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당선작

순환선 / 이도훈

 

 

 

 

한 사람이 죽었고 법의학자들은

 

그의 사인을 알아내기 위해

 

부검을 했다.

 

먼저 바쁘게 오르내린 계단이 줄줄이 달려 나왔다.

 

몇 바퀴인지 기억도 안 나지만

 

지구를 돌고도 남는다는 혈관엔 무수한

 

정차 역들이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더 울리지 않을 휴대폰에서는

 

남은 문자들이 재잘거렸고

 

생전에 찍은 사진들은 모두 뒷모습이었다.

 

몇 개의 청약통장과

 

돌려막기에 사용된 듯한 카드와

 

청첩장과 부의 봉투가 구깃구깃 들어있었다.

 

그 중 몇 건의 여행계획서가 나왔고

 

퇴근길에 쭈그려 앉아 쓰다듬는

 

고양이 한 마리와 찰칵찰칵

 

열고 닫았을 열쇠 소리도 들어있었다.

 

읽다만 책들의 뒷부분은

 

다 백지상태였다.

 

 

사람들 몰래 지구는 자주 기우뚱거렸고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계획을 쏟거나

 

계획에서 쏟아졌다.

 

오늘은 순환선에서 내려

 

애벌레의 마음으로 길고 긴 한숨을

 

느릿느릿 기어가 보고 싶은 것이다.

 

 

 

본명(이양훈): 한국방송통신대

김병택 나기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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