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몸으로 지나가던 그 긴 복도…제자를 만났습니다
미리 발가벗고 비누칠한 몸
문 따주면 달려가 물세례 받고 오는데
제 반 아이였던 준이가 와있었습니다
둘다 아무 말 하지 못했습니다
제자가 식구통으로 넣어주는 밥과 국
마룻바닥에 놓고 먹었습니다
한겨레

» 그림 이철수.
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22 /

교도관이 보는 앞에서 입었던 옷을 벗었습니다. 그리고 교도소에서 주는 푸른 옷으로 갈아입어야 했습니다. 옷을 입기 전에 교도관은 다른 죄수들과 함께 알몸인 채로 앉아 일어서를 시켰습니다. 엉덩이를 뒤로 돌리고 허리를 구부리도록 했습니다. 혹시 몸 깊은 곳에 숨겨 들여오는 것은 없는지 조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식기 두 개와 수저, 양동이 하나를 받았습니다. 가슴에는 수인번호 376번이 찍혀 있었습니다. 육중한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리고 엉거주춤 서 있는 발 근처에 식은 밥 한 덩어리와 멀건 국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감방 안에 있는 이들이 시큰둥하게 쳐다보면서 뭐 하다 들어왔느냐고 묻는데 설명하기가 마땅치 않았습니다.

남의 소를 훔쳤다가 잡혀 온 사람, 유가증권 위조범, 여성들을 유인하여 팔아넘기는 일을 하다 잡혀 온 이, 애인을 떼어버리려고 친구들을 시켜 집단 성폭행했다는 혐의를 받고 와 있는 사립학교재단의 손자, 하굣길에 여학생 목에 흉기를 들이대고 돈을 빼앗아 온 청년, 돈 때문에 들어온 사람, 그런 이들 십여 명과 한방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감방이 좁아 밤에는 옆으로 누워 칼잠을 잤습니다. 변기통 옆에 누워 있는 동안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밖에는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번개의 보랏빛 섬광이 창을 때리고 지나갈 때면 쇠창살이 잠깐씩 푸르게 이를 드러내고 있는 게 보였습니다.

생각해 보니 6월29일이었습니다. 6·29 선언이 있은 지 2년 동안 정말 바쁘게 살았습니다. 그들이 약속한 민주주의를 위하여, 내가 발 디디고 있는 곳의 민주적인 변화를 위하여 뛰어다니는 동안 따뜻한 밥 한 그릇 식구들과 편안히 먹지 못하였고 푸근하고 넉넉한 잠을 자 보지 못하였습니다. 내가 하는 일에 삿된 마음을 먹지 않았습니다. 취침 나팔소리에 모포를 끌어 덮으며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어디에 와 있는가?”

포승줄로 꽁꽁 묶이고 손에는 수갑이 채워진 채 검사 앞에 앉아 있는 동안 검사는 제 이름을 확인한 뒤,

“접시꽃 당신?” 하고 물었습니다.

내가 뭐라고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자 얼굴을 옆으로 돌리며 “피” 하고는 비웃는 소리를 냈습니다. 가소롭다고 여기는 듯했습니다.

“당신들이 주장하는 게 뭐야?”





“교육을 민주적으로 바꾸자는 겁니다. 반민족적이고 친일적인 교과 내용을 민족적인 교육으로 바꾸자는 거구요, 교육환경을 개선하여 인간답게 교육하자는 겁니다.”

“그건 그냥 하는 소리고, 삼민투의 논리대로 교육하자는 거 아냐? 민족, 민주, 민중교육! 반미교육 하자는 거 다 알고 있어.”

