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 시인 시모음]
장석주 시인은 전체성에 함몰된 인간의 몰개성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의 단절, 삶의 불연속성 등을 내면화하여 어둡고 메마른 풍경들로 보여준다. 그러나 시인은 그러한 사막, 황사, 쓸쓸함의 이미지에 숲, 새, 아이를 씻기는 여자 등의 이미지를 힘겹게 대비시키고 비벼 넣음으로써, 그 황량함의 풍경을 조금씩 해체시켜나가는 치열함을 보여준다.
희망은 카프카의 K처럼
희망은 절망이 깊어 더 이상 절망할 필요가 없을 때
온다.
연체료가 붙어서 날아드는 체납이자 독촉장처럼
절망은
물빠진 뻘밭 위에 드러누워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아 감은 눈 앞에
환히 떠오르는 현실의 확실성으로
온다.
절망은 어둑한 방에서
무릎 사이에 머리를 묻고
서랍을 열어 서랍 속의 잡동사니를 뒤집어 털어내듯이
한없이 비운 머릿속으로
다시 잘 알 수 없는 아버지와 두 사람의 냉냉한 침묵과
옛날의 病에 대한 희미한 기억처럼
희미하고 불투명하게 와서
빈 머릿속에 불을 켠다.
실업의 아버지가 지키는 썰렁한 소매가게
빈약한 물건들을
건방지게 무심한 눈길로 내려다보는 백열전구처럼.
핏줄을 열어, 피를 쏟고
빈 핏줄에 도는 박하향처럼 환한
현기증으로,
환멸로,
굶은 저녁 밥냄새로,
뭉크 畵集의 움직임없는 여자처럼
카프카의 K처럼
와서, 살고 싶지 않은 마음의 주인을
달래서, 살고 싶게 만드는
절망은
섬
먼지가 되어 먼지의 꿈을 꾸며
수백 년 동안 잠들어 있던
내가 다시 일어난다면
수천 개의 일요일이 한꺼번에 오리라
친구들은 하나도 없고
내가 걸었던 길이며 집들 남김없이 사라져버린 뒤
나 길 잃고
길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 있게 되리
나를 감싸는 허탈과 슬픔의 이유를
누구에게도 묻지 않으리
바람을 타고 날아드는 새들은
내게 잊혀진 섬의 소식을 실어 나른다
난 한 번도 나 자신이었던 적이 없다!
새들은 나를 무서운 깨달음에 이르게 한다
생선 내장에 썩는 악취로 진동하는 도시를 버리고
여름 태양이 바다 한가운데 피워낸
돌의 장미, 발 밑에
수많은 청어들을 기르는 섬으로 가리라
달빛 속에 잠든 해안을 거닐며
배고프면 해안을 뜯어먹고 벌거벗은 채 잠든다
심심하면 물 속을 헤엄치며 청어들과 놀고
몇 번 하품도 하고
마침내 내가 먹고 버린 청어가시들과 함께
실종되리라
푸른 달빛에 바래진
화석 되리라
애 인
누가 지금
문밖에서 울고 있는가.
인적 뜸한 산언덕 외로운 묘비처럼
누가 지금
쓸쓸히 돌아서서 울고 있는가.
그대 꿈은
처음 만난 남자와
오누이처럼 늙어 한 세상 동행하는 것
작고 소박한 꿈이었는데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
세상의 길들은 끝이 없어
한번 엇갈리면 다시 만날 수 없는 것
메마른 바위를 스쳐간
그대 고운 바람결
그대 울며 어디를 가고 있는가.
내 빈 가슴에 한 등 타오르는 추억만 걸어놓고
슬픈 날들과 기쁜 때를 지나서
어느 먼 산마을 보랏빛 저녁
외롭고 황홀한 불빛으로 켜지는가.
햇빛사냥
애인은 겨울벌판을 헤매이고
지쳐서 바다보다 깊은 잠을 허락했다.
어두운 삼십 주야를 폭설(暴雪)이 내리고
하늘은 비극적(悲劇的)으로 기울어졌다.
다시 일어나다오, 뿌리 깊은 눈썹의
어지러운 꿈을 버리고, 폭설(暴雪)에
덮여 오, 전신을 하얗게 지우며 사라지는 길 위로
돌아와다오, 밤눈 내리는 세상은
너무나도 오래 되어서 무너질 것 같다.
우리가 어둠 속에 집을 세우고
심장(心臟)으로 그 집을 밝힌다 해도
무섭게 우는 피는 달랠 수 없다.
