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무를 심어놓고 게을러 뿌리를 놓치고 줄기를 놓치고 가까스로 꽃을 얻었다 공중에 흰 열무꽃이 파다하다 채소밭에 꽃밭을 가꾸었느냐 사람들은 묻고 나는 망설이는데 그 문답 끝에 나비 하나가 나비가 데려온 또 하나의 나비가 흰 열무꽃잎 같은 나비 떼가 흰 열무꽃에 내려앉는 것이었다 가녀린 발을 딛고 3초씩 5초씩 짧게짧게 혹은 그네들에겐 보다 느슨한 시간 동안 날개를 접고 바람을 잠재우고 편편하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 설핏설핏 선잠이 드는 것만 같았다 발 딛고 쉬라고 내줄 곳이 선잠 들라고 내준 무릎이 살아오는 동안 나에겐 없었다 내 열무밭은 꽃밭이지만 나는 비로소 나비에게 꽃마저 잃었다
<극빈> -문태준

구례 섬진강 가 폐교 사택을 얻어 2년을 산 적이 있습니다. 제가 원래 농사꾼 출신이라 텃밭에 상추며 열무며 참깨며 채소를 많이 심었습니다. 그런데 열무는 저 혼자 먹고 남아서, 아내에게 보내고, 마을사람들에게 거저 솎아가게 해도 비 한 차례만 내리면 우쭐우쭐 자라버렸습니다. 어느 날 여행을 갔다가 일주일 만에 돌아와 보니 몇 번 먹지도 못한 열무들이 연보랏빛 흰 열무꽃을 온통 피워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열무꽃밭엔 나비떼며 벌 떼가 잉잉거리며 즈이들 사는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고 있었습니다. 내가 미처 거두지 못한 열무밭을 나비며 벌 떼가 차지하고 있던 것입니다. 저는 그걸 바라보며 그 풍경이 너무 아름답고 싱그럽게 느껴졌었습니다.
문태준 시인도 저와 같은 경험을 시로 표현하고 있군요. 사람들이 “채소밭에 꽃밭을 가꾸었느냐”고 놀리는 데서 알 수 있듯, 줄기와 잎 그리고 뿌리를 먹는 열무의 현실적 효용성을 ‘게을러’ 놓쳐버리고, ‘가까스로’ 꽃이라는 비실용적 미적 가치를 얻습니다. 채소밭은 아름다움을 위해 가꾸는 것이 아니라 채소를 재배하여 먹기 위해 있는 공간인데 비실용적이고 엉뚱한 일이 벌어져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난감하고 망설여지는 일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꽃밭에 한 마리, 두 마리, 나비 떼가 나타나 앉아서 “그네들에겐 보다 느슨한 시간 동안”을 머뭅니다. 한마디로 열무꽃밭의 쓰임새가 전복되는 순간입니다. 열무꽃밭은 사람들에게 싱싱한 채소를 제공해주진 못하지만 나비 떼에게 깊은 휴식의 시간을 만들어준 것입니다. 결국 나의 열무밭은 나비의 꽃밭이 되어버린 셈이지요. 나는 살아오면서 남에게 편히 쉬라고 내준 ‘무릎’이 한 번도 없었는데, 열무꽃은 나비 떼에게 느슨한 휴식의 자리를 내어주었으니, 어쩜 나는 열무밭에서 잎과 줄기, 뿌리만이 아니라 나비에게 꽃마저 잃은 셈이지요. 그러니 이게 ‘극빈’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름다움을 향한 허영과 욕망마저도 비워버린 지독한 가난인 셈이지요. (고재종 시인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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