검사는 이미 다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미 무슨 예단을 하고 있는 것 같았고 어디서 이미 무슨 사전 논의를 다 끝내고 온 것 같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제가 하는 이야기를 별로 귀 기울여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해 여름은 비도 많이 왔고, 무더웠고, 이래저래 뜨거웠습니다. 하루 종일 벽에 등을 기댄 채 죄수들끼리 서로 마주보고 앉아 있으면 등줄기를 타고 땀이 주르르 흘러내렸습니다. 힘깨나 쓰는 죄수들은 젊은 미결수들을 못살게 굴었고, 선풍기도 부채도 없는 감방 안에서 부채질을 하도록 시켰습니다. 공책 같은 것을 들고 앞에 서서 부채질을 하면서 젊은 미결수들은 땀을 비질비질 흘렸습니다. 그러면서 욕을 하고 학대하고 놀리다 놓아주면 그 미결수는 몰래 시멘트 창틀에 칫솔을 갈곤 했습니다. 여차하면 끝을 뾰족하게 간 칫솔 끝으로 찔러버리겠다는 분노를 그렇게 갈아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날은 무더운데 장이 좋지 않아 고생을 했습니다. 배탈 설사가 잘 멈추지 않았고 의무실에 가 보아야 치료가 제대로 되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방 한구석에 있는 변기통을 자주 들락거리며 민망했습니다. 별도로 화장실이 마련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방 한쪽 끝에 푸세식으로 뻥 뚫린 구멍이 하나 있는 화장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저래 죄수들은 목욕시간을 기다렸습니다. 목욕은 복도 끝에 있는 수도에서 집단으로 하였습니다. 교도관이 “목욕 준비!”라고 외치면 미리 발가벗고 몸에 비누칠을 하고 기다립니다. 서쪽 끝에 있는 방부터 차례차례 문을 따주면 달려가서 물을 끼얹으며 비눗물을 닦아내고 오는 목욕입니다. 자기 손으로 자기 몸을 닦는 목욕이 아니라 수도꼭지가 죽 달린 수도의 턱진 곳 안에 물을 받아 놓고 세숫대야로 퍼서 물을 끼얹어 주면 물세례를 받고 오는 목욕입니다. 목욕 시간은 채 몇 분도 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한 번이라도 더 물세례를 받으려고 아우성을 칩니다. 먼저 가면 먼저 여러 번 물맛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죄수들은 발가벗은 채로 복도를 달려갑니다.

그 긴 복도를 다 지나가야 했다 복도 끝에 수도가 있었고 세숫대야에 퍼서 끼얹어 주는 수돗물을 한 번이라도 더 받으려고 아우성치는 죄수들과 발가벗고 복도를 달려갔다 이삼 분 정도나 될까 서너 차례 물세례를 받으면 행운이었다 미리 칠하고 간 비눗물이 다리 사이로 채 미끌어지기도 전에 다음 사람들에게 자리를 비켜주어야 했다 그것도 목욕이라고 수건으로 짐승 같은 시간의 방울방울을 털어내며 돌아서다 준이를 만났다

나보다 더 털이 숭숭한 준이는 내가 담임한 아이였다 그렇지 않아도 쪼그라 붙을 대로 쪼그라 붙은 불알이 달그락거리며 어찌할 줄 몰라 했다 칠십 며칠 학교를 오지 않아 퇴학 처리할 수밖에 없던 준이는 사람을 찌르고 나보다 먼저 거기 와 있었다 우리는 서로 쳐다보고 말을 하지 못했다 아이들 앞에 떳떳한 교사가 되겠다고 떠들며 돌아다니다 나는 거기까지 끌려간 것이었는데 준이를 만나고는 그 말을 하기가 민망해졌다

그 긴 복도를 다 지나와야 했다 다른 감방 사람들이 물기 맛본 살을 이리저리 비틀며 지나가는 몸들을 쳐다보았다 해바라기가 노랗게 피어 있는 여름이었다 감옥 밖으로 나와서도 나는 자주 긴 복도를 지나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무슨 소리인가 창 안에서 주고받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 졸시 <복도> 전문

준이는 제가 담임한 아이였습니다. 학교에 잘 적응을 못하고 이 학교 저 학교를 옮겨 다니는 동안 나이가 많아진 아이였는데, 저희 반으로 전학을 왔을 때 저는 여기서만은 잘 적응하고 방황하는 걸음을 멈추어주기를 바랐습니다. 처음에는 친구도 하나둘씩 사귀고 적응을 하는 듯했으나 학교를 나오지 않는 날이 점점 많아졌고 마침내 칠십여 일을 넘기면서 어쩔 수 없이 퇴학처리를 해야 했던 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보다 먼저 거기 와 있었습니다. 교도관들에게 물어보니 사람을 찌르고 왔다고 하는데 저는 준이에게 어떤 연유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아이들 앞에 떳떳한 교사, 역사 앞에 당당한 교사가 되겠다고 소리치던 제 목소리가 준이 앞에서는 쏙 들어갔습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한 아이를 책임지지 못했으면서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준이도 저를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저보다 먼저 들어와 있었으므로 준이는 교도관을 도와 밥과 국을 배식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을 교도소말로 ‘소지’라고 합니다. 제자가 퍼서 식구통으로 넣어주는 밥과 국을 받아 마룻바닥에 놓고 먹곤 했습니다. 형벌이라고 해야 할지, 치욕이라고 해야 할지, 견뎌야 할 운명이라고 해야 할지 그런 복잡한 심정으로 보리밥을 입안으로 밀어 넣곤 했습니다.

