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대학일기』(실천문학, 1987년), 『마른잎 다시 살아나』(한겨레, 1989년), 『지독한 불륜』(실천문학, 1996년), 『소주병』(실천문학, 2004년) 아동전기 『성철스님은 내 친구』(재능출판, 1993), 『천진한 부처 성철스님』(북앤피플, 2003년), 『마음동자』(화남, 2004년) 논문 [신경림 시의 창작방법 연구] 등
공광규시인 ( 시모음 )
아름다운 오드리 햅번
우리가 정말 아름다운 오드리 햅번을 만난 것은 <로마의 휴일>에서가 아니라 아프리카에서였다고 문화일보 1996년 10월 21일자 32면에 ‘고객과 함께 하는 세계로 미래로-삼성’이 전면 이미지 광고를 냈다
흰머리 쭈그렁탱이 할머니가 아프리카나 어느 나라에서 기아에 허덕이는 인간 막대기를 안고 세상을 슬프게 응시하고 있다.
영풍문고판 48쪽에 실린 믿어지지 않을 만큼 탱탱한 몸매로 번 재산을 기아의 아가리에 털어 놓고서야 천사가 되다니 피부가 헌 가죽부대처럼 쭈글쭈글 해져서야
아름다워지다니
평생을 거쳐 아무도 아무것도 제대로 사랑해보지 않은 나는 언제 나에게서 해탈하여 이 할머니처럼 세상을 바라볼 것인가
그 사람
흰 그릇에 담아도 검은 그릇에 담아도 그대로인 바가지로 뜨면 바가지 가득 항아리로 뜨면 항아리에 가득한 작은 도랑에서도 좁음을 탓하지 않고 맑은 노래를 부르는 탁한 강물로 흘러들어도 불평 없이 세상의 복판을 뚫고 가는 그러다 세상이 마음에 안 들거나 화가 나면 온 들판을 엎어버리고 새로운 길을 내는 어떨 땐 내 마음의 물길로 흘러와 찰랑찰랑 나와 한 몸이 되는 마음처럼 고여 있고 감정처럼 움직이는 그러다 흘러넘쳐 너를 적시고 마침내 세상을 적시는 가끔 강하고 딱딱한 것들과 만나면 부딪치고 다투어 허물어버리지만 마음이 허공 같아 달도 산도 꽃도 마침내 하늘도 담는 그러다 햇빛을 담을 때 내 마음 가득 눈부신.
소주병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주면서 속을 비워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아름다운 사이
이쪽 나무와 저쪽 나무가 가지를 뻗어 손을 잡았어요 서로 그늘이 되지 않는 거리에서 잎과 꽃과 열매를 맺는 사이군요
서로 아름다운 거리여서 손톱 세워 할퀼 일도 없겠어요 손목 비틀어 가지를 부러뜨리거나 서로 가두는 감옥이나 무덤이 되는 일도
이쪽에서 바람 불면 저쪽 나무가 버텨주는 거리 저쪽 나무가 쓰러질 때 이쪽 나무가 받쳐주는 사이 말이어요
사랑
기운 나무 두 그루가
서로 몸을 맞대고 있다
맞댄 자리에 상처가 깊다
바람이 불 때마다
뼈와 뼈가 부딪히는지
삐악 삐악 소리를 낸다
얼마나 아프겠는가
서로 살갗을 벗겨
뼈와 뼈를 맞댄다는 운명이.
아내
아내를 들어 올리는데 마른 풀단처럼 가볍다
수컷인 내가 여기저기 사냥터로 끌고 다녔고 새끼 두 마리가 몸을 찢고 나와 꿰맨 적이 있다
먹이를 구하다가 지치고 병든 컹컹 우는 암사자를 업고 병원으로 뛰는데
누가 속을 파먹었는지 헌 가죽부대처럼 가볍다.
썩은 말뚝
큰비에 무너진 논둑을
삽으로 퍼올리는데
흙 속에서 누군가
삽날을 자꾸 붙든다
가만히 살펴보니 오랜 세월
논둑을 지탱해오던
아버지가 박아놓은
썩은 말뚝이다
썩은 말뚝 위로
흙을 부지런히 퍼올려도
자꾸자꾸 빗물에
흘러내리는 흙
무너진 논둑을 다시 쌓기가
세상일처럼 쉽지 않아
아픈 허리를 펴고
내 나이를 바라본다
살아 생전 무엇인가 쌓아보려다
끝내 실패한 채 흙 속에
묻힌 아버지를 생각하다
흑, 하고 운다.
