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순영의 자연관찰 일기][애니멀피플]윤순영의 자연 관찰 일기 20살 넘은 참수리 암컷 2020년부터 자취 감춰..아직 어린 새끼 흰꼬리수리 등쌀 이길까
참수리 왕발이는 20살이 넘었을 암컷으로 팔당호의 지배자였지만 2020년부터 자취를 감췄다.
2014년부터 관찰해오던 참수리 ‘왕발이’가 2020년부터 보이지 않는다. 왕발이는 필자가 팔당에서 처음 만난 참수리로, 오른쪽 허벅지가 유난히 굵어 날 때 배에 다리가 밀착되지 않고 아래로 처진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팔당호 일대를 손금 보듯이 훤히 들여다보는 왕발이는 이곳 터줏대감이라 하여도 손색이 없었다.
검단산에 자리 잡은 전망대에서 사냥을 기다리는 왕발이.
참수리 부부. 왼쪽이 암컷인 왕발이다. 수컷 ‘점박이’는 다소 작으며 몸매가 날렵하다.
왕발이는 필자가 관찰하기 전부터 팔당에서 사냥을 해 왔고 검단산에 잠자리와 사냥 전망대를 마련해 둔 ‘검단산의 산군’이었다. 몸집이 큰 것으로 보아 암컷으로 추정된다. 분원리와 팔당대교 하류 당정섬을 영역으로 두고 당정섬에서 자주 관찰되는 다소 작은 참수리는 수컷으로 보인다. 수컷은 허벅지 깃털과 흰 꼬리 깃털에 검은 점이 있어 ‘점박이’라 불린다. 부부가 함께 있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고 가족들이 모여 있는 모습도 종종 보였다.
왕발이의 사냥 모습.
수컷 점박이의 사냥 모습.
수컷 참수리의 허리와 허벅지 깃에는 검은 무늬가 있어 점박이란 이름이 붙었다.
참수리는 차가운 사냥꾼처럼 보이지만 가족 간의 유대관계가 끈끈하고 새끼들을 지극히 돌보며 부부의 애정도 돈독하다. 개별적으로 활동하면서도 형제들이 가끔 만나거나 가족과 함께 모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검단산에 터를 잡아 해마다 월동했던 왕발이가 보이지 않아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 같다. 혹여 이동 중에 사고를 당했거나 번식지에서 갑자기 예기치 않은 일을 당한 것은 아닐까,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본다. 수명이 다해 자연사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터울이 있는 참수리 형제.
참수리 부부가 어린 새끼를 가운데 두고 앉아 있다.
참수리가 팔당에서 처음 관찰된 것은 2005년쯤으로 보고 있다. 왕발이가 팔당에서 관찰된 햇수로 유추해 보면 20살이 훨씬 넘은 나이였을 것이다. 그동안 왕발이가 터울로 낳은 어린 참수리 세 마리를 관찰했고 새끼들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았다. 참수리는 성조가 되는 데 5년이 걸린다. 비록 왕발이는 보이지 않지만 그 새끼가 성조로 성장하여 팔당을 물려받아 지키고 있는 모습이 대견스럽다. 그러나 왕발이가 없는 참수리 가족은 세력이 약화했고 흰꼬리수리 성조 부부의 기세가 등등하다.
왕발이가 없는 팔당에서 흰꼬리수리가 기세를 부린다.
흰죽지는 흰꼬리수리의 단골 사냥감이다.
왕발이가 있을 때는 혼자 흰꼬리수리 서너 마리의 공격을 모두 막아냈다. 왕발이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진다. 이제 팔당에서는 참수리 4마리가 늘 관찰된다. 아비 한 마리와 성장한 새끼 두 마리, 그리고 3살로 추정되는 새끼 참수리가 그들이다. 그중 허리에 검은 점이 박혀있는 새끼 한 마리에게 ‘허리점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세월이 지나면 왕발이의 용맹함을 이어받은 새끼들이 팔당의 지배자가 될 것이다.
