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에만 가도 울화가 치민다"
이일훈, 불편함의 미학을 말하다 /<모형속을 걷다> 이일훈 지음, 솔, 2005
2009년 11월 12일 (목) 10:23:27 김보일 .

함석헌 선생의 스승이셨던 다석 유영모 선생의 인간적 됨됨이를 보여주는 일화는 많다. 그 중의 하나. 유영모 선생은 서울에서 인천까지 걸어 다니셨던 모양이다. 우리 중의 누가 그런 모험을 감행할까. 체력도 문제겠지만 시간 낭비도 문제겠다. 그러나 유영모 선생은 기꺼이 그런 불편을 감수하셨다. 오히려 그런 불편함 속에서 기계적 매카니즘에 묶이지 않은 대자유의 삶을 사셨는지도 모르겠다.

기술이 삶의 편익을 증진시킨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차가 있으니 발이 편하고, 식기세척기가 있으니 손이 편하다. 몇 천 자리 계산도 알아서 척척 해주는 컴퓨터가 있으니 머리가 편하다. '삼분카레'니 '삼분짜장'이니 하는 인스턴트 식품들, 캔만 따면 당장 먹을 수 있는 통조림, 세탁은 물론 다림질까지 척척해주고 심지어는 양말까지도 빨아주고 개켜주는 세탁소……. 이제는 돈만 있으면 홀아비들도 궁색함과는 안녕이다.

불편함을 훈장처럼 껴안고 사는 사람들

그러나 불편함을 무슨 훈장처럼 껴안고 사는 사람들도 있다. 산악인들은 말한다.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던 고통의 크기가 그가 차지할 수 있는 영광의 크기라고. 그들은 가장 험난한 시즌과 가장 험난한 코스를 택해서 에베레스트에 오른 자에게만 최고의 알피니스트라는 칭호를 준다. 헬리콥터를 탔다고? 첨단의 장비를 빌렸다고? 그대는 실격이다. 실격의 이유는 간단하다,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분투의 과정이 중요한 것!.

사랑의 행위는 또 어떤가. 사랑의 행위는 엎치락뒤치락하는 그 비효율성에 있는 것이 아닐까. 영화 <데몰리션맨>에서 볼 수 있는 사이버섹스를 생각해보시라. 체액과 타액을 교환하지 않는 간편하고 산뜻한 사랑의 행위가 과연 사랑의 본질에 부합하는 것일까. 사랑의 시간은 루즈타임과 연장전을 요구하는 법이다. <데몰리션맨>에서처럼 후다닥 기계적으로 성급하게 해치우는 사랑의 행위는 위생적이고 효율적일지는 몰라도 사랑의 심리학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는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어쨌든 편리와 효율은 기술개발로 이득을 보는 자들에게는 최고의 미덕일지 몰라도 피와 살이 도는 우리네 선남선녀들에게까지 능사일 수는 없다는 말이다. 바로 이 점을 도드라지게 역설하는 건축가가 있다.

인천시 만석동에 위치한 저소득층 어린이 보금자리 '기찻길 옆 공부방'을 설계한 이일훈이 바로 그다. 저소득층 맞벌이 부부, 결손가정의 아이들을 돌보는 신앙공동체인 '기찻길 옆 공부방'의 이름을 그대로 붙인 이 건물은 1998년말 만석동에 지어졌다. 건축주의 빠듯한 예산 때문에 일반 다세대주택보다도 적은 공사비로 지어진 연건평 45평짜리 이 작은 건물은 건축계의 젊은 비평가들로부터 찬사를 이끌어 낸다.

행복을 강요하는 부드러운 협박, 광고

   
<행복이 가득한 집>류의 잡지를 뒤적이다 보면 은근히 부아가 난다. 그런 유의 잡지들이 말하는 행복은 광고가 말하는 행복의 모습과 닮은꼴이다. 물질의 소비만이 행복을 보장해준다. 행복을 원한다면 일단 구입해라. 광고는 은근히 우리 무의식을 강제한다. '부드러운 협박'이다. 여기에 손들면 끝장이다. 일단 일벌레가 되야 하고, 할말은 꾹꾹 가슴속에 쟁여놓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물질이 보장해주는 안락함에 동참하려면 있는 성깔 다 죽이고 고분고분해져야지 다른 도리가 있겠는가. 그런데 이일훈은 좀 불편해지자고 말한다. '빈자의 미학'을 역설하는 건축가 승효상도 반갑지만 '불편의 미학'을 말하는 이일훈 또한 반갑기 그지없다.

승효상은 '빈자의 미학'을 말하지만 그의 건축에선 어쩐지 돈 냄새가 난다. 지나치게 세련되어 보이는 것도 어쩐지 마뜩찮다. '빈자의 미학', 논리로 보면 버릴 게 없지만 속내를 보면 왠지 찜찜하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일훈의 건축에서는 승효상적인 세련미는 덜해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네 건축의 주류적 마인드를 흠집 내는 어떤 거칠고 속 깊은 배포가 느껴진다. 그 '거침'과 '질박함'이 이일훈의 미학이다. 건축미학하면 흔히 가진 자들의 몫이었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일훈은 '기찻길 옆 공부방'에서 소규모 서민 공공건물에 철학과 미학을 스며들게 한다. <모형 속을 걷다>(솔)의 거의 모든 페이지가 그런 철학과 미학을 말하는 데 바쳐진다.

건축으로 표현되는 졸부의 치졸함

이일훈은 동물의 집짓기를 예로 들면서 우회적으로 인간의 건축을 비판한다. 길지만 그의 육성을 들어보자.

"집에 대해서 부리는 과도한 욕심, 갖고도 더 가지려 하는 욕심, 살지도 않으면서 여러 채를 갖고 싶어 하는 욕심, 여기저기 경치 좋은 곳에 별장 짓고 살고 싶은 욕심, 더 크게 더 높게 더 화려하게 짓고 싶은 욕심, 결국 그런 욕심은 치장과 장식으로 나타난다. 장식도 일종의 기능이긴 하지만 필요 이상의 과도함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보기 위해서가 아닌 보여주기 위한 것, 보여주기의 속뜻은 우월감을 나타내고픈 속내이다. 종종 그것이 건축으로 표현되면 역겨운 졸부의 치졸함으로 나타난다. 과잉/과도가 낳는 그 우스꽝스러움."

바로 그 우스꽝스러움이 '세계 제일'이니 '동양 최대'니 하는 화려한 수사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바로 그 우스꽝스러움이 대리석으로 발림이 된 '무늬만 르네상스풍'인 국적불명의 건축물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보여주기 위해서 지어진 건축물에 침묵과 겸손이 깃들 여지는 없다. 엄청난 규모로 지어진 교회의 건축물에 신비가 깃들 여지는 없다. 신비가 없는 곳에 침묵이 있을 리 없다. 이 시대의 건축은 이 시대의 종교를 닮아간다. 그리고 이 시대의 종교는 이 시대의 화두인 자본을 열심히 따라간다. 침묵이 사라진 곳에 여지없이 번쩍거림의 광택과 소음이 들어선다.

자비의 수도원

이일훈이 설계했다는 '자비의 침묵' 수도원은 그가 말하는 '불편의 미학'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공간으로 구현해준다. 우리는 흔히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통로는 넓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일훈의 생각은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자비의 침묵' 수도원의 통로를 설계한 이일훈의 말이다.

"복도가 넓으면 지나는 걸음걸이가 빠르고 빠름은 사람끼리의 예의를 소홀히 여기게 만든다. 서로 간섭 없이 스쳐갈 수 있는 넓은 복도는 언뜻 여유로울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인간관계에서는 외면/소외를 조장하는 악덕의 동선이다. 서로 마주치면 한 사람이 비켜서야만 둘 다 지나갈 수 있도록 복도를 아주 좁게 만들자."

좁은 복도에서 서로 마주치면 후배가 양보하면서 비껴 설 것이고 바로 그 비켜서는 데서 예의와 공경이 묻어난다는 것이다. 서로 먼저 가라고 양보하는 사이에 겸손이 배는 것이니, 겸손을 미덕으로 지키는 수도원에서는 좁은 통로가 알맞춤이라는 말이다. 모든 복도를 좁게 하자는 것이 아니다. '불편의 미학'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건축에서의 공간설계는 그 건축물이 상징하는 정신까지를 포괄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 삶이 공간의 효율성을 지향하는 것까지야 타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종교는 일상적 삶을 초월하는 데에 그 속깊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 초월의 의미를 간단히 방기해버리는 우리의 건축문화에 대한 그의 일갈은 아프게 음미해볼 만하다.

아무리 노자연하고 공자연해도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구복이 웬수'이고 보니 그런 건축가도 없다. 그는 ""냉혹한 자본주의 현실 속에서 사회적 기능과 미학적 성취를 동시에 이루는 건축가들은 존경받을 만하다.""라고 말한다. 주판알을 퉁기다 보면 이념이 뒷전이 되어야 하는 현실이다. 자재비와 인건비도 제때 지급해주지 못하는 판에 철학이니 미학이니 따지는 것도 한심하다. 이일훈도 여느 건축가처럼 현실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경박한 도시에 신중한 건축 드물고 기품 있는 공간 속에 비로소 기품 있는 생활이 따른다.""라고 주장하는 그가 돈이 되는 만큼만 대충 지을 사람은 아니다.