가자 애인이여, 햇빛사냥을
일어나 보이지 않는 덫들을 찢으며
죽음보다 깊은 강을 건너서 가자.
모든 싸움의 끝인 벌판으로.
우리에게 더 좋은 날이 올 것이다
너무 멀리 와버리고 말았구나
그대와 나
돌아 갈 길 가늠하지 않고
이렇게 멀리까지 와버리고 말았구나
구두는 낡고, 차는 끊겨버렸다
그대 옷자락에 빗방울이 달라붙는데
나는 무책임하게 바라본다, 그대 눈동자 만을
그대 눈동자 속에 새겨진 길을
그대 눈동자 속에 새겨진 별의 궤도를
너무 멀리 와버렸다 한들
이제 와서 어쩌랴
우리 인생은 너무 무겁지 않았던가
그 무거움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고단하게 날개를 퍼덕였던가
더 이상 묻지 말자
우리 앞에 어떤 운명이 놓여 있는가를
묻지 말고 가자
멀리 왔다면
더 멀리 한없이 가버리자.
소 금
아주 깊이 아파본 사람처럼
바닷물은 과묵하다
사랑은 증오보다 조금 더 아픈 것이다
현무암보다 오래된 물의 육체를 물고늘어지는
저 땡볕을 보아라
바다가 말없이 품고 있던 것을
토해낸다
햇빛을 키우는 것은 단 하나다
한 방울의 물마저 탈수한 끝에 생긴
저 단단한 물의 흰 뼈들
저것이 하얗게 익힌 물의 석류다
염전에서 익어가는 흰 소금을 보며
고백한다, 증오가
사랑보다 조금 더 아픈 것이었음을
나는 여기 얼마나 오래 고여
상실의 날들을 견디고 있었던 것일까
아주 오래 깊이 아파본 사람이
염전 옆을 천천히 지나간다
어쩌면 그는 증오보다 사랑을 키워가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도서관을 위하여
나는 하나의 도서관을 상상한다
도서관이 아버지의 음주 습관을
영화 잡지를 뒤적이며 매캐한 사랑을 꿈꾸는 누이의 몽상을
하늘을 향해 뻗어 오르는 수세미 줄기의 습성을
바꾸지는 못했을 것이다
여전히 사소한 것들은 사소할 것이며
수세미는 때가 되면 꽃을 피울 것이다
그러니 도서관이 없다고 해도
세상을 세상이라고 부르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천 길 땅속의 미라처럼 매몰되어 있다가
도둑고양이처럼 떠돌던 집시 소년에 의해 발견된
전대미문의 그 도서관을 상상한다
30세에 접어들어 일신상의 많은 변화를 겪게 된 뒤
잔인한 햇빛 속을 걸어가다가
나는 도서관이 없었다면 내 침울함도
치유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강둑에서 젖은 발을 말리는 집시 소년을 보았다
소년은 내게 도서관에 도착하거든
도서관의 지느러미들이 잘 있는가를 살펴봐 달라고 부탁한다
누군가 그것들을 노리고 있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기억과 욕망이라는 서가를 천 개씩이나 가진 도서관
새의 발자국이라는 제목의 책
나무 그늘이라는 제목의 책
찰나의 그림자라는 제목의 책
나는 그 세 권의 책을 대출 받아야만 한다
나를 키운 것은 도서관이다
내 침울함을 치유한 것도 도서관이다
빗방울이 흰 종아리를 내보이며 종종걸음으로 뛰어가는 아침에
나는 도서관으로 향한다
마지막 사랑
사랑이란
아주 멀리 되돌아오는 길이다
나 그대에 취해
그대의 캄캄한 감옥에서 울고 있는 것이다
아기 하나 태어나고
바람이 분다
바람부는 길목에 그토록 오래 서있었던 까닭은
돌아오는 길 내내
그대를 감쌌던 내 마음에서
그대 향기가 떠나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그렇게
아주 멀리 되돌아 오는 길이다
날아라,
시간(時間)의 포충망(捕蟲網)에 붙잡힌우울한 몽상(夢想)이여
-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1
신생(新生)의 아이들이 이마를 빛내며
동편서편 흩어지는 바람속을 질주한다
짧은 겨울해 덧없이 지고
너무 오래된 이 세상 다시 저문다
인가 근처로 내려오는 죽음 몇 뿌리
소리없이 밤눈만 내려 쌓이고 있다
2
희양목 아래서
칸나꽃 같은 女子들이 울고 있다.
