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夫婦) 백경(百景)
이재부
비가 하루종일 내린다. 겨울비가 얼마나 내릴까싶어 우산을 갖고 가지 않았는데, 일을 끝내고 귀가하려니 빗줄기가 점점 굵어진다. 시내버스를 타고 오면서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우산을 버스승강장까지 가지고 오라고 하려다가 늙은 아내가 귀찮아 할 것 같아 비를 맞고 왔다. 흠씬 젖은 옷을 털고 현관을 들어서면서 "겨울비가 꽤 많이 와" 했더니 아내는 내다보지도 않고 부엌에서 "그까지 비를 가지고 뭘…."로 대꾸한다.
내가 듣고싶었던 대답과는 천양지차다. 젊을 때 같으면 쫓아 나와 빗물을 털어 주며, '우산을 가지고 나오라고 하면 될걸, 비를 맞고 왔느냐'고 책망을 듣고도 기분 좋아했을 텐데. 늙어지니 무관심이 병이고, 처방이며, 약이다.
부부 관계는 시종일관형, 성숙 발전형, 점진 퇴색 형 중의 하나일 텐데, 우리 부부는 퇴색형이지 싶다. 누구나 다 성숙된 변화를 희망하지만 긴 세월과, 반복되는 일상 앞에서 날마다 새롭게 되기는 어려우리라. 무관심인 듯, 관심으로 살아왔다. 높이 나는 새도 땅위나, 나무에서 둥지를 틀듯이, 다 고만고만한 사랑의 수준이지만 타인 부부는 멋있어 보였고, 정겨워 보여, 부러워했었다. 이성에 눈도 뜨지 않은 어린 시절, 어른들 소망에 따라 결혼을 했으므로 탐탁치 못함이 늘 잠재해 있었다.
내 것을 넘어서는 부러움증은 은연중에 소망이 되어, 기대수준을 높이고, 요구 조건이 많아지게 된다. 그리하여 아내의 말을 무시하고, 불만을 자제하느라 고독을 느끼며, 갈등이 누적되어 소원해진 때도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부부사이는 소망의 누각이요, 심리전의 전쟁터다. 미묘하고, 복잡한 심리 갈등 속에서 사랑을 무기로 부부관계를 성숙하게 연출함은 큰 기술이다. 그 기술은 무형의 재산이요, 행복의 기반이며, 자녀 양육의 지혜임을 알면서도 의무보다 권위를 앞세우며 순종의 미덕을 바로 보지 못 했었다. 남존여비 시대에 앞장서 남자의 권위를 과신하며 살았다. 이혼은 꿈에도 생각해 본 일이 없으니까 싸울 일도 없었고, 불만이 있어도 서로 참는 방법을 터득해 갔다.
우리 부부는 무표정형이요, 강물형이라 별로 다투지도 않고 유유히 53년을 살았다. 젊어서 한 때는 줄다리기형이 되어 꽁한 마음을 속으로 닫아걸고, 자존심의 줄을 팽팽히 당기며, 양보의 기색을 보이지 않은 때도 있었다. 이제 와서 돌아보면 웃음이 난다. 자식들이 그 줄을 타며 얼마나 불안에 떨었을까. 지금도 그런 상황이 끝난 것은 아니다. 아내가 타인처럼 느껴질 때가 있으니, 아내도 그러하리라. 뜨거운 사랑의 눈빛으로 바라보지는 않지만 서로 기대는 무게가 가벼워지지는 않는다. 무관심이 평생 쌓은 성곽 같아서 갑갑함을 느끼면서도 인고의 세월에 쌓인 굳은살 같이 불편함을 모른다. 일상 속에 굳어진 식탁이나 몸치장, 집안을 가꾸는 정돈에 변화는 없지만 서로를 배려하는 협력의 고마움이 향기를 낸다.
세상도 많이 변했다. 여성 표에 정치인이 놀아나고, 아부를 떨었으며, 여성부가 생기고, 그 권한이 치솟아 법이 고쳐져도 우리 집은 아무 변화가 없다. 변화를 느낀 것은 자식 5남매가 다 결혼하여 분가한 후였다. 늙음이 실감되고, 힘없는 아내가 더욱 측은해 보이는 것이다. 상황변화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달인의 경지는 못 가더라도, 달라져야함을 자각하게 된다. 누리고 싶은 욕구를 참고, 말 없이 사는 것이 현명한 처사요, 가정평화의 묵시적인 조약이라 생각하며 살았는데, 긴장을 풀 때가 되었음을 알게 된다.
부부는 측은지심의 속울음이 있어야 서로가 바로 보이나보다. 서로 존중하고, 무엇인가 해주고 싶으며, 아끼게 된다. 그것이 무관심 속의 관심이다. 아내라는 존재가 있는 것도 잊은 듯 일에 몰두하며 살 때도 있고, 피곤에 지쳐 돌아보지 않는 때도 많다. 낭만이 무엇인지, 아내의 말이 푸념으로 듣기도 했고, 치열한 경쟁에서 아내의 내조를 원망도 했었다. 그런 것이 측은지심의 안경을 쓰면 다 후회로 걸러져 보인다.
철모르던 중학교 시절, 남녀라는 이유로 부부로 살면서 수 백가지 욕구의 모델을 생각하며 인생의 수를 놓으며 살았다. 희로애락의 사랑의 무늬를 짜면서 소통이 되지 않아 멍하니 바라보는 때도 있었다. 그래도 찢어지지 않는 직조의 바탕은 정직성이 배어있는 믿음인 것 같다. 측은지심도 그 바탕에서 울어나리라. '참으로 훌륭한 아내는 죽은 아내와, 얻지 못한 아내'라 한다. 남편도 마찬가지이리라. 나이 들고, 병들어 수술실에 밀어 넣으며 얼마나 많은 후회를 했던지……. 속도를 더하며 늙는 시간이 안타깝다. 부부의 조건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암·수이면 되는 것이지, 그 이외의 조건은 욕심이요, 사치이리라. 겨울비에 젖은 옷을 벗으면서 어리석은 원망의 마음도 벗는다.
(2009년 12월 10일 겨울비에 젖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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