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 / 이 가난은 종교적 상태의 고요를 준다. / 하루 일과를 일생처럼 아직 마치지 못한 내게.”(〈가난함〉) 가난은 가장 숭고한 형식의 고요를 불러온다. 시인은 그것을 “종교적 상태의 고요”라고 명명한다. 고요의 시공에로 발길을 들여놓는 순간, 우리는 고요에 빙의된다. 언젠가 자작나무 숲에 들어간 적이 있다. 나는 거기에 깃들어 있는 고요의 청정함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때 고요는 진리고 청정함이고 마음의 본원이다. 얕은 계곡의 돌 틈을 흐르는 물과 나무들 사이를 불어가는 바람은 이곳이 고요의 요람지라는 걸 말해준다. 고요는 소리의 부재 상태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소리와 자아 사이에 평화와 조화를 느끼게 하는 매개물이다. 시인은 빈 것에서 성스러움을 본다. “한 번 쓰고 버려지는 저 포장지가 성체(聖體) 아닌가. / 저 빈 바구니가 성소(聖所)가 아닌가.”(〈꽃을 전해주는 스무 가지 방법 중에서 하나〉) 고요는 비어 있는 것이기에 성스럽다. 〈고요로의 초대〉는 고요의 파릇함을 엿보게 하고, 고요가 존재를 정화시키는 성소(聖所)라는 걸 일깨워준다. 아울러 고요로의 초대가 잃어버린 ‘나’를 찾고 본원의 ‘나’에게로 인도하는 초대라는 사실도.
 
 
  조정권(1949~ )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남대문로에서 금은방을 하는 아버지를 둔 덕분에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문재는 양정고등학교 시절에 이미 나타난다. 1970년에 박목월의 추천을 받아 시인 전봉건이 주재하던 <현대시학>으로 등단한다. 중앙대학교 영어교육과를 나와 김수근이 발행인으로 있던 <공간>지의 편집장을 지냈다. 그 시절은 당대 예술가들과의 잦은 교류로 그의 예술적 취향이 깊어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는 “시는 무신론자가 만든 종교. / 신 없는 성당. / 외로움의 성전.”(〈은둔지〉)이라고 믿고, 더 나아가 “시인은 1인 교주이자 / 그 자신이 1인 신도.”(〈은둔지〉)라고 믿는다. 그러니까 그는 시라는 종교의 교주이자 단 하나인 신도다. 그는 세상을 등지고 과묵 속에 은둔한다. 과묵과 은둔은 시의 배양지이기도 하다. 그는 중세 음악을 즐기고, 단순하고 명징한 시 세계를 추구한다. 그의 시에 두드러지는 여유와 달관은 한때 노자와 장자의 무위자연 철학에 경도한 흔적이다. 시집 《비를 바라보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 《시편》 《허심송》 《하늘이불》 《산정묘지》 《신성한 숲》 《떠도는 몸들》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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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림사, 얼굴 없는 부처 / 이대흠


보림사에 가면 목이 뚝 잘린
부처가 있다니까
얼굴이 없으니 부처상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사람 몸 같은 돌덩이 하나 있다니까

안타깝게도 두상이 사라져서
문화재로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장모창 학예사가 말을 하지만
사실은,

돌부처가 제 얼굴을 버린거야

천년을 묵언수행했지만
도무지 제 눈도 밝힐 수 없어
자기 목을 그만 뎅강 잘라낸 거지

얼굴이었던 돌멩이는
어느 집 죽담에 굄돌로 주고
기다렸던 거야

어디 살아있는 부처가 없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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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 뒤축이
빛난다. 지가 무슨 신이라고
배광을 꿈꿨을까마는
신의바람이란 발가락처럼 오순도순
어둠과 고린내 속에서도
온 힘으로 떠받드는 것 아니겠는가
상가에 놓인 뒤축 꺽인 내 구두는
이 방 저 방 쉼 없이돌아다닌다
문이 활짝 열려 있기 때문이다
문지방처럼 빛나는 뒤축은
몸의 출입을 막지않는다
순례와전도늬 삶은, 낡은 구두처럼
자신의 문패를 지워야 한다
멀거니 닳은 뒤축을 내려다보니
신의 턱선을 닮은 듯도 하다
막힘이나 가둠이 없는 것이
정작 문 없는 큰문이라, 그러니
때가 때를 만나기를 골백번
길이 난다는 것은 빛을 주고받는 것이다
저 혼자 이루는후광은없는 것
신은 갈수록 뒷모습이 빛난다



