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쟁이 /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시래기 / 도종환
저것은 맨 처음 어둔 땅을 뚫고 나온 잎들이다
아직 씨앗인 몸을 푸른 싹으로 바꾼 것도 저들이고
가장 바깥에 서서 흙먼지 폭우를 견디며
몸을 열 배 스무 배로 키운 것도 저들이다
더 깨끗하고 고운 잎을 만들고 지키기 위해
가장 오래 세찬 바람맞으며 하루하루 낡아간 것도
저들이고 마침내 사람들이 고갱이만을 택하고 난 뒤
제일 먼저 버림받은 것도 저들이다
그나마 오래오래 푸르른 날들을 지켜온 저들을
기억하는 손에 의해 거두어져 겨울을 나다가
사람들의 입맛도 바닥나고 취향도 곤궁해졌을 때
잠시 옛날을 기억하게 할 짧은 허기를 메꾸기 위해
서리에 맞고 눈 맞아가며 견디고 있는 마지막 저 헌신
여백 / 도종환
언덕 위에 줄지어 선 나무들이 아름다운 건
나무 뒤에서 말없이
나무들을 받아 안고 있는 여백 때문이다
나뭇가지들이 살아온 길과 세세한 잔가지
하나하나의 흔들림까지 다 보여주는
넉넉한 허공 때문이다
빽빽한 숲에서는 보이지 않는
나뭇가지들끼리의 균형
가장 자연스럽게 뻗어 있는 생명의 손가락을
일일이 쓰다듬어주고 있는 빈 하늘 때문이다
여백이 없는 풍경은 아름답지 않다
비어 있는 곳이 없는 사람은 아름답지 않다
열쇠 / 도종환
세상의 문이 나를 향해 다 열려 있는 것 같지만
막상 열어보면 닫혀 있는 문이 참 많다
방문과 대문만 그런 게 아니다
자주 만나면서도 외면하며 지나가는 얼굴들
소리 없이 내 이름을 밀어내는 이데올로그들
편견으로 가득한 완고한 집들이 그러하다
등뒤에다 야유와 멸시의 언어를
소금처럼 뿌리는 이도 있다
그들의 문을 열 만능 열쇠가 내게는 없다
이 세상 많은 이들처럼 나도
그저 평범한 몇 개의 열쇠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두드리는 일을 멈추진 않을 것이다
사는 동안 내내 열리지 않던 문이
나를 향해 열리는 날처럼 기쁜 날이
어디 있겠는가 문이 천천히 열리는
그 작은 삐걱임과 빛의 양이 점점 많아지는 소리
희망의 소리도 그와 같으리니
산경 /도종환
하루종일 아무 말도 안했다
산도 똑같이 아무 말도 안했다
말없이 산 옆에 있는 게 싫지 않았다
산도 내가 있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하늘은 하루 종일 티없이 맑았다
가끔 구름 떠 오고 새 날아왔지만
잠시 머물다 곧 지나가 버렸다
내게 온 꽃잎과 바람도 잠시 머물다 갔다
골짜기 물에 호미를 씻는 동안
손에 묻은 흙은 저절로 씻겨 내려갔다
앞산 뒷산에 큰 도움은 못 되었지만
하늘 아래 허물없이 하루가 갔다
가구 / 도종환
아내와 나는 가구처럼 자기 자리에
놓여 있다 장롱이 그렇듯이
오래 묵은 습관을 담은 채
각자 어두워질 때까지 앉아 있는 일을 하곤 한다
어쩌다 내가 아내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내의 몸에서는 삐이걱하는 소리가 난다
나는 아내의 몸 속에서 무언가를 찾다가
무엇을 찾으러 왔는지 잊어버리고
돌아 나온다 그러면 아내는 다시
아래위가 꼭 맞는 서랍이 되어 닫힌다
아내가 내 몸의 여닫이문을
먼저 열어보는 일은 없다
나는 늘 머쓱해진 채 아내를 건너다보다
돌아앉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본래 가구들끼리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저 아내는 방에 놓여 있고
나는 내 자리에서 내 그림자와 함께
육중하게 어두워지고 있을 뿐이다
흔들리며 피는 꽃 /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었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어떤 마을 / 도종환
사람들이 착하게 사는지 별들이 많이 떴다.
개울물 맑게 흐르는 곳에 마을을 이루고
물바가지에 떠 담던 접동새 소리 별 그림자
그 물로 쌀을 씻어 밥 짓는 냄새 나면
굴뚝 가까이 내려오던
밥티처럼 따스한 별들이 뜬 마을을 지난다.