준이는 제 옆방에 있었으므로 목욕 시간이 되면 발가벗은 채 복도에서 만나야 했습니다. 그런 순간들도 이를 물고 견뎌야 했습니다. 발가벗은 채 그 긴 복도를 지나오는 동안 먼저 목욕을 마친 다른 방의 죄수들은 벌거벗은 몸들을 구경하느라 창살 옆에 붙어 서 있었습니다. 우리 방은 끝쪽에 있었으므로 복도는 길었습니다. 아는 사람들은 저기 시 쓰는 아무개 지나간다고 자기들끼리 킥킥거리곤 했을 겁니다. 감옥 밖으로 나와서도 저는 아직도 알몸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쳐다보며 웃고 있는 긴 복도를 지나가고 있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교도소 담 옆에 해바라기가 노랗게 피어 있던 여름이었습니다.

도종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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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타  /  신경림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如是我聞)

 

서양에서 '유일신'의 종교가 태동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광야, 사막이 가까이 있기때문이라고,

 

동양이 '다신교'(자연신)종교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너무도 아름다운 '산천초목'이 지천에 있기때문이라고...

 

 

왜, 서양의 많은 '영성가'들이 사막으로 들어갔을 까?

 

있는 거라고는 끝없이 펼쳐진 모래벌판,

별과 달과 해, 

거센 바람

한낮의 찌는듯한 더위,

밤이되면 찾아오는 살인적인 추위

그리고 어쩌다 지나가는 대상(隊商)의 행렬...

 

 

그들은 거기서 무엇을 보았는가?

그들은 거기서 무엇을 들었는가?

그들은 거기서 무엇을 만났는가?

 

 

이렇듯 텅빈 공간으로 찾아들어간  보통사람(ordinary man)들이

왜 특별난 사람(extraordinary person)이 되어 세상에 알려질 까?

 

 

그대, 사막의 성자(聖者)로 일컬어지는 '샤를르 드 푸코'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는가?

아니면 그의 제자 '까를로 까레또'에 대해서는 ..

-  까레또의 '사막에서 온 편지'라는 책을 통해 스승 '푸코'의 삶이 세상에 알려졌다.-

 

...................

 

 

잘 들어두어라.

 

 

그들은 사막에서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아무것도 듣지 않았다.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그들은 죽을 때 낙타를 타고 가지 않았다.

그는 살아서 낙타가 되었다.

그가 바로 낙타였다.

 

 

아무것도 없는(無), 텅빈(空) 사막에서

그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자 (Nobody), 텅빈(Empty) 인간이 되었다.

 

 

그때,  그는

神을 보았다

신의 음성을 들었다.

신을 만났다.

 

 

텅빈 사막에서 그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지복'(bliss-ness)을 느꼈다.

예수라는 인간이 그토록 목놓아  부르짖은 '하늘나라'를 체험했다.

"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은 ...." <본문>

 

 

 

분명히 말한다.

 

그대의 슬픔, 아픔은

그대가 어리석지 않아서 자초한 일이라고, <본문>

 

그대의 슬픔, 아픔은

Nobody(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지않고 Somebody(특별한 자)가 되려고 

몸부림친 '자업자득'이라고,  

 

그대는

그대의 삶에서 진짜 <재미>있는 일은 내팽게치고

당의정을 입힌 <재미 대용품>(돈, 권력, 명예 ..)에서 가짜 재미를 찾는

슬픈 중생이라고.. 

 

 

모세가 이국땅에서 종살이하는 그의 민족, '히브리 인'들을

에집트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데려나올 때 (The Escape, 출애급, 탈출기)

40년씩이나 '광야'(사막)을 돌아돌아 올 필요는 없었다.

