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목포문학상 수필부문 당선작] 민혜 성윤제


본상
산 / 민혜(서울시 노원구)



  기억이란 세월과 함께 풍화 과정을 밟는다. 내 추억 속의 남산만은 어째 닳아지질 않는다. 유년 시절, 나는 매일 남산과 숨바꼭질을 하며 놀았다. 집 밖으로 나서면, 산은 같은 키로 늘어 서 있는 2층 적산가옥들에 가리어서 보이질 않았다. 샛골목으로 접어들어야 산은 숨겼던 그 몸매를 조금씩 내밀어 주었다.


  산은 언제나 가까운 듯 멀고, 먼 듯 가까웠다. 창밖으로 손을 내밀면 산은 쉽사리 내 손아귀로 들어왔지만 잡히지는 않았다. 남산은 하늘 아래 가장 높았고, 남산 보다 더 높은 건 없는 줄 알았다. 나는 고작 다섯 살이었다.


  아버지는 이따금 나를 데리고 남산엘 오르셨다. 아버지 어깨엔 묵직한 카메라가 걸려 있었다. 가는 곳은 약수터까지였지만 다섯 살 나이로는 적잖이 힘겨운 걸음이었으리라.


  봄이면 개나리가 남산 언저리를 눈이 부시도록 물들였다. 봄은 개나리의 노랑과 함께 찾아왔다. 그 무렵의 사진을 보면 한 여름에도 남산을 오른 흔적이 역력한데, 현기증이 나도록 노랬던 개나리의 잔영 때문인지 내 기억은 한사코 봄날에만 남산을 올랐다고 지금도 고집한다. 참말이지 개나리는 어디에 그 많은 물감들을 숨겨두었다 봄이면 그렇게 샛노란 빛깔을 쏟아내는지 모를 일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우리는 남산에 보다 더 가까운 동네로 이사를 갔다. 집이 바로 남산 밑인 데도 남산을 오른 적은 거의 없었다. 언젠가부터 아버지의 카메라는 보이지 않았고, 아버지는 더 이상 나를 남산으로 데려가지도 않으셨다. 무슨 일 때문인지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주 다투었고 나는 그 소리를 숨죽여 들으며 이불 속에서 울음을 삼키는 일이 잦아졌다. 뭔가 크고 어둡고 불길한 것이 산처럼 우뚝하니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듯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느닷없이 빚쟁이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어디론가 종적을 감추었다. 집안에 큰 동공(洞空) 하나가 생겨난 것 같았다. 아버지가 빚을 지게 된 연유는 5.16으로 인한 사회적 변화로 빚어진 일이라고만 짐작했을 뿐이다. 가장이 사라진 집안을 어머니 홀로 힘들게 꾸려갔다. 엄동설한에 어머니는 우리 삼남매를 먹여 살리기 위해 공장에 취직하여 아침이면 어디론가 바삐 나가셨다. 하루하루 우리 가족이 넘어야 할 고개가 장애물 경주하듯 이어졌다. 고개는 높낮이가 다른 산의 능선과 같아서 어떤 것은 오를 만했고 어떤 것은 깔딱 고개처럼 나를 휘청거리게 했다. 끼니를 찾아 먹는 일, 중학교에 내야 할 입학금을 신경 써야하는 일, 빚쟁이로부터 알량한 재산을 지키는 일…. 아버지는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루는 긴 손톱에 새빨간 에나멜을 칠한 빚쟁이 아줌마가 찾아와 쌀자루를 들고 갔다. 사채업자였던 그녀는 검은 피부에 뾰족한 턱을 지녔고, 얼굴에 난 여드름 자국마다 밀가루 같은 분칠이 겉돌고 있어 짙은 화장에도 불구하고 인상이 여간 가년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녀는 쌀자루를 부여잡는 내 손등을 할퀴고 기어이 그것을 빼앗았다. 그녀의 손톱이 지나간 내 손등엔 이내 색연필로 그은 듯한 손톱자국과 함께 선홍색 핏방울이 내비쳤다. 나는 상처가 아픈 줄도 몰랐고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쌀자루를 포획하고 물러갔지만 다음 날이면 또다시 우리 집을 찾아 올 게 뻔했다. 하루하루 산마루를 넘고 또 넘어도, 넘어야 할 된비알은 다시 몸통을 들이밀며 앞을 가로 막았다. 끝이 도무지 보이질 않았다. 얼른 해 저물고 어둠 내려 잠자리에 들 시간이 찾아오기만을 나는 간절히 기원했다.