   
▲건축가 이일훈(사진/한상봉)

집은 작을수록 공간을 나누고, 한 가족일수록 적당히 떨어져 살아야 한다

동선(動線)은 짧아야 한다, 집은 한 덩어리로 지어야 한다, 공용면적은 최소화해야 한다는 규범화된 건축양식을 그는 거부한다. '조금 편하자고 많은 것들을 잃어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불편하게 살기'의 철학이 그가 말하는 '채나눔'의 논리다. 채나눔'은 이일훈이 일관되게 고집해온 건축형태다. ""집은 작을수록 공간을 나누고, 한 가족일수록 적당히 떨어져 살아야 한다.""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공간이 좁다고 집을 한 덩어리로 만들면 햇빛이 한쪽에서만 들어와 집 전체가 어두워지지만, 채를 나누면 나눠진 면은 모두 남향이 되어 채광과 통풍, 환기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아파트 같은 거실 중심의 획일적인 실내구조는 친부모라 해도 두 세대가 함께 살기에는 불편함이 따르는데 비해 채 나눔을 한 집에서는 사적인 공간을 침해받지 않고 동선이 길어져 가족 간의 충돌을 줄일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는 주장이다. 바로 그런 주장의 연장선상에 그가 설계했다는 자비의 침묵 수도원, 도피안사 향적당, 천주교 우수영공소 등의 종교용 건축물과 BK메디텍 본사 및 공장, 문학과지성사 사옥, 나루터 공동체, 기찻길 옆 공부방 등이 있다.

한복엔 고무신이 어울린다

일전에 아스카 문화의 중심지라는 나라현으로 일본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그곳에서의 문화적 충격을 나는 어떤 일간지에 다음과 같이 소개한 적이 있다.

"울긋불긋한 도시의 간판들은 한 명의 손님이라도 더 끌기 위해 안달이다. 행인들이 어떤 미적 취향을 가지고 있느냐는 관심 밖이다. 오직 강렬한 빛깔로 행인들의 시각을 사로잡겠다는 의지 하나로 도시의 간판은 번쩍거린다. 관광지라고 해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일상의 소음으로부터 벗어나 한적한 여유를 누리고 싶다는 소망은 관광지의 입구에서부터 여지없이 깨어진다. 노래방, 음식점, 모텔과 각종 위락시설들이 끊임없이 소음을 생산해낸다.

침묵은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이고, 여행은 침묵을 찾으러 가는 시간이다. 소리도 침묵하고 빛도 침묵하는 곳에서 우리는 비로소 '나'를 생각한다. 그러나 번쩍거리는 간판으로 눈은 고역이고, 호객의 외침으로 귀 또한 고역이다.

백 번 양보해서 장삿속이니 어쩔 수 없다고 치자. 더 큰 문제는 시설물들이 주는 시각적 공해다. 시멘트를 나무처럼 보이게 하여 글씨를 판 안내문은 조악하기 이를 데 없고, 사찰입구의 유럽식 가로등도 우리네 한심한 미의식을 증명해준다. 새로 건축한 건물들은 주변건물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튀는 느낌을 준다.

일전에 일본 나라현의 동대사(東大寺)를 다녀온 적이 있다. 커피를 마실까 해서 동대사 입구에 있는 자동판매기를 보니 나무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거참, 신기하군 하는 생각이 들어 가까이 가서 보니 자동판매기의 표면을 나무로 덧내어 놓았다. 자동판매기의 생뚱맞은 빛깔이 사찰의 고색창연함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미학적 판단에서 비롯된 발상이었다. 배울 건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한복에 하이힐을 신을 수는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한복엔 고무신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네 미학적 판단이다. 미학은 학자들의 학술적 연구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네 쾌적한 감각을 위해서 먼저 필요한 것이 아닐까."

<모형 속을 걷다>에서 만난 이일훈의 이런 구절이 아마도 그가 '우리편'임을 확신하게 했을 것이다.

"시간의 흔적을 거부할수록 빛나는 것은 소위 보석이나 귀금속 종류이다. 그것들은 녹슬면 안 되고 퇴색하면 가짜이지만 건축 배료는 시간이 지나 갈수록 퇴락하고 변형되며 상해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래서 노후된 건축물을 고치고 새로 짓는 것이다. 오히려 시간 따라 변해가는 그 푸석함을 즐기는 것이 건축의 참맛을 아는 것이다."

그의 시선을 빌어 우리네 건축을 보라. 경복궁에만 가도 울화가 치민다. 이일훈의 책, <모형 속을 걷다>를 읽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그의 책을 빌어 우리네 건축물을 보는 일은 울화가 치미는 일이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건축물은 무너지지도 않고 우뚝 서있다. 시각적 폭력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과 하나가 되려는 선인들의 미학이 아니다. 어떡해서든 자본을 증식시키고야 말겠다는 자본의 확장 논리다. 그 자본의 제국주의적 논리 앞에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논리는 현실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얼빠진 인문주의자의 넋두리에 불과하다는 빈축을 언제까지 사야 하는 것일까. 언제까지 우리의 풍경은 '자본의 풍경'이 되어야 하는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nahnews.net >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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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羅蕙錫, 1896. 4. 18 ~1949 서울)

 

 

1. 길 위에서의 죽음..

 

1949년 3월 14일 <대한민국 관보>는 한 행려병자의 사망을 실었다.

 

사망 석 달만이었다.

환자는 다른 사람의 배웅도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나이 53세

본적 미상

주소 미상

 

가진 것이라곤 헌옷 한 벌이 전부였다.

남긴 거라곤 이름 석 자뿐이었다.

 

나.혜.석.

 

조선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였다.

대표적 신여성으로 수많은 '최초'를 남긴 여성.

 

나혜석, 그녀는 왜 길 위에서 홀로 죽어가야 했을까.

 

행려병자가 된 천재화가 나혜석.

파란만장한 삶을 살며 숱한 화재를 뿌렸던 그녀.

그러나 정작 제대로 알려진 사실은 많지 않다.

 

그녀는 살아서는 물론이고 죽어서도 세상의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나혜석은 무엇때문에 그토록 오랫동안 질타를 받아야 했을까... 

 

 

2. 사상 초유의 '이혼고백서' - "정조는 취미다"

 

1934년 8월 경성이 발칵 뒤집혔다.

사람들의 반감과 불쾌감은 극도에 달했다.

한 잡지에 실린 글 때문이었다.

분노한 이들은 잡지를 불태우기까지 했다.

 

도대체 무슨 글인가?

 

고려대 중앙도서관에서 찾아봤다.

당대 대표적 월간지 <삼천리> 1934년 9월호에서 그 실체를 확인했다.

 

"흥미 위주, 대중 위주의 통속적 잡지입니다.

1934년 8월, 9월호에  나혜석이 '이혼고백서'를 실었습니다.

이 책이 세상을 발칵 뒤집히게 했습니다."

 

'이혼고백서'

이혼한 여자가 직접 적은 사상 초유의 이혼 경위서였다.

 

"조선 남성의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 1934. 8월, 9월호 '이혼고백서'중에서    

 

그것은 조선 사회에 대한 도전이었다.

 

사람들은

저자 나혜석이

추문때문에 이혼한 여성이라는 사실에

더 분노했다.

 

"여자가,

그야말로 외간 남자와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저렇게 이혼백서를 써내고 발표하고 뭐 그랬나...

사회적 반감이 막 끓어올랐던 것 같습니다."

                                                                            - 나영균(80살, 조카)

 

그녀는 파격적 발언을 멈추지 않았다.

 

"정조(貞操)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 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다."

                                                            - '신생활(新生活)에 대하여'

                                                   1935년 2월호 <삼천리>

 

당시 여성의 목숨과도 같은 정조를

선택의 문제로 치부한 일대 사건.

 

나혜석은 문제적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소설이나 영화에 단골 소재가 되었다.

 

1979년 영화 '화조(火鳥)'

최고의 여배우 윤정희가 출연한 작품.

영화에서 나혜석은 바람끼 많은 여자로 파경을 맞이한다.

 

"당대 여성으로서 너무 자유로운 남녀관계를 극대화했습니다.

'품행이 방정하지 못해서 돌을 맞아서 불행하게 갔다'라는 관점으로

흥미를 유발하여 사람들의 화재거리로 다루었습니다.

 

욕망에 휘둘린 '모던 걸'은 결국 파멸한다는 전제로,

부도덕한 여자, 음탕한 여자의 불행한 최후,

이것이 반 세기 이상 계속된 나혜석에 대한 평가였습니다.

사람들은 인간 나혜석보다 부도덕한 나혜석이라는 평가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 유지나 교수(동국대 연극영화학과)

 

서울시 대방동 <여성부 여성사 전시관>

각 분야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긴

근대 여성 선구자 15명을 선정해서 모시고 있다.

이곳에 나혜석이 있다.

 

참 이상한 일이다.

마녀 재판을 받는 듯 비난 받았던 그녀가 어떻게 명예의 전당에 올랐을까?

 

 

3. 여자유학생 - "여자라기보다 먼저 사람이다! "

 

1914년. 4월. 9일.

<매일신보>는 한 여자유학생의 기사를 싣고 있다.

선망받던 남보다 출중한 재주를 가졌던 나혜석.

당시는 남자도 유학 가기 힘든 시절이었다.

 

일본 도쿄 남쪽 사가미하라시.

당시도쿄에 있었던 100년의 역사를 가진 명문대 <여자미술대학>

나혜석은 이곳을 다닌다.