지도를 봐라! 

에집트에서 가나안땅이 얼마나 가까운지 ..

그런데 왜 그랬을 까?

 

 

잘 들어두어라.

 

그대의 삶에도 광야가 필요하다.

그대삶이 사막이 되어야한다.

 

 

비밀은 ...

지금 그대삶이

쓰잘때기없는 잡동사니만 가득한,

그것으로 한껏 치장을 한

실제로는 <사막>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사막으로 들어간 자에게

과거의 영화가,

과거의 부(富)가, 권력이, 영예가  무슨 소용있겠는 가?

미래의 꿈이, 희망이, 탐욕이 무슨 소용있겠는 가?

 

그대를 사막으로 만들라.

그대가 낙타가 되어라.

 

그대가 가진 쓰잘때기없는 잡동사니들을 내려놓으면 내려놓는 만큼,

그대는 신을 체험하리라.

지복을 체험하리라.

 

 

세상이 줄 수 없는 ....

 

...........

 

 

덧붙임.

 

 

그대,

낙타의 눈을 본 적이 있는 가?

순박하고, 그윽하고, 평화스럽고, 깊은 눈을 ..

 

그대,

어린아이의 눈을 본 적이 있는가?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본 체하는..<본문>

 

낙타의 눈이 어린아이의 눈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어린아이"가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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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의 길 - 고재종


어둠 속의 길은 흩어져버린 세월과 같다

길들은 내 핏속에서 질풍노도로 일었지만

내가 지나온 길 뒷자리는 늘 폐허였다

나는 길 위에서 또 길을 찾으러 다녔으니

나는 나 자신을 찾으러 다닌 셈인가

아침놀까지 더러워질 만큼의 하늘을 보았으나

악성의 하품 때문에 나는 심심하지 않았다

난장 난 계절의 억새밭을 지날 때

나는 거기 가장 황량한 곳에 머물고 싶었다

바다는 목쉰 파도로 끊임없이 부서져도

바다의 모든 고통을 아는 자만이 귀 기울였다

누구나 길에 나서나 다 같은 길엔 아니다

우리는 우리이되, 우리가 아니어서 배회했다

 

 

웃자란 형극 속에서 길을 헤치곤 했으나

나의 어려움은 되레 길을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잃어버릴 수도 없는 길을 향해 내가 저지른 죄,

그건 길섶에 핀 산자고를 짓이겨버린 일이었다

근사한 말만 만나면 빛나는 잠언을 쏟아내며

길을 노래하곤 하는 무수한 시인들이여

조주도 물었다, 길이란 어떤 것입니까

평상심(平常心)이 그것이다, 남천이 답했으나

길을 길이라 하면 늘 그러한 길이 아니어서

나는 다시 피에 젖은 흙빛의 길 위에 섰다

길은 항상 저만큼의 풍광 속에서 일렁거렸다


 

 

가을 오후 / 도종환



고개를 넘어오니
가을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흙빛 산벚나무 이파리를 따서
골짜기물에 던지며 서있었다
미리 연락이라도 하고 오지
그랬느냐는 내 말에
가을은 시든 국화빛 얼굴을 하고
입가로만 살짝 웃었다


웃는 낯빛이 쓸쓸하여
풍경은 안단테 안단테로 울고
나는 가만히 가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서늘해진 손으로 내 볼을 만지다
내 품에 머리를 기대오는 가을의 어깨 위에
나는 들고 있던 겉옷을 덮어주었다


쓸쓸해지면 마음이 선해진다는 걸
나도 알고 가을도 알고 있었다
늦은 가을 오후....