해를 거듭하며 어린 참수리들이 성장한다. 팔당에서 겨울을 보내는 것은 치열한 생존경쟁의 연속이다. 참수리와 흰꼬리수리가 함께 차지한 팔당에서 해마다 먹이 경쟁에서 밀리지 않으려는 다툼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반복된다. 사냥감은 물고기류와 흰뺨검둥오리, 청둥오리지만 흰죽지가 주로 사냥감이 된다. 맹금류는 부리가 긴 사냥감을 회피한다. 부리에 쪼여 눈에 치명상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참수리와 흰꼬리수리는 사냥에 성공하면 인근 산속의 은밀한 나무숲에서 먹는 것이 보통이지만 때로는 강가의 바위나 얼음이 언 강에 앉아 허겁지겁 먹기도 한다. 사방이 트인 곳에서 먹이를 먹으면 산 위에서 지켜보던 참수리나 흰꼬리수리가 그냥 바라만 보지 않는다. 서로 뺏고 빼앗기는 치열한 강탈은 겨울나기의 생존전략 중 하나다.
사냥감에 대한 애착과 먹이를 빼앗아 먹어야 하는 생존의 절박함, 다치지 않고 먹이를 빼앗기지 않도록 방어해야 하는 상황이 뒤엉킨다. 참수리는 정확한 판단과 인내심, 신중하고 용감한 모습으로 흰꼬리수리보다 우위를 점한다. 맹금류는 사냥한 먹이를 발로 움켜쥐고 비행하거나 먹이를 먹을 때 취약점을 드러낸다. 자신을 공격해 오는 다른 맹금류를 방어하지 못하기 때문에 비행 중 사냥감을 놓쳐 버리거나 땅에 앉아 먹던 먹이를 잠시 내려놓고 발로 방어해야 한다. 부리가 길고 날카로운 새라면 부리로 공격하겠지만 맹금류는 발을 주로 쓰는 동물이다. 부리는 먹이를 뜯어 먹기에 적합한 갈고리 형태로 잘 발달하여 있다.
먹기 위해 죽이고 서로 냉혹하게 먹이 경쟁을 하는 맹금류의 행동에 인간의 잣대를 들이댈 수 있을까. 자연 속에서는 그저 하나의 질서일 뿐 아닐까. 맹금류는 존재만으로도 그 지역 종의 다양성과 환경의 건강성을 가늠하는 지표가 된다. 매서운 겨울이지만 팔당과 검단산은 다양한 새들의 생명력이 넘쳐나는 열기로 가득하다.
일반적으로 번식지가 더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한반도를 찾아와 월동하는 새들은 후대를 이어나가기 위해서 풍요로운 월동지가 더 중요하다. 월동지에서 충분한 영향을 섭취해야 종의 번성을 이어나갈 수 있다. 사람도 쾌적한 환경에서 살기를 원하듯 생활의 풍요로움이 안정된 삶의 질을 높인다. 동물들이 살아가기 좋은 최적의 환경이 인간의 간섭으로 훼손되면 동물들은 기존에 살던 곳과 비슷한 장소를 차선책으로 활용하지만 더 나쁜 환경에서 살아가게 된다. 결국 생존의 질이 떨어져 절멸 위기로 몰리는 상황이 초래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참수리 성조를 관찰할 기회는 매우 드물다. 주로 어린 새끼들이 관찰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대를 이어 찾아오는 경우도 드물다. 왕발이의 부재는 서운하지만 후세들이 이곳을 찾아와 대를 이어나가는 모습이 경이롭다. 팔당의 환경이 변하지 않는 한 참수리 가족은 약속의 땅을 계속해서 찾아올 것이다.
1월 '마운스토리' 영양 일월산 '日'자 지닌 산 중에 가장 높아..동학 교주 최시형이 은거하면서 경전 집필
일월산 주변은 일월산으로 향한 봉우리들이 물결같이 밀려오는 듯하다. 그 너머로 동해의 태양이 장엄하게 떠오르고 있다. 사진 영양군청 제공
신년 일출산행을 맞이할 때이다. 일출산행으로 적절한 산은 어디일까? 그리고 남한에 해 ‘일日’자를 가진 산이 몇 개나 될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제주도 성산일출봉이다. 야트막하면서 오르기도 쉬워 많은 사람들이 신년 일출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일출을 보기 위해 몰린다. ‘日’자를 가진 산을 찾는 의미는 신년일출을 맞이하면서 새로운 각오로 한 해를 다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출산행은 산을 자주 찾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매년 행하는 통과의례와도 같은 것이다.