- 이 정록 시 ‘신의 뒤편’ 모두







* 삶의 연륜이 더 하면서 새롭게 실감하는 하나는,,, “사람은 변한다는 것” 이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조금씩, 조금씩 변한다. 짧은 삶 속에서 나름대로 많은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사람의 잠재력과 무한 가치성, 그리고 한 없는 약함에 조금씩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열심히 인생을 산다고 살아 왔는데,, 항상 나보다 더 노력하고 앞서서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젊은 시절에는 노력으로 극복할 수도 있다고 생각 했는대,,, 사는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삶도, 사랑도,, 금전적인 소유도,, 건강도 내 나름의 계획도,,, 결국에는 어쩔수 없는 순간이 존재한다.

언제는 100% 만족함을 느껴 본적이 있었던가?!.... 부족함 많은 내 인생에서 조금 이라도 꾸준히 걸어 볼 일이다.  내 자신만의 보폭으로 꾸준히 걷기라도 해야겠다. “길이 난다는 것은 빛을 주고받는 것”이라고,, 일상속에 마주치는 사람들이 친근하게 다가온다. 막힘이나 가둠이 없어지는 것인지... 

아프지만, 삶이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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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근친/장만호




오늘 저녁

슬픔의 주인은 누구인가

돼지고기 한 근을 앞에 두고

부엌에 서서, 오래도록 생각하고 있는 어머니인가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아들인가

이상하다, 생각이 나질 않는구나

고추장 불고기를 해먹어야겠는데, 생각이

30년 동안 식당 주인이었는데도,

갑자기 요리법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어머니의 저녁인가

제가 할게요

제가 하지요

고추장 불고기 맛있게 만드는 법

'고추장 두 큰 술, 고춧가루 두 큰 술, 후춧가루 약간…'

고기는 목살, 기름기 없는

쓸쓸한 한 근

주물러 재워두고, 담배를 피고 들어오는 아들의 저녁인가

그 사이에 잠시 잠든 어머니의 시간인가

오늘 저녁 슬픔은 어떤 맛이 나는가

고추장 두 큰 술, 고춧가루 두 큰 술…

아들과 어미가 저녁을 먹는다

마흔 넷 개띠와 여든 살 개띠가 저녁을 먹는다

고추장 불고기

으르렁 소리도 없이 양보하며 싸 먹는다

마지막 남은 슬픔 한 장을 서로에게 권해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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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밥 마는 여자/장만호-
 

 

눈 내리는 수유 중앙 시장

가게마다 흰 김이 피어오르고

묽은 죽을 마시다 보았지,

김밥을 말다가

문득 김발에 묻은 밥알을 떼어먹는 여자

끈적이는 생애의 죽간(竹簡)과

그 위에 찍힌 밥알 같은 방점들을,

저렇게 작은 뗏목이 싣고 나르는 어떤 가계(家系)를

한 모금 죽을 마시며 보았지

시큼한 단무지며 시금치며

색색의 야채들을 밥알의 끈기로 붙들어 놓고

붓꽃 같은 손이 열릴 때마다 필사되는

검은 두루마리,

이제는 하나가 된

그 단단한 밥알 속에서 피어오르는

삼색의 꽃들을

 


<감상>

 


   '김밥을 말다가 문득 발에 묻은 밥알을 떼어먹는 여자',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은가. 이런 디테일들을 만날 때 우리의 삶은 구체적인 몸짓을 갖게 된다. 바쁘게 한 끼를 떼우고 요금을 낸 뒤 붐비는 거리 속으로 사라지면 그만일 일상의 속도에 브레이크가 걸리고 문득 삶은 반복되는 소비와 소멸의 흐름 속에서 구출된다. 그때 시작되는 은유는 얼마나 곡진한가.

