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속에 핀 희망과 타자에 대한 사랑
                                                              

문    혜    원 | 문학평론가

전봉건은 1928년 평안남도 안주에서 출생했고, 1950년 《문예》에 「원願」, 「사월」, 「기도」 등이 추천되면서 등단했다. 이후 1988년 작고하기까지, 김종삼, 김광림과 함께 낸 공동시집 『전쟁과 음악과 희망과』를 비롯해서 개인 시집 『사랑을 위한 되풀이』, 『춘향연가』, 『속의 바다』, 『피리』, 『북의 고향』, 『돌』, 시선집 『새들에게』, 『트럼펫 천사』, 『아지랭이 그리고 아픔』, 『기다리기』, 시론집 『시를 찾아서』를 발간했고, 몇 편의 시극과 산문집들을 발간했다.

6·25에 직접 참가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그의 시들은 전후시의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김수영, 박인환, 김종삼 등에 비하면, 전봉건은 널리 알려진 시인은 못된다. 오랫동안 그의 시는 전후 모더니즘의 한 예를 보여주는 것으로만 연구되어 왔고, 개별적인 시인 연구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근래의 일이다.

그의 시에 대한 연구는 크게 몇 가지 주제로 나누어진다. 전후에 씌어진 시들을 중심으로 한 모더니즘적인 특성, 관능성과 에로티시즘적인 요소 그리고 이와 연관된 생명에 대한 애정과 희망, 6·25를 원체험으로 한 실향민의 정서 등이 그것이다. 또 이와는 별개로 형식면에서 「춘향연가」, 「사랑을 위한 되풀이」를 장시 혹은 연작시라는 형식면에서 설명한 글들이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시집 해설이나 단평 등을 제외한다면, 본격적인 연구 업적은 많지 않은 편이다. 이처럼 전봉건의 시가 연구나 이해의 대상에서 소외되어 온 데는 문학 내외적인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문학 내적으로 볼 때, 첫째는 그의 작품의 양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점이다. 1950년 등단해서 1988년 작고하기까지 근 사십여 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그는 개인시집으로 총 여섯 권의 시집을 남기고 있는데, 이는 그다지 많다고는 할 수 없는 분량이다.
 
『사랑을 위한 되풀이』(1959) 이후 『춘향연가』(1967)를 발간하기까지 8년이라는 시간이 걸렸고, 『속의 바다』(1970) 이후 『피리』(1979)에 이르기까지의 시간 또한 거의 십 년에 달하는 것을 보면, 그가 다작의 시인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넘쳐나는 시상을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시 한편 한편을 갈고 닦는 유형에 속하는 시인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특징은 그의 시가 긴장을 유지하게 하는 가장 큰 동력원이지만, 문단의 관심에서 벗어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둘째, 시적인 경향이 다양하고 어느 의미에서는 상반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김춘수가 “심미의식은 모더니즘에 연결되어 있지만 단순하게 모더니즘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고 오히려 모더니즘과 전통주의의 경계에 걸쳐 있다”(김춘수, 「전후 십오 년의 한국시」, 『한국전후문제시집』, 신구문화사, 1957)고 말한 것처럼, 전봉건의 시는 때로는 모더니즘 취향으로 때로는 전통서정시 측면에서 설명된다. 실제로 전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어느 토요일」이나 「JET·DDT」, 「0157584」 등에서는 모더니즘적인 색채가 두드러지지만, 「춘향연가」와 같은 작품은 전통적인 소재와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상반되는 경향은 일정한 시적인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혼재한다.
 
그의 시는 모던한 소재들을 다루면서도 서정적인 어조를 잃지 않고, 그러면서도 서정주나 박재삼으로 대표되는 전통파적인 시인들과도 구별된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시는 ‘리리시즘과 모더니즘의 변증법적 긴장을 보여준다’(이승훈, 「전봉건의 시론」, 『한국현대시론사』 고려원, 1993)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느 쪽 경향에도 속하지 않는 중간 지대에 남게 된다.   

셋째, 그의 시 및 시론에 두드러지는 예술지향적인 경향을 들 수 있다. 그는 전쟁을 소재로 한 시들을 쓰면서도 객관적인 시선을 잃지 않았고, 그러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남아 있는 아름다움의 가치를 믿었다. “전쟁의 마당에 피는 꽃의 색깔도 내게는 그것들이 생래로 지닌 분홍빛이거나 노랑빛이거나 흰빛이거나 그러하다. 그러기에 나는 그것들의 색깔은 그것들이 생래로 지닌 색깔 그대로이다”(『새들에게』 자서)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아름다움이 전쟁의 참혹함을 이길 수 있다고 믿었고, 그것이 시 혹은 예술의 의미라고 생각했다. 잘 알려진 「피아노」, 「음악」 등의 시는 예술지상주의적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시이다.
 