남한에 ‘日’자를 가진 산을 국토지리정보원이 산의 개념으로 총 정리한 7,000여 개의 산 중에 샅샅이 찾아보니 몇 개 나왔다. 그 중 일출을 보면서 산행을 즐길 만한 500m 이상 되는 산을 꼽자면 영양 일월산日月山(1,217.7m), 양구 일산(1,156.7m: 해산으로 더 알려져 있다), 구례 화엄사 위쪽 차일봉遮日峯(1,004.7m), 보성 망일봉望日峰(652.5m), 청도 학일산鶴日山(695.3m) 등이 있다. 그 외 ‘日’자를 가진 산들은 100~300m 정도의 높이여서 일출산행이라 하기엔 조금 부족한 감이 든다. 위에 언급한 차일봉은 해를 가린다는 의미를 지녀 뜻은 조금 다를 수 있지만 역설적으로 산이 너무 높아 해를 가린다는 의미를 가질 수 있어 일출산행 후보지로 꼽았다.
여기서 해발이 가장 높으면서 대중성 있고, 민속·지리·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영양 일월산은 신년 일출산행지로 삼기에 적격이다. 일월산의 대중성은 산나물과 약초에서 찾을 수 있다. 봄철에 전국의 산나물꾼들이 일제히 몰리며, 그 명성은 전국 어느 산 못지않게 뛰어나다. 산나물꾼들과 약초꾼들은 일월산 산나물이 심산유곡의 서리에, 무속인들의 기氣까지 받아 맛과 향이 특히 좋다고 말한다. 영양군에서는 매년 봄 산나물축제를 성대히 열어 지역경제 활성화에 한 몫 한다. 영양군청 관계자는 “일월산 전체가 산나물 천지”라며 “산 사면과 능선 어디든지 산나물이 자라지 않는 곳이 없으며, 4월 중순부터 순식간에 자란 산나물이 5월 중순쯤엔 일월산 전체를 뒤덮어 이 시기부터 산나물의 은은하고 싱그러운 향기로 가득 찬다”고 설명했다.
영양은 첩첩산중 오지 중의 오지로 꼽힌다. 영양군 전체 면적에서 산은 90%나 차지한다. 일월산은 그중에 우뚝 솟은 ‘산 중의 산’이다. 따라서 일월산의 심산유곡은 그 높이와 넓이에서 나온다. 해발 1,218m는 주변 일대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다. <여지도서>에 ‘일월산은 현 북쪽 30리에 있고, 안동 통구산通丘山(지금 울진의 통고산)에서 뻗어 나와 읍의 진산이 되었다. (정상에서) 동쪽으로 푸른 바다가 보이고, 해와 달이 떠오르는 것을 내려다볼 수 있어 그 이름이 생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방지도(1872)>에는 일월산 아래에 기우제를 지내는 기우단과 성황단이 그려져 있다.
일월산 월자봉 아래 황씨부인당 산령각에 있는 황씨부인도(맨 오른쪽)와 산신도, 칠성도.
무속인들 많이 찾고 산나물로 유명
이와 같이 일월산은 그 높이면에서 일단 주변을 압도한다. 산세는 우뚝 솟아 웅장하고 거대하나 정상부는 오히려 완만한 편이다. 그래서 정상엔 공군 레이더기지가 차지하고 있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주변 산들은 전부 일월산을 향해 경배하듯 엎드려 있는 것 같다. 산이 높으면 깊은 골짜기를 만들고 풍부한 물을 계곡으로 흘러 보낸다. 일월산에서 발원한 여러 계곡의 물은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반변천(또는 대천, 신한천, 와부탄으로 부르기도 한다), 장군천, 동천(또는 청기천) 등으로 흘러간다. 물을 오래도록 머금고 있는 육산陸産이라 계곡이 마를 날이 없다. 풍부한 물은 산 전체를 축축하게 만들어 산나물의 생장에 최적의 환경조건을 만든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산 일대에는 구리·납 등의 지하자원이 매장되어 있으며, 산약초·인삼·버섯·벌꿀 등의 특산물도 풍부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일제 강점기 때 아연, 구리 등을 캐는 일월광산이 있었다. 지금은 폐광됐다.
육산의 심산유곡성은 일월산을 민속적으로 매우 깊은 의미를 갖게 했다. 산은 남성성, 바다는 여성성을 상징하지만 육산은 의외로 여성성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진다. 다시 말해 산은 남성성이지만 일월산은 여성성에 가깝고, 나아가 음陰과 양陽이 조화를 이룬 산이라 할 수 있다. 대개 산신은 남성이 좌정했지만 일월산 산신은 황씨부인으로 알려져 있다. 전국의 무속인들이 일월산을 영산靈山, 즉 신령스러운 산으로 여긴다. 섣달 그믐날이면 전국의 무속인들이 일월산을 찾아 기도하는 장면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전국의 으뜸 기도처로 꼽는 대관령 국사당과 버금갈 정도로 무속인들이 많이 찾는다.
