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에 드러나면 짜안해지는

것들이 있다

김이 모햇볕에 드러나면 짜안해지는 것들이 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에 햇살이 닿으면 왠지 슬퍼진다

실내에 있어야 할 것들이 나와서 그렇다

트럭 실려 가는 이삿짐을 보면 그 가족사가 다 보여 민망하다

그 이삿짐에 경대라도 실려 있고,

거기에 맑은 하늘이라도 비치면

세상이 죄다 언짢아 뵌다 다 상스러워 보인다

20대 초반 어느 해 2월의 일기를 햇빛 속에서 읽어 보라

나는 누구에게 속은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진다

나는 평생을 2월 아니면 11월에만 살았던 것 같아지는 것이다

                                                          ―이문재, 「햇빛에 드러나면 슬픈 것들」 전문

 

 

락모락 나는 흰 쌀밥에 햇살이 닿으면 왠지 슬퍼진다

 

실내에 있어야 할 것들이 나와서 그렇다

트럭 실려 가는 이삿짐을 보면 그 가족사가 다 보여 민망하다

그 이삿짐에 경대라도 실려 있고,

거기에 맑은 하늘이라도 비치면

세상이 죄다 언짢아 뵌다 다 상스러워 보인다

20대 초반 어느 해 2월의 일기를 햇빛 속에서 읽어 보라

나는 누구에게 속은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진다

나는 평생을 2월 아니면 11월에만 살았던 것 같아지는 것이다

                                                          ―이문재, 「햇빛에 드러나면 슬픈 것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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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의롭다" 이순신 도운 일본 장수..실존모델 후손들 사는 곳

손민호 입력 2022. 08. 17. 05:00 수정 2022. 08. 17. 10:10 댓글 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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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장수로 임진왜란에 참전했다가 조선에 귀화한 김충선 장군을 모신 대구 녹동서원. 지난 12일 장군의 12대손이자 김충선 장군이 시조인 사성 김해 김씨 종친회의 김상보 회장이 녹동서원을 소개하고 있다.

개봉 20일 만에 관객 수 600만 명을 기록한 영화 ‘한산 : 용의 출현’.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을 소재로 한 영화에서 유난히 눈에 띈 역할이 있었다. 조선에 항복한 왜군 장수 ‘준사’라는 인물이다. 일본 상투 촌마게(丁髷)를 틀어 정수리까지 훤히 드러낸 일본 장수가 위기에 빠진 조선을 도와 왜군과 싸우는 장면은 낯설면서도 통쾌했다. 이 장면에서, 그러니까 조선에 상륙한 왜군이 돌변해 왜군에 칼을 휘두르는 대목에서 사실을 의심한 적 있었다면 오해를 거두시길.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상륙한 왜군 중에서 조선으로 귀화한 사람은 실제로 있었다. 특히 영화에서 모델로 삼은 실존 인물은 평생 조선을 위해 싸웠고, 그 공을 인정받아 정이품 벼슬을 받았다. 대구에 그를 모시는 사당이 있고, 그 사당이 있는 마을에 후손이 모여 산다.


사야가 vs 김충선

녹동서원. 대구에서 청도로 넘어가기 직전 삼정산 남쪽 기슭에 있다. 사진 중앙의 녹동서원 오른쪽으로 한일우호관이 보인다.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대구에서 남쪽으로 30번 지방도로를 타고 내려가다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니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골 마을이 나타났다. 마을 어귀만 막으면 세상과 완전히 단절될 것 같은 천혜의 요새 같은 지형이다. 마을 초입에서 정면에 보이는 산이 우미산(747m)이고, 오른쪽의 산이 삼정산(566m)이다. 왼쪽에 늘어선 봉화산(473m)과 삼성산(668m) 너머가 청도 땅이라고 했다.

녹동서원은 볕 잘 듣는 삼정산 남쪽 아랫자락에 있었다. 녹동서원.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의 우선봉장으로 참전했다가 조선에 귀화한 김충선(1571~1642) 장군을 모시는 서원이다. 귀화 이전 그의 이름은 사야가(沙也可)로 전해진다. 녹동서원 옆 한일우호관에서 대구시 문화관광해설사 손수자(67)씨를 만났다.