 

 

 




              

가을이 가는구나 - 김용택

 


이렇게 가을이 가는구나
아름다운 시 한 편도
강가에 나가 기다릴 사랑도 없이
가랑잎에 가을빛같이
정말 가을이 가는구나

조금 더
가면
눈이 오리
먼 산에 기댄
그대 마음에
눈은 오리
산은
그려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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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메모 :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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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욱한 탓에 ‘슬픔을 판 시인’이란 낙인이 찍혔습니다
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16
한겨레

» 그림 이철수
예상치 못한 떠들썩한 반응
대중성에 영합했다는 평가…
모두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돌아보니 미숙한 시
그냥 건넨 제 책임이 컸습니다

이정우 신부님의 시 중에 <이 슬픔을 팔아서>라는 시가 있습니다. “이 슬픔을 팔아서 / 조그만 꽃밭 하날 살까. / 이 슬픔을 팔면 / 작은 꽃밭 하날 살 수 있을까.” 이렇게 시작하는 시는 뇌출혈로 쓰러져 중환자실에 누워 계신 어머니를 지켜보며 가눌 길 없는 슬픔을 다스리려고 쓴 시입니다. 슬픔과 아픔이 없는 곳을 꿈꾸는 이 시를 읽으며 이 시의 제목이 가시처럼 목에 걸릴 때가 있었습니다.

나야말로 슬픔을 팔아서 장사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시는 슬픔을 내다파는 일이 아니고 슬픔을 함께 나누는 일이어야 하며, 사랑의 아픔을 떠들어대는 것이 아니라 아픔을 사랑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시집이 나오면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매스컴의 떠들썩함과 독자들의 반응과 베스트셀러가 되어가는 과정은 시골학교 선생인 제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대중성에 영합한 저급한 문학으로 평가 절하되는 과정을 겪어야 하는 일도 힘든 일 중의 하나였습니다.

신문마다 시집이 두 달 만에 십만 부가 나갔다, 일 년여 만에 오십만 부가 팔렸다 이런 기사로 상업주의에 휩쓸려 있을 때, 문학적 평가를 해보자고 먼저 나선 것은 <창작과비평>이었습니다. 최두석 교수는 ‘대중성과 연애시’라는 논문에서 “절실한 마음과 평이하면서도 적절한 표현”으로 강한 호소력을 발휘하면서 “대중성은 획득했으나 ‘분단시대’ 동인으로서 무장해제라는 화살을 피하기는 힘들게 되었다”고 하면서 “시인이 이 땅의 엄연한 현실에 뿌리내리기를 바라는 필자로서는 너무 오래 무덤가를 배회하고 있다는 느낌을 버릴 수 없다”고 지적하였습니다. 특히 그리는 대상으로서의 님이 한용운보다는 김소월에 닿아 있다고 보면서, 김소월의 <산유화>에 비해 보면 도종환의 시는 “너무 평면적이고 왜소한 것으로 판단”되고, “문학이 담당할 역사적인 몫을 제대로 감당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접시꽃당신>은 문학사의 주류에 들기엔 아무래도 미흡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창비 1987>, 1987)고 평가하였습니다.

2년 뒤인 1989년 최두석 교수는 <실천문학> 겨울호에 쓴 다른 논문을 통해 제 시가 “너무 오래 무덤가를 배회하고 있다”는 불만을 밀어내고 “현실에 굳건히 뿌리내리고 있다”는 평가를 한 바 있지만, 동시대에 함께 활동한 문우인 최두석 교수의 평가를 저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주류 문단의 반응 역시 이 시집이 문학사의 주류에 들기엔 미흡하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또 다른 한 주류인 <문지> 쪽에서는 시집이 나온 지 이십오 년이 지난 지금까지 단 한 번의 원고청탁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시문학>에서는 아예 시로 취급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시문학>은 지령 200호 특집으로 마련한 ‘집중분석 / 세칭 베스트셀러 시집’을 통해 “짙은 감상성, 보편적 정서에 녹아 있는 산문성 등을 지니고 있는 도종환의 시편들이 대중의 인기를 얻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눈물 외에 시대성이나 역사성은 물론 이 시대의 삶의 문제에 진지하게 접근하고 고뇌하고 개혁하려는 젊은 시인의 민중적인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우며 바로 이러한 점이 눈물을 사랑하는 대중들의 감성에 영합된 것으로 보인다”(심상운)고 진단했습니다. 특집은 서정윤의 <홀로서기>, 이해인의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등을 포함해 집중적인 비판을 제기하면서 “한결같이 문학적 수용능력이 부족한 독자층에 의해 선호된 시 이전의 시” “시에 미치지 못한 시, 즉 시의 차원에 다다르지 못한 미숙한 시”라고 규정했습니다. 이런 시집들이 많이 읽히고 팔리게 되는 것은 “문학적 수용능력이 결여된 젊은 독자층의 무분별한 독서 행위, 예술성보다는 센세이셔널리즘만을 추구하는 대중매체들의 과대보도, 출판사들의 얄팍한 상업주의 등이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내기” 때문이라고 비판하며 베스트셀러 시집이야말로 현대적인 비극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지적한 대로 대중매체야 예술성을 추구하기보다는 센세이셔널한 것을 찾아다니게 마련이고, 상업적으로 경쟁하며 잡지를 팔다 보면 과대보도와 과장된 선전이 넘쳐나게 된다는 건 틀린 말은 아니지요. 그래서 이건 ‘시라고 할 수 없다’고 해도 그 평가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작품에 비해 과도한 관심을 받은 것이 사실이고, 시의 깊이나 성숙도나 완성도가 부족하기 이를 데 없는 데 비해 시집 한 권으로 얻은 명성은 지나치게 큰 것이 틀림없습니다. 받은 격려와 보상이 너무 과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비판 또한 머리 숙여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대성’, ‘역사성’, ‘삶의 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뇌’가 없다는 지적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면이 있었습니다.