 

근대 초기, 여성에게 그림을 가르쳤던 곳은

조선과 일본을 통틀어 이곳이 유일했다.

나혜석은 수원여고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이곳에 진학한 것이다.

 

"이것이 1918년 3월 졸업생 앨범입니다.

있습니다. 이것이 나혜석씨입니다.

 

(당시 서양하 전공은) 보기 드문 경우였습니다.

일본 내에서도 아주 적은, 겨우 몇 사람밖에 안 되는 분들이라고 생각됩니다.

대부분 자수, 조화... 그런 전공을 했습니다."

                                           -나이토 사치에(여자미술대학 역사자료 담당)

 

서양화과 고등사범과 나혜석.

수백 명의 졸업생중 유일한 조선 여성이었던 나혜석.

그녀는 서양화를 전공했다.

 

비록 미술대학이었지만 당시 대학생의 90%는

재봉과 자수 등 여성과 친숙한 전공을 선택했다.

 

서양화를 전공한 학생은 전체의 2~3%에 불과했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나혜석은 남과 다른 길을 선택했다.

 

"이것이 학적부입니다.

실기 성적도 매우 좋은 점수를 받았고

학과 성적도 상당히 좋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3학년 때 평균이 90점이라고 쓰여 있으니까 상당히 좋은 성적입니다."

                                             -나이토 사치에(여자미술대학 역사자료 담당)

 

동경여자유학생 모임.

나혜석의 이름앞에는 늘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그녀는 선각자로서 자신의 입지를 자각하고 있었다.

 

대학 2학년이 되던 해,

나혜석은 조선유학생들의 잡지인 <학지광>에 글을 발표한다.

 

이상적 부인(理想的 婦人)상을 그린 현모양처의 실체를 비판한 글이었다.

나혜석은 현모양처의 이상형이 여성을 노예로 만든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현모양처가 가지는 허위의식을 만천하에 드러낸 겁니다.

그 허위를 꿰뚫어 본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여성에게만 요구하는 교육주의다,

그래서 '현모양처를 여성에게만 요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

여성도 말하자면 주체적인 존재,

사람으로 똑바로 서야 되겠다는 글이었습니다."

                                               - 서정자 교수(초당대 부총장, 국문학)

 

그녀는 여성이 시대의 선각자가 되어

스스로 실력을 키우고 권력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시집도 가지 않은 채 여성의 권리를 운운하는 딸이 아버지는 못마땅했다.

 

"저는 혼자 살아요."

"이년아. 혼자 어떻게 사니."

"제가 벌어서 저 혼자 살지요."

                                  - 1935년 7월 <삼천리>, '나의 여교원시대'중에서

 

당시 나이 19살.

나혜석은 어떻게 그 나이에 여성의 권리를 의식했을까?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신풍동에 나혜석의 생가터가 있다.

그녀는 수원에 이름난 가문 출신이었다.

 

"나혜석의 아버님 되시는 나기정(1863~1915)씨는

구한말에 사법관을 지내시고

그 다음 시흥군수를 거쳐 용인군수를 역임했습니다."

                                                               - 유동준 회장(나혜석 기념사업회)

 

수원의 유지로 지방 행정관을 하며 부유한 생활을 하던

나혜석의 아버지에겐 다른 여자가 있었다.

 

딸인 나혜석보다 불과 한 살 많았다.

나혜석은 딸벌 되는 첩때문에 평생 눈물짓는 어머니를 지켜보며 살았다.

 

그 첩은 아버지의 호적에도 버젓이 올랐다.

어지간한 조선 남자중에 첩을 한둘 두지않는 남자가 없던 시절이었다.

축첩은 나혜석의 어머니의 고통이자 모든 조선 여자들의 고통이었다.

 

그녀는 직접 보고 느낀 것을 글로 담아 세상에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녀는 누구나 알지만 문제 제기를 하지 못하는 축첩에 대해 말한다.

 

나혜석의 첫소설 <경희>.

 

"첩이 있는 것도 배우지 못한 까닭이고

그것으로 속을 썩이는 당신도 알지 못한 죄이에요.

그러니까 여편을 두고 첩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도 가르쳐야만 합니다."

 

"춘원 이광수도 단편소설로 등단했고

김동인이나 염상섭, 현진건이나 전영택이나 전부 여성 문제를 소설로 썼어요.

그런데 그들은 다 무얼 가지고 썼느냐

전부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를 가지고 시작을 합니다.

그러나 나혜석은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남녀문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합니다."

                                                                - 서정자 교수

 

나혜석은 지식인으로서 조선 여성의 입장과 지위 대변에 앞장섰다.   

 

"계집애도 사람이라 해요.

사내와 같이

돈도 벌 수 있고

사내와 같이

벼슬도 할 수 있어요.

사내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는 세상이예요."    

                                      - 소설 <경희>중에서

 

여주공립보통학교.

그녀는 아버지가 학비를 주지 않고 결혼을 강요하자

1년간 교사를 하면서 직접 학비를 낸다.

한 인간으로서 당당히 서기 위해 결코 배움을 포기치 않는다.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또 조선 사회의 여자보다

먼저 우주 안

전 인류의 여성이다.

오냐, 사람이다."

                     - 소설 <경희>중에서    

 

1918년 3월. 대학을 졸업하고 난 22세의 그녀에겐 할 일이 많았다.

글과 그림으로 자기 생각을 널리 알리기로 했다.

 

1921년 7월 개벽에 '개척자'

그녀는 자신을 척박한 조선 여성의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개척자라 생각했다.

 

"나혜석은 그러한 신념을 가지고 살았던 것 같아요.

누군가 걸어가야 길이 생긴다.

처음에 걷는 사람은 참 힘들고 가시밭길을 가게 되니까 힘들고 어렵지만

누군가 걸어가면 또 따라오면 길이 생긴다."

                                                             - 윤범모 교수(경원대 미술대)

 

그녀는 남성 중심의 조선 사회에 변화와 개혁의 물꼬를 트려 했다.

여자도 하나의 사람으로 존중받는 세상.

그것이 나혜석의 꿈이었다.

 

"여자도 사람이다." -수원시 인계동 '나혜석 거리'

 

나혜석은 한 인간으로서 여성의 권리를 깨달은 선각자이자

그것을 직접 찾기 위해 나섰던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그 길은 너무 멀고 험했다.

 

 

4. 결혼, 그리고 어머니가 된다는 것!~

 

서울시 중구 정동제일교회.

1885년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교회로

고딕풍으로 꾸며진 근대 초기 가장 인기있는 서양식 결혼식장이다.

 

1920년 4월 10일. 24세의 나혜석은 이곳에서 결혼을 한다.

신랑은 변호사 김우중이다.

 

나혜석은 결혼후에 더 작품활동에 매진했다.

그러나 결혼 5개월만에 임신을 하게 되고

나혜석은 그 생소한 몸의 변화에 당황하고 두려워한다.

 

그녀는 잡지 <동명>에 그때의 심경을 고백한다.

'母된 감상기'

그녀는 엄마가 되는 여자의 고통과 감성을 나누고자 하였다.       

 

"뱃속에서는

어느덧 무엇이 움직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깨달은 나는

몸이 오싹해지고

가슴에서 무엇인지 떨어지는 소리가

완연히 탕 하는 것 같이 들리었다."

 

"나는 할 일이 많았다.

게다가  내 눈이 겨우 좀 뜨이려고 하는 때였다.

예술이 무엇이며 어떠한 것이 인생인지,

조선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겠고,

조선 여자는 이리 해야만 하겠다는 것을,

이 모든 일이 결코 타인에게 미룰 것이 아니라

내가 꼭 해야 할 일이었다."

                                   - '모(母)된 감상기', 1923. 1   

 

1921년 4월 28일. 25세.

열 달후 혹독한 신고식이 시작되었다.

 

"어머님 나 죽겠소,

여보 그대 나 살려주오,

내 심히 애걸하니

옆에 팔짱끼고 섰던 부군 "참으시오" 하는 말에

"이놈아 듣기 싫다" 내 악 쓰고 통곡하니

이 내 몸 어이타가 이다지 되었던고."              

                                                     - '모(母)된 감상기' 

 

나혜석은 아이 낳는 고통을 자세히 기록했다.

이제껏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생생한 기록이었다.

어머니가 되는 길은 이제 시작이었다.

 

곧 젖먹이 키우는 괴로움이 시작되었다. 

잠을 못자는 고통이 가장 컸다.

 

"이러한 견딜 수 없는 고통이 기(幾) 개월간 계속 되더니

심신의 피곤은 인제 극도에 달하여

정신은 광증이 발하고

몸에는 종기가 끊일 새가 없었다."

                                                - '모(母)된 감상기' 

 

극심한 고통속에서 나혜석은 모성은 본능이란 생각에 회의한다.

결국 '자식'이란 모체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라고까지 표현한다.

 

"엄마가 '자식을 악마로 느낀다'고 하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생각인 것입니다.

 

여성이라면 언젠가 어머니가 되고

'어머니가 된 여성은

당연히 자식에게 모성애를 느낀다'고 말해오던 것에 대해서

 

전혀 그것이 아니라고,

모성애의 신화를 깨뜨린 것이, 

나혜석의 '모된 감상기'가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지점입니다."