“조선에 항복한 왜군을 항왜(降倭)라 하는데, 거의 모든 항왜가 평생 신분을 숨기고 살았어요. 김충선 장군이 거의 유일한 예외입니다. 귀화 사유부터 전공(戰功)까지 조선에서의 50년 기록이 전해오니까요. 영화 초반에 이순신 장군이 부하를 구하려다 부상당하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그때 준사가 의(義)를 말합니다. 김충선 장군이 바로 그 의와 예 때문에 조선에 귀화하셨어요.”

영화 '한산: 용의 출현'에서 항왜군사 준사역으로 출연한 김성규 배우의 모습. 영화 홈페이지 캡쳐

해설사의 설명처럼 사야가는 조선의 예의에 감동해 귀화를 결심한다. 종군 7일 만에 내린 결단이었다. 그는 “피란길에 오른 조선인이 전쟁통에도 의복을 갖춰 입고 노모를 업고 아이들을 걸리고 있었다. 전란 중에도 의관 문물이 일본에서 들었던 바와 같았다”며 항복의 뜻을 밝혔다(사야가가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에게 항복하며 건넨 ‘강화서’에서 인용)’. 무인이자 문인이었던 사야가는 평소 고대 중국 하은주 시대를 흠모했다고 한다. 하은주 시대는 인간이 예와 의를 지키며 사는 태평성대의 시절을 이르는데, 조선에서 그 이상향의 일단을 발견했다는 게 사야가가 밝힌 귀화 이유다. 사야가는 훗날 자신의 호를 ‘모하당(慕夏堂)’이라 지었다. 중국 하나라를 흠모한다는 뜻이다. 영화에서도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을 “불의(不義)에 맞서는 의(義)의 싸움”이라고 여러 번 말한다.

녹동서원 옆 한일우호관에 전시 중인 김충선 장군 관련 기록. 밑줄 친 부분에 '사야가'라는 한자 이름이 나온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30년(1597) 11월 22일자를 복사한 것이다.

조선에 투항한 사야가는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자신의 조총부대 500명과 함께 귀화한 사야가는 조선에 조총과 화약 제조법을 전수했으며, 울산·경주·영주 등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영화에서 준사가 바다가 아니라 육지에서 싸우는 것처럼, 사야가도 육지에서 싸웠다. 사야가는 실제로 이순신 장군과도 교류했다. 조총과 화포, 화약 만드는 법에 관하여 이순신과 주고받았던 서신이 전해온다. 사야가가 왜군에 함락됐던 성 18개를 되찾아오자, 선조는 정이품 자헌대부 관직과 김해 김씨 성과 충선(忠善)이란 이름을 하사했다. 왜란 뒤에도 그는 북방에 나가 여진족을 소탕했고,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에서도 활약했다.


우록리 녹동서원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전경.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골 마을로, 사성 김해 김씨 집성촌이다.
“김충선 장군을 시조로 하는 사성 김해 김씨는 현재 18대손까지 내려옵니다. 전국에 약 7500명의 후손이 살고 있고요. 우록리에는 87가구 100여 명이 살고 있습니다. 우록리는 사성 김해 김씨 집성촌입니다.”

사성 김해 김씨 김상보(74) 종친회장의 설명이다. 그는 김충선 장군의 12대손이다. 사성(賜姓)은 임금이 하사한 성이라는 뜻이다. 원래의 김해 김씨 가문과 구별하기 위해 사성 김해 김씨라고 따로 부른단다. 지명을 따 ‘우록 김씨’라고도 한다. 우록(友鹿)은 ‘사슴을 벗삼는다’는 뜻이다. 병자호란 이후 거처를 찾던 김충선 장군이 여기 산자락에서 사슴이나 벗 삼고 살겠다며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녹동서원 안에 있는 녹동사. 김충선 장군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삼정산 자락에 있는 김충선 장군의 묘소. 녹동서원에서 약 15분 오르면 나온다.

마을에 김충선 장군을 기리는 녹동서원과 장군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녹동사가 있다. 서원 뒤쪽 산자락에는 장군의 묘소가, 서원 서쪽에는 생가가 있다. 서원 옆에 2012년 건립한 한일우호관에선 장군의 유품과 기록이 전시 중이다. 김 회장은 “문재인 정부 이전까지 해마다 수학여행단을 비롯해 일본인 2000∼3000명이 방문했었다”며 “일본에서도 김충선 장군을 배신자가 아니라 의인으로 이해한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일본에서 그를 이해한다는 건 사실일까. 1960년대까지 일본에선 김충선 장군이 조선이 만든 허구 인물이라고 주장했었다. 일본에서 반전이 일어난 건, 1970년대 일본 국민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1923~1996)가 녹동서원을 방문한 뒤 펴낸 책에서 장군을 알린 뒤부터다. 임진왜란 400주년이자 김충선 장군 귀화 400주년이던 1992년에는 일본 NHK 방송이 ‘출병에 대의 없다-풍신수길을 배반한 사나이 사야가’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방영하기도 했다. 이후 일본에 사야가 연구단체들이 설립되었고, 1998년 한국과 일본 교과서에 김충선 장군의 이야기가 실렸다.