  내 앞에 다시 산이 다가온 것은 결혼한 뒤 오십 중반을 넘긴 어느 여름날이었다. 그 무렵 남편은 집안에만 칩거해 있었고 나는 맨살로 세파를 견뎌내고 있었다. 그 때 생각난 게 산이었다. 들짐승처럼 무작정 산속으로 숨어들고 싶었다. 그제야 비로소 서울의 산들을 둘러보았지만 높다랗게 우뚝한 산을 홀로 오를 엄두가 선뜻 나지 않았다.


  삼복염천에 나는 작정하고 매일 동네 한 바퀴를 1시간 여 돌고 돌았다. 산에 오를 체력을 키우기 위함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면 기력이 탈진하여 거실 바닥에 길게 뻗어 천정만 바라보기가 일쑤였다. 그러기를 한 달 여. 그 후 나는 산행 클럽에 가입하여 매주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을 오르노라면 숨은 턱에 닿고 몸은 혹한에도 땀으로 질척였으며 옷 밖으론 허연 김이 연신 새어나왔다. 산에 오르면 의식이 아주 단순해지는 게 신기했다. 거대한 산이 나를 품어준 것만이 그저 고마웠다.


  1년 쯤 지나 나는 첫돌 맞은 아이 걸음 떼듯 홀로 하는 산행을 즐기기 시작했다. 고삐 풀린 망아지인양 산의 체취에 코를 박으며 흙 위에 뒹굴어도 보고 맨발이 되어 네 발(?)로도 산을 올랐다. 간단없이 흘러내리는 땀방울 속에 내 삶의 무거움도 함께 빠져나갔다. 봄비 내리는 연두빛 산도 걸어보고, 삭풍 부는 겨울날의 호젓한 산길을 걸어도 봤다. 그런 날 일반 등산로를 벗어나 인적 드문 길을 걷노라면, 낙엽을 밟고 지나간 사람 발자국이 보이던 조붓한 산길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아 길을 잃고 정처 없이 헤매기 십상이었다. 뼈 속 깊은 추위와 적막 가운데서도 이상스레 나는 겨울 산에 이끌렸다. 바람이 지날 때마다 겨울의 마른 숲은 잎새들의 서걱대는 소리와 함께 신음을 내지르며 나를 혼미하게 만들었다. 거대한 산의 암석도 맨몸으로 바람과 맞싸우다 언젠가는 닳아질 것이었다. 지표 위를 덮었던 낙엽들은 거센 바람에 몸부림을 쳐대며 뒹굴고, 어떤 것은 분수처럼 공중으로 치솟고, 어떤 것은 눈발처럼 위에서 아래로 나부끼다가 자취 없이 사라졌다. 수세를 자랑하던 낙락장송도 근육이 찢기는 소리와 함께 덧없이 꺾여 내렸다. 산이 그 품에 거느렸던 모든 식솔들은 강풍을 만나 맥없이 스러지고 흩어지며 숨어들었다. 산이란 바위를 뼈대로 솟아난 불굴의 뫼인 줄만 알았을 뿐, 그도 지난한 생명들을 품은 채 자기 식솔들의 생로병사를 지키며 온갖 풍상을 지긋이 견뎌내고 있다는 걸 예전엔 몰랐다.


  산 속에서 나는 나와 유사한 방랑객을 만나기도 했다. 김밥으로 궁색한 점심을 때우려는데, 내가 앉은 바위 밑으로 고양이 한 마리가 다가왔다. 고양이의 움직임은 눈송이처럼 사뿐하여 나는 그의 존재를 금방 알아채지 못하였다. 미풍조차 불지 않는 산은 온통 하얗고 두툼한 눈 이불을 뒤집어쓴 채 깊은 동면에 빠진 듯 했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잡티 없는 코발트 불루를 풀어놓았고, 눈의 흡음(吸音) 효과인지 한낮임에도 비현실적 고요만이 온 산을 휘감았다. 그 아무도 이 순결한 고요를 방해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나는 무위(無爲)의 순간을 호사스럽게 즐기고 있었다. 그 고요 속에서, 놀랍게도 고양이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녀석은 내 손에 들린 김밥을 간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몇 날을 굶은 듯 고양이의 몰골은 양 볼이 움푹하니 궁기가 가득한 모습이었다. 나는 김밥을 손에 들고 녀석에게 오라는 시늉을 했지만 놈은 한 발짝도 다가서지 않은 채 연신 침만 넘겼다. 남은 양식을 모두 고양이에게 내어주고 나는 휘적휘적 산길을 내려왔다. 녀석은 집둘레를 돌며 쓰레기를 뒤져 먹는 길고양이의 안전한(?) 삶을 버리고 어쩌다 이 산속까지 기어들어와 산고양이가 됐을까.