증발하는 구름 같은 꿈의 모발
어떤 손이 잡을 수 있나
3
밤이 오자 적막한 온천 마을
청과일 같은 달이 떴다.
바람은 낮은 처마의 불빛을 흔들고
우리가 적막한 헤매임 끝에
문득 빈 수숫대처럼 어둠속에 설 때
가을 산마다 골마다 만월의 달빛을 받고
하얗게 일어서는 야윈 물소리.
4
어둠 속을 쥐떼가 달리고
공포에 떨며 집들이 긴장한다.
하나의 성냥개비를 켤 때
또는 타버린 것을 버릴 때
더 깊고 단단하게 확인되는 밤
쥐떼의 탐욕의 이빨이 빛나고
피묻은 누군가의 꿈이 버려져 있다
5
하오 3시, 바다는 은반(銀盤)처럼 빛난다
흰 공기 속을 통과하는 햇빛의 정숙
바람이 분다, 벌판에
흰 빨래처럼 처박힌 저 어두운 바다가 운다.
포악한 이빨을 드러내는 바다, 하오 4시
위험한 시간 속으로 웃으며 뛰어드는 아이들
6
전파는 다급하게 태풍 경보를 예보하고 탁자의 유리컵에는
바다가 갇혀서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고 있다
폐쇄된 전해안(全海岸)
새파랗게 질린 풀들이 울고 그 풀들 사이에 누군가의 거꾸로
처박힌 全生涯가 펄럭거리고 있다
오, 병(炳)든 혼(魂),
아이들은 폭풍속을 뚫고 하얗게 떠 있는 바다로 달리고, 내
붉은 피톨은 쿵쿵 혈관을 뛰어 다니며 울부짖고 있다
7
햇빛 그친 낡은 문짝에 쇠못들이 박혀 녹슬고 있다
잊혀진 누군가의 이름들
8
바람은 오늘의 풀을 흔들며 지나가지만
흙속의 풀의 휜뿌리는 다치지 못한다
9
통제구역 팻말이 꽃혀 있다
끝없이 거부하며 어둠으로 쓰러지고
풀뿌리 밑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잠들곤 했다
팻말뒤에서 펄럭이는 막막한 어둠
어두운 窓너머 벌판에는 비가 뿌리고
잠자면서도 절벽을 보았다, 밤마다
시간, 오오, 가혹한 희망과 다정한 공포여
소멸의 이마를 스치는 푸른 번개
서치라이트의 섬광만 미친 짐승처럼
이빨을 번득이고
나는 꿈속에서도 필사적인 질주를 하며
땀을 흘리고 울었다
아, 1975년 여름
절벽에 부딪쳐 산산히 튀어 오르는
파도 조각처럼 부서지고 싶었다, 그때.
장석주
1954년 충남 논산(연무)출생.
1975년 '월간문학' 신인상을 받았고,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었으며, 같은 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입선했다.
1979년 시집 '햇빛 사냥'을 낸 이후, '완전주의자의 꿈' '그리운 나라' '새들은 황혼 속에 집을 짓는다' '어떤 길에 관한 기억' 등의 시집과 시선집 '어둠에 바친다', 그리고 평론집 '한 완전주의자의 책읽기' '비극적 상상력' 등을 출간했다.
그는 전체성에 함몰된 인간의 몰개성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의 단절, 삶의 불연속성 등을 내면화하여 어둡고 메마른 풍경들로 보여준다. 그러나 시인은 그러한 사막, 황사, 쓸쓸함의 이미지에 숲, 새, 아이를 씻기는 여자 등의 이미지를 힘겹게 대비시키고 비벼 넣음으로써 그 황량함의 풍경을 조금씩 해체시켜나가는 치열함을 보여준다.
주요 저서 시집 목록
시집 <햇빛사냥> 1979
시집 <완전주의자의 꿈> 1981
시집 <그리운 나라> 1984
시집 <어둠에 비친다> 1985
시집 <어떤 길에 관한 기억> 1989 등
'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찔레꽃 / 송찬호 (0) | 2016.04.15 |
---|---|
[스크랩]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_ 장석남 시인 (0) | 2016.04.15 |
[스크랩] *** 장석주 시인 시모음 *** (0) | 2016.04.15 |
[스크랩] 장석주 시 모음 (0) | 2016.04.15 |
모란이 피기까지는 (0) | 2016.04.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