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철의 꽃이야기] 박수근 그림에 핀 꽃들
<129회>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박수근 전시회에 갔을 때 상당수 그림에 꽃이 있는 것을 보고 좀 놀랐다. 박수근(1914~1965) 하면 나무, 여인, 거친 질감, 색을 아껴쓴 화가 정도가 떠올랐는데 꽃 그림도 여러 개 있고 원색으로 그린 꽃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꽃에 관심을 갖고 본 입장에서 가장 눈길이 가는 그림은 ‘고목’과 ‘꽃 피는 시절’이었다. ‘고목’엔 하얀 꽃과 푸른 잎사귀가 가득했고 ‘꽃 피는 시절’은 제목 자체가 관심을 끌었다. ‘고목’은 ‘ㄱ’자 모양과 ‘Y’자 모양의 고목을 오른편에 배치하고 이 나무들에서 나온 가지로 화면을 채운 작품이다. 꽃과 잎이 가득해 다른 박수근 그림과 달리 밝은 느낌을 주고 있다. 하지만 어떤 나무인지 잘 짐작이 가지 않았다. 잎은 길쭉하고 수피가 세로로 길게 갈라지는 것은 버드나무 비슷한데 하얀 꽃이 피어 있다. 어떤 나무일까. 화사한 느낌을 주는 그림이어서인지 덕수궁 미술관 외벽에 붙인 전시 안내 현수막에도 이 그림을 사용했다. 유채가 아닌 수채화와 색연필로 그린 작품이다.
‘꽃 피는 시절’은 화면 가운데 큰 나무를 배치하고 그 양쪽에 작은 나무를 채워 넣은 그림이다. 그림만 보고 꽃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제목을 본 다음 ‘나뭇가지 사이사이로 부드러운 연두색 잎사귀와 진분홍색 꽃망울이 봄임을 알려준다’는 설명을 보고서야 그림을 자세히 보니 과연 꽃을 나타내는 분홍색 터치가 보였다. 아직은 춥지만 곧 봄이 찾아올 것을 표현한 것일까. 초봄에 피는 분홍색 꽃이면 진달래가 대표적인데, 진달래로 보기에는 나무 줄기가 너무 굵다.
박수근 ‘꽃피는 시절'(1961). 얼핏 앙상한 가지만 남은 헐벗은 나무처럼 보이지만, 실제 작품을 자세히 보면 그 속에 분홍 꽃잎과 연둣빛 이파리를 품고 있다. 박완서의 표현대로, “봄에의 믿음”을 간직한 겨울나무이다. /개인 소장
두 그림을 고수들에게 보여주어도 “‘복사나무를 연상시킨다”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나무인지가 뭐가 중요하겠는가. 국립현대미술관 김인혜 근대미술팀장은 “박수근은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한 분이라 관찰을 통해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며 “작가가 다른 것은 앙상하게 그리면서도 어린이옷은 핑크와 연두색으로 그렸듯 (원색을 쓴) 꽃과 잎은 추위 속에서도 생명이 잉태하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그림들은 무슨 꽃인지 알아보기가 수월하다. ‘복사꽃’은 오른쪽으로 뻗은 복사나무 가지에 연분홍 복사꽃이 핀 모습과 가지 끝에 푸른 잎사귀가 막 돋아난 것을 그렸다. 1960년대 전반 유채로 그린 그림이다.
‘목련’은 겨울을 견딘 나무가 하얀 목련을 가득 피운 것을 그린 그림이다. ‘소박하고 건강함, 생명력을 느낄 수 있는 박수근 작가의 전형적 작품세계를 보여준 점’을 인정받아 2015년 홍콩 경매에서 1200만 홍콩달러(약 17억1000만원)에 낙찰된 그림이라고 한다.
모란 그림은 3점 있었다. 그중 흰 모란을 그린 아래 그림은 2020년 케이옥션 경매에서 3억1000만원에 팔린 작품이다. 모란꽃 두 송이를 화면 가득 그려 놓았다. 붉은색, 노란색 모란을 민화 스타일로 그린 그림도 있었다.
‘철쭉’은 1933년에 그린 것으로, 박수근 작품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라고 한다. 그림 뒷면에 ‘철쭉, 양구, 박수근’이라고 적혀 있어서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했다가 낙선한 작품으로 추정한다는 설명이 있었다. 또 ‘색채가 많이 퇴색했지만 화병을 부드럽게 감싸는 빛과 주변 그림자의 섬세한 표현을 볼 수 있다’고 했다. 꽃색도 퇴색해서인지 그림만 봐서는 철쭉 그림인지 바로 알기 어려울 정도였다.
전시장엔 양구의 ‘박수근 나무’ 대형 사진도 있었다. 박수근이 고향 양구에서 보통학교를 다닐 때 즐겨 그렸다고 전해지는 느릅나무라고 한다. 덕수궁 박수근 전시회에서는 이런 그림들을 포함해 박완서가 데뷔작 ‘나목’을 쓰게 만든 그림 ‘나무와 두 여인’ 등 모두 174점을 전시하고 있다. 주최 측이 “박수근 예술의 엑기스만 엄선해 일생에 두 번 다시 보기 어려운 전시라고 자부하고 있다”는 글을 보았다. 전시회는 3월1일까지 열린다.
양구 '박수근 나무'인 느릅나무 사진. 박수근이 양구보통학교를 다닐 때 즐겨 그렸다고 전해지는 나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