  너무나도 정확히, 산은 사람이 오른, 꼭 그만큼만, 자신을 열어 보인다. 실은 인생도 살아낸 그만큼만 실체를 보여준다. 산으로 오르는 길은 지름길도 있고 두름길도 있게 마련이다. 눈앞에 암벽이 가로막혀 끙끙거리며 바위를 오르고 났더니 바로 옆에 에움길이 있는 걸 보고 빙긋 웃음이 난 적도 있다. 산이란 오르막길에서도 내리막을 거쳐 가기도 하고, 내리막길에서도 오르막을 통과하기도 한다. 고봉준령을 넘어 정상에 올라 빛나는 깃발을 꽂는 이가 있는가 하면, 야트막한 산언저리나 겨우 오르다 가는 이도 있으니 이 또한 우리네 인생살이 아닌가.


  어린 시절 산을 보고 자랐던 나는 황혼녘이 되어서도 산을 보며 살고 있다. 내가 사는 아파트 창밖으론 북한산과 도봉산과 수락산이 보인다. 인근에 명산들을 끼고 있어 나는 한 동안 그 산들을 꽤나 많이 올랐다. 이제 내 유년의 봄날은 가뭇없이 사라졌고, 단내 나던 여름날도 강물처럼 흘러갔다. 지금 나는 가을을 살고 있고 내 기력은 해마다 쇠진하여 다시 산이 두렵다. 모든 산이 정녕 두려웁다.


  아무려나 언제고 나는, 내 평생을 오르내리며 웃고 울었던 삶의 산마루 고갯길에서 내려오다가 마른 들풀처럼 스러지고 말 것을 안다. 산은 그제야 곤고했던 나를 품어 넉넉한 잠을 허락해 줄 것이다.








신인상

아버지의 전축 / 성윤제(충남 예산군)



  시골집 사랑채 옆에는 조그만 마루가 하나 딸려있다. 우리 형제들은 어렸을 적부터 이곳을 사랑마루라고 불렀다. 사랑방 옆에 딸린 작은 마루였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직접 집을 짓고 그곳에 마루를 내어 살아생전에 요긴하게 사용하던 곳이다. 저녁마다 등잔불을 밝혀놓고 긴 곰방대를 입에 문채 돗자리를 짜고 새끼를 꼬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할아버지의 일상이 펼쳐지는 독립된 공간이었다. 점심을 드신 뒤 목침을 베고 편하게 낮잠이라도 주무실 때면 참으로 아늑해 보이기도 했다.
사랑방 옆에 마루가 딸리는 것은 충청도와 경기도를 비롯한 중부지방의 전형적인 가옥형태다. 사랑채 옆에 달아놓은 일종의 툇마루였다. 우리 집은 튼ㅁ자형의 집구조로 내가 중학교 다닐 때 지어졌다. 본채에는 안방 윗방이 나란히 붙어 있고 이어서 대청마루가 있고 그 옆에 사랑채가 연결돼 있는 형태다. 그리고 그 끝에 조그만 사랑마루가 놓여 있다.


  이곳은 우리들에게도 둘도 없는 비밀의 공간이었다. 우리는 수시로 이곳에 모여 다양한 놀 거리를 만들어 시간을 보내곤 했다. 봄철에는 칡뿌리를 캐다 잘라먹고 여름에는 참외를 서리해와 들킬세라 숨어서 먹던 공간이다. 가을철에도 옹기종기 모여서 알밤을 까먹던 기억이 새롭고 겨울철에는 썰매나 팽이를 깎기도 했다. 사시사철 소일꺼리를 제공해주던 아지트 같은 곳이다. 지금도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면 아름다운 추억들이 줄줄이 머리를 비집고 올라온다. 사랑마루는 그렇게 퍼내도 줄지 않는 샘물 같은 추억의 보고인 곳이다.


