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 충남 청양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1986년 동서문학에 <저녁>등 5편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 <대학일기> ,<마른 잎 다시 살아나> <지독한 불륜> <소주병> 등

 

수퇘지

 

양돈장에서 얻어온 삼겹살을 굽는데
헌 구두를 잘라 구운 가죽맛이다
젖꼭지가 붙어있는 걸 보니
누린내 나는 수퇘지 뱃가죽이다

 

"어머니,
맛대가리가 하나도 없어요."
"정을 너무 많이 넣은 돼지라 그래."

 

마당가에 나와 오줌을 누면서
뱃가죽을 자꾸 만져본다
가까운 날 무덤 속 미생물들은
내 뱃가죽이 질기다고 투덜거릴 것이다   

  

겨울 산수유 열매 

 

콩새부부가
산수유나무 가지에 양말을 벗고 앉아서
빨간 열매를 찢어 먹고 있다
발이 시린지 자주 가지를 옮겨 다닌다

 

나뭇가지 하나를
가는 발 네 개가 꼭
붙잡을 때도 좋아 보이지만
열매 하나를 놓고 같이 찢을 때가
가장 보기에 좋다

 

하늘도 보기에 좋은지
흰 눈을 따뜻하게 뿌려주고
산수유나무 가지도
가는 몸을 흔들어 인사한다

 

잠시 콩새 부부는 가지를 떠나고
그 자리에 흰 눈이
가는 가지를 꼭 붙잡고 앉는다

 

콩새 부부를 기다리다
가슴이 뜨거워진 산수유나무 열매는
눈이 빨갛게 충혈되었다

 

미안하다, 수캐

 

수캐를 향나무 아래 매어놓고 키운 적이 있다

쇠줄에 묶였으나 나처럼 잘 생긴 개였다

나는창문을 열고 그 개를 가끔 바라보았다

그 개도 나를 멀뚱히 쳐다보며 좋아했다

우리는 서로 묶인 삶을 안쓰러워 하였다

언젠가 한밤중, 창이 너무 밝아 커튼을 올렸다가

달빛 아래 눈부신 광경을 보았다

희고 예쁜 암캐가 와서 그의 엉덩이를 맞대고 있었다

화려한 창조 작업의 황홀경, 나는 방해가 될까봐

얼른 소리를 죽여 커튼을 내렸다

엄마 아빠의 그것을 본 것처럼 미안했다

나는 그 사건을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다

그 개의 사생활을 그 개의 비밀을 지켜 주고 싶었고

그 암캐가 향나무 아래로 자주 오길 기대했다

암캐는 안보이고, 어느 날부터 수캐가 울기 시작했다

동네사람들은 개가 울어 재수없다고 항의했다

나는 개장수에게 전화하라고 아내에게 화를 냈다

헌 군화를 신은 개장수가 오토바이를 타고 왔다

개장수는 철근으로 짠 상자를 마당에 내려놓았고

당황한 개는 오줌을 질질거리며 주저앉았다

개장수는 군홧발로 마구차며 좁은 철창에 개를 구겨넣었다

한 두번 낑낑대다 발길질에 항복하던 슬픈 개

나는 공포에 가득 찬 개의 눈길을 피했다

폭력 앞에 비굴했던 기억이 떠올라 괴로웠다

개는 오토바이에 실려 짐짝처럼 골목을 빠져나갔고

나는 절망의 눈초리가 퍼붓던 개의 신음소리를 들었다

얼마후, 골목에서 어슬렁거리던 강아지떼를 보았다

아비 없이 쓰레기통을 뒤져서 먹이를 구하는

설설대는 강아지들을 거느린 슬픈 암캐

나는 그 암캐가 향나무 아래로 몇 번을 찾아왔었는지

팔려간 수캐에게 몇 번째 암캐였는지 모른다

수캐는 나에게 그걸 말하지 않았고 나는

알았어도 그걸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달빛을 잘 받는 목련나무 아래 수캐를 매어놓았더라면

그가 더 황홀한 일생을 보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미안하다, 평생을 묶여 살다 도살장으로 실려간 수캐

 

소주병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 주면서

속을 비워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별국 

 

가난한 어머니는
항상 밀덕국을 끓이셨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를
손님처럼 마루에 앉히시고

 

흰 사기그릇이 앉아 있는 밥상을
조심조심 받들고 부엌에서 나오셨다

 

국물 속에 떠 있던 별들

 

어떤 때는 숟가락에 달이 건져 올라와
배가 불렀다

 

숟가락과 별이 부딪치는
맑은 국그릇 소리가 가슴을 울렸는지

 

어머니의 눈에서
별빛 사리가 쏟아졌다.

 

출처, 네블, 내영혼의깊은곳


출처 : 휘수(徽隋)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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