……음악이여.
 
너는 전장을 포복하는 군단의 불면이 겹 쌓여
탄피와 같이 굳어진 나의 눈시울 그 속에도 살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총알 맞아 쓰러졌던 내가
다시 깃발처럼 일어서면서 눈저리게 똑똑히 보았느니
그것은 머리에서 별빛 냄새가 나는 처녀의
둥근 빛무리 같은 알몸이었다.
                                                                                                  ―― 「음악」 부분
 
결국 전쟁터에서 그를 지켜낸 것은 총이나 대포 같은 살상 무기나 투철한 애국심, 반공 정신 같은 사상이 아니라, “장미로 수놓인 하늘 같은/ 노오랗고 새빨갛고 또 무슨/ 여러 가지 빛나는 색깔의 과실 같은/ 그리고 그러한 수없이 많은 과실들과/ 과실들 사이로 보이는 들과 바다 같은/ 샛말간 날개 같은” 음악의 위무의 힘이다. 아름다움을 상상함으로써 현실의 참담함을 견딜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개인적인 경험은, 시는 주장일 수 없다는 그의 시론의 바탕을 이루는 믿음이 된다.

여기에 전쟁과 분단, 4·19와 5·16 등 급박하게 계속되는 사회적인 사건들은, 문학인들에게도 문학 외적인 이슈들에 대한 태도를 표명할 것을 요구했다. 순수 참여 논쟁은 이러한 외적인 압력이 문단내적인 이슈로 연결되면서 이루어진 대표적인 논쟁이다. 전봉건 역시 이 같은 문단내외적인 상황에서 자유롭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봉건은 순수문학적인 입장을 표명하고 김수영과 논쟁을 벌였다. 

이 논쟁은 김수영이 「난해의 장막」(《사상계》, 1964.12)이라는 글에서, 《문학춘추》, 《세대》, 《현대문학》에 실린 시론들을 비평하는 가운데, 전봉건과 김구용의 글을 비판한 데서부터 비롯된다. 김수영은 그들의 시론이 “양심이 없는 기술만을 구사하는 시를 주지적이고 현대적인 시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사기를 세련된 현대성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전봉건은 김수영의 글이 “과잉되게 감정적이고 비논리적이고 저돌적이고 황당무계”하다고 비난하면서, 조목조목 글의 부분을 옮겨가며 비판을 가하고 있다.
 
또 김수영은 시인의 양심과 사회 참여를 주장하고 있는데, 김수영의 대표작인 「거대한 뿌리」는 자신이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현실의 사람들과 괴리가 있다고 지적한다. 즉 “그 속에 끼어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 층의 사람들의 이해를 거부하는 방법을 택”함으로써, 실제로는 이론과 시가 맞지 않다는 것이다. (후에 전봉건은 당시의 논쟁을 회상하면서, 김수영의 참여시 이론은 표현보다 사상이 앞선다는 것인데 그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다.
                                                  ―김현, 「전봉건을 찾아서」, 『시인을 찾아서』, 민음사)

전봉건이 지적한 주장과 행동, 이론과 실제 시 사이의 불일치는 김수영뿐만 아니라, 문학인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묻는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이에 대해 전봉건은 문학의 사회 참여란 그 자체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으며,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진실하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전봉건의 태도는 진솔한 것이긴 했지만, 문학인의 사회적 책임이 강조되는 현실에서는 소극적이고 현실도피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김수영이 참여 시인의 대명사로 불리워지며 지금까지 각광을 받는 것과 대조적으로 전봉건의 시가 주목을 받지 못한 것은, 여기에도 그 원인이 있다.

전봉건의 결벽한 성격 역시 하나의 이유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중동부 전선에서 부상을 입고 제대한 후, 1953년 출판사인 <희망사>에 취직한 것을 시작으로 해서 《현대시》, 《문학춘추》의 편집을 맡아보았고, 1969년에는 《현대시학》을 창간하고 작고할 때까지 주간을 맡아 조정권, 이하석 등 유망한 시인들을 배출해냈다.
 
그러나 그는 신인을 배출하고 지면을 결정하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그것으로써 자신의 문단적 입지를 확보하려 하지 않았다. 서대문구에 있던 《현대시학》 사무실은 돈이 없어 사무실 평수를 줄이고, 나중에는 이중섭 화백의 그림을 팔아 유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사심이 없고 깔끔한 성격이었음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이러한 결벽성은 주변에 가까운 사람들을 쉽게 만들지 못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던 듯하다.