  사랑마루 주변은 비밀의 공간에 어울리지 않게 꽤나 운치도 있었다. 바로 앞에는 잘 가꾸어진 화단이 자리하고 있어 사시사철 다양한 꽃들을 피웠다. 특히나 봄철에는 라일락이 그윽한 향기를 드리우고 자목련 또한 도도한 자태로 우리들을 현옥시켰다. 나무 주변은 하얀 백합이 순결한 자태로 고개를 숙이고 있어 늘 서정적인 풍경을 자아냈다. 가끔은 라디오를 틀어놓고 음악을 들으며 라일락 향에 취해 릴케나 바이런의 시를 탐닉하기도 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사랑마루는 대를 이어 아버지의 공간이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떤 연유인지 별로 이곳을 사용하지 않으셨다. 어쩌면 그곳에서 당신의 아버지가 떠올라 그랬을 수도 있다. 그 뒤로 얼마 동안은 선반 위에 할아버지가 돗자리 짤 때 사용했던 고드래돌과 왕골로 만든 실타래 몇 개만 놓여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몇 해 지나지 않아 이런 것들도 하나둘 사라지고 나중에는 아버지가 쓰던 대패나 작은 연장 몇 개만 얹어져 있었다. 그 뒤로는 아예 미닫이 유리창을 달아 허드레 창고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런 뒤로 주인 없는 성처럼 사랑마루의 존재는 거의 내 기억에서 지워져 있었다.


  그런데 올 여름방학이었다. 방치된 시골집에 잡초라도 제거하려고 들렀다 우연히 사랑마루를 둘러보게 되었다. 당연히 허드레 물건이 쌓여있든가 텅 비어있으려니 했다. 하지만 생뚱맞게 부피가 큰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가 구석에 뽀얗게 먼지에 뒤덮여 있었다. 의아해서 살펴보니 아버지가 생전에 구입하신 것이었다. 겉에는 가죽으로 씌워져 손잡이 까지 달려있고 당시에는 최신식 모델로 꽤나 값이 나갔던 것이다. 15년여 만에 다시 보게 되니 감회가 새롭고 어떻게 저것이 지금까지 치워지지 않고 남아 있을까 신기했다. 구입한 것으로 치면 20년이 훌쩍 넘은 물건이다.


  당시에 우리들은 그것을 휴대용 전축이라고 불렀던 기억이 난다. 도시나 시골을 막론하고 그런 휴대용 전축이 한참 유행할 때였다. 들이나 산으로 놀러 나가면 너 나 할 것 없이 들쳐 메고 나갔다. 여기저기서 크게 틀어놓고 남녀가 뒤엉켜 관광버스 춤을 춰대던 때였다.


  처음 휴대용 전축이 우리 집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안 것은 이것을 구입하고 몇 개월이 지난 뒤였다. 우연히 사랑마루에 들렀을 때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순간 우리 집에 이런 것이 있었나 하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론 누가 사다 놓고 듣지도 않고 방치해 놓았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평소 음악을 좋아하던 아버지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머니가 듣기 위해 사다 놓은 것은 더더욱 아닌 듯했다. 설령 아버지가 샀다고 해도 안방에 놓고 들을 일이지 사랑마루에 처박아 놓을 이유가 없었다. 생각할수록 궁금증이 증폭되었다. 분명 여기에 무슨 사연이 있을 것 같았다.


  더군다나 당시로서는 좀 비싼 가격대의 카세트 플레이어였다. 평소 누구보다 검소하고 계획성 있게 생활하시던 당신들이다. 아무리 음악을 듣고 싶었다고 해도 고가에 선뜻 구입했을 리가 만무했다. 처음에는 앞 개울가로 놀러왔다가 놓고 간 것을 주워왔던가, 아니면 차에 싣고 가다가 떨어트린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흠집 하나 없고 거의 사용하지 않은 상태다보니 그런 추측도 아귀가 맞지 않았다. 또 다른 추측은 노래를 듣고 싶어서 사기는 했는데 조작법이 까다로워 방치해 놓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궁금증을 풀기 위해 어느 날 에둘러 아버지한테 휴대용 전축 얘기를 꺼냈다. 좋아하는 노래있으면 테이프를 구입해 드릴테니 심심할 때 들으라고 권했다. 그런데 돌아온 반응은 의외였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남에게 얘기하듯?나는 들을 일 없으니 너나 갖다 들어라?하시는 거다.


  나를 주려고 샀으면 미리 모델이나 기능에 대해서 물어봤을 분이다. 그리고 벌써 가져가라고 전화라도 했지 사랑마루에 처박아 놓을 리가 없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더 이상 물어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저런 추측을 해보아도 선뜻 마음에 짚이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마을에 나갔다가 우연히 답을 얻게 되었다. 저녁 무렵 아들 녀석의 손을 잡고 마을 쉼터를 둘러보는데 마침 아버지 친구 분들이 막걸리를 들고 계셨다. 모처럼만에 인사라도 드리고 술 한 잔씩 따라 드리려고 다가갔다. 그런데 한 분이 뜬금없이 나를 보자마자?네 아비가 장사꾼한테 속아서 산 전축 좀 가져와 틀어라?하시는 거다. 어찌 말투가 평소 말투와 다르게 놀리는 듯한 뉘앙스가 풍겼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감이 오지 않았는데 잠시 생각해보니 사랑마루에 처박혀 있는 휴대용 전축이 떠올랐다.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우리 집에 무슨 전축이 있고 속아서 사다니요?하고 되물어보았다. 그랬더니 휴대용 전축을 구입하게 된 사연을 자세히 말씀해 주셨다.