김충선 장군 영정. 남자 후손 27명의 사진을 수집해 영정을 제작했다고 한다.

평소에는 잠가놓는다는 서원을 김 회장이 열어줬다. 서원을 지나 장군 영정을 모신 녹동사로 걸음을 옮겼다. 1960년대 남자 후손 27명의 사진을 수집해 제작한 영정이라고 했다. 김 회장이 “영정이 나랑 비슷하지 않으냐”며 웃었다. 정말로 비슷해 보였다.

김충선 장군의 일본 기록은 알려진 바가 없다. 정확한 출신지도 모르고, 사야가도 가명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일본에 두고 온 가족이 보복을 당할까 봐 입을 다문 듯하다. 그런데 정말 의를 좇아 조국과 가족에 등을 돌리는 건 가능한 삶일까. 사사로운 이해에 안달복달하는 우리네에겐 헤아리기 버거운 인생이다.

대구=글ㆍ사진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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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대작이다. 결말을 다 알면서도 조마조마한 것은  그만큼 잘 만들었다는 작품 아닐까?

명량을 못 봐서 안타깝다.

주인공들의 열연이 피부에 와닿는다.

전술 전략등 전쟁을 앞두고 두뇌싸움 등 장수들의 고뇌가 극을 달한다.

이순신 장군의 지적인 모습 조용한 성품 등 매력이 돋보였다.

 

한산도 대첩(閑山島大捷) 혹은 견내량대첩(見乃梁大捷)은 1592년 8월 14일(선조 25년 음력 7월 8일) 통영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왜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 이 전투에서 육전에서 사용하던 포위 섬멸 전술 형태인 학익진을 처음으로 해전에서 펼쳤다.

 

배경[편집]

조선 선조 25년(1592년) 5월 29일(양력 7월 8일)에 2차 출동한 조선 수군의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함대는 6월 10일(양력 7월 18일)까지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등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육지에서는 패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일본 수군은 일본 육군에 호응하여 가덕도 거제도 부근에서 10여 척에서 30여 척까지 함대를 이루어 서진하고 있었다.

일본은 해전의 패배를 만회하고 제해권을 재차 장악하고자 병력을 증강하였다.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제1진 70여 척은 웅천(熊川)에서, 구키 요시타카의 제2진은 40여 척을, 제3진의 가토 요시아키도 합세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7월 5일(양력 8월 11일),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전라 좌, 우도의 전선 48척을 본영이 있는 여수 앞바다에 집결시켜 합동훈련을 실시하였고, 다음 날인 6일에 이억기와 더불어 48척을 거느리고 출진하였고,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선 7척이 합세하여 조선 수군의 전력은 55척이 되었다. 7월 7일(양력 8월 13일) 저녁, 조선 함대 당포에 이르러 정박하였다. 이때 목동 김천손(金千孫)에게서 일본 다이묘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함대 73척(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이 견내량(見乃梁 :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에 들어갔다는 정보를 접했다.

이 과정에서 약간의 사고가 발생했는데 7월 7일(양력 8월 13일) 이순신 휘하의 수졸 황옥현이 도주했다. 이순신은 황옥현을 잡아들여 군무이탈 혐의로 참수형에 처한 후 그 수급을 효수했다.

견내량파왜병장(見乃梁破倭兵狀)을 보면 한산도해전 당시 일본 수군은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으로 구성되어있는데, 대선을 흔히 안택선으로 등치하여 병력을 계산하려는 시도가 많다, 하지만 안택선은 당시 일본 내에서도 그렇게 많은 배가 아니였으며, 일본 제일의 다이묘 오다 노부나가조차도 해전에서는 10척 남짓 동원한게 다였으므로 대선이라고 기록된 것은 세키부네중 조금 덩치가 큰 배 인것이 타당할 것이다.

