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의 길 - 고재종
어둠 속의 길은 흩어져버린 세월과 같다
길들은 내 핏속에서 질풍노도로 일었지만
내가 지나온 길 뒷자리는 늘 폐허였다
나는 길 위에서 또 길을 찾으러 다녔으니
나는 나 자신을 찾으러 다닌 셈인가
아침놀까지 더러워질 만큼의 하늘을 보았으나
악성의 하품 때문에 나는 심심하지 않았다
난장 난 계절의 억새밭을 지날 때
나는 거기 가장 황량한 곳에 머물고 싶었다
바다는 목쉰 파도로 끊임없이 부서져도
바다의 모든 고통을 아는 자만이 귀 기울였다
누구나 길에 나서나 다 같은 길엔 아니다
우리는 우리이되, 우리가 아니어서 배회했다
웃자란 형극 속에서 길을 헤치곤 했으나
나의 어려움은 되레 길을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잃어버릴 수도 없는 길을 향해 내가 저지른 죄,
그건 길섶에 핀 산자고를 짓이겨버린 일이었다
근사한 말만 만나면 빛나는 잠언을 쏟아내며
길을 노래하곤 하는 무수한 시인들이여
조주도 물었다, 길이란 어떤 것입니까
평상심(平常心)이 그것이다, 남천이 답했으나
길을 길이라 하면 늘 그러한 길이 아니어서
나는 다시 피에 젖은 흙빛의 길 위에 섰다
길은 항상 저만큼의 풍광 속에서 일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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