  당시에는 떠돌이 박물장수처럼 마을을 돌아다니며 약이나 불량한 가전제품을 팔러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사람한테 아버지가 휴대용 전축을 샀다는 것이다. 그것도 속아서 말이다.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요즘에도 나이 드신 노인들을 상대로 건강식품이라고 해서 사기를 치는 사람들이 많아 사회 문제로 이슈화되기도 한다. 하지만 평소 아버지와 어머니는 쉽게 이런 수법에 넘어갈 분이 아니셨다. 오히려 주변 분들에게 못 사게 설득하던 분이다. 단언컨데 속아서 사신 것은 아니고 무슨 사연이 숨겨져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는데 아버지라고 넘어가지 말란 법이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일반적으로 장사꾼들이 자주 써 먹는 고전적인 수법 중에 하나가 당신 같은 분은 돈이 없어서 이런 것을 살 수 없다고 은근히 무시하는 거다. 그 말에 남자들은 자존심이 상해서 보란 듯이 물건을 구입한다는 것이다. 특히나 피해 의식을 가지고 계신 시골 분들한테는 절대적으로 통하는 수법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런 수법을 꿰뚫고 계셨기 때문에 분명 속임수에 넘어간 것 같지는 않았다.


  어느 날 여기에 대한 궁금증을 우연한 자리에서 아버지를 통해 직접 듣게 되었다. 아버지 친구 분 중에 떠돌이 장사꾼 물건을 잘 사시는 분이 계시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데도 일단 배짱 있게 할부로 사고 본다. 그런데 어느 날 쉼터에 떠돌이 장사꾼이 휴대용 전축을 팔러 온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 친구 분이 보란듯이 할부로 구입하신 것이다. 그러면서 아버지에게도 물건이 좋다고 부추긴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충동적으로 구입하실 리가 없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던 장사꾼이 아버지한테 새로운 수법을 쓰신 것이다. 아저씨는 돈은 좀 있어 보이는데 남자로서 배짱이 없어서 못살 것 같다고 한마디 던진 것이다. 이에 아버지가 자존심이 상하시고 감정을 자제하지 못해 보란 듯이 그것도 현찰로 사신 것이다. 나보다 못사는 친구도 배짱 있게 사는데 왜 못사나 싶어서였다고 했다. 장사꾼의 고도의 심리전술에 낚인 것이다.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사리분별이 확실하시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분이다. 동네에서 큰 일이 발생하면 아버지한테 자문을 구하고 평소 아버지 말이라면 모두 인정하고 잘 따랐다. 그런 아버지가 잘 알면서도 전축을 샀다면 장사꾼의 속임수보다 친구 앞에서 힘없고 능력 없는 남자로 보이기 싫으셨던 심리가 더 작용했을 것 같다. 남자들만이 가지고 있는 특성인지도 모른다. 남자들은 본래 친구들 앞에서 기죽기 싫어하고 힘이나 배짱을 과시하려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장사꾼이 이런 남자의 가장 중요한 감정 영역을 건드린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그런 것까지도 알고 계셨을 것이다. 단지 친구 앞에서 자존심이 무너지는 것에 스스로가 상처받고 싶지 않은 자격지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평소 당신 스스로 남자의 위엄을 지니고 배짱과 뚝심으로 어려운 집안을 건사해 오신 가장이었다.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을 지니셨고 출중한 외모에 운동신경까지 남달랐던 분이다. 하지만 어려운 집안 형편에 많은 식구를 건사하느라 품었던 뜻을 평생 펼치지 못하셨다. 평생 가정을 먼저 생각하고 절제하며 다른 생각을 못하신 것이다. 가끔 술이라도 한잔하시면 푸념처럼 내뱉던 말이 생각난다. ?내가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형편이었다면 어떻게라도 성공해서 한자리 했을 텐데……. ?하시던 분이다. 말은 안 해도 피해 의식을 가지고 계신 분이다. 아버진들 자존심이 없고 배짱이 없었겠는가. 누구보다도 남자다웠던 분이다. 그 순간 친한 친구 앞에서 평소 당신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집어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나한테 구입하게 된 이유를 얘기했다는 것도 그런 의미가 담겨있다는 것을 피력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생긴 것이 우리 집 휴대용 전축이다. 구입해서 듣고 안 듣고는 문제가 아니었다. 아버지 마지막 자존심의 산물이었다. 아버지가 남겨 논 유형의 마지막 유산처럼 느껴졌다. 평소 노래 듣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괜히 객기를 부렸다는 생각이 들어 사랑마루에 처박아 놓게 된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도 10여 년이 넘었다. 아버지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은 이제 거의 없다. 그런데 사랑마루 한쪽 구석에서 아버지의 굳건한 자존심이 지금껏 살아서 우리를 지켜주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놓여있는 휴대용 전축은 용도 폐기된 낡은 그런 물건이 아니다. 평생 동안 굳건히 우리 집을 지탱하고 건사해 오신 아버지의 분신이었고 자존심이자 사랑 그 자체였다.