사람이 순하게 사는지 별들이 참 많이 떴다.
귀가 / 도종환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지쳐 있었다
모두들 인사말처럼 바쁘다고 하였고
헤어지기 위한 악수를 더 많이 하며
총총히 돌아서 갔다
그들은 모두 낯선 거리를 지치도록 헤매거나
볕 안 드는 사무실에서
어두워질 때까지 일을 하였다
부는 바람 소리와 기다리는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고
지는 노을과 사람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밤이 깊어서야 어두운 골목길을 혼자 돌아와
돌아오기가 무섭게 지쳐 쓰러지곤 하였다
모두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라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의 몸에서 조금씩 사람의 냄새가
사라져가는 것을 알면서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터전과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쓰지 못한 편지는
끝내 쓰지 못하고 말리라
오늘 하지 않고 생각 속으로 미루어둔
따뜻한 말 한마디는
결국 생각과 함께 잊혀지고
내일도 우리는 어두운 골목길을
지친 걸음으로 혼자 돌아올 것이다
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
작가의 산실, 회인산방을 찾아서 / 도종환 시인
느린 걸음으로 걷고 싶을 땐 직선보다 구불텅 휘어진 곡선의 길이 좋다.
급하게 달려온 걸음도 에워 안으며 돌아가는 길은 강퍅한 마음마저
여유롭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한 눈에 다 드러내기보다 사이사이
새롭게 내어주는 길은 그리운 이를 기다리는 마음처럼 설렌다.
도종환 시인의 회인산방으로 가는 길 역시, 곡선이다.
도심을 벗어나 굽이굽이 돌아가는 피반령 고개는 조였다 풀었다를
반복하며 발아래 자연 풍광을 펼쳐보이고, 부드러운 곡선의 길은
법주리에 자리잡은 회인산방까지 이어진다.
그렇게 도심에서 외곽으로, 외곽에서 시골 마을로, 마을에서도 깊은
산골짜기로 접어드는 동안, 길의 끝자락에서 만나게 될 사람을
가만히 생각하는 시간도 길이 주는 즐거움이다.
회인산방을 찾은 날, 시인은 겨울나기 준비로 분주했다.
창틀마다 떨어져 나간 황토를 덧바르고, 습기를 잡기 위해 구멍 낸
방바닥에 초배지로 도배하고, 아궁이에 불을 넣어 안으로 난 틈새
를 하나하나 점검했다.
겨울 준비는 이곳에서 다섯 번의 혹독한 시골 겨울을 보내며 얻은
소중한 경험이기도 하다. 시인이 회인산방에 옮겨 앉은 지도
올해로 꼭 5년째다. 갑자기 쓰러져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김이동 화가가 다짜고짜 차에 태워 내려놓은 것이 인연이 되어
산방의 주인으로 눌러 앉았다.
"당시는 육체적으로도 힘들었지만 정신적으로도 힘든 시기였어요.
일만 하던 사람이 갑자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몸이 되어 이곳에
왔으니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불빛도 보이지 않는 산속에 들어앉아
2년 동안은 내가 뭘 잘못했는가, 왜 이런 곳에서 유배 아닌 유배를
해야하는가, 수없이 반문하며 보냈습니다"
끝 모를 절망으로부터 시인을 일으켜 세운 것은 믿음이었다고 한다.
하늘은 날 버리지 않을 것이란 믿음. 그리고 데려간다 해도 이 또한
하늘의 뜻 일 거라는 믿음이 평정을 되찾게 했다.
"고요하게 내 처지를 받아들이게 되었어요. 고요한 이곳에서
고라니도 맨발로 다니는데, 책을 많이 읽고, 생각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 글 쓰는 사람에겐 좋은 기회일 거 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평화로운 시간과 고요한 시간을 받아들이면서 평온한 마음을
되찾고, 여유로워졌어요"
나를 쓰러뜨린 삶이 생각을 깊게 하고 재충전의 기회가 되었다는
시인은 글이 조용한 시간을 만나 한 편의 시로 씌여지면서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긴 터널을 빠져나와 웃음으로 들려주는 이야기
는 추억의 이면에서 빛이 나지만, 당시 시인이 부둥켜안고 보낸
절망의 시간은 "천 권의 책을 읽어도 쓸쓸한 일에서 벗어날 수
없어"라는 '이 세상이 쓸쓸하여'라는 시에서 진하게 읽혀진다.