» 미욱한 탓에 ‘슬픔을 판 시인’이란 낙인이 찍혔습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무덤에 가서 쓴 <앉은뱅이 민들레>를 거론하며 김상욱 교수는 서정윤 시집과 비교해 볼 때 ‘더불어 함께 사는 삶’과 ‘홀로 서는 삶’의 차이가 ‘사랑을 인식함에 있어서도 열린 사랑과 닫힌 사랑으로 끌어가고 있다’(‘닫힌 사랑, 열린 사랑’)고 두 시집을 구분하려는 노력을 시도한 바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두 시집은 지금까지도 대중적인 시집이야말로 문학성이 결여된 시집이라는 등식으로 설명하는 예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대중적 성공이 곧 저급한 문학이라는 등식을 정면으로 거부한 사람은 김사인 시인이었습니다. 그는 그런 도식이야말로 편협한 패배주의적 선입견이라고 하면서 “그것은 상업적 성공을 곧 문학적 성공의 척도로 동일시하는 태도나 다를 바 없이 온당치 못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제 시에서 혹자는 “패배주의를 조장하고 있다는 혐의” “종교적인 것으로의 일탈” “소시민적 슬픔과 비애를 만연시킨 데 대한 책임”을 묻기도 하지만 “슬픔을 제대로 슬퍼하는 일, 고통을 제대로 고통스러워하는 일은 그 자체가 참다운 위안의 방식인 동시에 또한 사람을 깊고 넓게 만드는 힘을 가지며, 그리하여 희망으로 가는 올바른 길을 이룬다”고 김사인 시인은 말하고 있습니다.

“법도를 잃지 않는 슬픔, 사랑의 애통함을 통해 각성하는 구체적인 연대감, 목숨 있는 것들의 소중함, 진정성, 사사로운 넋두리나 좌절이 아니라 인간의 본래적 진실과 선함에 대한 순한 믿음”, 김사인 시인은 쓸 수 있는 모든 언어를 동원하여 제 시집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펼치고, 방어하고, 옹호하였지만 시집을 내자고 권유한 사람이면서 시집을 낸 출판사에서 일한 바 있는 사람이라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아니 김사인 시인 역시 옹호만 한 것이 아니라 매섭게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제 시집에 어려 있는 교사적 태도, 독실한 구도자적 태도가 시적 긴장을 이완시키고, 고전적 품위에 대한 집착이나 선비적이라 할 만한 분위기의 결벽이 고통과 슬픔을 치르면서 강화되어 관념적인 내용을 남발하거나 깨달음의 내용을 그 자체로서 진술하는 시들이 많다는 점을 비판하였습니다.

‘참다운 슬픔의 힘’이라는 제목의 이 글은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이라는 시집의 발문으로 쓴 글이기도 합니다. 이 시집의 맨 마지막 페이지에 저는 <그대 잘 가라>라는 시를 실었습니다.

