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루트] '북한산성 행궁'.. 권력다툼의 중심에 내몰렸던 '군주(君主)의 울음'
라영철 입력 2022. 01. 09. 10:28 댓글 33개부왕(父王)에 대한 후궁(後宮) 아들의 그리움 깃든 행궁
고양 북한산성 관성소지 및 상창지, '경기도 기념물' 지정
[아시아경제 라영철 기자] 북한산은 서울 근교의 산 중에서 가장 높고 산세가 웅장하다. 백두산, 지리산, 금강산, 묘항산과 함께 오악(五嶽)으로 꼽히기도 한다.
서울 서북부와 경기도 고양·양주시의 경계 지역에 위치하며 최고 높은 백운대(836.5m)를 비롯해 400m~800m에 이르는 수십 개의 봉우리가 능선을 따라 이어져 있다.
산봉우리가 하나의 거대한 바위로 돼 있고 가파른 기암절벽이 형성돼 만경대, 원효대, 소요대, 영취봉, 노적봉, 인수봉 등 전망 좋은 바위 봉우리도 많다.
이런 봉우리가 모여 '큰 산'을 이루고, 험준한 능선과 암벽은 북한산을 하나의 성이자, 천연 요새로 만든다.
깊은 계곡에 절경을 갖춘 중흥동, 옥류동, 은선동으로 불리는 골짜기도 있다.

■ 북한산성 '행궁(行宮)'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왕실을 지킬 수 있는 최후의 보루가 필요했고, 1711년(숙종 37)에 이곳 북한산에 성을 축조한다.
그리고 피난 시 왕이 머물 수 있는 '행궁(行宮)'을 산성을 축성한 다음 해인 1712년에 건립한다.
남한산성에도 행궁이 있지만, 한강 포구가 적의 수중에 들어갔을 때는 방어에 속수무책이기 때문이다.
‘행궁’은 글자 그대로 임금이 행차해 머무는 임시 궁궐인데, 북한산성의 행궁은 임시 궁궐보다는 피난용 궁궐로 만들어졌다.
기록에는 왕실을 상징하는 종묘와 사직을 갖추지 않았다고 한다. 참고로 남한산성 행궁에는 종묘와 사직의 기능을 대신할 수 있는 좌전과 우실이 갖춰져 있다.

북한산성 행궁은 임금이 신하들과 정사(政事)를 보는 외전(外殿)을 앞에 두고, 뒤에는 임금과 왕실 일가족이 생활하는 공간인 내전(內殿)을 배치했다. 건물 주변으로는 담장을 둘러 전통적인 궁궐 건축물의 형태를 나타냈다.
규모는 내전 28칸, 외전 28칸, 부속건물 68칸 등 총 124칸으로 구성됐다.
행궁 관리는 1712년 산성을 관리하는 관청으로 설치된 경리청(經理廳) 소속의 관성장(管城將) 1인이 담당했다. 행궁의 수직은 관성소(管城所) 소속의 행궁 군사 2인이 맡았다.
세월이 흘러 북한행궁에는 왕실 족보를 보관하기 위한 보각(譜閣)을 두게 된다. 고종대에 이르면 사고(史庫)로 쓰이면서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왕실의 어제나 어보, 어책, 의궤 등 중요 물품들을 보관하게 된다.
이렇듯 북한행궁은 조선 왕실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피난처였다.

■ 37년 간의 논쟁, 종지부 찍다
숙종(肅宗, 1661∼1720, 재위: 1674∼1720) 통치 당시 조선은 외침의 위협을 계속 받았다. 국방과 영토 방어 문제는 최대의 현안이었다.
울릉도에는 왜인들이 침입해 영토를 어지럽혔고, 북방에선 청나라가 국경을 확실히 정하자며 압력을 가했다. 그래서 조선은 군사력을 키워야 했고, 외적 침입에 대비해 도성을 지킬 방비책과 피난처가 필요했다.
1711년 2월 초순, 마침내 숙종은 결단을 내린다. 즉위년에 시작해 37년을 끌어온 북한산성 축성 논쟁에 마침표를 찍게 된다.
임금이 말했다. "도성은 넓고 커서 수비하기가 어렵고 남한산성은 나루를 건너기가 어려우며, 강화도는 바다로 침입해 들어오는 도둑 무리에 취약해 얼음이 녹아버리면 믿을만한 곳이 못된다. 오직 북한산만은 극히 가까워 백성과 함께 들어가 지키려고 한다. 군량을 마련하는 등의 조치는 이들 먼 지역과는 달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만약 의견이 같아지기만을 기다린다면 어찌 이룰 수 있는 날이 있겠는가?" - 『숙종실록』 권50, 숙종 37년(1711년) 2월 5일 -

축성 결정이 나자 공사는 빠르게 진행됐다. 1711년 4월에 축성을 시작해 그해 10월에 성곽 공사를 끝냈다. 숙종이 연잉군(영조)과 함께 북한산성에 행차한 1712년 4월 무렵에는 행궁과 군사시설물 조성이 진행되고 있었다.
배수시설인 수문(水門)까지 살펴본 숙종은 이어 행궁을 찾았다.
"도성 10리 거리 행궁에 이르니 높고 험한 시단봉(柴丹峯)이 바로 동쪽에 있네. 노적봉(露積峯) 머리엔 아직 구름 걷히지 않았고 백운대(白雲臺) 위에는 안개 자욱하네." - 숙종(肅宗) 어제시(御製詩) 「북한산성」 『열성어제(列聖御製)』 -
행궁을 나온 숙종은 동장대(東將臺)에 서서 말없이 능선과 골짜기가 띠를 두른 성곽을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해가 뉘엿해지며 성곽 그림자가 길어지자, 산성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숙종은 환궁(還宮)을 서둘렀다.