일월산 산령각이 일월산 월자봉 바로 아래 황씨부인당 내부에 있다.
일월산 산령각은 황씨부인당 제일 위쪽에 자리 잡고 있다. 황씨부인당은 일월산에 몇 군데 있다. 그런데 정상 부위 바로 아래 자리 잡은 그 위치가 절묘하다. 일월산의 두 봉우리인 일자봉과 월자봉 중에 월자봉 바로 아래 위치해 있다. 굳이 신화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산신과 달의 관계는 항상 뭔가 연결고리가 있었다. 일월산에서도 그 상징성을 보여주는 것 같다. 월자봉 아래 일월산 산령각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으로 느껴지는 건 필자만의 감정일까. 육산의 여성성과 월자봉이라는 달이 가진 여성성, 그리고 황씨부인당…, 이 묘한 관련성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단순히 음과 양의 조화를 넘어 밝혀내지 못한 신화가 있는 건 아닌지….
일월산 산신으로 알려져 있는 황씨 부인의 전설도 애처롭다. 황씨 부인은 일월산 자락 마을에 살던 처녀였다. 그녀를 사랑하는 두 청년이 있었다. 그녀는 그중 한 명과 결혼했다. 그 첫날 밤 사건이 발생했다. 신랑은 신부가 잠자리에 들기 전 화장실에 갔다. 볼 일을 마치고 오는 중 방문에 칼 그림자가 비치는 모습에 깜짝 놀라 바로 도망쳤다. 신랑은 자신의 연적이 칼을 들고 죽이러 온 것으로 착각했다. 하지만 칼 그림자는 마당의 대나무 그림자가 방문에 비쳐 나타난 것이었다. 사연도 모르고 황씨 부인은 원삼과 족두리도 벗지 않은 채 밤새도록 신랑이 오기만을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 신랑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식음을 전폐하며 기다리던 신부는 깊은 원한을 안고 결국 죽었다. 그녀의 시신은 몇 개월이 지난 뒤에도 첫날 밤 그대로였다.
일월산 8부 능선에 있는 송국 중계소에서 일자봉을 향해 조금 가면 공군부대 옆에 이정표가 나온다.
정상 일자봉~월자봉 등산거리는 약 2㎞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신랑은 혹시나 싶어 마을로 돌아와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됐다. 자신의 무책임과 잘못을 크게 뉘우친 신랑은 신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일월산에 사당을 건립하고 매일같이 기도를 올렸다. 애틋한 사연을 접한 주민들도 덩달아 그 사당을 찾아 황씨 부인의 혼령을 위로했다. 그 뒤로 황씨 부인이 일월산 사당의 산령이 됐다고 전한다.
그런데 일월산 산령각이 왜 전국적으로 유명한지, 대관령 국사당만큼 기도발이 있는지에 대해서 조사된 바는 없다. 하지만 무속인들이 많이 찾는 건 사실이다. 그게 민속이다. 지명에서는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루지만 민속에서는 음陰인 여성성이 두드러지는 특징을 보인다.
월자봉과 정상 일자봉은 직선거리로 1㎞ 남짓 떨어져 있다. 등산로 상으로는 2㎞쯤 된다. 일자봉 정상은 군부대가 차지하고 있어 그 옆 살짝 솟은 봉우리가 정상을 대신한다. 군부대를 우회해서 가야 한다. 그 봉우리에 해맞이 데크를 조성해 놓았다. 실제 많은 등산객들이 일월산 정상에서 새해 일출맞이를 한다.
일월산 정상은 군부대가 차지하고 있고, 그 옆 봉우리에 일자봉 비석과 함께 동해를 향하도록 데크를 조성해 놓았다.
데크는 동쪽 사면으로 조성되 있다. 일자봉은 해를 보도록 동쪽으로, 월자봉은 달을 보도록 서쪽 황씨부인당 위에 있다. 주변엔 첩첩산중 산그리메들이 일월산을 향해 다가오는 듯하다.