느티나무아래로 가서
이렇게 희망 없는 중년을 더럽게 버텨가다가 다행히 도심이나 여행길에서 늙은 개처럼 버려지거나 비명횡사하지 않는다면 다행이리라 기력이 다한 어느 날 나는 도시의 흙탕물에 젖은 털과 너덜너덜한 상처를 끌고 백 년도 넘게 천천히 살아온 우리 동네 느티나무 아래로 갈 것이다 월산 쪽으로 지는 해를 바라볼 때 누가 회환으로 가득 찬 구겨 앉은 늙은 짐승을 알아줄 리 없지만 남들을 따라 짖어온 그림자 같은 안타까운 삶을 망연히 바라보며 망상을 기댈 것이다.
안면도
언덕에 널린 이른 봄 밭이
빨래처럼 깨끗하다
다리가 빨간 소나무 숲이
곧게 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바람에 휘어지는 대나무 숲
그 옆에 매화가 환하다
안면도에 살면
일생이 곧고 깨끗하고 환할 것 같다.
새싹
겨울을 견딘 씨앗이
한 줌 햇볕을 빌려서 눈을 떴다
아주 작고 시시한 시작
병아리가 밟고 지나도 뭉개질 것 같은
입김에도 화상을 입을 것 같은
도대체 훗날을 기다려
꽃이나 열매를 볼 것 같지 않은
이름이 뭔지도 모르겠고
어떤 꽃이 필지 짐작도 가지 않는
아주 약하고 부드러운 시작.
시골집
무쇠솥이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새끼 염소가 외양간 기둥을 툭툭 뿔로 친다 서울 아이들은 개떡보다 불장난이 더 맛있다 아궁이에 마른 대나무가 펑펑 터지고 나른함을 활주로 삼아 비상하는 파리떼 아흔 살 할머니는 시부렁시부렁 남은 생을 탓하며 파리채로 방바닥을 두드린다 옛날에 구렁이가 떨어졌다는 늙은 느티나무 아래 큰아버지가 삭정이처럼 앉아 있다 경운기가 툴툴툴 농업정책에 불만을 터뜨리며 지나간다 볏잎들은 서울 쪽에 등을 돌리고 술렁댄다 빨간 함석지붕 마루에는 도심 피로가 푸줏간 고깃덩어리처럼 졸다 깬다 지나간 잘못과 연애도 시로 쓰면 아름다울까? 잡지와 쓸모 없는 책들을 뽑아 부엌으로 던진다. 잡지 같은 삼류 소설 같은 쓰나 마나한 시 같은 인생이 있을 것이다 한 번 보고 처박히는 일회용 신문지 같은 아궁이에 처넣어도 되는 쓰레기 같은 인간이 있을 것이다. 내가 그런가? 자두나무 이파리가 절 처마 풍경처럼 햇빛에 매달려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며 팔랑거린다.
별국
가난한 어머니는 항상 멀덕국을 끓이셨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를 손님처럼 마루에 앉히시고
흰 사기그릇이 앉아 있는 밥상을 조심조심 들고 부엌에서 나오셨다
국물 속에 떠 있는 별들
어떤 때는 숟가락에 달이 건져 올라와 배가 불렀다
숟가락과 별이 부딪히는 맑은 국그릇 소리가 가슴을 울렸는지
어머니의 눈에서 별빛 사리가 쏟아졌다
폭설
술집과 노래방을 거친
늦은 귀갓길
나는 불경하게도
이웃집 여자가 보고 싶다
그래도 이런 나를
하느님은 사랑하시는지
내 발자국을 따라오시며
자꾸자꾸 폭설로 지워주신다
욕 심
뒤꼍 대추나무 약한 바람에 허리가 뚝 꺾였다
사람들이 지나며 아깝다고 혀를 찼다
가지에 벌레 먹은 자국이 있었나? 과거에 남 모를 깊은 상처가 있었나? 아니면 바람이 너무 드샜나?
그러나 나무 허리에선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다만 너무 많은 열매를 나무는 달고 있었다.