■ 군주(君主)의 울음
영조(英祖, 1694~1776, 재위: 1724~1776)는 권신(權臣)들의 의견들을 조정하고 붕당(朋黨) 간의 암투를 조율해온 강한 왕, 경제를 일으키고 문물을 정비해 문화 조선의 기틀을 다진 임금, 신중하면서도 과감하게 정책을 추진해온 결기 있는 군주였다.
이런 영조가 북한산성 행궁을 찾아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울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1760년 8월 영조는 북한산성 행궁 외전에서 선왕(先王)의 자취를 찾으려는 듯 한참 동안 포진(鋪陳, 방석)을 만지며 울음을 삼키기를 반복했다.
이날 북한산성 행궁에서 부왕의 온기를 느끼는 순간, 영조는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제어할 수 없었다.
숙종이 48년 전(1712년) 이곳 북한산성 행궁에 행차했을 때 앉았던 그 포진이었다. 영조의 모습을 바라보던 대신들도 숙연해했다.
영조는 왜 그토록 감정이 북받쳐 울었을까?
총관(摠管)의 지위로 부왕(父王)인 숙종을 모시고 이 행궁을 찾았던 당시 연잉군(延?君)으로 불렸던 영조의 나이는 열아홉.
영조에게 부왕 숙종은 아버지이자, 스승이었다. 영조는 연잉군 시절, 국왕 중심의 지배질서를 세우고 강한 나라를 일으키는데 필요한 안목과 통치술을 부왕 숙종의 행보를 지켜보면서 배웠다.
이날 영조의 울음은 그런 선왕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던 것으로 문헌에는 기록됐다.

하루하루가 위태로웠던 연잉군 시절의 절박함과 아픔에 대한 기억 때문이기도 했다고 한다.
연잉군은 비록 왕자의 신분이었지만, 또한 궁녀의 하인으로까지 취급받던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淑嬪 崔氏, 1670~1718)의 아들이었다.
그래서 은근한 멸시의 눈길과 목숨을 걸어야 했던 왕위 승계 다툼을 딛고 오른 왕좌였기에 부왕에 대한 그리움은 더 했다.
부왕의 뒤를 이을 왕세자는 희빈 장씨(禧嬪 張氏, 1659~1701)의 아들로 이미 정해져 있었지만, 붕당 세력과 연계된 후계 다툼은 그치지 않았다.
연잉군은 나이가 들면서 권력다툼의 중심으로 내몰리면서 다음 군주 자리를 두고 생존을 걸어야 하는 위치에 서 있었던 것이다.
부왕은 승하하기 3년 전에 "연잉군의 앞날을 부탁한다"는 말을 남겼는데, 이는 더 큰 빌미가 돼 왕세자가 경종(景宗, 1688~1724, 재위: 1720∼1724)으로 왕위에 오른 뒤에도 다음 왕권을 두고 목숨을 건 권력투쟁이 이어졌다.
결국 연잉군은 살아남았고, 경종이 후사 없이 재위 4년 만에 승하하지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그렇게 36년 군주의 세월이 흐르고, 이제 부왕과 함께 올랐던 그 북한산성을 다시 찾은 것이다.
슬픔을 가라 앉힌 영조는 선왕의 포진을 궤(櫃)에 넣어 간직하라고 이른 뒤, 성곽 관리와 군량미 보관 등 북한산성 관련 업무를 지시하고 처리해나갔다.
영조는 다시 강한 군주로 돌아왔고, 숙종의 뒤를 잇는 조선의 강한 군주로 기록됐다.

■ '경기도 기념물' 지정
고양시 덕양구 북한산성 내에 소재한 '고양 북한산성 관성소지 및 상창지'는 지난해 12월 경기도 기념물 제229호로 지정됐다.
'고양 북한산성 관성소지 및 상창지'는 북한산성이 축성된 다음 해인 1712년(숙종 38) 관성장(管城將)이 배치돼 산성을 비롯해 행궁, 3군영(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창고(호조창, 상창, 중창, 하창), 승영사찰(僧營寺刹) 등에 대한 관리와 운영을 전담했던 중앙의 관아시설이다.
국가 사적인 '북한산성 행궁지'와도 가까운 곳에 위치한다.
그동안 문화재 보호법 상 보존·관리받지 못했다가 2020년 6월에 공모사업을 통해 문화재청의 국비 100%를 지원받아 유적에 대한 시굴조사를 하게 됐다.

지난해 3월에는 보다 체계적인 보존·관리·활용 정책을 세우기 위해 경기도 문화재 지정을 추진해 약 8개월 만에 기념물로 새로 지정됐다.
김수현 고양시 학예사는 "고양 북한산성 관성소지 및 상창지는 현재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서울)에 3군영 유적이 잔존하지 않는 상태에서 원형이 남아 있는 유일한 군영지(관아 및 창고지)"라며 "역사적·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유적이며 북한산성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와 관련해 유산의 완전성을 증명해주는 자료로도 유용하게 사용될 것"이라고 말했다.
참고·인용: 『성(城)과 왕국』, 조윤민, -주류성-
사진: 문화재청·경기도 박물관·고양시
라영철 기자 ktvko2580@asiae.co.kr
'구름발치' 카테고리의 다른 글
477억짜리 그림에 숨겨져 있던 '성모자상' 찾았다 (0) | 2022.01.12 |
---|---|
[장석주의인문정원] ‘노래의 씨앗’을 심는 마음 (0) | 2022.01.09 |
행복 (0) | 2022.01.08 |
생일 턱 1월 5일 (0) | 2022.01.08 |
세계적 건축가들 韓 모였다…3만명이 화성 벌판에 만든 기적 (0) | 2022.0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