정상 비석 뒷면에 소설가 이문열씨가 2001년 1월 1일 밀레니엄을 맞아 ‘일월송사日月頌辭’란 제목의 멋진 글을 써놓았다.
‘곤륜崑崙의 정기가 해 뜨는 곳을 바라 치닫다가 백두대간을 타고 남으로 흘러 동해 바닷가에 우뚝한 영산靈山으로 맺히니, 이름 하여 일월산이다. 해와 달을 아울러 품은 넉넉한 자락은 그윽한 옛 고을 고은古隱(신라시대 영양의 지명)을 길러내고 삼엄한 기상은 거기 깃들어 사는 이들에게 매운 뜻을 일깨웠다. (중략) 이제 옛 古隱은 문향文鄕 영양英陽으로 자라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고 섰으니, 아아, 일월산이여. 그 기상 그 자태 바뀌고 다함이 없으라. 우리 영양과 더불어 길이 우뚝하라.’
일월산의 가치를 극대화해서 읊은 내용이다. 일월산이 이 정도 가치를 지닌 줄 미처 몰랐다.
이문열씨의 글 옆에는 일월산의 지명유래와 간단한 소개 내용이 있다.
‘산세가 하늘에 우뚝 솟아 웅장하고 거대하며 산정은 평평하다. 산이 높아 해와 달을 가장 먼저 볼 수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옛날 산마루에 천지라는 연못이 있어 그 모양이 해와 달을 닮았다 하여 일월산이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정상부에는 일자봉, 월자봉 두 봉우리가 솟아 있고 청축사라는 사찰 터와 황씨 부인당, 용화사, 천화사, 용화선녀탕 등이 있으며, 낙동강의 상류 지류인 반변천이 이 속에서 발원한다.’
일월산 정상 비석. 뒷면에 이문열씨 글이 있다.
청록파 조지훈, 소설가 이문열씨가 일월산 출신
일월산의 지명유래를 소개한 옛 문헌은 어디에도 없다. 대체적으로 정상 안내문에 소개한 내용을 지명유래로 대신한다. 이유야 어쨌든 산지명에 양과 음, 즉 해와 달을 동시에 품은 산은 한국에서 일월산이 유일한 건 분명한 사실이다.
이문열씨가 극찬한 일월산이 실제로 어느 정도의 족보나 가치가 있을까. 일단 <산경표> 상으로는 낙동정맥의 한 지맥에 속한다. 낙동정맥은 백두대간이 흘러내려오다가 태백산에서 동해 쪽으로 갈라지는 산줄기이다. 태백산에서 내려온 정맥은 백암산에서 일월산이 다시 가지치기를 한다. 그 첫 번째 산이 일월산이다. 산의 족보로 보면 그리 탁월한 가치가 있는 건 아니다.
고지도에서도 별로 일찍 등장하지 않았다. 조선 초기 지도에는 일월산이 아예 없다. 처음으로 표기된 지도가 17세기 후반(1680년대쯤)에 제작된 <동여비고>이다. 이후에는 대부분의 지도에 나타난다.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일월산은) 영양현의 북쪽에 있다. 강원도 울진과 경계에 있다’는 정도로 간단히 소개돼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아예 없다.
그런데 조선 후기 들어 개인문집에 일월산이 많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문집이 <향산집響山集>. 조선 말기 문신이자 학자인 이만도(1842~1910)의 문집이다. 이만도는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 활동했고, 한일합병이 체결되자 유서를 남기고 곡기를 끊어 순국한 애국지사이다. 그는 일월산에 은거해 살며 7일 만에 유람하여 <북유록北遊錄>을 남겼다. <북유록>이란 제목은 이만도의 고향인 안동에서 일월산이 북동쪽에 있어 북쪽을 유람했다고 해서 명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문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전략) 일월산은 신라시대에 망제望祭를 지내던 종산宗山이었고, 또 사고史庫 터가 일자봉 서쪽 단곡丹谷의 위에 있는데, 지금 <동경기東京記> 및 우리나라 역사책 중에 신라의 역사를 언급한 것들이 명산의 사고에서 나왔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당시 문장에 최치원이 청량산에서 노닐던 행적 같은 것은 분명하게 남아 있는데, 어찌하여 이 산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이 없는가. 애초에 없었다고 한다면 그만이지만 있었는데 사라진 것이라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풍전등화와 물거품같이 위태한 시대 속에 운명을 맡기고 날아가는 새나 흘러가는 구름의 흔적을 읊고 노래하는 것이 어찌 스스로 기쁘고 스스로 자랑할 만한 것이었겠는가. 이제 파도가 들끓고 산악이 무너진 듯 세상이 뒤바뀐 뒤에도 오직 우리 일월산만은 여전히 문무 강토 안에 우뚝이 솟아 있다. (후략)’
일월산에서 신라시대 망제를 지냈다는 것과 조선시대 사고가 있었다는 기록은 사실상 찾을 수 없다. 이만도가 이같은 내용을 어느 문헌에 근거해서 주장했는지 알 수 없다. 근거 없는 주장인지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일월산이 문헌에서는 조선 초기에 간단히 언급만 되고, 고지도에서는 조선 중기부터 등장한다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렇게 훌륭한 명산을 왜 여태까지 모르고 소홀히 취급했는가에 대한 지적일 수도 있다.