  나는 무심코 전축의 플러그를 꽂았다. 아직도 10여 년 전에 꽂혀있던 테이프에서 신기하게 이미자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동안의 긴 세월이 한순간에 증발해 버린 느낌이었다.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세월에 치어 아름다운 추억을 잊고 아버지의 기억도 지워가고 있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마루 구석에서 지금껏 따스한 사랑의 온기를 지닌 채 홀로 버텨내고 있었는데 말이다. 멍하니 서서 노래를 듣고 있자니 처음 휴대용 전축을 사들고 오셨을 아버지의 마음이 읽혀졌다. 나도 이런 것쯤은 살 수 있을 만큼의 여유와 배짱 있는 남자라며 스스로 자랑스럽게 들고 오셨을 것 같다. 돌아가시고 10여년이 흐른 지금 먼지가 뽀얗게 쌓인 사랑마루에서 따스한 아버지의 또 다른 모습을 본 것이다. 당신도 남들 앞에 자존심과 배짱을 내보이고 싶었던 평범한 한 남자였다고 생각하니 더욱 친근하게 느껴진다.


  돌아오는 내내 당신께서 생전에 유일하게 흥얼거리시던 이미자의 섬마을선생 노래 소리가 계속해서 귓가에 들려오는 듯했다.









『제5회 목포문학상』수필부문 예심평 / 예심위원 정정길 주광현
1. 알아 두기(신인•기성 공통)


◎ 응모자는 응모 요강을 정확하게 파악해 두어야 한다. 작품 분량이 ‘200자 원고용지 20매 내외’라는 조건을 제시했으므로 작품 내용이나 수준은 차치하고라도 최소한은 이 주문에 응해야 한다. 이는 공모를 주관하는 공모자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이자 응모자의 겸허한 자세이기 때문이다.
공모는 일종의 공개경쟁을 전제로 하고 있으므로 동일한 조건에서 작품을 꼲고 가려야 하는 잣대이자 공정을 유지하는 저울이 되므로 어떤 경우에서나 이는 지켜져야 한다. 따라서 제출한 두 편 중의 한 편이라도 이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았으면 예심에서 과감하게 제외하였다.


◎ 작품을 창작하는 문인, 특히 산문을 쓰는 작가는 우리말의 쓰임에 매우 정확하고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외래어나 영어, 한자에는 획 하나, 점 하나를 놓고도 시비를 가리면서 우리말에는 너무 너그러우면서 소홀하게 여기는 경향이 짙다. 대화하는 문장에서는 흠이 될 수 없으나 본문에서는 지극히 조심해야 하는 사투리가 그러하지만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말의 바탕이 되는 맞춤법과 띄어쓰기에 소홀하면서 글을 쓴다는 것은 모래 위에 높은 집을 짓는 일과 무에 다른가. 더불어 우리 고유의 낱말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말의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글을 쓰는 작가는 그 품격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굳이 육필 원고만을 원하지 않고 한글 문서라는 매체로 규격 용지에 쓰기를 바란다. 이때 꼭 유의할 점은 원고 말미에 원고 분량을 밝혀 두는 친절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컴퓨터에 자기 나름대로의 문서 규격을 만들어 두는 정성을 쏟으면 매우 편리하다. 규격 용지가 A4이므로 전후좌우의 여백과 행간•자간•서체•글자 크기 등 원고 작성에 필요한 조건을 조절해서 규격 용지 한 장에 원고용지 4~5 장 정도가 넣어지도록 편집해 두면 꼭 육필만을 요구하는 주문이 아니면 전부 응할 수 있다.


