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빛깔은 삶의 빛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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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규 칼럼]- 위령성월을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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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의 성인들이여, 어서 오소서. 주의 천사들이여, 마주 오소서. 이 영혼을 부르신 그리스도여, 이 영혼을 받아들여 주소서. 천사들이여, 이 영혼을 아브라함의 품으로 데려가소서. 주여 이 영혼을 받으소서. 주의 영원한 빛을 그에게 비추소서.”
살았어도 죽은 자가 있는가 하면 죽었어도 살아 있는 자가 있다. 진실로 죽음은 몸의 것이 아니라 마음의 것, 영혼의 것이다. 삶의 반대말은 죽음이 아니라 거짓과 불성실, 궁극적으론 죄악 그런 것이리라. 오히려 죽음의 빛깔은 삶의 빛깔, 삶의 충실성 그 만큼이다. 그럴 때 죽음은 더 이상 칙칙한 것이 아니라 투명토록 푸르른 가을 하늘빛! 위령성월이 지금임은 아마도 그런 뜻일까?
과연 죽음은 끝이 아니라 삶의 영원한 반향, ‘바로 여기’의 이 모습이야말로 하느님의 가슴에 영원히 새겨질 그 모습이리라! 빈 무덤은 부활이 환상이 아님을 말해 준다. 죽음의 현실성 그 이상으로 부활은 현실적인 것이다. 누가 무덤의 주검을 가져갔는가. 하느님이다. 우리 삶의 끝을 거두어주는 자는 염꾼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죽음에 처한 자에게 가장 가슴에 와 닿는 하느님의 이미지는 아마도 ‘거두어 주시는 분’이리라. 허무로 꺼져버릴 것 같은 참담한 자신의 자아를 따스한 사랑의 가슴으로 받아 주는 마지막 실재가 있다는 사실, 자신이 영원으로 간직될 곳간이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위로와 희망이 될 것인가. 이야말로 신학자 한스 큉(Hans Küng, 1928~)이 말한 “마지막 실재에 거두어진 자아”가 아닌가!
어느 성직자 묘지 입구에 새겨진 라틴어 ‘HODIE MIHI CRAS TIBI’, 이르되 ‘오늘은 나 내일은 너’ 라는 의미다. 참으로 죽음이란 무엇일까. 누구를 가리지 않는 죽음 앞에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면, 피할 수 없는 이 운명을 우리는 진지하고도 솔직하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죽음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기 위한 작업은 그래서 더욱 필요하다.
이름하여 ‘죽음의 일상화’이다. 스스로를 죽이는 체험 곧 십자가의 죽음을 일상생활에서 거듭함으로써 하느님 손길로 자신을 다듬어 가는 것이다. 살아서 이미 죽음과 무수한 만남을 이루었던 그대는 진짜 죽음이 찾아와도 전혀 낯설지 않을 것이다.
하여 죽음이 나를 부르기 전에 내가 먼저 스스로를 죽이고, 죽음이 나를 홀로 만들기 전에 내가 먼저 온갖 것을 끊고서 홀로 서고, 죽음이 나를 꼼짝 못하게 하기 전에 내가 먼저 자기 십자가에 못 박고, 죽음이 나를 분해하기 전에 내가 먼저 내 모든 걸 나눠주고, 죽음이 나를 부패시키기 전에 내가 먼저 참된 밀알이 되어 온전히 썩어지고, 죽음이 나를 허무케 하기 전에 내가 먼저 헛된 욕망과 꿈에서 깨어나고, 죽음이 나를 그분 앞에 세우기 전에 내가 먼저 그분께로 달려가 안기며 그분 안에 새로 태어날 때, 죽음은 불청객이 아닌 친근한 ‘길벗’이 되어 그분께로 나를 이끌어 갈 것이다. 그처럼 충실하고 지극한 삶에 있어 죽음이 주는 의미란 오히려 하늘의 빛을 이 땅에 드러내 보여주는 은총의 손길이요, 이 땅에 ‘영원한 지금’을 가져다주는 복된 발길이 될 것이다.
부활은 어떻게 오는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 그분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모든 걸 다 쏟아 내며 죽었을 때 비로소 그 문이 열리리라. 삶의 집착이 아닌 초월로서만 부활이 가능한 까닭도 그러하리라. 지금의 삶을 넘어서 참된 삶이 되는 것, 모든 것을 잃어 모든 것을 찾는 것, 궁극적으로 존재 그 자체만이 남았을 때 근원에서 발하는 ‘존재의 빛’ 그것이 부활이리라. 따라서 십자가 없인 부활도 없는 것, 죽음으로써만이 부활은 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가. 비아돌로로사(Via Dolorosa) 곳곳에 핏빛이 어림은 어인 까닭인가! 나를 죽이고, 나를 끊고, 나를 못 박고, 나를 나누고, 나를 썩히고, 나를 깨우고, 나를 새롭게 만든다는 것은 차라린 죽음보다 더 하니, 구원의 길은 수난의 고통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부활의 영광인 파스카의 신비인 것이다.
생명의 끝은 어디일까. 또 시작은 어디일까. 오늘도 길 가에는 나무를 떠난 낙엽들이 시나브로 쌓이고 있다. 생명의 뿌리를 떠난 그들은 곧 퇴색되어 볼품없고 메마른 몸뚱이로 하루가 무섭게 겨울로 썩어가고 있다.
그러나 겨울은 봄의 어머니, 아낌없이 내어 주고 죽어 간 저들의 썩은 주검 위로 새로운 생명의 씨앗이 움트고 있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아니 믿고 있는 것이다. 생명의 이러한 공동체성 안에서 결국 부활은 나의 것도 너의 것도 아닌 바로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함께 부활할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그곳에서,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는 그곳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 되는 그곳에서 우리는 분명 함께 부활할 것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nahnews.net>
정중규 / 다음카페 ‘어둠 속에 갇힌 불꽃’(http://cafe.daum.net/bulkot) 지기, 대구대학교 한국재활정보연구소 연구위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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