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어진 길 저쪽 / 권대웅           

       

세월도 이사를 하는가보다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할 시간과 공간을 챙겨

기쁨과 슬픔, 떠나기 싫은 사랑마저도 챙겨

거대한 바퀴를 끌고

어디론가 세월도 이사를 하는가보다

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

기억 속에는 아직도 솜틀집이며 그 옆 이발소며

이를 뽑아 던지던 지붕과

아장아장 마당을 걸어오던 햇빛까지 눈에 선한데

몇 번씩 부서졌다 새로 지은 신흥 주택 창문으로

엄마가 저녁밥 먹으라고 부르는 소리가

초승달처럼 걸려있다.

어디로 갔을까 그 세월의 바퀴는

장독대와 툇마루와 굴뚝을 싣고

아버지의 문패와 배호가 살던 흑백텔레비전을 싣고

초저녁별 지나 달의 뒤편 저 너머

어디쯤 살림을 풀어놓은 것일까

낯설어 그리운 골목길을 나오는데

문득 어디선가 등불 하나가 켜지고 있었다

희미한 호박 등처럼 어른거리는

내 마음속 깊은 골목 맨 끝 집

등불 속에 살고 있는 것들

오, 어느새 그 속으로 이사와

아프고 아름답게 반짝이며 자라고 있는

세월들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 문학동네, 2017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만호 시인  (0) 2019.10.02
북쪽/이용악  (0) 2019.09.13
오래된 수틀/나희덕  (0) 2019.08.19
과일 가계 앞의 개들/최금진  (0) 2019.08.19
그날이 오면/심훈  (0) 2019.08.1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