◎ 예심을 통과한 신인상의 여섯 작가 여덟 편, 기성 문인 일곱 작가의 열한 작품을 일일이 소개할 수 없는 점을 양해하기 바란다.
공모자에게 접수된 순서에 따라 붙인 번호와 제목만을 보고 예심을 진행했으므로 실명을 알 수 없는 탓도 있지만 열아홉 편 모두의 심사평을 일일이 열거할 만한 공간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여타 응모자와 다음을 위하여 일부러 사족을 붙이거니와, 한 응모자가 작품 두 편을 앞뒤로 바꿔 붙여서 시간차를 두고 이중으로 응모했다면 부러 그러한 것이 아니라 깜박 잊고 다시 보내는 수고를 했다고 생각해서 위로의 말씀을 전하는 바이다.


2. 신인 작품상 예심


수필의 주인공은 한 마디로 작품을 쓰는 작가 자신이다. 따라서 작품 내용의 범주가 자칫 자신의 주변으로 제한 받게 되어 감동과 공감을 얻지 못하기 마련이다.
경험했던 사실의 단순한 나열이나 전시, 지식의 소개에 그치게 되면 수필이 추구하는 관조와 깊은 사색으로 추구해야 할 감동은 사라지게 되어 있다. 신인들의 응모 작품 대부분이 바로 이러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아내와 남편, 직계 존비속과 지인과의 인연에 대한 회억(回憶)에서 멈추는 경향이 심했다. 수필에서 지극히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대목을 짚어 가지 않았다는 말이다.
제목이 싱그럽고 서두가 제법 그럴듯하기에 한눈을 팔지 않고 재미를 붙여 한창 읽어 가는데 갑자기 뚱딴지같은 이야기가 툭 불거지면서 분위기가 딴통같이 바뀌니까 그 순간 고조되어 가던 감동이 홍로점설같이 사라져지고 말았다. 즉 아내와 남편의 투병기, 사랑을 다지고 기념하기 위한 여행 기록, 타인의 작품을 지루하게 인용하여 문맥이 산란해져 버렸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일이다.
특히 아쉬운 점은, 응모한 두 편 중 한 편은 쏠쏠한 맛이 있어 맘에 쏙 꼽히는데 함께 제출한 다른 작품은, 앞의 작품을 쓴 능력을 감안하여 아무리 후하게 생각하고 싶어도 이에 미치지 않는다면 심사자가 꼭하다거나 태만은 되지 않으리라.
심사운영위원회는, 예심에 들어가기 전에 예년과는 달리 본심으로 넘기기로 약속한 다섯 분에 머무르지 말고 놓아 버리기 아까운 작품도 선정해 달라는 주문이 있어 내심 반가웠으나 수필로서의 격(格)을 갖춘 작품을 더 많이 추려내기 어려워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겨우 한 분의 한 작품을 더 올리는 욕심으로 만족해야 했다.
글쓰기를 처음으로 배울 때 으레 듣게 되어 있는 “많이 읽고 많이 쓰라.‘는 지극히 평범한 가르침을 원리이자 진리로 여기고 깊이 새겨 좀 더 많은 관심을 갖기 바란다.


3. 기성 문인 작품상 예심


역시 달랐다. 문장 구성이 그러했고 어휘 선택이나 이의 운용 솜씨가 그러했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주제를 놓지 않고 이에 매달려 천착(穿鑿)하며 문장을 전개해 나가는 방법이 신인 작품들과는 사뭇 달랐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옥에 티가 아주 없지도 않았다. 기성 수필가라면 작품의 주인공이 자기 자신임을 익히 알았을 터, 그러함에도 가족의 역사와 주변 인물과의 관계를 지루하게 설명하는 등의 우를 범하는 작품도 발견할 수 있었다. 너무 자상하고 친절한 설명은 독자의 눈을 어지럽게 하고 머리를 둔하게 한다. 줄일 것은 줄이고 없앨 것은 과감하게 버리는 용기를 가짐으로써 독자에게도 생각하고 추상(抽象)하며 감동을 함께 느낄 수 있는 틈을 주는 아량을 베풀라는 말이다.
하나의 사상(事象)을 붙잡고 줄기차고 끊임없이 탐색하며 추구하는 수필 본연의 길에서 슬쩍슬쩍 벗어나고 있었다는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는 한 작품에서 ‘나’와 ‘내’가 마흔한 번에 걸쳐 반복되었다면 독자는 어디에 눈을 두어야 할까. 동일인의 다른 작품에서는 열여덟 번이었고 여타 몇몇 작품에서도 어슷비슷한 현상이 발견되었다는 점도 잊지 않아야 할 대목이다.
신인상 예심에서 잠깐 언급한 바 있지만 기성 문인 또한 풍부한 우리말을 충분히 활용하는 길을 들였으면 좋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몇 가지 예(例)만 들어도 우리말의 표현 방법이 얼마나 넉넉한가를 알 수 있다.
귀신의 경우, ‘강남도령’을 비롯해서 ‘하리’에 이르기까지 서른이고, 바람은 또 어떤가. ‘가맛바람’에서 ‘흙바람’까지 아흔여섯이며 구름만 하더라도 ‘겹구름’에서 ‘흙 구름’까지 쉰하나에, 잠을 말하자면 ‘갈치잠’에서 ‘헛잠’까지 쉰셋에 달한다.
기성•신인 작품 총 238편중에서는 개•이내를 비롯한 고유의 우리말을 기껏 넷밖에 발견하지 못했으니 씁쓰레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기성 문인 작품 또한 애초에 정한 다섯 분에서 자르지 말고 넉넉하게 올리라는 주문에 따라 두 분의 세 작품밖에 추가할 수 없었다는 점을 밝힌다.
끝으로,
선(選)에 들지 못한 작가들의 지금까지의 각고의 노력에 깊은 위로와 격려의 박수를 보내고, 절차탁마(切磋琢磨)에 더욱 정진하여 다음 기회에 과감하게 도전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마지않는다.