경과[편집]

 
견내량, 한산도, 한산대첩 전투 해역

견내량은 거제도와 통영만 사이에 있는 긴 수로로 길이 약 4km에 넓은 곳도 600m를 넘지 않는 데다, 암초가 많아 판옥선이 운신하고 전투를 벌이기에 좁은 해협이었다. 반면 한산도는 거제도와 통영 사이에 있어 사방으로 헤엄쳐나갈 길도 없고, 한산도는 당시 무인도나 다름이 없는 섬이었기 때문에 궁지에 몰려 상륙한다 해도 굶어 죽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이리하여 먼저 판옥선 5 ~ 6척 만으로 한산도 앞바다로 일본 함대를 유인하여 격멸한다는 전략이 세워졌다.

6척의 조선 함대를 발견한 일본 수군은 그들을 뒤쫓아 한산도 앞바다에까지 이르렀고 그곳에서 대기하던 전 조선 함대가 배를 돌려 학익진(鶴翼陣)을 펼쳤다. 여러 장수와 군사들은 지·현자총통(地玄字銃筒) 등 각종 총통을 쏘면서 돌진하였다. 싸움의 결과 중위장 권준(權俊)이 층각대선(層閣大船) 1척을 나포한 것을 비롯해 왜선 47척을 불살라 격침시켰고 12척을 나포하였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뒤에서 독전하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패잔선 14척을 이끌고 김해 쪽으로 도주했다. 이 해전은 조선 수군의 큰 승리로 막을 내렸다. 격전 중 조선 수군의 사상자는 있었으나 전선의 손실은 전혀 없었다. 일본군 400여 명은 당황하여 한산도로 도주했다가 뒷날 겨우 탈출하였다.

일본의 전선들은 판옥선에 비해 급격한 회전이 어려웠고(따라서 후방은 비워져 있었지만, 쉽게 도망갈 수 없었다)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함대의 정면에 배치된 함선은 많은 피해가 우려되었지만, 조선 함대는 압도적인 화포의 화력으로 이 불리한 점을 극복하였다. 격침되거나 나포된 일본 함선은 모두 총 59척이었고, 한산도로 도망친 와키자카 휘하의 병력 400여 명(이순신이 조정에 올린 《견내량파왜병장》에는 400명, 《와키자카기》에는 200여 명)은 군량이 없어 13일간 미역을 먹으며 견내량과 무인도에서 머무르다가 뗏목으로 겨우 탈출하였다. 마나베 사마노조는 이때 자신의 배가 소각되자 섬에서 할복하였다.

이 전투는 행주대첩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때의 3대 대첩의 하나로 불리며, 이순신은 그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억기와 원균은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서(陞敍)되었다.

결과[편집]

의의[편집]

이 해전을 진주대첩(晉州大捷, 1592년 10월 5일 10월 10일행주대첩(幸州大捷, 1593년 2월 12일)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 대첩중의 하나로 부른다. 한산도 대첩은 일본 수군의 주력을 거의 격파해 그들의 수륙병진계획을 좌절시켰다. 그리고 육지에서 잇단 패전으로 사기가 떨어진 조선군에게 승리의 용기를 주었다.

나아가 조선 수군이 남해안 일대의 제해권을 확보함으로써 이미 상륙한 적군에게도 위협을 주어 불리했던 전세를 유리하게 전환할 수 있었다. 구한말 고종 황제의 미국인 고문 호머 헐버트도 “이 해전은 조선의 살라미스 해전이라 할 수 있다. 이 해전이야말로 도요토미의 조선 침략에 사형 선고를 내린 것이다…….”라고 감탄하였다.

한산도 해전 다음 날 벌어진 안골포(安骨浦, 현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에서 벌어진 해전도 이순신은 승리로 이끌었고, 이순신은 정헌대부(正憲大夫, 정2품), 이억기 · 원균 가의대부(嘉義大夫, 종2품)의 관계를 받았다.

각주[편집]

참고 문헌[편집]

  • 『선조실록(宣祖實錄)』
  •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 『日本戰史朝鮮役』(參謀本部, 1924)
  • 『임진장초(壬辰狀草)』(조성도역, 동원사, 1973)
  • 『임진전란사』(이경석, 임진전란사간행위원회, 1967)
  • The Passing of Korea(Hulbert,H.G., Doubleday Page and Co., New York, 1906)
  • 한산도대첩 (閑山島大捷)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임진왜란" 항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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