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과 사랑
김 상 미
나는 중학교 때부터 술을 마셨다. 애주가인 아버지 덕에 우리 집에는 양주가 많았다. 조니 워커, 나폴레옹 꼬냑, 시바스 리갈, 발렌타인… 등등. 그리고 그런 양주병들은 바라보기만 해도 예쁘고 세련돼 보여 어떤 맛일까, 무척 맛보고 싶게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늦도록 시험공부를 하다가 재미가 없어 읽다 만 파스칼의 『팡세』를 펼쳤다. 그런데 갑자기 밖에서 빗소리가 났다. 가을비였다. 음산한 가을비.
나는 마루로 나가 찬장에서 아버지가 마시다 둔 양주병을 꺼내 한 잔 가득 따랐다. 그리고 그것에다 설탕을 탔다. 설탕을 타도 독주는 독주인지라 가슴속으로 흘러 들어온 술 방울은 확, 하고 내 몸에다 불꽃을 튀겼다. 마치 몸 안에서 불꽃놀이라도 벌어진 듯. 짧지만 아주 강렬한 느낌이었다. 파스칼이 셰익스피어처럼 삐딱해지는 것 같았다.
아, 이런 게 술의 맛이구나. 장미꽃 봉오리가 활짝 피어나는 것 같은.
그 이후부터 나는 가끔씩 술을 마셨다. 때로는 커피나 홍차에 한 방울씩 떨어뜨려 마시기도 했다. 뜨겁고 강렬한 술맛을 배후에 깔고 읽는 세계 명작들은 영혼을 아주 빨리 달아오르게 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딱 한 잔씩만 마셨다. 한 잔 이상은 절대 연거푸 마시지 않았다.
그러다 고등학교 졸업식날 오후, 파라다이스 두 병을 마시고 뻗어버렸다. 선배 오빠 세 명이 찾아와 대학 진학은 꼭 해야 한다며, 자신들이 등록금을 대주겠다며 어찌나 나를 협박(?)하던지 나도 모르게 연거푸 술잔을 비운 탓이었다.
그들 중 한 명의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대학 진학은 물론 그들의 프로포즈도 단호히 거절해 버렸다.
엉망으로 취해 있어도 별이 빛나는 밤은 아름답듯이 나 역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인위적으로 내 인생 궤도를 수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남들이 다 가는 길, 남들이 다 ‘순리’라고 부르는 그 길을 혹 내가 가지 못할지라도 “술은 입으로 오고/ 사랑은 눈으로 오나니// 우리가 늙어 죽기 전/ 알게 될 진실은 오직 그것뿐…”이라고 속삭이는 예이츠처럼 나 역시 술과 사랑을 선택하고 싶었다.
이 세상엔 술도 못 마시고 사랑도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술병에 코를 대고 맡아보라. 그 안에는 우리가 언젠가 어느 길목에서 보고 느끼고 만지다 잃어버린 냄새와 눈물과 아쉬움과 향수가 다 녹아들어 있다. 그 생의 비밀계단과 같은 술잔을 높이 들고 흔쾌히 술을 마시고 흔쾌히 술을 건네는 사람들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술병을 옆구리에 차고 아직도 이니스프리 섬을 이리저리 거닐고 있을 예이츠의 모습. 상상만 해도 얼마나 자유롭고 편안해 보이는가.
물론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취한 사람들은 불쾌하지만, “술은 입으로 오고/ 사랑은 눈으로 오나니….” 그러니 “…와서 맛보라/ 저절로 익은 것들은 무엇보다도 풍성하고 따뜻하다…/ 원하는 맛대로 나를 마셔라/ 저절로 익은 향기는 모두 에로스의 핏줄/ 상상할 수 없는 태고의 사랑이 내 속에 녹아 있다/ 마음껏 나를 마셔 나를 발견하고 나와 작별하라/ …”(나의 시 '나는 포도주' 중에서)
술과 사랑. 그리고 시. 나는 오늘도 그 위에서 아침을 맞고 황혼을 맞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다. 99%의 유쾌한 마음과 절실한 마음으로 생의 경계를 넘어 내게로 한 발 두 발 다가오는 사랑이여, 너를 기다린다!
김상미 1957년 부산 출생. 1990년 '작가세계' 여름호로 등단. 박인환 문학상 수상. 시집 '모자는 인간을 만든다' '검은, 소나기떼' '히지 않는 나비'등이 있음.
출처 : http://cafe.daum.net/chojung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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