                                                       - 이상경 교수 (카이스트 인문사회과학부)

 

남성들은 반발했다.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임신이란 것은 두려운 사실이요, 그리 편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결혼 그 자체부터 부인하고 회피하기 전에는 임신은 불가피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원래 임신이라는 것은 여성의 거룩한 천직이니

여성의 존귀가 여기 있고 여성이 인류에게 향하여 이행하는

최대 의무의 한 가지인 것을 자각하여야 할 것이다."

                                                                          - 백결생, <동명> 1923. 2. 4  

 

나혜석도 맞섰다.

 

"과연 마치 구름 속에 있는 양반에게서

'너희는 왜 흙을 밟고 다니느냐' 하는 비방을 받는 격이 되었다.

씨의 '임신이란 것은 그리 편한 일이 아니다'라는 일구를 보면

씨가 능히 알지 못할 사실을 아는 체하려는 것이 용서치 못할 점이다."

                                                        - '백선생에게 고함', <동명> 1923. 3. 18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임신에 대해서

한 번도 애를 가져보지 않은 '남자가 왈가불가 하는 것은 듣지 않겠다'라는 겁니다.

어떤 면에서 나혜석은 이 글을 임신을 해본 여자들에게 말하는 거니까

남자인 너는 입 다물어라 이렇게 답변한 것입니다."

                                                                  - 김은실 교수 (이화여대 여성학과)

 

나혜석에게 자식은 무엇이었을까?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에

그녀의 손자 김성민씨는 집안의 오랜 앨범을 간직하고 있다.

80년이 넘은 사진, <나혜석의 사진첩>이었다.

 

신혼시절 사진부터 아이들 사진까지,

특히 공을 들인 건 아이들이었다.

나혜석은 아이들 성장과정을 일일히 사진으로 남기고 꼼꼼하게 메모를 적었다.

 

"이것이 가족 사진입니다.

이분이 미국에 계신 큰 고모님,

이분이 미국에 계신 큰 아버님,

이분이 저희 아버님,

3남 1녀인데,

한 분이 돌아가시고 세 분만 이렇게 남아 계시죠."

                                                                                 - 손자 김성민(55세)

 

아이를 키우면서 나혜석은 비로소 모성애에 눈을 뜬다.

 

"모성애로 인하여 얼마나 만족을 느꼈으며 행복스러웠는지 모릅니다.

과연 하나 기르고 둘 기르는 동안에

지금까지 애인에게서나 친구에게서 맛보지 못하는 애정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 <삼천리>, 1934, 9.

 

그녀에게 모성은 저절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보살펴주고 챙겨주면서 생겨나는 자연스런 감정이었다.

이후 나혜석은 화가로서, 어머니로서 자신의 일상에 최선을 다한다.

 

"나는 결코 가사를 범연히 하고 그림을 그려온 일은 없습니다.

내 몸에 비단옷을 입어본 일이 없었고 1분이라도 놀아본 일이 없습니다."

                                                                                    - <삼천리>, 1934, 8.

 

그러나 가사와 작품 활동을 동시에 하는 것은 큰 고통이 따랐다.

 

"다다미 위에서 차게 군 까닭인지

자궁에 염증이 생(生)하여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프고

또한 매일 병원에 다니기에

이럭저럭 겨울이 다 지나고 봄이 돌아오도록

두어 장 밖에 그리지 못하였다."

                                             - <조선일보> 1926. 5. 20

 

생에 전부였던 그림이 어느덧 고역이 되었다.

그래도 나혜석은 붓을 놓지 않았다.

매해 조선미전에 작품을 선보였고 어김없이 상을 탔다.

 

1926년 제 5회 조선미술전람회 특선 '천후궁(天后宮)'

마침내 특선의 영광을 안았다.

여류화가로선 최초였다.

 

그녀의 성공은 남편의 명예였다.

 

"남에게 존경받는 아내를 가진 자는 행복스럽다 했지."

"당신 한 턱 하오. 애는 내가 쓰고 좋기는 당신만 좋지."

"그러게 '여자는 남자의 부속물'이지."

                                                     - '화가로 어머니로'중에서  

 

나혜석은 허탈했다.

능력이 있어도 인격체로 인정받지 못하는 한계에 절망했다.

예술가로서의 한계에 더 고통이 밀려왔다.

 

"내게는 근일 고통이 되다시피 그림에 대한 번민이 생겨서

화필을 들고 우두커니 앉았다가 그만 두고 그만 두고 한 때가 많다.

나의 그림은 기교에만 조금씩 진보될 뿐이오

아무 정신적 진보가 없는 것 같은 것이

자기 자신을 미워할 만치 견딜 수 없이 괴로운 것이다."

                                                        - <조선일보> 1926. 5. 20.

 

화가와 어머니 사이에서 나혜석은 길을 잃었다.

결혼후 나혜석의 모습은 요즘 직장여성과 다르지 않았다.

결혼과 직장 일 모두를 잘 하기 위해 애쓰는

이른바 '슈퍼우먼증후군'을 80년전 나혜석은 경험하고 있었다.

 

'슈퍼우먼증후군(Superwoman syndrome)'은

여성들이 가정과 직장에서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하려 할 때 겪는

신체적, 심리적 스트레스증후군이다.

 

하지만 철저한 가부장사회였던 식민지 조선에서 나혜석에게 돌파구가 필요했다.

 

 

5. 파리, 이브의 호기심 - 불륜 그리고 이혼..

 

1927년. 31세.

남편 김우영이 뜻 밖의 제의를 한다.

미국과 유럽 일주여행을 하자는 것이었다.

 

칠순 노모와 네 아이가 있었지만 나혜숙은 결행한다.

예술로써 자신이 행복해져야 가족도 행복해진다는 생각이었다.

 

부부는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열차로 대륙을 건넜다.

그리고 모스크바, 바르사뱌를 거쳐

한 달 뒤 그토록 동경했던 파리에 도착한다. 

 

나혜숙에게 파리는 도시 전체가 교과서이자 캠퍼스였다.

도시 곳곳에 전시된 미술품들,

박물관에 대가들의 작품들은

화가 나혜석을 눈뜨게 하고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나혜석은 조셉 바라 7번지에 자주 들렀다.

당시 이곳엔 거장들이 운영하는 미술아카데미가 있었다.

 

"당시 이곳엔 페르낭 레제나 앙드레 로트 같은 거장들이

미술을 지도하는 아카데미들이 있었습니다.

규모가 큰 아카데미가 많았는데 특히 '랑송아카데미'가 대표적입니다."

                                             - 알렉산드라 샤르비에(미술사연구가)

 

1908년 창설된 랑송아카데미에서

나혜석은 야수파 화가 뒤셀에게 그림을 배웠다.

그녀는 이곳에서 화가로서 인간으로서 다시 태어났다.

 

"단발하고 양복 입고 스케치 박스를 들고

책상에서 프랑스말의 단자(단어)를 외우고

사랑의 꿈도 꾸어보고

장차 그림의 대가가 될 공상도 해 보았다."

                                                            - <삼천리>, 1932. 1 

 

         <무희> - 나혜석

 

 

                    <작약> -나혜석

 

                                      

                           <파리풍경> -나혜석

 

나혜석은 파리에서 일본 유학 시절 배울 수 없었던

서구 미술의 진수를 배웠고 그것을 작품화했다.

 

파리에서의 6개월.

그리고 미국으로 떠났다.

뉴욕을 거쳐 시카고, 로스앤젤리스, 샌프란시스코 등

주요 도시를 두루 돌아 부산항에 도착했다.

 

1년 반이었다.

여행은 새로운 세계에 눈 뜨게 했다.

 

"이제야 정말 양화(洋畵)에 눈이 떠지는 듯 합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헛일을 한 듯 해요.

헛 그림을 그린 듯 후회납니다."

                                            - <삼천리> 1930. 5

 

귀국후 나혜석이 돌아간 곳은 부산 시집이었다.

대가족에게 돌아온 그녀에게 남편은 충격적인 선언을 한다.

 

"나는 이혼을 하겠소이다!"

"애야, 그게 무슨 소리냐. 어린 것들을 어쩌고 이혼이라니!~"

"서방질하는 것하고 어찌 살아요!"

 

불륜은 파리에서 시작되었다.

나혜석은 파리 유학생 모임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최린(崔麟, 1878 ~1958)

3.1운동 33인 중에서 천도교 대표이자 선망받는 정치가였다.

 

최린은 예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취미와 감성이 비슷한 그에게서 나혜석은 지적 동반자 모습을 발견한다.

 

"과거지사(過去之事), 현 시사 (現 時事), 장래지사(將來之事)를

논하는 중에 공명되는 점이 많았고 서로 이해하게 되었사옵니다."

                                                          - '이혼고백서', 1934. 8

 

그것은 어느 순간 유혹이 되었다.

 

"결코 손을 대서는

아니된다고 한 과실에

손을 댄 것은

뱀의 유혹이었고

이브의 호기심이 아니었나...

 

"나는 확실히 유혹을 받았었고

나는 확실히 호기심을 가졌었다.

 

우리는 황무(荒蕪)한 형극의 길가에서

생각지 않은 장미화를 발견한 것이다.

방향과 밀봉(蜜蜂)중에 황홀하였던 것이다."

                            - '신생활에 들면서' 1935. 2

 

추문은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남편에게 알려졌다.

변호사로 당대 저명인사였던 남편에게 그것은 모욕이었다.

 

나혜석은 남편에게 죄인이었다.

1934년 결혼 11년만에 남편에게 이혼을 당한다.

나혜석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

 

"어디로 갈까.

