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금융 위기 뉴스로 듣는 사람들까지 쭈그러들게 하고 있는 요즘, 잠시 시름을 잊고자
본 야구 경기가 오늘 밤은 너무 재미있었다. 준 프레이 오프 경기는 예상외로 삼성이
롯데를 주눅 들게 할 정도로 철저히 유린해 재미없게 마치더니, 프레이오프 1차전은
또 두산이 삼성을 빠른 발로 놀리면서 얼을 빼어놓았다. 그래 오늘 두산이 먼저 3점을
뽑는 걸 보면서, 어제의 재탕이 되나 하고 TV가 있는 방을 떠나 다른 일을 했다.
그런데 9시 스포츠 뉴스에 연장전에 돌입했다는 말을 듣고 인터넷 문자 중계를 보는데,
팽팽하게 긴장된 투수전으로 14회까지 이르러 삼성이 2사후에 주자를 모아 3점이나 뽑는
저력을 보이면서, '그러면 그렇지!' 하고 다시 마지막 시리즈까지 기대를 갖게 한다. 금년은
야구는 올림픽부터 신나게 해 롯데의 돌풍으로 이어가더니, 시리즈까지 참맛을 보여준다.
제주에서는 예로부터 고욤나무와 감나무의 교배종 같은 재래종을 많이 심어 초여름에
열매를 따서 갈옷을 만들어버리기 때문에 좀처럼 잘 익은 감을 볼 수 없더니, 이제는
갈옷을 많이 입지 않기 때문에 자잘한 열매가 나무에서 겨울이 될 때까지 오래도록 남아
있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어제 신제주에 가려고 오등동을 지나는데 길가 차도 위로
뻗친 나무에 이렇게 감이 익어 있어 나의 차를 멈추게 했다.
♧ 감 익을 무렵 - 이양우
서리 맞아야 활짝 피는
감(柑) 익을 무렵.
그 떫은 생피로
연시(軟枾)가 되고
홍시(紅枾)가 되어
나를 못 살게 굴던
금순이
네 젖몽울에
내 10월은
가래톳이 서고
저 늦가을
서리길로 남은
까치 밥 만큼
붉은 암내음,
나는 잊을 수가 없어
엊그제는 고향산천
휘어진 향나무 가지를 잡곤
실컷 울어 퍼대고파라.
금순아! 이제는 다 틀렸지?
내 얼굴도 바삭바삭
네 얼굴도 찌들찌들
그때 그 포동포동한
속 볼기 젖가슴
이제는 그 촉촉한
소싯적 달큼한 진액도
모두 다 잦아들었겠지?
♧ 감나무 아래에서 - 김종제
감나무 아래에서
내 생의 노오란 감 잡았다
저 감 아직 떫어서
먹기에 이르니
그냥 앉아서 구경만 하는 것이다
새들도 몇 번 쪼아 먹은 뒤에 버려서
감들이 시신처럼 뒹굴고 있다
한 철 잘 놀았다고 떠나간 뒤라
생이 무소식이다
지난 폭우에도 가뭄에도
꿋꿋하게 잘 버티더니
새롭게 또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
감나무 아래에서
감 한 알 얻으려고
언제나 나는 서성거릴 뿐이다
저절로 떨어진 감 하나 들고
먹지도 못하고 버리지도 못하고
그 둥글고 단단한 삶에
감명이 깊어서
오래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이다
비가 올 것이라고 예감하더니
감들이 후두둑 떨어진다
감나무 아래에서
감감한 나를 알게 되어
그저 감사할 뿐이다
♧ 감나무 - 이남일
정원의 감나무는
한 번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줄곧
한번 내린 뿌리를
멈추어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맨 처음의 그 마음을
진작 알고 있었지만
늘 미안한 나는
나무에게 눈길 한번 주지 못했다.
가지가 잘릴 때도
벌레에 나뭇잎이 먹힐 때도
나무는 사계절 눈비를 맞으면서
꿈쩍 않고 그 자리를 지켜주었다.
그리고 가을날
나무는 붉은 잎을 모두 벗어버리고
수줍게 내 보인 알몸 가지 끝에
한 여름의 고통을 주렁주렁 매달아 보였다.
설익은 자존심 보다
향기 나는 아픔이 아름답다는 것을 순간
나무는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 감나무 그늘 아래 - 고재종
감나무 잎새를 흔드는 게
어찌 바람뿐이랴.
감나무 잎새를 반짝이는 게
어찌 햇살뿐이랴.
아까는 오색딱다구리가
따다다닥 찍고 가더니
봐 봐, 시방은 청설모가
쪼르르 타고 내려오네.
사랑이 끝났기로소니
그리움마저 사라지랴,
그 그리움 날로 자라면
주먹송이처럼 커갈 땡감들.
때론 머리 위로 흰 구름 이고
때론 온종일 장대비 맞아보게.
이별까지 나눈 마당에
기다림은 웬 것이랴만,
감나무 그늘에 평상을 놓고
그래 그래, 밤이면 잠 뒤척여
산이 우는 소리도 들어보고
새벽이면 퍼뜩 깨어나
계곡 물소리도 들어보게.
그 기다린 날로 익으니
서러움까지 익어선
저 짙푸른 감들, 마침내
형형 등불을 밝힐 것이라면
세상은 어찌 환하지 않으랴.
하늘은 어찌 부시지 않으랴.
♧ 감나무 - 김정호(美石)
푸른 가을 하늘 끝
짝짝 갈라지는 햇살
모진 비바람 속에서도
용케도 견디어온 서러운 세월
익을 대로 익은 그리움은
혈관 속에 녹아내리고
이파리에 초롱초롱 매달린
이슬 같은 기억들
또 잠들지 못한다
옆집 육촌 아저씨는
대대로 물려 내려온 가난이 싫어
어느 날 저녁 곗돈을 싸 들고
동네 사람들 몰래
삼륜차에 짐을 싣고 도회지로 떠났다
주인이 떠난 뒤 외롭게 남겨진 감나무에
생쥐만 득실거리며
뿌리부터 서걱서걱 조여 오는
죽음의 그림자 다가서면
"그래 이 불쌍한 놈 주인에게 버림받고
까치에게 홀몸 다 내준
너는 정말 불쌍한 놈이구나"
바람이 말한다
♬ 가을이 드리는 잊지 못할 선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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