산방에 가지런히 쌓여있는 책에서 시인의 온기가 느껴지는 것
도 이 때문이리라.
산방의 적막은 시인에게 자연과 마주할 수 있는 시선을 선물
한다. 햇살이 모이는 마당은 다람쥐도, 무당개구리도, 뱀도,
박새도, 고라니도 모두가 주인이란 사실을 깨닫게 한다.
"친구들이 산방에 있는 나를 위해 숲 해설가 교육을 함께 신청
해 듣게 되었는데, 지금도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식이 처음에는 방해가 될 때가 있었지만, 숲에 대해 알면
알수록 나와 숲의 관계, 작은 우주로서의 관계를 들여다보게
되었어요"
숲에 대한 관심은 문학적 영역의 확장 뿐만 아니라, 시인의
삶을 자연과 하나가 되게 하고 있다. 시편마다 배경이 되어
주는 자연은 편안하면서도 깊고, 맑은 울림을 주며 독자들
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한국의 시인으로 손꼽히고 있다.
시 담쟁이는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으며 낭송되고 있는
시인의 대표 시 중 하나다.
담쟁이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산방에 든 지 5년, 시인은 시집과 동화, 에세이 등 여러 권의
책을 출간하며 문학적 열정을 쏟아왔다.
새벽이 작업 시간이라는 시인은 글을 쓰기 전, 한 시간 정도
명상하며 생각을 모으고 정리한다고 한다.
아픈 몸을 치유하기 위해 찾아든 회인산방이지만, 이젠 글을
쓰기 위한 시인의 문학 산실이 된지 오래다. 그렇다고 시만
쓰지 않는다. 시인은 지역 문학의 뿌리 찾기에도 남다른
열정을 보이고 있다. 오장환문학제와 같은 일련의 작업들은
자기 안에서 거듭나고, 자가발전하고, 자신을 한 단계 끌어
올려야 한다고 주문하는 시인의 말을 실천으로 보여주고
있다.
크고 소리내지 않고 흐르는 강물처럼 시인은 그렇게 정지용,
홍명희, 신경림 등 충북문학의 큰 물줄기를 이으며 문학인
들의 든든한 기둥이 되어주고 있다.
가지끝에 걸린 감이 붉은 등처럼 따스해지는 계절, 산방에서
만난 시인은 고요하다. 투명한 시냇물을 바라보는 것 같다.
이러한 타인의 생각이 시인에겐 창살이, 벽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시인은 도심에 들어앉은 숲 같다.
속리산 자락 산방(山房)에서 느릿느릿 안분지족하는 도종환 시인
그에게서 섬세하게 흔들리는 여린
첩첩 산중에 그림처럼 서 있는
시인을 만나기 위해 시골길을 달렸다. 서울 밖으로 고작 두어 시간 나왔을
선생의 집은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들어온 다음에도 또 한 번 산속에
앞마당에는 담요를 덮어놓은 듯 정갈하게 잔디가 깔려 있다.
“미술교사로 재직 중이던 후배가 암 판정을 받고 요양 차
시인이 충북 보은의 이곳 산방에 머문 지도 어느새 3년
건강은 어떠냐고 물었더니 얼마 전 있었다는 에피소드로 답을
“여긴 TV도 없고 라디오도 없고 신문도 없으니 하루 종일
산방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찬사일색인 손님에게 시인은
“식구들도 종종 다녀갑니다. 큰아이는 군대 가 있고 작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초여름 산방의 햇살을 즐기고 있자니
마음속의 풍랑이 가라앉아 고요한 상태로 가는 길
시인은 듣던 대로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하기야 1백만 명의
“이가 아파서 이를 하나 뺀다고 할 때 처음에는 빼기가 싫죠.
그의 신작 시집 「해인으로 가는 길」은
시집의 제목인 ‘해인으로 가는 길’은 곧
“여기 오기 전에는 화엄의 삶을 지향하면서 살았다고 할
시인은 최근 시를 배달하는 집배원으로 나섰다.
“우리 동네에 착한 집배원이 한 명 있어요. 오토바이를 타고
시인은 자신도 그 집배원 같은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
글 / 박연정 사진 / 김준수 (프리랜서)
'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범부채로 부치는 바람 (0) | 2010.08.22 |
---|---|
[스크랩] 유명 시인의 현대시 222 모음 (0) | 2010.03.30 |
외로움 (0) | 2009.04.29 |
눈 내리는 날 (0) | 2008.11.21 |
[스크랩] 가을엔 맑은 인연이 그립다 (0) | 2008.09.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