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아무개 별에게/이영식
내가 아는 어느 시인은
별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취미가 있다
까뮤, 쌩떽쥐베리, 니체 같은 이름 붙여주며
가슴 환하도록
별들의 명명식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밤 나는
저 별들의 이름을 지우기로 한다
철필鐵筆로 쓴 이름 떼어내고
별자리의 틀에서 풀어놓기로 한다
샛강 차오르는 은어 떼처럼
싸라기별들이 헤엄치게 하고 싶다
가끔은 내 꿈속에도 내려와 놀고
술잔 위에도 앉히고 싶다
이름을 벗고 알몸으로 온 별들
첫사랑의 키스보다 뜨거울 것이다
금싸라기 술 몸안에 퍼지면
내 허명虛名 또한 희미해질 것이고
수수깡 집처럼 무너져도 좋으리
그런 날에는 빗장 친 관념을 벗고
눈물방울 화석, 저 아무개 별과
한살림 차려도 좋겠다
―『꽃의 정치』(지혜, 2020)
*
사월의 첫 시는 이영식 시인의 네 번째 시집 『꽃의 정치』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영식 시인의 첫 시집 『공갈빵이 먹고 싶다』(2002)를 읽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십수 년이 훌쩍 지났네요.
"저 아무개 별에게"
'이름을 붙인다는 것, 명명(命名)한다는 것'에 대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할런지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라는 김춘수 시인의 「꽃」은 또 어찌 생각하는지요.
인간이 우주만물에 대해 명명을 하면서부터 비롯된 '어떤 불행'이 머지 않았다는 예감
인간이 우주만물의 주인 행세를 하면서부터 비롯된 '어떤 비극'이 머지 않았다는 예감
코로나19는 단지 그 전조에 지나지 않을 거라는 이 불길한 예감
저는 왜 이영식 시인의 시 「저 아무개 별에게」가
인간의 오만에 대한 경고로 읽히는 걸까요?
인간이 만들어낸 감옥과 그 감옥에서 마침내 생기를 잃어가는 별들이 보이는 걸까요?
오늘 밤에는 이름을 벗고 알몸으로 빛나는 별들
저 아무개 별들과 술 한잔해야겠습니다.
'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각(知覺) (0) | 2021.07.27 |
---|---|
조기영 시인 (0) | 2020.04.21 |
마리 로랑 생과 아폴리 네르 (0) | 2020.03.24 |
미라보 다리 (0) | 2020.03.24 |
재래식 변소에 쭈구리고 앉아서 (0) | 2020.03.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