집도 없고

부모도 없고

자식도 없고

친구도 없고

이 홀로 된 몸 어디로 갈까..."

                                       -' 이혼고백서' 1934. 9

 

주부로서, 또 화가로서 자신을 뛰어넘고자 했던 나혜석.

파리에서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 댓가는 참으로 혹독했다.

그녀가 평생 일궈온 명예는 물론 자식과 가정까지 모두 잃게 된 나혜석.

그러나 그녀는 여기서 주저앉지 않았다.

 

"나는 거의 재기할 기운이 없을 만치

때리고 욕하고 저주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필경은 같은 운명의 줄에 얽히어 없어질지라도

'필사의 쟁투'에 끌리고 애태우며 괴로워하면서 재기하려 합니다."

                                                             - '이혼고백서' 1934. 9.

 

그녀는 죽을 힘을 다해 작품활동에 매진한다.

 

그때 그녀에게 빛이 된 건 파리였다.

클뤼니 중세 박물관.

고대 로마의 목욕탕을 개조해서 만든 이 미술관은

2만 점 이상의 작품을 소장한 중세 미술의 보고였다.

 

나혜석이 파리에 머물 때 박물관 정원에 

파리에서 가장 오랜 성당문이 전시되었다.

생 제르망 성당문.

 

나혜석은 이 문을 화폭에 담았다.

이 작품이 나혜석 대표작 <정원>이다.

 

                나혜석 <정원>                       실제 퀼리니 성당문(출처 : 오마이뉴스)

1931년 제 10회 조선미술전람회 특선

1931년 제 12회 일본제국미술전람회 입선

 

나혜석이 파리생활을 하면서 완성한 이 작품은

1931년 조선미전과 일본제전에 동시 입상하는 초유의 기록을 세운다.

나혜석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이로 인하여 나는 면목이 섰고 내 일신의 생계가 생겼나이다.

나는 평생 처음으로 자기 힘을 의식하였나이다.

그때에 나는 퍽 행복스러웠사외다."

                                                      - '이혼고백서' 1934. 9

 

자신감을 찾은 그녀는 이듬해 금강산에 머물며 서른 점이 넘는 작품을 그린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머물던 집에 불이 나 작품 대부분을 잃어버리고 만다.

나혜석은 다시 주저앉고 만다.

 

이혼후 그림은 그녀에게 자식이며 생명과도 같았다.

충격끝에 나혜석은 병을 얻는다.

붓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손이 떨렸다.

점차 몸도 굳어갔다.

 

"걸음이 불편하고,

턱이 덜덜덜 떨리고,

그리고 뿔테안경을 썼는데 눈이, 개개풀린 눈이 확대되어 보였어요."

                                                                   - 나영균(조카, 80세)

 

파킨슨씨병이었다.

그림 그리는 것은 물론 입까지 돌아가버렸다.

사회생활이 쉽지 않았다.

 

시련은 연이어 다가왔다.

 

<나부>  제 10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작약>  제 10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조선미전에 입선한 작품에 대해 혹평이 쏟아졌다.

 

"이러한 것을 출품한 작자의 사상이 의문이요

출품을 하였더라도 그것을 진열하여 놓은 자의 심사를 모를 일이다.

우대를 한 것이냐? 모욕을 한 것이냐?

불미한 작품에 특선 딱지를 붙여서는 안 될 것이다."

                                                                        - <매일신보> 1931. 6. 3

 


          나혜석 <등을 돌린 나부>                      <자화상(1926)>

 

그것은 조선의 남성들이 이혼녀에게 가한 따돌림이었다.

나혜석은 다시 펜을 들었다.

자신이 직접 이혼에 대해 밝히기로 한다.

나혜석은 이 글에서 결혼에서 이혼까지 낱낱이 기록하고

정조에 대한 남성들의 이중성을 고발한다.

 

이혼을 막으려고 경성에 남편을 찾아간 날.

나혜석은 숙소에서 한 여자를 목격한다.

남편이 보란 듯이 기생을 끌어들였던 것이다.

 

"조선 남성의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 1934. 8월, 9월호 '이혼고백서'중에서    

 

"자기의 삶을 그대로 드러내 보임으로써

자기로 대표되는 여성이 처한 문제들을 드러내 보이고,

 

그 문제에 대해서

여성인 나는,

여성인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열망을 담은 것입니다."

                                     - 이상경 교수(카이스트 인문사회과학부)

 

그러나 상황은 그녀의 의도와 반대로 전개되었다.

<신가정> 1934년 10월호.

'이혼고백서'를 가장 격렬히 비난한 것은 바로 여성들이었다.

 

"필요없는 폭로는 악취미요 병적입니다.

더우기나 당신은 사남매의 어머니로서

그 '노출증적 광태'를 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느 여성들에게 나혜석은 정신병자로 비춰졌다.

'이혼고백서'이후 사람들은 하나, 둘 그녀 곁을 떠나갔다.

 

출중한 재능으로 어려서부터 언론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고

자라서는 신여성으로 그 누구보다도 많은 찬사를 받았지만

이혼녀 나혜석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세상의 모든 신용을 잃고 모든 공분(公憤)과 비난을 받으며

부모, 친척의 버림을 받고 옛 좋은 친구들을 잃은 나는

황야를 헤매고 암야에 공막(空漠)을 바라고 자실(自실)하여 할 뿐입니다."

                                                                        - '이혼고백서' 1934. 8

 

나혜석에겐 단 한 명의 동료도, 지지자도 없었다.

평생 여성의 인간다운 삶을 주장하였지만

같은 여성에게조차 외면당하고 이해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나혜석은 세상을 향한 말을 멈추지 않는다.

 

1934년 9월. 34세.

경성에 희대의 소송사건이 일어났다.

 

피고 나혜석.

원고 최린.

 

추문의 두 당사자.

처권(妻權) 침해 위자료 청구 소송이었다.

 

나혜석은 정조를 유린 당했다며 최린에게 위자료를 청구한다.

그와의 추문으로 이혼을 당했으니 막대한 보상을 하라는 이유였다.

 

"여자가 감히

'바람피우고 이제 와서 뻔뻔하게 돈까지 받아내려고 한다' 이렇게 생각했겠죠.

 

그러나 사실은 그건 외형적인 것이고,

나혜석이 정말 그 안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남성들에 의해 자행되고 공범되고 있는 여성에 대한 강요,

정조에 대한 일방적인 강조,

거기서 그걸 통해 잃게 되는 여성들의 정신적인 자유의 억압, 

이런 문제를 나혜석은 제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 김경일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

 

그러나 그녀의 투쟁은 원천봉쇄 되었다.

최린의 압력으로

그녀의 기사들은 조간에서부터 석간까지

모두 삭제되고 자취를 감춘다.

 

나혜석은 다시 펜을 들었다.

이번엔 정조에 관한 문제를 정식으로 거론했다.

 

"정조(貞操)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 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다."

                             - '신생활(新生活)에 대하여', 1935년 2월호 <삼천리>

 

"자기의 판단에 의해 가지고 '그것을 지킬 것인가 말 것인가?'

그리고 '사랑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할 것이지

그것을 규범이 여성들에게 '정조는 지켜져야 한다'

혹은 '정조는 지키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는

그런 사회적인 규범의 내용이 아니라는 그런 얘기입니다."

                                                             - 김은실 교수(이화여대 여성학과)

 

여성을 정조문제에서 해방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냉대와 고립으로 돌아왔다.

경성 진고개 조선관.

1935년 10월 24일 나혜석이 개인전을 열었지만 철저히 외면당하고 만다.

미술계는 물론 언론계 모두 그녀에게서 등을 돌린다.

 

 

6. '우리가 비난을 받지 않으면

우리의 역사를 무엇으로 꾸미잔 말이오."

 

서울 종로 신교동.

이제 그녀는 갈 곳조차 마땅치 않았다.

세상을 떠돌던 나혜석에게 오빠의 집이 유일한 피난처였다.

나혜석의 조카 나영균씨는 당시 고모의 모습을 기억한다.

 

"제 나이보다 10년 더 되었으니 90년 된 집이예요.

여기가 집안에서 뚝 떨어진 방인데

고모가 오시면 어머니가 여기다가 숨겨 놓으셨어요."

 

나혜석은 세상에 눈을 피해 이 방에서 몇 일씩 머물다 가곤 했다.

1941년 당시 45세였던 오빠 나경석(1890~1959)은

나혜석에게 일본 유학을 주선할 정도로

누구보다 동생의 재능을 아끼고 사랑했다.

 

오빠는 나혜석에게 간곡히 말한다.

 

"몇 년만 숨어지내면

이 시끄러운 소문이 가라앉게 되고

그러면 세상에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나혜석은 그게 아니었다.

 

"나는 하나의 인간이고

내가 사는 그 방식에 대해서는 내가 알아서 한다."

 

나혜석은 숨지 않았다.

계속 지인들을 만나며 전국의 사찰을 순례하며

승려도 일반인도 아닌 비승비속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틈틈히 작품활동도 멈추지 않았다.

 

결코 순탄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삶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

 

"때로 살아있다는 것이 괴롭고

때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그래도 살아 있다는 것은 축복이란다.

살아 있기에

자살도 생각해볼 수 있는 일이고

가끔 오욕스럽게 느껴지다가도

살아 있기에 다행스럽다는 기쁨을 맛보는 때도 있거든."