겨울 산수유 열매
콩새부부가 산수유나무 가지에 양말을 벗고 앉아서 빨간 열매를 찢어 먹고 있다 발이 시린지 자주 가지를 옮겨 다닌다
나뭇가지 하나를 가는 발 네 개가 꼭 붙잡을 때도 좋아 보이지만 열매 하나를 놓고 같이 찢을 때가 가장 보기에 좋다
하늘도 보기에 좋은지 흰 눈을 따뜻하게 뿌려주고 산수유나무 가지도 가는 몸을 흔들어 인사한다
잠시 콩새 부부는 가지를 떠나고 그 자리에 흰 눈이 가는 가지를 꼭 붙잡고 앉는다
콩새 부부를 기다리다 가슴이 뜨거워진 산수유나무 열매는 눈이 빨갛게 충열되었다
아름다운 기둥
법당 받치고 있는 저 기둥 참 아름답다
한때 연약한 새싹이었으나 아름다운 법당 받치고 있다
나 어렸을 때 세상 받치는 기둥 되기로 결심했었다
그러나 지금 아무것도 못 되고 벌써 한 가계에 등이 휘었다
내 휜 등에 상심하다 저 법당 기둥 보고
누구나 세상 한쪽 받치고 있는 아름다운 기둥임을 안다
그러고 보니 원망만 했던 우리 아버지 법당 기둥이었다
가난한 가계 힘겹게 받치다 페가 썩어 일찍 지상에 무너진 아름다운.
대천 바다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을 알아듣는 파도가 나와 술을 마시자고 어리고 슬픈 작부처럼 보챈다 술은 파도가 먹고 싶은데 바람이 먼저 횟집 창을 두드리고 들어와 술을 달라고 졸라댄다
아나키스트, 그 여자의 술집에서 해변에 버려져 썩어가는 배 폐션처럼 늙어가는 나이를 바라보며 생계에 갇힌 인생을 안주로 파도와 수십 잔 수백 잔
사상의 政府도 마음의 情婦도 없이 꿈과 힘과 아름다움이 소진해가는 내가 그리고 네가 안쓰러워 떠나간 사람 떠나간 사랑을 얘기하다 파도가 왜 기타줄에 와서 우느냐고 횡설수설 술잔으로 탁자를 친다.
겨울 태백산
빠지는 눈길 시린 바람
이 길에 든 것을 후회한다
그러나 후회 없는 길이 있다면 나에게 보여달라
이 길이 가장 힘들고 처음인 것 같지만
나보다 먼저 많은 사람이
이 길을 지나 정상에 다다랐으리라
지금은 되돌아가는 길이 더 멀어 앞으로 가는 길
돌부리가 발을 차서 넘어뜨리고
언 나뭇가지가 칼끝으로 뺨을 긋는다
귀신은 휘파람 불며 큰 바위 뒤에서 숨고
나뭇가지는 옷깃을 잡는다
혀를 내밀어 달빛을 핥아 먹는 산죽 잎새
따라붙는 달 그림자
우람한 세월을 몸으로 우는
부러지고 찢어지고 쓰러진 주목.
그리움을 훔쳤다
빌딩 숲에서 일하는 한 회사원이 경찰서까지 끌려 갔다. 점심 먹고 식당 골목을 빠져 나올 때 시멘트 담벼락에 매달린 시래기를 한 움큼 빼어 냄새를 맡다가 식당 주인에게 들킨 것이다. “이봐, 왜 남의 재산에 손을 대!” 반말로 호통치는 주인에게 회사원은 미안하다며 사과했지만 막무가내인 주인과 시비를 벌이고 언성을 높이고 기어코는 멱살 잡이를 하다가 파출소까지 갔다. 사건을 화해시켜 돌려보내려는 경찰의 노력도 그를 신임하는 직장동료들이 찾아가 빌어도 식당주인은 한사코 절도죄를 주장했다. 한 몫 보려는 주인은 그 동안 시래기를 엄청 도둑 맞았다며 한 달치 월급만큼이나 되는 합의금을 요구했다. 시래기 한줌 합의금이 한 달치 월급이라니! 그는 야박하고 썩어빠진 도심의 인심이 미웠다. 더러운 도심의 한가운데서 밥을 구하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래, 그리움을 훔쳤다, 개새끼야.” 평생 누구와 주먹다짐 한번 안 해본 산골 출신인 그는 경찰이 보는 앞에서 도시의 인심에게 주먹을 날렸다. 경찰서에 넘겨져 조서를 받던 그는 추운 유치장 바닥에서 도심의 피곤을 쉬다가 선잠에 들어 흙벽에 매달린 시래기를 보았다. 늙은 어머니 손처럼 오그라들어 부시럭거리는.
다시 절벽
내가 시시해졌다 부동산, 재테크, 조루증 상담 이런 광고들에 눈이 쏠린다
마음으로 하는 사랑 숨어서 하는 연애 남몰래 하던 외도 무덤까지 묻고 가기로 한 은밀한 상처도 긴장이 풀렸다
아찔한 계룡산 능선이나 북한산 바위 절벽 거기 매달려 있는 소나무들을 보고 이제는 위험하다는 생각보다 운명이라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