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량수전에서

 

주영순

 

  길을 잃은 듯 안양루에 서 있다. 절집은 처마 끝마다 버선코처럼 살짝 들리어져 신비롭다. 운해에 섞여 먼 산은 간 곳 없다. 어렴풋이 보이는 낮은 산들이 남실거리는 파도처럼 아련하게 보인다. 우산을 높이 들고 공중에 뜬 기분으로 천천히 돌아선다. 비를 맞는 무량수전의 모습이 음전하다.

  부석사는 일주문에서 안양루까지 돌계단으로 길이 이어진다. 다른 절집처럼 한눈에 사찰 정경이 보이지 않는다. 누각 밑의 계단을 한 발 한 발 디딜 때마다 번뇌를 하나씩 버리면 누구나 극락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빗소리를 들으며 헝클어진 생각을 정리한다. 전화 속 힘없던 딸의 음성에 맥없이 주저앉던 날이 떠오른다. 어느 만큼 가다가 절집의 수려한 모습이 펼쳐지고, 단청이 벗겨져 민낯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범종루로 들어선다. 시야가 시원해 한숨을 돌린다.

  사사로운 갈등을 미련 없이 버리지만 돌아서면 어느새 가득 차 있는 번뇌를 어이하겠는가. 맑은 여인으로 살고자 했었다. 못난 짓거릴 많이도 했었다. 뉘우침은 없고 한만 남는 이유는 뭘까. 교만이, 이기심이 옥죄는 걸 왜 모르나. 비는 끊임없이 내리고 아홉 개로 되어있는 석단의 마지막 돌계단을 딛는다.

딸은 모든 걸 잊으려고 애를 쓰며 살아간다. 아직도 슬픔에 젖어 과거에 사는 이 못난 어미는 딸만도 못하다. 알게 모르게 지은 죄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일까. 의심에 불안을 달고 산다. 백팔개의 돌계단에서 무엇을 내려놓았나. 마음대로 안 된 주저앉고 싶던 날들을 다 끌고 올라왔다.

  마지막 돌계단을 딛고 안양문으로 들어선다. 빗줄기 사이로 퇴색된 천 년 빛을 휘감은 무량수전이 보인다. 여섯 개의 배흘림기둥이 우뚝 서 형형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홀리듯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을 조심스럽게 만진다. 습기를 잔뜩 먹어 축축하다. 거칠거칠한 몸을 쓸어내리며 거대한 세월 동안 수고한 노동에 숙연해진다. 쩍쩍 갈라진 골진 주름을, 깊은 몸속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배흘림기둥은 통통한 것이 딸애의 배를 닮았다. 천하를 얻은 것처럼 기쁨이 딸애를 감쌌다. 온갖 수식어를 다 가져와도 모자랄 만큼 신기하고 대견해서 봉긋한 배를 만져보고 또 만졌다. 몇십 년 만에 세상에 나올 쌍둥이 손주를 기대하며 모두 꿈길을 걸었었다. 배가 막 달처럼 부풀어 오르는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양수과다증으로 아기는 물론 산모까지 위태로웠다. 그렇게 아기들을 잃고 이 년 후 이번엔 기필코 아기를 잃는 일은 없을 거라고 했건만 오 개월이 되자 또 실패하였다.

  울음바다에 빠진 듯 허우적거리던 딸이 툭툭 털고 일어났다. 딸애의 의지가 굳어 오히려 위로를 받았다. 몸을 추스르고 전화 속 딸의 음성은 차분하다. 나쁜 꿈을 꾼 거라며 다 잊자고 하며 학교에 다시 나가겠다고 한다. 건강 잘 챙기시라며 오래오래 살아 힘이 되어달라고 한다. 그 이후 지금까지 아기는 가슴에 묻고 사는듯하다. 한 번도 이야길 꺼내지 않는다.

  비가 거세진다. 그날도 오늘처럼 비가 내렸다. 딸아이를 가졌을 때 복더위를 보내느라 힘이 들었다. 그 더위를 다 보내고 비가 축복처럼 오던 날 저녁에 딸애를 낳았다. 잠도 안 자고 아기를 들여다봤다. 일생에서 제일 귀하고 좋았던 시간은 아기를 품고 낳고 양육하던 때라 생각한다. 아기를 안고 내가 이루지 못한 것을 아기가 해주기를 바라며 선한 꿈을 꿨다. 그 꿈은 딸애의 꿈과 기막히게 같았다.

  딸은 나의 분신이고 나의 자랑이었다. 그분은 왜 딸에게 모성의 기쁨을 느끼기도 전에 슬픔을 알게 하셨을까. 삶은 내 손안에서 좌지우지될 줄 알았다. 탁월한 수재들인 부모의 아기는 어떨까 꿈에 부풀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중생은 세상이 호락호락한 줄 알고 헛꿈만 꿨다.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들을 위해서 피땀 흘려 기도해도 모자랄 시기에 나는 사회일원으로 세상에 나가고 싶었다. 뒤늦게 장롱에서 굴러다니던 자격증에 날개가 달려 취업을 하고는 경거망동을 일삼는 철부지 어미였다.