<고종실록>에서는 동학의 최복술이 일월산에서 소동을 일으키고 사람을 모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이 일월산에 수도하면서 동학의 기본경전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집필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일월산의 음양성 내지는 영산성靈山性, 민속성을 반영한 내용이 아닌가 여겨진다. 음양을 갖춘 지형은 풍수적으로 명당이면서 영산성도 갖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일월산의 문필봉은 조선시대 유명 학자들뿐만 아니라 청록파 시인 조지훈과 소설가 이문열씨를 배출한 배경이라고 주장한다.
결과적으로 일월산은 일출명산으로 대중성을 지녔으면서 역산성과 민속성도 동시에 지닌 명산이지만 일찍 노출되지 않은 명산으로 평가할 수 있을 듯하다.
일월산 등산은 정상 바로 아래 공군부대까지 차가 올라갈 수 있지만 겨울에는 눈이 쌓여 위험하다. 영양군에서는 7개 등산코스를 소개한다. ▲찰당골에서 일자봉까지 편도 총 7.5㎞에 4시간 남짓 소요된다. ▲찰당골에서 황씨부인당까지는 약 4㎞로 2시간 30분가량 소요. ▲찰당골에서 월자봉 구간은 총 5.1㎞로 약 3시간 소요. ▲자생화공원에서 일자봉 구간은 총 4.2㎞로 약 2시간 30분 소요. ▲선녀탕에서 일자봉 구간은 약 3㎞에 1시간 40분 남짓 소요. ▲윗대티에서 일자봉 구간은 약 3㎞에 2시간가량 소요. ▲큰골에서 월자봉 구간은 약 2㎞로 1시간 남짓 소요.
지난해에 이어 2022년 올 한해 역시 기후변화로 인한 심각한 피해가 예상되는 가운데, 10년 안에 동식물 약 100만 종이 자취를 감출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다.
세계자연기금(WWF) 전 세계가 공룡시대 이후 가장 큰 대멸종으로 향하고 있으며, 10년 이내에 수백만 마리의 동물을 포함한 동식물 약 100만 종이 멸종할 수 있다는 예측을 담은 보고서를 공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국제자연보전연맹(IUCN)의 적색 목록에 올라 있는 생물종은 총 14만 2500종이며, 이중 야생에서 매우 높은 절멸 위기에 직면한 멸종위기(EN) 종은 4만 종에 달한다.
아프리카에 서식하는 둥근귀코끼리는 지난 31년간 개체 수가 86% 감소해 멸종위기가 가장 심각한 동물 중 하나로 꼽혔다. 북극곰 역시 북극해 얼음이 급속히 녹으면서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다.
세계자연기금은 “2035년 여름에는 북극의 얼음이 완전히 녹아 사라질 가능성이 있다”면서 북극곰의 멸종 예측이 현실화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멸종위기 종으로 분류된 북극곰 자료사진 123rf.com
이 밖에도 모든 종의 상어와 가오리의 개체 수는 서식지 감소와 기후변화, 무분별한 남획 탓에 1967년 이후 30% 감소했다. 독일에 서식하는 청개구리와 두꺼비 역시 10년 내 닥칠 대량 멸종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으로 보이며, 지중해에서 가장 크고 귀한 조개 역시 대멸종 위기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세계자연기금은 “전 세계 생물종의 멸종이 재앙적으로 확대될 것”이라면서 지구 생물종 보존을 위한 새로운 협정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멸종위기 종으로 분류된 둥근귀코끼리 자료사진 123rf.com
이어 “다만 지난해 멸종위기종을 지키기 위한 헌신적인 노력이 빛을 발하기도 했다”면서 “네팔에 서식하는 인도코뿔소 개체 수는 정부의 강력한 보호조치 도입으로 2015년 이후 16% 증가했다.
