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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까마득함 뚝뚝 떼어넣으며 수제비를 끓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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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려놓은 냄비에선 오래 물이 끓어도
멸치 팔러 간 어머닌 오시지 않고
동생들은 까무룩 잠이 들었습니다
청주에서 일을 찾아 증평으로 오신 아버지는 크고 작은 사업을 시작하셨습니다. 다른 지방에서 곡물을 사다 파는 일도 하셨고, 군납을 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강보에 싸인 채 증평으로 와서 열한 살까지 살았습니다. 증평에서 살던 10여년은 내게 여러 가지 행복한 기억을 남겨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행복한 장면들은 열몇 살에 끝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가 군납을 하다 크게 실패하는 바람에 집안은 거덜이 나고 말았습니다.
갑자기 찾아온 파탄으로 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져야 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강원도 원주로 떠나셨습니다. 무일푼에 적수공권으로 울면서 헤어져야 하는 이별이 찾아온 것입니다. 나는 외가에 몸을 의탁하게 되었고, 앞 못 보는 할아버지도 모시고 갈 수 없어 둘째고모 댁에 부탁을 하고 떠나야 하는 이별이었습니다. 그때 진 빚을 다 못 갚아 동업을 했던 이가 수십 년을 두고 찾아다니며 빚독촉하는 걸 지켜보기도 했습니다. 청주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아버지와 동업을 했던 이가 학교로 찾아와 아주 친절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아버지 있는 곳을 찾고 물어보던 기억이 있습니다.
나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습니다. 초등학교 때도 신문지에 크레용으로 무언가를 그리는 게 좋았고, 중학교 때는 만화를 곧잘 그렸습니다. 만화 그려놓은 것을 동네 애들이 오원, 십원씩 주고 사가기도 했습니다. 미술시간에 크리스마스카드를 그려 그것으로 문화원에서 전시회를 열어 불우이웃돕기 바자회를 한 적이 있었는데, 다른 친구들의 카드는 보통 오백원씩 팔렸지만, 내 카드는 이천원, 삼천원에 나가곤 했습니다.
종례가 끝나면 나는 도서실로 달려가 책을 읽었습니다. 내가 다니던 청주중학교는 도내에서 제일 크고 좋은 도서실을 갖추고 있었는데, 완전 개가식으로 운영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들어간 사람이 자기 마음에 드는 책을 직접 골라가지고 올 수 있었습니다. 도서실 서가에 들어가 이 책 저 책을 뒤적이는 일이 참 좋았습니다. 문학전집, 공상과학 소설, <학원> 같은 학생 잡지에서 과학잡지까지 닥치는 대로 읽었습니다.
친구들이 문제집 풀고 있을 때 도서실에서 책을 읽었습니다. 나도 참고서나 문제집 한 권씩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바랐지만 참고서를 사줄 아버지가 옆에 있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이 수학여행을 갈 때 같이 갈 수 없었고 내일 소풍을 간다고 도시락을 싸달라고 말을 할 수가 없어서 그냥 빈손으로 소풍을 따라갔다 오곤 했습니다. 수학여행을 갈 형편이 안 되는 애들은 학교에 나와 있었는데 그 애들 중에 속리산으로 하루 여행을 다녀올 형편이 되는 애들은 돈을 걷어 선생님이 속리산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거기도 갈 수 없는 애들 몇은 남아서 정구장 롤러로 정구장 바닥을 다지는 일을 했습니다. 진종일 커다란 시멘트로 된 롤러를 끌면서 정구장을 밀고 났더니, 선생님은 다시 운동장 가에 심어져 있는 나무의 송충이 잡는 일을 시켰습니다. 친구들이 여행을 떠난 텅 빈 운동장 가에서 송충이를 잡아 깡통에 넣던 일은 상처가 되어 오래 남아 있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일 년에 두 번 방학 때가 되어야 볼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는 편지를 썼습니다. 어떤 때는 눈물을 질금거리며 ‘부모님전 상서’를 썼습니다. 국어선생님이 가르쳐 준 대로 계절 인사 몇 줄을 쓰기 위해 계절의 변화를 세심히 살폈고, 비가 오는지, 무슨 꽃이 피는지, 별이 어떻게 떴는지를 살피곤 했습니다. 그렇게 주위의 정경에 관심을 갖는 것이 글 쓰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데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편지를 받을 때마다 아버지도 답장을 보내주시곤 했는데 편지는 올 때마다 주소가 바뀌었습니다. 