  무량수전은 팔작지붕의 기와 골을 타고 빗물을 쉴새 없이 떨어트린다. 내 눈물처럼 절집 마당을 흥건히 적신다. 이슬처럼 스러진 태아들이 아까워 애가 탄다. 배흘림기둥에 손을 얹고 사무치는 마음을 꼭 끌어안는다.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던 시간을, 누구나 먼지처럼 사라진다는 것에 계속 헤맨다. 비는 소리를 지르고 나는 걷잡을 수 없는 속울음을 참는다. 세상 빛도 못 보고 간 태아들을 위로하며 천천히 배흘림기둥을 쓸어내린다.

  착시효과일까. 기와의 곡선은 춤을 추는듯하다. 비에 젖는 무량수전은 더욱 수려하고 마음을 고요하게 해준다. 절집 마당에 부처의 진리를 비추는 석등이 있다. 석등을 천천히 돌며 곱게 핀 꽃을 발견한다. 연꽃은 돌 속에서 빗물을 머금고 활짝 폈다. 더러운 흙탕물에서도 우아하게 올리는 꽃을 생각한다. 한 송이 연꽃처럼 피어난 무량수전을 바라본다. 어떠한 순간에도 기품있는 맑은 생이 되기를 바라며 산란하던 마음을 가라앉힌다.

  절집으로 내려온 구름을 밟는 느낌으로 무량수전의 은은한 향에 취한다. 큰 우산에 부딪는 빗소리에 정취가 더욱 무르익는다. 무량한 자비 속 고요가 내면에 잠재된 그리움이 되어 뭉게뭉게 피어오름을 느낀다. 적멸을 꿈꾸는 절집에서 새롭게 태어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2019년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부문 심사평

매일신문 배포 2019-07-05 01:30:00 | 수정 2019-07-01 15:20:33

삶의 이야기가 불러일으키는 감동

장호병 수필가

100세 시대라 말하면 희망사항이라 웃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100세 삶을 의심치 않는다. 오히려 100세가 뭐냐, 120세라고 말하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오래 사는 것만이 축복은 아닐 것이다. 어떻게 건강하게 의미 있게 보람 있는 삶을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

이제 시니어는 이 사회의 주류다. 고령화 시대 운운하지만 그만큼 이 시대의 주체세력 중심세력도 시니어들임을 말함이다.

매일신문이 선도적으로 시니어문학상을 제정하여 올해로 5회째를 맞는다. 금년에도 참 많은 작품들이 응모되었다. 놀라운 것은 한 편이 아니라 5편에서 10편씩의 작품을 응모했다는 것이다.

최원현 문학평론가 수필가

작품들도 수준작이었다. 그것은 곧 시니어들의 힘을 보여준 것이다. 사회의 뒷전에서 비생산적인 부류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주체적 삶을 살면서 사회와 가정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 했던 저력으로 이젠 자신을 위한 알찬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는 증거였다. 해서 녹녹치 않았던 삶을 이겨낸 힘과 지혜와 자랑스러움이 글에서도 나타나고 있었다. 삶의 문학 아니 문학의 삶을 살아온 것이었다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이번 당선작 10편을 뽑기 위해 작품을 읽고 또 읽었다. 살아온 삶의 날들이 얼마나 질곡이 많은 시대였던가. 그 시대의 주인공들, 그리고 이만한 오늘이 있게 한 역전의 용사들 고백이요 흔적들이다.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없고 귀하지 않은 게 없다. 그러나 문학상이다. 겨루어야만 한다. 어떻게 문학적으로 승화시켰는가가 궁극적 결과물로 나와야 한다. 진솔한 이야기면서 문학적인 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작품들이 수준작이었다.

최종 당선작이 된 조순환씨의 '용산방죽' 강문희씨의 '오래된 편지' 주영순씨의 '무량수전에서' 장기성씨의 '코뚜레' 성보경씨의 '모란을 그리다' 조이섭씨의 '나미비아의 풍뎅이' 윤진모씨의 '나의 로망' 김태호씨의 '틈' 민병숙씨의 '초원의 빛' 김현숙씨의 '반딧불이 한의원' 외에도 좋은 작품이 많았지만 등 외로 밀려 안타까웠다.

문학은 감동이 있어야 한다. 그 감동을 어떻게 불러일으키느냐 하는 것이 글을 쓰는 이의 능력이다. 해서 문장력(표현력)과 구성에 주제의 의미화와 형상화는 문학으로의 수필이게 되게 하는 힘이다. 사건의 열거나 겪었던 일의 사실 기록만인 응모작도 많았다. 내 글을 읽고 공감 내지 감동을 할 수 있겠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내 이야기면서 읽는 이의 이야기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좋은 작품으로 수상하신 수상자에겐 큰 축하를 보내며 선에 들지 못한 응모자에겐 내년에 꼭 더 좋은 작품으로 도전해 주길 바란다.

심사위원=장호병 (사.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최원현 (사.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구름발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추  (0) 2021.09.06
"이런 큰돈 어떡하나" 상금 무서워 밤잠 설치는 지리산 시인 [뉴스원샷]  (0) 2021.09.04
부전나비, 제비집  (0) 2021.09.02
우체국 갔다 오는 길  (0) 2021.09.02
부레옥잠  (0) 2021.09.02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