그대여 흘러흘러 부디 잘 가라
소리 없이 그러나 오래오래 흐르는 강물을 따라
그댈 보내며
이제는 그대가 내 곁에서가 아니라
그대 자리에 있을 때 더욱 아름답다는 걸 안다
어둠 속에서 키 큰 나무들이 그림자를 물에 누이고
나도 내 그림자를 물에 담가 흔들며
가늠할 수 없는 하늘 너머 불타며 사라지는
별들의 긴 눈물
잠깐씩 강물 위에 떴다가 사라지는 동안
밤도 가장 깊은 시간을 넘어서고
밤하늘보다 더 짙게 가라앉는 고요가 내게 내린다
이승에서 갖는 그대와 나의 이 거리 좁혀질 수 없어
그대가 살아 움직이고 미소 짓는 것이 아름다워 보이는
그대의 자리로 그대를 보내며
혼자 뼈아프게 깊어가는 이 고요한 강물 곁에서
적막하게 불러보는 그대
잘 가라

- 졸시 <그대 잘 가라> 전문

그런데 시집이 서점에 나올 때는 제목이 <접시꽃당신·2>로 바뀌어서 출간되었습니다. 저도 서점에 갔던 후배들이 하는 말을 듣고 놀라 출판사에 전화를 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이냐?”, “제목을 저자도 모르게 바꾸는 법이 어디 있느냐?”, “다시 책을 수거하고 원제목으로 바꾸어서 찍어 달라”고 요구했지만 “이미 전국 서점에 다 배포를 해서 어렵다. 미안하다. 양해해 달라”는 말만 할 뿐 요지부동이었습니다. 배창환 시인 등 문우들은 이렇게 되면 앞의 시집도 상업주의의 오명을 벗어날 수 없게 되고, 지금까지 낸 시집 모두를 잃게 되는 짓이라고 성토를 했습니다. 문단의 어른들도 이거야말로 좌파상업주의라고 나무라셨습니다. 정식 문건으로 사과문을 받고 다시 시집 제목을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으로 바꾸는 데는 꽤 여러 해가 걸렸습니다. 저는 저자용으로 배달되어 온 증정본 스무 권의 포장을 그때까지 풀지 않고 있었습니다.

» 도종환 시인
이래저래 그 시집은 제게도 남에게도 부끄러운 시집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동안 읽고 싶지 않아 밀어두고 펼쳐 보지 않았던 <접시꽃당신·2>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던 시집을 참 오랜 세월 후에 다시 꺼내 읽으며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시집 제목도 제목이지만 김사인 시인이 지적한 긴장의 이완과 관념과 진술로 가득한 시, 숙성되지 않은 시가 너무 많기 때문이었습니다. 시집을 내고 일 년 반 정도밖에 되지 않은 때에 또 시집을 내자고 한다고 미숙한 시를 출판사에 그냥 건넨 미욱한 제 책임이 더 크다는 생각을 합니다. 슬픔을 팔아서 장사하는 시인, 상업주의에 끌려다니는 시인이란 소리를 듣는 게 다 제 책임이란 생각을 합니다.

도종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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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시인의 ‘나의 삶 나의 시’를 매주 연재합니다. 도종환 시인이 써 온 시들 가운데 자신의 삶의 이야기가 들어 있는 것들을 골라 그에 얽힌 이야기를 산문으로 풀어 놓을 예정입니다. 시인의 오랜 지기인 판화가 이철수씨가 채색 그림으로 시인의 연재를 더욱 빛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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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잘 것 없는 열매 남기고 떠납니다.



모진 바람 불 때면 아무도 모르게 그만 쓰러지고도 싶었습니다.



한 켠으로 내달렸던 마음, 부질없는 희망...



이제 접으려 합니다.



화려했던 웃음 조용히 거두고



영원히 푸르겠다던 오기, 땅 위에 나즈막히 떨구고



너그러운 바람의 품으로 돌아갑니다.



아직도 생생합니다... 지난 여름의 그 폭풍 같던 사랑...
추억의 여운만으로도 저는 이렇듯 빛나고 있습니다.



허나 어리석은 미련 갖지 않게 하소서.



찬란한 햇살에 욕심 부리지 않게 하소서.
행여 꽃 같은 님이라도 쳐다 볼까 두려운 물기 잃은 얼굴입니다.



소풍 나왔던 이 세상, 황홀한 빛으로 목 놓아 적시다가



어느 시린 가을 날, 스산한 바람 한 점에 날아가듯 저물게 하소서.
돌아서는 뒷모습 애달프지 않게 하소서...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메모 : 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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