편지봉투에 쓰여 있는 주소를 들고 방학 때면 아버지 어머니를 찾아 갔습니다. 외롭다는 생각, 혼자 있다는 생각, 가난 때문에 받았던 상처가 나를 글 쓰는 사람이 되게 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외가에서 먹여주고 돌봐 주셔서 3년간 중학교를 다닌 뒤 고등학교는 원주로 진학을 했습니다. 성적에 따라 학교를 어디로 갈 것인가를 생각하기보다 그냥 어머니 아버지와 같이 지내며 학교를 다니고 싶은 생각이 더 컸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어머니 아버지는 원주시 변두리인 태장동에 살고 계셨습니다. 구멍가게를 하기도 하고 국수틀을 돌리기도 하던 아버지는 거기서도 정착을 하지 못하고 떠돌았습니다. 그러다 경기도 어딘가로 또 떠나시고 어머니가 근교로 멸치 장사를 다니며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고등학생인 나는 멸치 장사를 나간 어머니를 기다리며 저녁 준비를 했습니다. 팔다 남은 멸치로 국물을 우려내며 수제비를 끓이는 날이 많았습니다. 땅거미가 지고 어머니가 오실 때를 기다리며 부엌에 올려놓은 냄비에선 오래 물이 끓어도 어머니의 귀가가 늦어지는 날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기다리던 동생들과 노래를 불렀습니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하는 노래를 부르다가 눈물이 맺히곤 했습니다. 그 노래는 엄마를 기다리는 아기를 노래하기도 하지만, “다 못 찬 굴 바구니 머리에 이고 엄마는 모랫길을 달려” 오듯이 엄마도 아기가 걱정이 되어 달려오고 있을 거라고 믿는 마음이기도 했습니다. 노래를 불러도 불러도 어머니는 오지 않고 기다리다 허기에 지친 동생들은 들마루에 쓰러져 잠이 들었습니다. 잠든 동생들의 얼굴 위로 어둠이 점점 짙게 내려앉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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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려놓은 냄비에선 오래 물이 끓어도 멸치 팔러 간 어머닌 오시지 않고 동생들은 까무룩 잠이 들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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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내장으로 멸치를 팔러 간
어머니는 오지 않았다
미루나무 잎들은 사정없이 흔들리고
얇은 냄비에선 곤두박질치며
물이 끓었다
동생들은 들마루 끝 까무룩 잠들고
1군 사령부 수송대 트럭들이
저녁 냇물 건져 차를 닦고 기름을 빼고
줄불 길게 밝히며
어머니 돌아오실
북쪽길 거슬러 달려가고 있었다
경기도 어딘가로 떠난 아버지는 소식 끊기고
이름 지을 수 없는 까마득함들을
뚝뚝 떼어 넣으며 수제비를 끓였다
어둠이 하늘 끝자락 길게 끌어
허기처럼 몸을 덮으며 내려오고 있었다
국물이 말갛게 우러나던 우리들의 기다림
함지박 가득 반짝이는 어둠을 이고
쓰러질 듯 문 들어설 어머니 마른 멸치 냄새가
부엌 바닥 눅눅히 고이곤 하였다.
- 졸시 <수제비> 전문
그래도 그때는 매일 저녁 팔다 남은 멸치 부스러기를 넣어 끓인 국물에 수제비 정도는 끓여 먹을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찾아 어머니마저 떠난 뒤에는 먹을 양식이 있다 없다 했습니다. 아르바이트 해서 연탄을 사기도 했지만 그것으로 연명을 하기는 힘들었습니다. 저녁을 굶고 학교에 남아 밤공부를 하다 허기를 못 참아 있는 돈을 다 털어 내가 마련할 수 있는 것이 건빵 한 봉지뿐이던 날도 있었습니다. 쌀이 떨어진 걸 보고 친구들이 자루를 들고 여러 친구 집을 다니며 한두 됫박씩 걷어다 마루에 던져두고 간 날도 있었습니다.
수업료를 안 낸 사람이 나 혼자라서 교무실에 불려갔는데, 언제까지 낼 수 있느냐고 묻는 담임선생님 질문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언제까지 줄 수 있는지 물어볼 어머니 아버지가 옆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학교에서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강둑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쪼그려 앉아 울었습니다.
서정주 시인은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었다”고 노래했는데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가난함과 외로움이었습니다.
도종환 시인, 그림 이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