『제5회 목포문학상』수필부문 본심평 / 본심위원 정목일
(본상부문)


제5회 목포문학상 수필부문의 본심에 올라온 후보작은 기성과 신인을 합하여 총 13명의 26편이었다. 작품을 다 읽고 나서 느낀 소감은 문장의 수식과 묘사력은 인정되지만, 내용이 부실하다는 점이었다. 주제의 형상화가 부족한 편이었으며, 체험의 무게나 깊이를 드러내지 못하고 문장에만 신경을 쓴 듯한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지나친 수식과 형용은 진실을 가리게 된다. 수필 문장에 있어선 압축과 간결한 문장이 돋보이는 법이다.
문장만을 볼 때는 나무랄 데가 없지만, 읽고 나서 무엇인가 남는 게 없다는 점이 허망하다. 주제의식이 선명하지 못한 까닭이다. 자신의 체험과 느낌과 생각만으로 된 작품으로 그쳐선 안 된다. 좋은 수필이란 체험을 통한 인생적인 발견과 깨달음으로 감동을 수반해야 한다.
미끈한 문장을 찾고자 하는 게 아니라, 인생적인 성찰과 발견, 깨달음과 감동을 주는 작품을 얻고자 했다. 심사위원이 되면 좋은 작가와 작품을 만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기성 작가의 작품들을 일별하고 마음에 드는 작품을 골라낸 다음, 두 번씩 정독하였다. 군계일학의 작품이 나타나지 않아 꼼꼼히 다시 한 번씩 읽게 되었다. 특별하다고 할 만한 정도는 아니지만, <산>( 접수번호 250번)을 수필 본상 당선작으로 선정한다.
<산>은 주제의 통일성, 소제의 적절성, 효율적인 구성, 문장력 등이 조화를 이뤄 인생적인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문장이 치장이나 과장법이 없이 진솔, 단아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적인 내공과 마음의 연마를 보았다. 이 작가의 또 하나의 작품인 <베토벤을 만났을까>도 3년 전에 타계한 남편을 회상하면서 쓴 글로써 자연스럽게 공감을 갖게 하는 작품이었다. 목포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더욱 분발하여 좋은 작가가 되길 바란다.


(신인상부문)


신인상의 응모작품 중, 결심에 올라온 작품은 여섯 분의 13편이었다. 신인이란 기성의 틀과 형식을 깨고 새로운 작품세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알려야 한다. 기성의 틀과 형식에 따르는 현실주의를 지양해야 한다. 합리와 전통에 따르려 하지 않고 실험과 시도가 필요하다. 주제나 소재 면에서 새롭고 개성적인 작품을 만나길 기대했다. 신변잡사의 서정수필에서 벗어난 자신 만의 빛깔과 광채를 보이는 작가를 발굴하고자 했다.
응모작들이 기성 수필가들의 작품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평범하고 첨예성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중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작품세계를 가꾸어 갈 저력과 안목이 깃든 것을 찾아보려고 애쓴 끝에 <아버지의 전축>(접수번호 333번) 신인상 당선작으로 골라냈다.
<아버지의 전축>의 작가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비로소 출발선에 섰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언제나 초발심을 잊지 말고, 수필쓰기에 정진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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