                                                         - '라훌라의 사모곡'중에서

 

치열했던 젊은 날을 뒤로 하고 나혜석은 때를 기다렸다.

1947년 51세.

그녀는 경기 안양 경성보육원에 머물렸다.

 

당시 대학생으로 이곳에 잠시 머물렀던 화가 박인경(80세)은

나혜석에게 한 가지 부탁을 받는다.

 

"내가 그동안에 있으면서 글을 써 놓은 게 있는데

그것을 좀 정서 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여전히 나혜석은 글을 쓰고 있었다.

 

"글씨가 힘이 없어요.

그래서 꼭꼭 눌러 쓰지도 못한 흐릿한 글씨였지요.

지나간 과거,

아주 화려했던 파리시절,

꿈 같은 이야기를 거기다가 써 놓으셨어요."

 

그녀는 가장 자유로웠던 날들을 추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한 말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가 욕심을 내지 아니하면

우리 자손들은 무엇을 주어 살리잔 말이오?

 

우리가 비난을 받지 않으면

우리의 역사를 무엇으로 꾸미잔 말이오.

 

다행히 우리 조선 여자중에 누구라도

가치 있는 욕을 먹는 자가 있다 하면 우리는 안심이오.

 

아아! 아무려나 나가다가 벼락을 맞아 죽든지

진흙에 미끄러져 망신을 당하든지 나가볼 욕심이오."

                                                                  - <학지광>

 

그로부터 얼마후 나혜석은 사라졌다.

그녀가 세상에 다시 나타난 것은 2년후

<대한민국 관보 1949. 3. 14> 부음을 통해서였다.

 

나이 53세

본적 미상

주소 미상

이름 나혜석

 

평생 자유를 찾아 헤매던 그녀는 결국 길 위에서 사망했다.

나혜석은 부자유의 시대에 한 인간으로 섰던 자유인이었다.

 

나혜석은 한 여성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길 원했다.

그리고 그 욕망때문에 파멸했다.

 

올해는 나혜석이 죽은 지 60년.

하지만 그녀가 그토록 외쳤던 여성의 고민은 여전하다.

 

 

  - 한국사전을 보고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메모 :
Mary Dineen





 
 
      가을 향기

      쪽빛 하늘 아래
      가을 들길로 나아가 보라
      샛바람에도 코에 스미는
      풀꽃 알싸한 향기

      살뜰히 가꾸어 온 과원에는
      불볕더위 장마를 이겨낸
      소담스런 과실들이
      해맑은 이슬 머금고
      저마다 달콤한 향기 풍기며
      알알이 성숙을 재촉하나니

      가만히 눈을 감아 보아라
      그리운 이들의 향기가
      갈 하늘 보다 짙게 가슴에 젖어온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어도
      그만의 매력에 끌리는
      함께 머물고 싶은 이가 있다

      왠지, 가을에는
      그대 그리움의 향기에 빠져들고 싶다
      그대 사랑의 향기에 취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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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ins

090905

 

 

아름다운 구월이 되시기를..

 

 

  

 


 



 
 

 

 

  파치노영

 

 

 

 


 
 
 
출처 : 아트힐
글쓴이 : 파치노영 원글보기
메모 :

"내가 숲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보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서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해보려는 것이었으며, 인생이 가르치는 바를 내가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했던 것이며, 그리하여 마침내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내가 헛된 삶을 살았구나 하고 깨닫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에서)

 

 

미국 메사추세츠 주의 콩코드에서 남쪽으로 1마일 반 정도 떨어진 곳에 월든(Walden)이라는 작은 호수가 있다. 물이 들어온 내력과 나가는 길을 파악하기 힘든 신비한 호수이다. 1845년 3월 말, 27세의 젊은 시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호숫가 숲속에서 도끼질을 하기 시작했다. 호수 북쪽 비탈진 언덕에 자신이 기거할 오두막을 짓기 위해서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기에 저 서툰 손놀림으로는 도대체 개집 하나 만들어낼 성싶지 않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소로의 손놀림은 부드러워지고 신속해졌다. 5월 초순이 되자 소로는 친지들과 함께 상량(上樑)을 했다. 벽을 붙이고 지붕 올리는 일이 완료되자 소로는 마침내 새로운 집에 입주했다.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이었다. 19세기의 진정한 자유주의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2년 2개월 2일 동안의 모험이 시작되는 순간이었으며, 그곳에서의 삶은 그의 작은 오두막을 어떤 거대한 건축물보다 위대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모험은 집을 지을 때부터 시작된 셈이었다. 소로는 자신의 힘으로, 그리고 최소한의 비용으로 집을 짓고자 했다. 집이라곤 한번도 지어본 경험이 없는 이가 땅을 파고 돌을 나르고 도끼질하고 톱질하는 것 모두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가 지출한 건축비는 28달러가 조금 넘은 금액이었다. 당시 하버드대학 기숙사의 1년 방세가 30달러였다니, 1년 방세도 안되는 돈으로 평생 거주할 수 있는 집을 지은 것이다. 당시 1달러가 현재의 1달러보다 약 30배의 가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때, 오늘날의 돈으로 1천 달러가 되지 않은 돈으로 집을 지은 셈이다.

 

 

소로는 왜 이런 모험을 감행했을까? 그가 보기에 사람들은 집의 노예였고 재산의 노예였고 일의 노예였다. 그는 월든 호숫가에 작은 집을 짓고 농사지어 자급자족하면서 여유있게 살 수 있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노예로서의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몸으로 증명하기 위해 그는 집을 짓고 농사를 짓고 물고기를 잡으면서, 그리고 최대한 여가를 즐길 생각이었다. 그것이 바로 소로가 생각하는 자유인의 길이었다. 그는 월든 호숫가 오두막에서의 삶을 낱낱이 기록했다. 그 기록이 바로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와 비견되는 명작 <월든>이다. 물론 소로의 상황은 자발적 고립이라는 점에서 외딴섬에 표류한 로빈슨 크루소의 상황과는 확연히 다르지만, 두 작품이 모두 원시적인 상황에 직면한 인간의 모습을 비교해볼 수 있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소로는 <월든>에서 “간소하게, 간소하게, 간소하게 살라! 제발 바라건대, 여러분의 일을 두 가지나 세 가지로 줄일 것이며, 백 가지나 천 가지가 되도록 하지 말라. 백만 대신에 다섯이나 여섯까지만 셀 것이며, 계산은 엄지손톱에 할 수 있도록 하라”라고 말했다. 잠시라도 한눈 팔게 되면 뒤처지는 현대인에게는 시대착오적인 발언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월든>이 소로가 살았던 때보다 물질문명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20세기 후반, 특히 21세기에 더욱 각광받는 이유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토마스 페인, 마하트마 간디와 더불어 뼛속까지 혁명적인 인물이다. 페인이 근대 혁명의 출발인 미국의 독립운동과 프랑스 혁명의 정신적인 토대를 지원했다면, 간디는 현대 문명에 의존하지 않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구축하고자 했고, 소로는 일과 명예와 돈과 통념의 노예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이들은 모두 부정한 현실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는 주체할 수 없는 끓는 피를 소유하고 있었다. 페인이 정치적 혁명가였다면, 간디는 다분히 종교적인 혁명가였고, 소로는 문학적인 혁명가였다. 소로의 혁명이 은근히 ‘개인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유이다. 문학적이고 개인적인 혁명은 자칫 혁명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소로가 숲속에 혼자서 둥지를 튼 것부터가 혁명과는 도통 상관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 통념의 뿌리를 흔드는 혁명이었다. 사회 속에서 부지런히 일해 경쟁에서 이기고 성공해야 행복해질 수 있다는 일반적인 상식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소로의 부모는 성격이 서로 정반대였지만 매우 잘 어울리는 부부였다. 아버지는 조용하고 겸손하고 친절했으며, 어머니는 재치있고 총명하고 쾌활했다. 그들은 허세 부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문학과 학식을 중히 여겼다. 노예제 폐지가 메사추세츠에서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자 소로의 부모는 자신의 집을 노예폐지론자들의 모임 장소로 빌려주었다. 소로의 부모는 또 산책하면서 자연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했다. 이런 부모의 성격과 취미가 자식들에게 그대로 이어졌음은 물론이다. 헨리의 위로는 누나 헬렌과 형 존이 있었고, 여동생 소피아가 있었다. 헨리는 형과 함께 인디언 흉내를 내며 노는 것을 좋아했다. 형제들과 사이가 좋으면서도 헨리는 혼자 사색하는 것을 즐겼다. 그는 열두 살 무렵부터 홀로 엽총이나 낚싯대를 매고 인적 없는 후미진 숲과 강 주위를 휘젓고 다녔다. 어린 시절에 월든 호수를 방문하기도 했다. 호수와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그는 그곳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1833년 열여섯 살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하버드 대학에 입학한 뒤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소로의 말에 따르면 그의 대학 시절이 자신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한 듯하다. 그는 “나의 육신은 하버드 대학의 일원이었지만, 내 마음과 혼은 소년 시절의 정경으로 멀리 떠나 있었다. 공부하는 데 헌신해야 할 시간들이 내 고향 마을의 숲을 찾아 헤매고 호수와 시내를 탐험하는 데 소비되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소로는 대학에서 비교적 좋은 성적을 얻었다. 그가 1843년의 어느 편지에서 “내가 대학에서 배운 것은 주로 나 자신을 표현하는 능력이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대학 시절이 그에게 문필가이자 강사로서의 능력을 부여한 기간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1837년 랠프 왈도 에머슨과의 만남은 소로에게 일생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들이 만나게 되는 과정은 상당히 재미있다. 소로의 여동생 소피아가 에머슨의 처형 루시 브라운과 함께 에머슨의 강연을 들었는데, 강연 내용이 오빠가 쓴 글과 같았던 것이다. 이에 소피아가 브라운 부인에게 그 글을 보여주었고, 그 글이 에머슨에게까지 전해진 것이다. 4월 9일 집으로 찾아온 소로를 보는 순간 에머슨은 소로가 예사로운 젊은이가 아님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소로는 본래 매사에 냉담한 듯한 태도를 보였으나, 이 뛰어난 지성인 앞에서는 특별히 생기발랄해졌다. 에머슨은 소로의 입에서 사회와 종교에 대한 탁월한 견해,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쏟아져나올 때마다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두 사람의 우정은 시작되었고, 약간의 굴곡이 있긴 했지만 소로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대학을 졸업한 소로는 생계를 위해 교사 생활을 하고자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콩코드의 마을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체벌해야만 하는 현실을 견딜 수 없어 2주 만에 그만두었다. 형과 함께 사설 학교를 몇 년 운영하지만 형이 몸이 아프게 되자 그것마저 벗어던지고 만다. 소로는 이제 시인이자 박물학자로서 식물표본상자와 쌍안경을 들고 새로운 길을 걷기로 했다. 이 무렵 소로는 에머슨이 주도하고 있는 초월주의(transcendentalism) 운동에 매료되었다.

