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은 똥이다
안도현
인도를 여행하다 보면 심심찮게 마주치는 풍경이 하나 있다. 살갗이 거무스름하고 눈이 큰 인도 사람들은 이른 아침마다 물통 하나씩을 달랑 들고 어디론가로 걸어간다. 처음에 나는 그들이 한 끼 밥을 얻기 위해 슬프게 걸음을 옮기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들은 똥을 누기 위해 그렇게들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한적한 공터나 흙탕물이 흐르는 개울가를 찾아서 모두들 느긋하게 말이다. 물론 물통의 물은 뒤처리를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기차를 타고 가다 보면 철로변에 저만치 쭈그려 앉아 태연히 똥을 누는 사람을 종종 볼 수도 있다.
그런 인도 사람을 보며 손가락질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다.
똥이란 모든 동물의 생리적 작용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똥을 눈다는 것은 자연으로부터 입을 통해 섭취한 것을 몸에서 걸러낸 뒤 그 찌꺼기를 다시 자연으로 되돌려주는 행위다. 자연의 어머니인 대지는 절대로 똥을 밀어내거나 홀대하지 않는다. 대지는 똥을 고스란히 흡수하여 더욱 기름진 땅을 만든다. 대지는 똥뿐만 아니라 똥 냄새까지도 흡수한다. 그리고 그 땅에서 식물의 뿌리와 허리를 튼튼하게 키운다. 대지의 모성애는 그렇게 거리낌없이 똥을 빨아들임으로써 발휘된다.
그런데 대지가 똥을 거부할 때가 있다. 바로 대지의 얼굴에 시멘트나 아스팔트 같은 개발 문명의 분이 발라졌을 때다. 그것은 대체로 급격한 도시화와 함께 진행된다. 똥을 받아들일 능력을 상실한 도시의 땅은 똥 냄새까지도 끌어안지 못한다. 인도의 도시 변두리 곳곳에 유난히 똥 냄새가 진동하는 것은 대지가 자기 정화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똥의 지위와 역할을 제대로 인정해 주지 않으면 똥은 그 지독한 냄새로 사람들의 코를 마구 미틀고 찔러대는 것이다.
시골의 콩밭이나 풀숲에서 엉덩이를 까고 쭈그려 앉아 똥을 누어본 적이 있는가? 그때의 똥 냄새는 도시의 공중 화장실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도시는 똥과 똥 냄새를 밀어내려고 애를 쓰지만 흙은 아주 익숙하게 받아들일 줄 안다. 콩잎이나 매끄러운 아주까리 잎사귀로 뒤를 닦고 바지를 끌어올리며 일어설 때까지 똥 냄새는 우리를 푸근하게 감싼다. 흙과 똥의 궁합이 맞아떨어졌다는 뜻이다. 이때 매몰차게 똥을 그대로 놔두고 자리를 뜨면 안 된다. 흙으로 똥을 덮어주는 일을 잊지 말아야 한다. 흙으로 된 이불을 뒤집어쓰고 똥이 다시 흙의 가슴 속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게 똥에 대한 예의다.
옛날부터 민가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똥 위에다 재를 덮었다. 똥이 눈에 띄지 않아서 좋고, 신통하게도 고약한 냄새가 나지 않아서 좋고, 재와 섞여 더 잘 삭을 수 있어서 좋다. 지금도 그런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는 뒷간을 간혹 만날 때가 있다. 전주 근교의 모악산 아래에 사는 박남준 시인의 오두막에 가 보라. 똥 위에 재를 뿌리는 노천 뒷간이 그 집에 있다.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쭈그려 앉아야 하는 게 흠이지만, 코를 싸쥐고 인상을 찌푸리지 않아도 될 만큼 뒷간의 청결 상태는 양호하다.
어릴 적에 시골에 있는 큰집이나 외갓집을 가면 ‘통시’라고 부르는 변소가 위채와 아래채에 각각 하나씩 있었다. 하나는 여성용이고, 하나는 남성용인 셈인데, 그보다는 똥을 모아 거름으로 쓰고자 하는 목적이 더 컸을 것이다. 똥장군과 오줌통을 거느린 그 통시가 나에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곳이었다. 그래서 그 통시를 드나들 때마다 나는 하얀 수세식 변기가 있는 집을 머릿속에 그리곤 하였다. 물통에 달린 줄을 아래로 끌어당기면 맑은 물이 기분 좋게 콸콸 쏟아져 내리는 수세식 변기는 나를 똥의 공포로부터 잠시 벗어나게 해 주었다. 그리고 수세식 변기가 있는 집에서 서양식 양변기가 있는 아파트로 이사한 후에는 마치 신분 상승을 이룬 것처럼 뿌듯한 기분까지 들었다. 옹색하게 쭈그려 앉아 땀을 흘리지 않아도 되고 의젓하게 가슴을 펴고 변기에 턱 걸터앉을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똥 냄새로부터 멀어지면서 우리는 고향을 잃었다. 함부로 버려서는 안 되는 똥을 아무 생각 없이 물에다 풀어 버리면서 맑은 강을 잃었다. 똥을 오래 삭혀 거름으로 쓰던 지혜를 잊어버리면서 맑은 강을 잃었다. 똥을 오래 삭혀 거름으로 쓰던 지혜를 잊어버리면서 화학 비료가 땅을 망치도록 방기하였다. 나날이 늘어가는 자연의 온갖 재앙들이 똥을 무시하면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가령, 광우병과 같은 신종 가축 전염병의 원인이 소의 사료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정은 설득력이 있다. 실제로 농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싱싱한 풀을 먹고 자란 소보다 사료를 먹고 자란 소의 똥이 더 역한 냄새를 풍긴다고 한다. 말하자면, 똥의 반란이다. 똥을 잘 달래야 한다. 똥이 똥으로 대접받을 때 이 세상 전체가 편해진다.
⚈안도현은 1981년 대구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 「낙동강」이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1998년에 소월시 문학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안도현의 아침 엽서』,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연어』, 『외롭고 높고 쓸쓸한』, 『자장면』 등이 있다. 이 글은 『사람』(안도현 지음/이레)에서 옮겨온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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