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추쌈 /구활
막걸리에 취해 밤길 대여섯 시간을 걸어 어머니가 계시는 고향집에 간 것이 딱 이맘때다. 그날이 보름이었던가. 아니야, 보름에 가까운 초승달이 살쪄 있는 아마 그런 밤이었지. 술 취한 눈은 보름달이 중천에 걸렸는지 하현달이 멍에다물에 걸렸는지 그걸 알지 못한다.동촌과 반야월을 지나고 청천을 거쳐 고향집이 있는 하양의 도리리에 도착하니 새벽 네시가 좀 지나 있었다. 인기척에 놀란 어머니가 “우짠 일이고” 하며 소리를 지르셨다. 스물한 살짜리 청년 셋이 방으로 밀고 들어갔다. 나중 ‘마당 깊은 집’의 작가가 된 김원일과 영문학 박사가 된 고 윤지홍 그리고 어머니의 아들인 나였다.
#작가 김원일과 술기운에 밤길 60리 걸어
김원일은 나의 첫 에세이집인 ‘그리운 날의 추억제’의 발문에서 그날 밤의 기억을 이렇게 썼다. “대학 3학년 때던가. 활의 고향집을 심야 방문했던 추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향촌동 ‘고구마 집’을 시작으로 말술을 퍼마시며 이상과 윌리엄 포크너 그리고 제임스 조이스를 읊고 있는데 ‘걸어서 하양까지 가자’는 활의 제의에 술기운이 동의하고 나선 것이다. 우리는 개구리 울음소리를 들으며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야경꾼을 피해 논둑 옆에 숨었다가 금호강을 끼고 다리 아픈 줄 모르고 육십 리 밤길을 내처 걸었다.”
그날이 몇 월 며칠인 줄은 정확히 모른다. 다만 그날 아침 어머니가 텃밭에서 솎아온 기차표보다 조금 더 큰 상추잎의 크기를 기억해 내고 보니 그날이 딱 이맘때인 것을 가까스로 알겠다. 겨우내 땅속에서 숨죽이고 있던 지렁이와 온갖 미생물들이 흙을 푸석푸석하게 일궈 놓는 새봄이 오면 농부가 맨 먼저 뿌리는 씨앗이 상추와 쑥갓 그리고 실파다.
“흙이 가진 것 중에/ 제일 부러운 것은 그의 이름이다/흙 흙 흙하고 그를 불러보라/심장 저 깊은 곳으로부터/눈물 냄새가 차오르고/이내 두 눈이 젖어온다/흙 흙 흙하고 불러보면/눈물샘 저 깊은 곳으로부터/슬프고 아름다운 목숨의 메아리가 들려온다./하늘이 우물을 파놓고 두레박으로/자신을 퍼올리는 소리가 들린다.”(문정희의 시 ‘흙’ 중에서)
#보글보글 된장국에 날된장 그리고 상추
“야야, 고만 자고 아침 묵어라.” 혼곤한 늦잠에서 깨어보니 보글보글 끓는 된장국 옆엔 낟알 콩이 듬성듬성한 노란 날된장 한 종바리(작은 사발의 사투리)가 담겨 있다. 상추쌈의 풍미를 더해 주는 멸치젓국 속의 멸치도 아직은 눈깔이 반들반들한 채로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이다. 비좁은 상위에 올라오지 못한 상추 소쿠리에는 고향 사람들 모두가 열차에 올라타도 몇 장 남을 기차표 상추와 실파가 가득하다. “올 상추 너희들이 첫 마수하네.” 어머니의 기쁜 음성이 상추와 쑥갓은 물론 옆에 있는 멸치까지 춤추게 할 것 같다.
두레상에 둘러앉은 우리는 상추쌈을 입이 터져라 움켜 넣었다. 술 마시느라 저녁도 굶은 데다 밤길을 걸어 왔기 때문에 식욕은 잔뜩 화가 난 상태여서 청산의 솔가지도 입에 넣으면 금방 소화가 될 것 같았다. 원일의 글은 상추쌈의 기억으로 끝을 낸다.
#상추쌈 먹을 때면 어머니·친구 생각나
“청상에 지아비를 여의고 농사일에 매달려 홀로 고향집을 지키던 그 노친네가 이튿날 아침 그득하게 차려 내놓은 아침 밥상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울안 텃밭에서 갓 뽑아온 상추를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그 뒤 어머니는 나만 보면 ‘원일이 니 요새도 상추쌈 그래 마이 묵나’ 하신다. 한 소쿠리를 먹고 또 더 먹었으니 그날의 아침 밥맛이 그 어떤 진수성찬보다 그립게 회상된다.”
나는 요즘 화분에서 키운 기차표 상추를 아침에 한 소쿠리, 저녁에 한 소쿠리 먹어 치운다. 상추쌈을 먹을 때마다 어머니를 만나고 멀리 있는 친구를 만난다. 오늘 저녁 밥상 앞에서 만나면 거나하게 막걸리 좀 마시고 밤길 육십 리를 다시 걸어보자고 제의해 볼 참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hojung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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