 

소로는 1837년부터 3년간 에머슨의 집에서 기거하는 동안 콩코드의 초월주의 그룹이 만드는 잡지 <다이얼>에 시와 산문을 실으면서 문필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소로는 대중보다는 개인을, 이성보다는 감성을, 인간보다는 자연을 중시했는데, 이러한 사상적 성격은 초월주의와 일치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면모는 어린 시절부터 형성된 소로의 기질이기도 했다.

 

소로는 원래가 모험가적 성향이 강했다. 형 존과 함께 카누를 타고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을 탐험한 것도 이러한 성격에 기인한 것이었다. 안정된 교사의 길을 접고 시인의 길을 택한 것도 일종의 모험이었다.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생활한 것은 모험의 정점이었다.


 

그의 위대한 모험이 그에게 안락한 생활을 제공해주지는 못했다. 뉴욕에서의 작가생활 시도도 실패했고,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의 카누 여행 경험을 담은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의 일주일>은 형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을 듬뿍 담아 집필했건만 거의 팔리지 않았다. 다만 소로에게 안락한 생활이란 일반적인 것과는 판이했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가 불행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는 모험을 통해 인생을 충분히 즐긴 사람이었다.

 

소로는 잘못된 것을 그냥 두지 못했다. 젊은 시절 에머슨과 함께 길을 걷다가 길 옆에 울타리가 쳐진 것을 보고 소로는 분개했다. 그는 하느님의 땅은 만인의 소유이므로 울타리 바깥의 쪼가리 땅만을 밟을 수는 없다며 울타리를 넘어가려 했다. 에머슨은 이를 만류하며 사유재산제가 이상적인 것은 아니지만 현재로선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성격이 어떻게 다른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소로는 월든 숲에서 살던 1846년 7월 멕시코 전쟁에 반대하여 인두세 납부를 거절한 죄로 투옥당한 적이 있으며, 1859년에는 노예제도 폐지 운동가 존 브라운을 위해 탄원서를 의회에 제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로의 근본적인 저항은 <월든>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고 볼 수 있다. 소로의 저항이 잘못된 제도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모든 인간의 그릇된 사고방식과의 투쟁이었기 때문이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서일까, 안정된 삶을 구축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소로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게 된다. 문필활동이 생계를 위한 직업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소로는 측량사 일을 겸해야 했다. 물론 글을 쓰는 일은 버릇처럼 계속되고 있었다. 1854년 <월든>을 출간한 이후로 소로는 어떤 책도 출간하지 않고 오직 집필에만 몰두했다. 그는 초월주의에서 벗어나 실천적인 노예제 폐지 운동을 펼쳤다. 1854년에 행한 강연 <매사추세츠의 노예제>는 비인간적인 노예제도에 신랄한 고발이었다. 이렇게 부지런하게 활동하는 사이에 몸이 약해졌던 것일까? 1859년 노예폐지론자 존 브라운이 하퍼스페리 마을 습격을 주동했다가 처형당할 때 너무도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일까? 아직 젊은 사람의 몸에 결핵이 찾아온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소로와 에머슨의 삶을 함께 정리한 하몬 스미스는 소로의 마지막 장면을 매우 감동적으로 그렸다. 스미스는 소로가 밀려오는 피로 속에서 생의 최후를 보냈지만 마지막까지 여유를 잃지 않았다고 전한다. 1862년 5월 6일, 소로는 여동생 소피아에게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의 일주일>의 마지막 장을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나슈아 어귀를 지나쳤고, 곧 새먼 부룩도 지나칠 즈음, 우리의 배를 가로막는 것은 바람밖에 없었다.” 이때 그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제야 멋진 항해가 시작되는군.” 그리고 잠시 후 숨을 거두었다.

 

5월 29일 소로의 지인들이 모인 장례식에서 에머슨은 조사를 통해 25년 동안 우정을 나눴던 친구를 회고했다. 에머슨의 이 조사는 소로와 소로의 문학에 대한 당시의 평가를 말해주는 대목이었다. 에머슨은 소로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해서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지만 작가로서의 업적은 적극적으로 칭찬하지 않았다. 에머슨은 자신이 좋아한 소로의 시 <연민(Sympathy)>과 <연기(Smoke)>를 언급했지만, 시인으로서 소로는 자연스러운 서정과 기교가 모자라다고 평했다. 소로의 월든 호숫가 생활을 얘기했지만 작품 <월든>은 지나가는 말로밖에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말은 큰 울림이 있었다. “가장 숭고한 사귐으로 자신의 영혼을 만들고, 짧은 생을 통해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다했습니다. 지식이 있는 그곳, 덕이 있는 그곳, 아름다움이 있는 그곳이 바로 그의 영혼의 집입니다.”

 

아아, 최근 부드러운 소년을 알았다
너무나 덕스러운 용모를 지닌 그 소년은
원래 한갓 아름다운 피조물로 창조되었으나
마침내 스스로 미의 요새를 지키는 왕좌에 앉았도다

 

고백건대, 나는 조금도 깨닫지 못했다
신하로서의 예를 완전히 잊고 있었음을
그러나 지금 알게 되었느니, 그 동안
사랑의 마음이 부족했다면, 이제라도 더욱더 사랑하리

 

하지만 가까워지는 순간마다
존경의 엄숙함이 우리 사이를 더욱더 멀리 갈라놓으니
우리 서로 손이 닿지 않네
첫 만남의 순간보다 더 낯설기만 하네

 

영원은 우연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로되
분명 나 홀로 외로이 길을 가야 하네
우리 한때 만난 슬픈 기억 속에서
축복이 영영 떠났음을 알고


-소로의 시 <연민> 전문(윤규상 역)

 

겉으로 보면 소로의 삶은 결코 성공했다고 볼 수 없다. 에머슨의 조사가 말해주듯, 그의 시세계는 널리 인정받지 못했고, 심지어 가장 평판이 좋았던 <월든>마저도 각광받았다고 볼 수는 없다. <시민의 불복종>도 19세기 말에야 널리 읽혔고 간디 같은 위대한 인물의 정신세계에 깊은 영향을 주게 되었다. 소로가 그만큼 뼛속까지 혁명적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혁명적인 정신은 이해받기가 쉽지 않다. 엄밀히 말해 오늘날에도 제대로 이해받았다고 볼 수 없다. 박홍규 교수(영남대, 법학)가 지적하듯이 소로는 여전히 자연예찬론자이자 환경운동가의 선구자쯤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사실은 인생을 단지 자유롭게 살고자 했던 사람일 뿐이었다. 자유롭게 사는 것이 그의 소중한 가치였고,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그는 때로 고립을 자초했고 사회와 싸웠고 글을 썼다. 필자는 소로를 앞에서 말했던 대로 ‘문학적인 혁명가’라고 생각한다. 정치적 혁명가나 종교적 혁명가가 주로 한 방향으로의 전환을 꿈꾼다면, 문학적(예술적) 혁명가는 (맹목적으로) 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사람들(혹은 자신의 마음)을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방향으로 가도록 유도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우리에게 주는 감동을 생각할 때 그의 대부분의 책이 국내에서 출판되었어야 옳다. 유독 <월든>만이 여러 판본이 나와 있는 실정이다. 방대한 분량의 일기를 다 출판하진 못한다 하더라도 나머지 저서들을 망라해서 펴내는 출판사에게는 그에 따른 보상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소로 생전에 출판업자들이 <월든>의 가치를 몰랐지만, 100년이 지난 후에 <월든>이 엄청난 각광을 받았듯이……. 소로의 불후의 명작 <월든>은 그 명성에 답하듯 국내에 여러 판본으로 나와 있다.


