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통해 루이스를 처음 만났다. 이 책만큼 간절히 다시 읽고 싶은 책도 없었다. 이번에는 연필로 열심히 줄을 그어가며 읽게 되었다.

 

옥스퍼드 대학 영문학부 수석 졸업생으로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로 평생을 지낸 그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청소년기에 완고한 무신론자가 되었다. 그러나 세기의 지성인 답게 고뇌하고 연구하여 밝혀낸 변증적인 논리로 그가 처한 오류에서 벗어나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하게 되었고, 위대한 기독교 저술들을 남기게 되었다. 특히 이 '순전한 기독교'는 출판사상 최고의 기독교 변증서로 알려진다. 

 

그의 이 기독교 논증은 우주의 생성과 인간의 본질에서부터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구원과 각 개인의 삶에 구체적으로 임하는데까지 철저하게 변증법적으로 풀어 나가고 있다. 우리가 믿음안에 있어도 논리적으로만 풀어낼 수 없는 이 땅에서의 삶에 끊임없이 부대끼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은 늘 굴곡이 있게 마련이다. 그 가운데서 치밀하고 명료한 논리적 근거위에 세워진 그의 기독교가 우리에게 얼마나 견고한 믿음에 서도록 도우는지 모른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감탄하며 이 책을 읽었다. 두번째 이 책을 읽기 시작할 때 이것을 완전히 소화하여 나의 말로만 이루어진 멋진 독후감을 한번 써봐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 읽고 났을 때 나의 믿음은 한 계단 더 올라섰다고 생각되는데, 내가 처음 가졌던 그 생각이 얼마나 교만한 생각이었는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또 그의 수려한 문장을 옮겨 놓을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실마리를 그는 이렇게 풀어간다. ' 우주를 지휘하는 무언가가 존재하며, 그 무언가는 내 안에서 옳은 일을 하도록 재촉하고 그릇된 일에는 책임감과 불편함을 느끼게 만드는 하나의 법칙으로 나타난다.' 그는 이것을 도덕률이라고 이름 붙인다.

 

도덕률에는 어떤 짓을 해도 다 받아준다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분 -비인격적인 절대 선-이라면 결코 좋아할 수 없으며, 따라서 전혀 개의치 않겠다"고 말한다 해서 피할 길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여러분이 마음 한편으로 절대 선의 편을 들고 있으며, 인간의 탐욕과 거짓과 착취를 인정하지 않는 그 절대 선에게 내심 동의하고 있다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빠져 있는 끔찍한 곤경이 이것입니다. 절대 선이 우주를 다스리지 않는다면, 어떤 노력을 해도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반면에 절대 선이 우주를 다스린다면 우리는 매일 그 선의 원수가 되는 셈이고 다음 날이라고 해서 사정이 나아질 기미 또한 전혀 없으므로, 이 경우에도 역시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 선 없이 살 수도 없고, 그 선과 더불어 살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유일한 위안인 동시에 최고의 공포입니다. 

 

여러분은 먼저 도덕률이라는 사실이 정말로 존재하며, 그 법칙의 배후에 어떤 힘이 있고, 여러분이 그 법을 어김으로써 그 힘과 잘못된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깨닫기 전에는, 정말이지 이 모든 것을 깨닫는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기독교는 여러분에게 아무말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임을 당했으며, 그 죽음이 우리의 죄를 씻어 주었고, 그가 죽음으로써 죽음의 세력이 힘을 잃었다는 말을 듣습니다. 이것이 공식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어야 하는 바입니다.

 

만약 예수가 인간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라면 그의 고통과 죽음은 "그에게 지극히 쉬운 일이었을 것이므로" 아무 가치가 없지 않느냐고 불평하는 이들의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완전한 순종, 완전한 고난, 완전한 죽음은 오직 그가 하나님이었기 때문에만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유 삼아 그의 순종과 고난과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 이상한 일 같지 않습니까?

 

제가 급류에 빠졌는데, 강둑에 한 발을 딛고 있는 어떤 사람이 저의 목숨을 구해 주기 위해 팔을 뻗었다고 합시다. 그때 제가  "아니, 이건 불공평해! 당신은 지금 유리한 위치에 있잖아! 강둑에 한 발을 디디고 있으니까" 하고 소리쳐야(물에 빠져 숨을 헐떡거리면서) 마땅하겠습니까? 그가 가진 이점-여러분이 '불공평하다'고 말할 수 잇는-이야말로 가가 저를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자기보다 더 강한 존재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세상을 침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드러내놓고 직접 세상에 간섭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그 뜻을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궁금해집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날은 바로 세상이 끝나는 날입니다. 극작가가 무대위로 걸어나오면 연극은 끝난 것입니다. 그가 지체하시는 이유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진해서 그의 편에 가담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는 또한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의 행동에 대해 진술하였고, 그의 글들은 나에게 얼마나 가슴벅차게 실천하고싶은 덕목으로 남았는지 모른다.