고양잇과 포유류인 스페인스라소니는 약 20년 전 당시만 해도 100여 마리만 남은 심각한 멸종위기 종이었으나, 현재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지에서 1111마리가 서식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한편, 한국을 상징하는 동물이자 2022년을 의미하는 한국호랑이는 멸종위기종 1급에 속하며, 야생에 남아있는 개체 수는 약 4000마리 정도로 알려졌다.
시는 불꽃이요, 한 벌의 의상이다. 시는 비교적 단일한 것으로 이해되는 시상을 노래한다. 시는 시적 대상을 다른 대상에 견줌으로써 그 대상에 대한 해석의 폭을 확장한다. 유비(類比)가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시가 진술의 형태를 갖더라도 시는 주견을 강조하지 않는 장르이다. 시적 화자의 위치를 낮춤으로써 시적 대상을 추켜세우는 것이 시의 미덕이다. 비교적 단일한 것으로 이해되는 시상을 노래하는 것이기에 서사 구조를 회피하려는 성향을 갖게 되고, 또 시상 전개에 있어서는 구조화가 중요하게 된다.
제 4회 천강문학상 시 부문 공모에는 총 300명의 작품 2171편이 접수되었다. 뜨거운 열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작품의 질적 수준도 매우 높은 편이어서 심사 과정은 녹록하지 않았다. 빈틈이 없이 차분하고 조심스럽게 심사는 진행되었다. 물론 공모작품들을 살피면서 아쉬움도 있었다. 첫째는 가족과 관련한 시가 많았다. 대개는 가족 구성원과의 이별로 인한 비감, 그리고 지나간 과거에로의 아련한 회귀와 재생 같은 것이 주류적 심상을 이루었다. 둘째는 시간의 경과에 따른 일이나 마음의 형편을 노래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로 인해 산문화되는 경향이 다분히 많았다.
예심을 통과해서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은 스물아홉 분의 시편들이었다. 오랜 숙고 끝에 세 분의 응모작을 두고 본격적인 논의를 진행했다. 김춘순, 임세한, 최은묵 세 분의 작품들이었다.
김춘순님의 시편들은 독특한 자기 발언력을 갖고 있었다. 시적 대상과 세계에 대한 독자적인 육성을 들려주었다. 시적인 사건들을 대개는 통증으로 이해하는 성향을 보여주었다. 가령 <화농의 봄>에서 만개한 ‘꽃’은 신생의 생명력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의 ‘화농’으로 인식된다. 그렇다고 삶의 비극성을 발언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는다. 김춘순님의 시는 상상력의 탄력성을 잘 보여주었지만 특별한 시적 진술을 발굴하려는 의욕이 너무 강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천강문학상 시 부문 대상의 영예는 최은묵님에게 돌아갔다. 최은묵님은 활달한 상상력과 트인 수사를 보여주었다. 작품들의 수준도 높낮이나 차이가 없이 한결같았다. 풍부한 창작 경험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했다. 대상작 <밤 외출>은 ‘업다’라는 행위를 변주한 작품이다. 어릴 적 엄마의 등에 업혔던 기억에서 이 시는 탄생한다. 그리고 그 업힌 기억은 평온과 자유로움의 그것으로 노래되고 있다. 이 시의 백미는 시의 후반부이다. 별을 바라보는 화자가 있다. 화자가 별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화자는 능동적인 위치에 있다. 그런데 이 시는 밤하늘을 바라보는 화자가 되레 밤하늘에 업히는 입장으로 전환되어 버린다. 지상과 하늘이라는 두 공간, 그리고 주체와 객체라는 두 입장을 역전시켜 버린다. 이런 변전은 읽는 이에게 어떤 인식의 새로운 열림과 그로인한 쾌감을 경험하게 한다. 심사위원들은 최은묵님의 이러한 능력을 소중한 것으로 평가했다.
간발의 차이로 수상자가 되지 못한 분들이 많았다. 낙담하지 말고 계속 정진하길 바란다. 수상자들에게는 박수를 보낸다. 앞길에 문운이 함께 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