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어진 길 저쪽 / 권대웅
세월도 이사를 하는가보다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할 시간과 공간을 챙겨 기쁨과 슬픔, 떠나기 싫은 사랑마저도 챙겨 거대한 바퀴를 끌고 어디론가 세월도 이사를 하는가보다 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 기억 속에는 아직도 솜틀집이며 그 옆 이발소며 이를 뽑아 던지던 지붕과 아장아장 마당을 걸어오던 햇빛까지 눈에 선한데 몇 번씩 부서졌다 새로 지은 신흥 주택 창문으로 엄마가 저녁밥 먹으라고 부르는 소리가 초승달처럼 걸려있다. 어디로 갔을까 그 세월의 바퀴는 장독대와 툇마루와 굴뚝을 싣고 아버지의 문패와 배호가 살던 흑백텔레비전을 싣고 초저녁별 지나 달의 뒤편 저 너머 어디쯤 살림을 풀어놓은 것일까 낯설어 그리운 골목길을 나오는데 문득 어디선가 등불 하나가 켜지고 있었다 희미한 호박 등처럼 어른거리는 내 마음속 깊은 골목 맨 끝 집 등불 속에 살고 있는 것들 오, 어느새 그 속으로 이사와 아프고 아름답게 반짝이며 자라고 있는 세월들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 문학동네, 2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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