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술가
이 재 무
우리 세대의 경우 처음 술을 배우게 된 동기를 들어보면 대개 엇비슷하다. 초등학교 시절 일하시는 아버지 심부름으로 하꼬방에 가 주전자 술을 받아오다가 심심풀이 삼아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대기 시작한 것이 자신도 모르게 모주꾼이 되었다는 그 흔한 사연 말이다. 나도 그렇다. 그 누구나 할 것 없이 술과 관련된 일화가 적지 않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주酒와 함께 살아온 그 많은 세월, 술이 가져다준 활력과 기쁨이 적지 않았지만 그 반대로 술로 인해 입은 치명적인 상처 또한 무시하기 힘들 정도로 많았던 게 사실이다. 관계의 공든 탑이 하루아침에 무참히 무너지게 된 게 어디 한두 번인가. 물로 만들어진 불은 칼의 쓰임새처럼 상반된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때로 청량제가 되어 나날의 삶에 리듬과 악센트를 실어 주기도 하지만 정도를 넘어설 때는 타자에게나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는 무서운 독이 되기도 한다.
술! 매력적인 여인의 감미로운 혀 같기도 하고 사나운 독사의 혀 같기도 한 그것! 술이 들어오면 우리 몸에 산재한 40조 개의 세포가 새로운 긴장으로 눈을 뜬다. 풍선처럼 몸은 가볍게 부풀어 오르고 동공은 커지면서 풀어져 세상이 조금은 만만해 보인다. 갑자기 다변가가 되어 주변을 어수선하게 만들기도 한다.
술은 의식과 몸을 분리시켜 따로 놀게 만든다. 과장된 몸짓과 공허한 허장성세.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술에 취한 이들 가운데는 상대에 대해 관대해지다가도 표변하여 가혹하게 굴기도 한다. 술은 사람을 인간 이상으로 상승시키다가도 갑작스럽게 태도를 바꿔 인간 이하의 짐승으로 전락시키는, 악과 선이 공존하는 물物이다. 꼴불견이 따로 없다.
돌아보니 그간 나는 핑계만 있으면 술을 마셨다. 핑계가 없으면 핑계를 만들어 술을 마셨다. 자신의 무기력과 비겁을 술에 의존하여 은폐하여 왔던 것이다. 사랑에 대한 고백도 술이 없으면 불가능했다. 하지만 술 힘을 빌려 고백한 사랑이 받아들여진 적은 없었다.
세상에 대한 좌절과 절망도 술로써 풀어 왔다. 그러나 다음날 깨어보면 나의 좌절과 절망은 곱절이나 더 덩치가 커져 있었다. 술은 백해까지는 아니더라도 무익했음에 틀림없었던 것이다. 술을 마시면 내 몸 안에 자고 있던 광기와 짐승이 으르렁거리며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 광기와 짐승은 의지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제멋대로 날뛰었다.
아, 그렇게 나는 수시로 술을 마시고 내 안의 우리 안에서 날뛰는 광기와 짐승을 토해내고는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한동안 평상심을 가지고 가혹한 현실을 조용히 견딜 수 있었다. 술은 나를 세상에 대한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만들어 왔다.
이 가해자로서의 느낌이 시를 쓰게 만들었다. 세상에 대한 나의 반성적 사유는 구차하지만 이렇게 비롯되었던 것이다. 이 관성의 악순환을 나는 물론 혐오한다.
나는 대화의 기술에 서툰 편이다. 에둘러 말해야 할 것도 직설적으로 툭 던져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곤 한다. 이것은 내 각오와는 상관없는 체질이다. 이 약점 때문에 내가 입은 손해가 결코 적지 않다. 이런 나를 사람들은 순박하다고 듣기 좋게 말하기도 하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세상물정 모르고 함부로 날뛰고 까분다는 말이 될 것이다.
세련된 대화술에 능숙한 이들을 나는 그 얼마나 선망해 왔던가. 직설은 때로 통쾌하고 시원할 수도 있지만 상호 이해가 전제되지 않는 상황에서 소통의 장애가 생길 경우 그것은 서로에게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교양 귀족들의 그 자유자재한 화술을 더러 가다 내 것으로 익혀보려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마다 빌려 입은 옷처럼 어색한 것을 감출 수가 없었다. 직설은 화근을 낳는다. 과도하게 술을 마시면 예의 고질병인 직설이 말썽을 일으키기 일쑤다. 다혈질인 성격에다 그 분별 없고 융통성 없는 직설이라니!
통어되지 않은 말들이 입 속의 혀를 빠져나와 주변의 질서를 어지럽혔던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구제불능이다. 내가 던진 그 많은 말의 독은 다음날 부메랑으로 되돌아와 내 가슴에 칼과 송곳이 지나간 상처를 남긴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자학, 자괴, 자조로 다음날 아침 태양 보기가 부끄러워 백지가 주는 공포에도 불구하고 나는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술이 마냥 내게 위해危害를 가하고 백해무익한 독소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과도하게 마시지 않으면 그것은 느슨한 관계를 더욱 끈끈하게 밀착시키고 크지 않은 허물쯤은 눈감게 하는 관용을 가져다주기도 했던 것이다. 물로 이루어진 불은 생활의 추위를 견디게 해주었다. 또 술은 내게 예상치 않았던 영감을 주기도 하였다. 분위기가 좋은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실제로 나는 몇 편의 시를 건진 적도 있다.
30년 넘게 마셔온 술!
친구들은 술이 없는 나를 상상하기 힘들다고 한다. 나는 이 말이 결코 명예가 아님을 안다. 하지만 어쩌랴. 이제 술은 내게 버리기에 너무 늦어버린 조강지처라서 때로 지겹고 무섭긴 해도 없는 것보다야 나은 생활의 방편이 되어버린 것을. 다만 앞으로 내가 내게 스스로 당부하노니 부디 주량을 넘지 말고 절제 또 절제하여 지난날의 과오를 다시 살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랄 뿐이다.
이재무 1958년 충남 부여 출생. 한남대 졸업, 동국대 석사과정 수료. 1983년 '삶의문학' '실천문학' '문학과사회' 등에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 난고문학상 수상. 계간 시전문지 '시작' 편집 주간. 시집 '섣달 그믐' '벌초' '몸에 피는 꽃'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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