밥알의 끈기로 붙들어 놓은' 은유는 '발에서 죽간으로, 뗏목으로 그리고 검은 두루마리'로 연쇄되면서 삼색의 꽃으로 피어난다. 그리하여 고단한 시장의 일상이 붓꽃 같은 손으로 필사되는 문장이 된다. 상한 속을 어루만지는 한 모금 죽 같은 시다.

 
-손택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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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악

 

북쪽은 고향

그 북쪽은 여인(女人)이 팔려간 나라

머언 산맥(山脈)에 바람이 얼어붙을 때

다시 풀릴 때

시름 많은 북쪽 하늘에

마음은 눈감을 줄 모른다

(시집 '분수령', 1937)

 

 

참고자료

 

이용악은 일제 강점기에 대규모로 발생했던 국내외 유이민(流移民)의 비극적 삶을 깊이 통찰하고, 이를 빼어난 시적 감수성과 튼튼한 서정성을 바탕으로 작품화한 시인이다. 반공 이데올로기에 막혀 40년이 넘게 논의조차 할 수 없었던 그는 월북 작가들에 대한 해금 조치가 단행된 이후에서야 비로소 30, 40년대 우리 시문학사의 빈약한 공간 속에 우뚝 자리잡게 된 위대한 민족 시인의 한 사람이다.

이 시는 고향 상실감에 대한 독특한 시적 정서가 관심을 끄는 작품이다. 패배주의와 절망의 몸짓만이 두드러진 박용철의 고향’(1931)과도 다르고, 개인의 회고적 서정에 머무르고 만 정지용의 고향’(1932)과도 차별되는 특유의 시적 정조가 단 6행 속에 명료하게 새겨져 있다. 그러므로 그의 고향은 단순한 향수 대상이 아닌, 현실 상황을 총체적으로 가늠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 고통받는 현실적 삶과 역사의 시적 등가물로 치환되어 있는 고향이다.

이 시는 화자의 내면 감정을 표백하는 독백의 성격을 지닌다. 화자는 지금 자신의 고향이 위치한 북쪽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겨 있다. 시름에 찬 화자의 내면은 마지막 구절인 시름 많은 북쪽 하늘에 / 마음은 눈감을 줄 모른다로 명징하게 제시되어 있으며, ‘머언 산맥에 바람이 얼어붙을 때 / 다시 풀릴 때라는 묘사적 표현은 화자의 고향인 북쪽의 예사롭지 않은 상황을 암시하는 동시에 화자의 근심어린 마음을 반영하고 있다. 이처럼 북쪽을 향하여 시름에 찬 화자의 내면을 서정적으로 형상화시키는 가운데, ‘그 북쪽은 여인이 팔려간 나라라는 객관적 서술이 2행에 삽입되어 있다. 이 구절은 북쪽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으로, 화자로 하여금 시름을 겪게 하고 있는 동인(動因)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어떤 구체적인 사건을 제시하는 경우, 화자의 주관을 배제시킨 채 객관적인 서술로 표출하게 되면, 보편성과 객관성을 획득하게 된다. 물론 그 구체적인 사건이란 다름아닌 당대의 사회역사적 상황, 즉 일제하의 우리 민중들이 겪는 고난과 수탈의 비극적 상황을 함축하는 것이다. 이렇듯 이 시는 고향을 그리는 주관적 표출과 함께, 그 곳에서 행해지고 있는 비극적 상황을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표현 방법을 배합하여 개인의 주관적 서정을 보편성과 객관성을 지닌 사회적 차원의 정서로 확산시키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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