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가 맨 앞

 

                            - 이문재

 

 

나무는 끝이 시작이다.

언제나 끝에서 시작한다.

실뿌리에서 잔가지 우듬지

새순에서 꽃 열매에 이르기까지

나무는 전부 끝이 시작이다.

 

지금 여기가 맨 끝이다.

나무 땅 물 바람 햇빛도

저마다 모두 맨 끝이어서 맨 앞이다.

기억 그리움 고독 절망 눈물 분노도

꿈 희망 공감 연민 연대도 사랑도

역사 시대 문명 진화 지구 우주도

지금 여기가 맨 앞이다.

 

지금 여기 내가 정면이다.

 

 

- 시집 『지금 여기가 맨 앞』(문학동네, 2014)

 

* 이문재 : 1959년 경기 김포 출생. 경희대학교 국문학과와 동 대학원 졸업. 1982년 <시운동> 4집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마음의 오지』(1999),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1988, 2001, 2004), 『제국호텔』(2004), 『산책시편』(2007), 『지금 여기가 맨 앞』(2014). 현재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있다.

 

모든 것의 처음은 사소하고 미약한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거기서부터 쌓이고 쌓인다. 쌓여서 육중한 무게와 너른 넓이를 만든다. 쌓이면 누구도 꺾을 수 없다. 다발과 묶음과 무더기는 어떤 힘도 견뎌낸다. 마치 서로 의지한 갈대 묶음을 힘센 사람도 쉽게 부러뜨릴 수 없는 것처럼.

 

지금 여기가 맨 끝이라고 여기는 때가 맨 처음이다. 끝은 맨 앞이다. 끝에서 생겨난다. 실뿌리에서 생겨나 잔가지와 우듬지가 된다. 새순에서 생겨나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 아, 이제 이곳이 끝이구나라고 자신을 아주 허물어버리지 않는다면 거기 그때가 맨 앞이 된다. 그리고 매 순간 놀랍고, 기적과도 같은 진전이 이뤄진다.

 

개개의 움직임이 중요하다. 낱낱의 존재들이 동일하게 소중하다. 이문재 시인은 시 ‘어떤 경우’에서 “어떤 경우에는/ 내가 이 세상 앞에서/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내가 어느 한 사람에게/ 세상 전부가 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라고 썼다. 우리는 모든 경우에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고, 맨 앞이고, 당당한 정면이다.

 

문태준 시인ㆍ불교방송 PD

 

 

어린 시절이었지만, 나는 한때 나무를 보며 이런 상상을 하곤 했다. 나무는 아주 열심히 어딘가로 달려가고 있었는데, 누군가 ‘얼음!’ 하고 외쳐서 그만 제자리에 서 버린 것은 아닐까? 침묵이 흐르고 먼지가 쌓이고 발이 땅속 깊이 뿌리처럼 묻히고, 머리카락을 바람에 잎사귀처럼 맡겨 버린 것은 아닐까?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러 마침내 그것을 제 습성으로 가져 버린 것은 아닐까?

 

이 시를 읽고 새삼 깨닫게 된 것은, 나무가 늘 달리고 있었다거나 매순간이 치열한 싸움의 시작과 끝이라거나 우리가 역사의 한 페이지 속에 있다는 식의 새삼스런 각성이 아니다. 어려서 아름답고 몰라서 빛나는 순간을 빼앗아 버리는 현실의 잔혹함 같은 것이다. 매일매일 역사의 마지막 장이자 첫 장으로 펼쳐지는 뉴스에 대한 서글픔 같은 것이다. 그러나 ‘땡땡땡’ 햇살이 종소리를 울리는 봄이 오면, 나무는 정말 그 깊은 발을 빼서는 달릴 수도 있지 않을까?

 

신용목 시인

 

 

나무는 온몸으로 맨 앞에 서는군요. 수없이 갈라진 저 가지도, 바람에 나부끼는 저 잎도 제 삶의 최전선이로군요. 나무는 가지가 벋을수록 더 많은 정면과 맞서는군요. 우람해진다는 것은 더 많은 최전선을 갖는 것이로군요. 바람 잘 날 없는 가지들을 만들고 또 만들어 전선을 넓혀야 거목이 되는 것이로군요. 나무는 태풍과 홍수와 눈보라와 온몸으로 싸우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로군요. 온몸으로 살랑거리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꽃조차 피우는군요. 어제와 작별한 당신, 오늘도 춤추며 전선으로 가요.

 

반칠환 시인

 

 

‘지금 여기’가 세상의 가장 정면에 있음을 이토록 분명하게 시어로 표현하고 있음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서 이문재 님께 상이라도 드려야 하지 않을까?

 

끝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모두 연결되어 있는 고리를 발견한다. 누구도 스스로 완전한 섬이 아니듯 표면에서 떨어져 있지만 깊은 곳에서는 이어져 있다. 시대가 돌아가는 꼴이 마치 끝을 향해 치닫는 것 같아 불안하다. 그렇지만 그 점이 시작이고 희망인 것을 ‘지금 여기’가 맨 앞이고 내가 정면이다. 김영사에서 펴낸 “내가 정말 좋아하는 농담”이란 책에서 김하나는 “당신에게 필요한 모든 건 이미 당신 안에 있다. Everything you need is already inside.”고 말한다. 부족함이 너무나 많게 느껴지는 자신일지라도 창조주께서는 그 안에 필요한 모든 것을 넣어 두었다. 그것을 꺼내 쓰고 나누는 것은 각자의 몫이겠지만 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식량이 아니라 남아도는 식량을 굶주리는 이들과 이어 줄 더 나은 아이디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 시대의 가장 큰 아픔은 정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제대로 된 분배가 이루어진다면 보다 더 많은 이가 행복한 매일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자연계의 많은 부분을 인간이 독식하고 인간들 중에서도 소수가 재화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어서 문제라는 것을 우리 인간은 또 그 소수는 알고나 있는지.... 문제가 있다고 인식하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다. 당신은 문제가 있다고 인식하는가? 그렇다면 살아 있다는 증거다. 살아 있다는 것은 뭔가를 변화시키고 전환시킬 힘이 있는 것이다. 스스로가 변환자임을 인식하며 생명의 물을 길어 올려 보자.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다리를 이루며 말이다. ‘지금 여기’가 맨 앞이고 지금여기가 정면이며 ‘지금 여기’가 출발해야 할 곳이다.

 

이진영(체칠리아) 수녀ㆍ사랑의 씨튼수녀회ㆍ인천새터민지원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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