이상의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해, 전봉건은 함께 활동했던 시인들에 비해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아웃사이더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시만큼 전쟁의 비극성을 건조하면서도 적확하게 묘사하고 있는 예는 드물다. 그는 전쟁을 소재로 하면서도 참혹함을 과장하지 않고 객관적이고 건조한 시선을 유지하고자 했다. 예를 들어 「그리고 한쪽 눈을 감았다」, 「0157584」 등은 전쟁의 한가운데서 일어나는 죽음과 삶의 대비를 과장없이 담담하게 묘사함으로써, 전쟁의 참혹상을 더욱 두드러지게 그려내고 있다. 

그의 시가 더욱 중요한 것은, 이처럼 냉정한 현실인식의 한켠에 생명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직접 6·25에 참가해서 전쟁의 참상을 목격했고 그것을 원체험으로 한 시들을 남겼지만, 그 속에서도 희망과 생명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고 있다. (“불탄/ 나뭇가지마다 찌든 전사자의/ 아직도 검은 외마디소리들을 발려내기 위하여/ 수액은 푸른 상승을 시작하고/ 155마일의 철조망이 에워싼 무인지대에서도/ 하늘은 푸르고 새들은 노래하고/ 꽃들은 한들거렸다.” ―「강물이 흐르는 너의 곁에서」) 이러한 믿음은 타자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연결되어 있다. 전봉건에게 있어 시를 쓰는 일은 그 자체가 타자에 대한 사랑을 구현하는 기획투사 행위이다.

가난한 누구보다도 더 가난하고, 상하고 상한 누구보다도 더 애처롭고 끔찍하게 상하였기에 노래하리라. 세계의 가장 슬프고 아픈, 낮은 목소리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더 높은 목소리로. 전쟁보다도 더 강한 목소리로 노래하리라. 나의 노래를, 노래하리라. 노래하리라. 바위보다도 더 깊은 목소리로.
사랑을,
노래하리라. 총알이 뚫고 간 나의 손금 위에서
나는 사랑을, 나의 폐허, 나의 손,
오 나의 조국에서 사랑을, 사랑을 사랑을.
                                                                             ―― 「사랑을 위한 되풀이」 부분

그의 대표작인 「춘향연가」는 타자를 향한 사랑이 육체를 가진 인물로 설정되어 구체화된 예이다. 여기서 나타나는 에로스는 생명의 리듬이고, 나아가 전우주적인 생명의 질서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에 나타나는 관능성은 주체의 내면으로의 매몰을 극복하고 우주적인 것으로 옮겨가고자 하는 시도인 셈이다. 실향과 분단을 소재로 한 시들 역시 ‘타자를 향한 사랑’이라는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다. 그의 시를 관통하고 있는 전쟁 체험은, 역설적으로 타자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전봉건의 시는 전쟁을 원체험으로 하고 있다. 직접적인 전쟁 체험을 소재로 한 초기시뿐만 아니라 실향을 노래한 후기시 역시 이에 바탕하고 있다. 그는 끝까지 전쟁과 분단이라는 사회적인 소재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 예로 후기에 씌어진 『북의 고향』(1982)은 개인적인 실향의 아픔과 민족의 분단이 하나로 용해되어 나타나 있다. 문학의 사회 참여가 시와 별개의 주장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학이 현실과 완전히 분리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김수영이 참여시를 주장하며 지식인 및 학생층의 지지를 받고 박인환이 멜랑콜리한 댄디즘으로 대중에게 어필할 때, 전봉건은 혼자 남아 생명과 남아 있는 희망을 노래했다. 또한 김구용과 김춘수가 일찌감치 시의 비정치성을 선언하고 관념의 깊이로 천착해 들어갈 때 역시, 홀로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그의 시는 참전과 실향, 가족과의 이별이라는 상황을 겪으면서도 개인적인 아픔에 매몰되거나 상황의 참혹함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생명에 대한 지지와 타자에 대한 사랑이라는 주제를 유지하고 있다. 외적인 상황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시세계를 끝까지 고수했던 그는, 한마디로 ‘시인’이었던 것이다.

문혜원   제주 출생. 서울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현재 아주대 강의교수. 1989년 《문학사상》 신인상 수상. 저서로 『한국 현대시와 모더니즘』 『한국 현대시와 전통』과 평론집 『흔들리는 말, 떠오르는 몸』 『우리 시의 넓이와 깊이』 『문학의 영감이 흐르는 여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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