시민의 불복종나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소로우와 에머슨의 대화

 

사이버 경제논객 세일러는 자신의 책 <흐름을 꿰뚫어보는 경제독해>(위즈덤하우스, 2009)에서 <월든>을 경제위기 상황에서 머리를 식히기 위해 읽을 만한 책이라고 소개했다. <월든>에는 오늘의 세계를 읽는 해법이 들어 있다. 우리들은 모두 경제논리의 노예이며, 더 세부적으로는 집의 노예이며 직장의 노예이며 돈의 노예이며 길의 노예이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한 인간은 영원히 노예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샬롯의 거미줄>을 쓴 미국 작가 엘윈 브룩스 화이트가 대학 졸업생에게 졸업장 대신 <월든> 한 권씩을 주자고 제안한 이유를 상기해볼 일이다.

 

소로의 책 중에서 인류에게 가장 직접적이고 지대한 영향을 끼친 책은 단연 <시민의 불복종>(강승영 옮김, 이레, 1999)이다.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마하트마 간디, 마틴 루터 킹 등 수많은 혁명가와 인권운동가와 사상가들이 이 책의 영향을 받았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책의 다음과 같은 말을 꼭 명심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내가 떠맡을 권리가 있는 나의 유일한 책무는, 어떤 때이고 간에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하는 것이다.”  

 

박홍규의 <나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필맥, 2008)는 소로를 이해하는 데 가장 긴요한 길잡이가 되어주는 책이다. 저자는 소로가 모든 면에서 세속적 잣대를 철저히 거부하고 오로지 자기만의 방식으로 단순소박하게 ‘멋대로’ 살았다는 점에 주목한다. ‘멋대로’ 사는 삶은 따돌림당하기 십상인 법인데, 소로야말로 원칙을 지키면서 끝까지 타협하지 않고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를 지켰다. <월든>을 읽기 힘든 독자들은 이 책을 먼저 읽어보기 바란다. <월든>은 결코 어려운 책이 아니다.

 

하몬 스미스의 <소로우와 에머슨의 대화>(서보명 옮김, 이레, 2005)는 소로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친구였던 에머슨과 소로의 삶을 함께 다룬 흥미로운 전기이다. 문장 하나하나가 팽팽한 긴장감을 조성하고 있는데, 그것은 두 사람이 쓴 내밀한 일기를 종합하여 드라마틱하게 재조직했기 때문일 것이다. 헨리 솔트의 전기 <헨리 데이빗 소로우>(윤규상 옮김, 양문, 2001)도 권하고 싶은 전기이다. 헨리 솔트는 소로의 진가를 일찌감치 알아본 선구자였다. 심지어 그는 이 책의 개정판에서 소로가 결국 에머슨보다 높이 평가받을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우리는 지금 그 예언의 실현을 확인하고 있다. 한 인간의 순수한 정신세계에 깊은 애정을 갖게 하는 책이다.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메모 :

우리동네 목사님

 

읍내에서 그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철공소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그는

양철 홈통을 반듯하게 펴는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자전거 짐틀 위에는 두껍고 딱딱해보이는

성경책만한 송판들이 실려있었다

교인들은 교회당 꽃밭을 마구 밟고 다녔다, 일주일 전에

목사님은 폐렴으로 둘째 아이를 잃었다, 장마통에

교인들은 반으로 줄었다, 더구나 그는

큰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법도 없어

교인들은 주일마다 쑤군거렸다, 학생회 소년들과

목사관 뒷터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늦은 적도 있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에 그는 우리마을을 떠나야 한다

어두운 천막교회 천정에 늘어진 작은 전구처럼

하늘에는 어느덧 하나둘 맑은 별들이 켜지고

대장장이도 주섬주섬 공구를 챙겨들었다

한참 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던 목사님은 그제서야

동네를 향해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저녁 공기 속에서

그의 친숙한 얼굴은 어딘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기형도

 

그의 글은 철저히 감상을 피했다. 오늘 예배가 끝나고 그의 글을 읽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라. 생활에...

내 생활은 하루가 힘들다...어미새를 잃은 새끼를 보둠기에는 내 가슴이 너무 작거나 초라하다.

가끔은 나에게도 기형도처럼  심야영화를 보고 소리없이 소천할 수 있는 축복이 주어진다면 생각한다.

  나에게 무슨 소명이 더 있길래..아이가 아프던 날, 설령 무너지더라도 나는 다시 소망의 기도를 쌓으며,,생활에 밑줄하나 그어본다. 

출처 :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
글쓴이 : 김정랑 원글보기
메모 :
 
죽는 法을 배우십시오


모리 슈워츠 교수의 마지막 메세지





1. 살아가는 법을 배우십시오.

그러면 죽는 법을 알게 됩니다.

죽는 법을 배우십시오.

그러면 살아가는 법을 알게 됩니다.

훌륭하게 살아가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언제라도 죽을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2. 자신의 몸이나 병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마십시오

몸은 우리의 일부일 뿐, 결코 전체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렇게 위대한 이유는 몸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감정과 통찰력, 직관을 지닌 존재들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감정과 통찰력과 직관이 남아있다면

우리는 아직 우리의 자아를 잃어버린 것이 아! 닙니다.





3. 화가 나면 화풀이를 하십시오.

항상 좋은 사람인 척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좋은 사람인 때가 더 많은 사람이면 충분합니다.

극도로 화가 났을 때는 그 감정을 밖으로 표현하십시오.

좌절하거나 화가 났을 때, 감정을 표출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4.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

자신을 동정할 줄 아는 사람

자신에게 친절한 사람이 되십시오.


자신을 가장 가까운 친구로 삼으십시오.

자신을 진실로 아는 자는 진실로 자신을 귀하게 여기며

자신에 대한 귀한 존경심을 통하여

타인들을 자기처럼 귀하게 여기는 방법을 배웁니다.





5.
타인의 도움을 받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꺼이 우리를 도와주도록 해야! 합니다.

다만, 그들이 들어 줄 수 없는 요구를

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6.
너무나 짧은 우리의 삶에서

행복은 소중한 것입니다.


가능한 한 즐거움을 많이 느낄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 놓으십시오.

전혀 예상치 못한 때에, 뜻밖의 곳에서

행복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7.
슬퍼하고, 슬퍼하고, 또 슬퍼하십시오.


눈물을 흘리며 슬픔을 드러내는 것은

삶의 소중한 휴식이 되며,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 줍니다.

슬픔을 드러내는 것은

카타르시스와 위안을 안겨 주며

침착함을 유지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슬픔의 끝이 슬픔일 수는 없습니다.

잃어버린 것을 슬퍼하며 울고 난 후에는

아직 남아 있는 것에 감사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8.
우리가 정말로 해서는 안 될 일은

자기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생각의 끝에는 우울증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쓸모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자기 나름의 방법을 찾으십시오.





9.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힘을 기르십시오.


용서는 우리의 삶을 이전의 삶과는

아주 다른 새로운 삶으로 이끌어 줍니다.

용서는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억울한 생각을 없애주며, 죄책감을 녹여 줍니다.





10.
파도는 해안에 부딪쳐 사라지지만,

바다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바다의 일부였던 그 물결은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인류의 삶이 계속되는 한

우리는 파도가 아니라

바다의 일부입니다.






      모리 슈워츠(Morrie Schwartz)교수는 미국 매사추세츠 월트햄에
      있는 브랜다이스 대학에서 35년 동안 사회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1994년 77세 나이에 루 게릭병에 걸려 1995년 11월 4일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신의 병을 받아 들이고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가능한 한 풍요로운 삶을 살기에 노력했다.

      목숨이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배움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않았으며, 스승으로서의 직분 또한 버리지 않았다.

      자신의 죽음을 드러내어 그 과정에서 겪는 온갖 슬픔과 고통을
      모든 사람들을 위한 대화의 소재로 기꺼이 내 놓았으며,

      말을 더듬고 손발은 움직이지 못하는 처지이면서도
      자신의 마지막 모습까지 모든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개인주의와
      경쟁만이 최고의 가치로 인정되는 이 시대에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사랑과 연대 의식, 용기와 희망을 전하고자 했던 위대한
      스승이었다.


      그는 삶을 사랑하였고, 죽음 또한 기꺼이 받아
      들였으며, 그의 삶과 죽음은 사람됨의 위엄과 기품을
      우리들 마음속에 깊이 새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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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떠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이 길을 만들기 이전에는
모든 공간이 길이었다.
인간은 길을 만들고 자신들이
만든 길에 길들여져 있다.
그래서 이제는 자신들이 만든 길이 아니면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나의 인간은 하나의 길이다.
하나의 사물도 하나의 길이다.
선사들은 묻는다.
어디로 가십니까. 어디서 오십니까
그러나 대답할 수 있는 자들은 흔치 않다.
때로 인간은 자신이 실종되어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길을 간다
.

 

 

 

인간은 대개 길을 가면서 동반자가
있기를 소망한다.
어떤 인간은 동반자의 짐을
자신이 짊어져야만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어떤 인간은 자신의 짐을
동반자가 짊어져야만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

 


 
길을 가는 데 가장 불편한 장애물은
자기 자신이라는 장애물이다.
험난한 길을 선택한 인간은
길을 가면서 자신의 욕망을 버리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고
평탄한 길을 선택한 인간은
길을 가면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일에 즐거움을 느낀다.
전자는 갈수록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후자는 갈수록 마음이 옹졸해진다.

 


 
지혜로운 자는 마음안에 있고
어리석은 자의 길은 마음 밖에 있다.
아무리 길이 많아도 종착지는 하나다

 

 

Alone on the Road (나홀로 길을 걷네)

Svetlana

//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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