 

현대에 와서 '절제'라는 말을 음주 문제에만 국한해서 사용하는 바람에 생긴 큰 해악이 하나 있습니다. 음주외에 다른 많은 부분에서도 똑같이 무절제해 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골프나 오토바이를 자기 생활의 중심으로 삼은 남자나 옷이나 카드놀이나 애완견에 온통 정신이 팔린 여자는 저녁마다 술에 취하는 사람만큼이나 '무절제'한 사람입니다. 물론 겉으로는 쉽게 드러나지 않지요. 카드놀이나 골프광이 길 한복판에 쓰러져 자는 경우는 없으니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겉모습에 속지 않으십니다.

 

심리적 재료가 나쁜 것은 죄가 아니라 병입니다. 따라서 회개할 것이 아니라 치료받아야 합니다. 이 점은 아주 중요합니다. 인간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을 보고 서로를 판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의 도덕적 선택을 보고 판단하십니다. 어렸을 때 성격이 비뚤어지는 바람에 잔인한 행동을 하고 싶은 마음을 참을 때, 하나님은 여러분과 제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일보다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한복판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말씀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 말씀은 다른 방법으로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할 여지를 조금도 주지 않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은 아주 명백한 사실입니다.

어찌 되었든 용서는 아주 어려운 일이지만, 이 일을 좀더 수월하게 만들 방법을 알아봅시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듯이 내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나는 나 자신을 얼마나 한 치 오차없이 사랑하고 있습니까?

 

기독교 옛 스승들이 사람의 악한 행위는 미워하되 그 사람 자체는 미워하지 말라고 했던 말이 생각나는군요. 어떻게 어떤 사람의 행위는 미워하면서 그 사람은 미워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제가 평생동안 그렇게 대해온 사람이 하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저 자신이었습니다. 저는 자신의 비겁함이나 자만심이나 탐욕은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계속 자신을 사랑해 왔습니다. 그것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제가 그런 것들을 미워한 이유는 바로 저 자신을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이 그런 짓을 저지르는 종류의 인간밖에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토록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기독교는 잔인한 행동이나 배신 행위에 대한 미움을 티끌만큼이라도 줄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일을 미워할 때, 자기 자신에게서 똑같은 것을 발견했을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미워하라고 합니다. 즉, 그 사람이 왜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 안타까워하면서, 할 수만 잇다면 언제 어디에서 어떤 식으로든 치유되어 그의 인간다움을 되찾기를 바라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웃을 사랑하나 사랑하지 않나 고민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그냥 그를 사랑한다 치고 행동하십시오. 그러면 곧 위대한 비밀 하나를 발견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 치고 행동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로 그를 사랑하게 된다는 비밀 말입니다.

 

독후감이 너무 길어져서 서둘러 결론을 내려야겠다. 그는 겸손한 그리스도인을 더 나가가 새사람이 된 자들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만약 여러분이 겸손한 사람을 만난다면 '요즘 사람들이 흔히 겸손하다고 말하는 그런 사람이겠지'라고 생각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그가 주는 인상은, 여러분이 그에게 무슨 말을 하든지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들어 주는 쾌활하고 지적인 사람이라는 것이 전부일 것입니다. 만약 그에게 호감이 생기지 않는다면, 인생을 너무 쉽게 즐기는 것처럼 보이는 데 약간의 질투를 느꼈기 때문이겠지요. 그는 자신의 겸손을 의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목소리와 얼굴 자체가 벌써 우리와 다릅니다. 더 힘있고 더 평온하며, 더 행복하고 더 빛이 납니다. 우리 대부분이 포기하는 그 지점에서 그들은 새로 시작합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관심을 끌어모으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그들이 여러분에게 친절을 베풀고 있는데도, 마치 여러분이 그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들은 여러분을 그 누구보다 더 사랑하지만 그 누구보다 덜 필요로 합니다(우리는 사람들이 우리를 필요로 하길 바라는 마음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들, 특히 여성들에게 이것은 가장 이기기 힘든 유혹입니다). 그들은 대게 시간이 많아 보입니다. 그 비결이 무엇일까 궁금할 정도입니다.

출처 : 저녁 강가에서
글쓴이 : 안동꿈 원글보기
메모 :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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