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論/마경덕

 

 

  묵은 신발을 한 무더기 내다 버렸다


  일기를 쓰다 문득, 내가 신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발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을 한다 학교와 병원으로 은행과 시장으로, 화장실로, 신발은 맘먹은 대로 나를 끌고 다녔다 어디 한 번이라도 막막한 세상을 맨발로 건넌 적이 있었던가 어쩌면 나를 싣고 파도를 넘어 온 한 척의 배 과적過積으로 선체가 기울어버린. 선주船主인 나는 짐이었으므로,


  일기장에 다시 쓴다


  짐을 부려놓고 먼 바다로 배들이 떠나갔다

 

 

 

(200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시집『신발論』(문학의전당,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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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을 잃다

 

이재무

 


소음 자욱한 술집에서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고
한참을 즐기다 나오는데 신발이 없다
눈 까뒤집고 찾아도 도망간 신발 돌아오지 않는다
돈 들여 장만한 새신 아직 길도 들이지 않았는데
감쪽같이 모습 감춘 것이다 타는 장작불처럼
혈색 좋은 주인 넉살 좋게 허허허 웃으면 건네는
누군가 버리고 간 다 해진 것 대충 걸쳐
문밖 나서려는 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찬바람,
그러잖아도 흥분으로 얼얼해진 빰
사정없이 갈겨버린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구멍난 양심에 있는 악담 없는 저주 퍼부어대도
맺혔던 분 쉬이 풀리지 않는데
어느 만큼 걷다보니 문수 맞아 만만한 신
거짓말처럼 발에 가볍다
투덜대는 마음 읽어내고는 발이 시키는 대로
다소곳한 게 여간 신통방통하지가 않다
그래 생각을 고치자
본래부터 내 것 어디 있으며 네 것이라고 영원할까
잠시 빌려쓰다가 제 자리에 놓고 가는 것
우리네 짧고 설운 일생인 것을.
새 신 신고 갔으니 구린 곳 밟지 말고
새 마음으로 새 길 걸어 정직하게 이력 쌓기 바란다
나는 갑자기 새로워진 헌 신발로, 스스로의 언약을
때마침 내리기 시작한 새 눈
인주 삼아 도장 꾹꾹 내리찍으며
영하의 날씨 대취했으나 반듯하게 걸어 집으로 간다

 

 

계간-『창작과 비평』(2005, 봄호)

-제51회 現代文學賞 수상시집『목화밭지나서 소년은 가고』(현대문학,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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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이 나를 신고

 

이재무

 


주어인 신발이 목적인 나를 신고


직장에 가고 극장에 가고 술집에 가고 애인을 만나고
은행에 가고 학교에 가고 집안 대소사에 가고 동사무소에 가고
지하철 타고 내리고 버스 타고 내리고


현관에서 출발하여 현관으로 돌아오는 길
종일 끌고 다니며 날마다 닳아지는 살[肉]
끙끙 봉지처럼 볼록해진 하루
힘겹게 벗어놓고
아무렇게나 구겨져 침구도 없이 안면에 든다

 

 

―《시와 정신》2009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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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신발과 함께

 

안오일

 


아무리 찾아봐도 내 신발이 없다
식당 안, 남아 있는 누군가의 신발 한 켤레
가만히 발 집어넣어 보는데
 남모를 생이 기록된 이 신발은 도통 낯설다
몇 걸음 걸어보지만
모양도 크기도 다른 시간
자꾸만 벗겨져 헛발을 짚는다
오랫동안 잊고 살던 내 발의
생김새와 버릇이 떠오른다
신발 속에는 그 사람의 굴곡이 있다
서로를 맞춰간 침곡 같은 시간으로
동행이 되어준 신발,
발을 꼼지락거려보니
내 발만 놀고 있는 것인데
낯선 신발의 완고함은
내 걸음마저도 바꾸려고 한다

 

 

 

시집-『화려한 반란』(삶이보이는창, 2010)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흐르는 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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