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충북 보은에서 출생
경북대 독문과를 졸업
1987년 <<우리 시대의 문학>>6호에 <금호강> <변비> 등을 발표
시집,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10년 동안의 빈 의자> <붉은 눈, 동백>
궤짝에서 꺼낸 아주 오래된 이야기
우리집에는 아주 오래된 얼룩이 있다
닦아도 닦아도 잘 지워지지 않는
누런 냄새, 누런 자국의,
우리 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그 건망증이다
바스락바스락 건망증은 박하냄새를 풍긴다
얘야 이 사탕 하나 줄까, 아니에요. 할머니.
할머닌 벌써 십 년 전에 돌아가셨잖아요!
봄날
봄날 우리는 돼지를 몰고 냇가에 가기로 했었네
아니라네 그 돼지 발병을 했다 해서
자기의 엉덩짝살 몇 근 베어 보낸다 했네
우린 냇가에 철판을 걸고 고기를 얹어 놓았네
뜨거운 철판 위에 봄볕이 지글거렸네 정말 봄이었네
내를 건너 하얀 무명 단장의 나비가 너울거리며 찾아왔네
그날따라 돼지고기 굽는 냄새가 더없이 향기로웠네
이제, 우리들 나이 불혹이 됐네 젊은 시절은 갔네
눈을 씻지만, 책이 어두워 보인다네
술도 탁해졌다네
이제 젊은 시절은 갔네
한때는 문자로 세상을 일으키려 한 적 있었네
아직도 마비되지 않고 있는 건 흐르는 저 냇물뿐이네
아무려면, 이 구수한 고기 냄새에 콧병이나 고치고 갔으면 좋겠네
아직 더 올 사람이 있는가, 저 나비
십리 밖 복사꽃 마을 친구 부르러 가 아직 소식이 없네
냇물에 지는 복사꽃 사태가 그 소식이네
봄날 우린 냇가에 갔었네, 그날 왁자지껄
돼지 멱따는 소린 들리지 않았네
복사꽃 흐르는 물에 술잔만 띄우고 돌아왔네
동백꽃 활짝
마침내 사자가 솟구쳐 올라
꽃을 활짝 피웠다
허공으로의 네 발
허공에서의 붉은 갈기
나는 어서 문장을 완성해야만 한다
바람이 저 동백꽃을 베어물고
땅으로 뛰어내리기 전에
동백 열차
지금 여수 오동도는
동백이 만발하는 계절
동백 열차를 타고 꽃 구경 가요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거짓말인
삼월의 신부와 함께
오동도 그 푸른
동백섬을 사람들은
여수항의 눈동자라 일컫지요
우리 손을 잡고
그 푸른 눈동자 속으로 걸어들어가요
그리고 그 눈부신 꽃 그늘 아래서
우리 사랑을 맹세해요
만약 그 사랑이 허튼 맹세라면
사자처럼 용맹한
동백들이 우리의 달콤한 언약을
모두 잡아먹을 거예요
말의 주춧돌을 반듯하게 놓아요
풀무질과 길쌈을 다시 배워요
저 길길이 날뛰던
무쇠 덩어리도 오늘만큼은
화사하게 동백 열차로
새로 단장됐답니다
삶이 비록 부스러지기 쉬운
꿈일지라도
우리 그 환한 백일몽 너머
달려가 봐요 잠시 눈 붙었다
깨어나면 어느덧 먼 남쪽 바다
초승달 항구에 닿을 거예요
구두
나는 새장을 하나 샀다
그것은 가죽으로 만든 것이다
날뛰는 내 발을 집어 넣기 위해 만든 작은 감옥이었던 것
처음 그것은 발에 너무 컸다
한동안 덜그럭거리는 감옥을 끌고 다녀야 했으니
감옥은 작아져야 한다
새가 날 때 구두를 감추듯
새장에 모자나 구름을 집어 넣어 본다
그러나 그들은 언덕을 잊고 보리 이랑을 세지 않으며 날지 않는다
새장에는 조그만 먹이통과 구멍이 있다
그것이 새장을 아름답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새 구두를 샀다
그것은 구름 위에 올려져 있다
내 구두는 아직 물에 젖지 않은 한 척의 배,
한때는 속박이었고 또 한때는 제멋대로였던 삶의 한켠에서
나는 가끔씩 늙고 고집센 내 발을 위로 하는 것이다.
오래 쓰다 버린 낡은 목욕통 같은 구두를 벗고
새의 육체 속에 발을 집어 넣어 보는 것이다
만년필
이것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인가 만년필 끝 이렇게 작고 짧은 삽날을 나는 여지껏 본 적이 없다
한때, 이것으로 허공에 광두정을 박고 술 취한 넥타이나 구름을 걸어두었다 이것으로 경매에 나오는 죽은 말대가리 눈화장을 해주는 미용사 일도 하였다
또 한때, 이것으로 근엄한 장군의 수염을 그리거나 부유한 앵무새의 혓바닥 노릇을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이것으로 공원묘지에 일을 얻어 비명을 읽어주거나, 비로소 가끔씩 때늦은 후회의 글을 쓰기도 한다
그리하여 볕 좋은 어느 가을날 오후 나는 눈썹 까만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면서, 해바라기 그 황금 원반에 새겨진 ‘파카’니 ‘크리스탈’이니 하는 빛나는 만년필시대의 이름들을 추억해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오래된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며 지난날 습작의 삶을 돌이켜본다-만년필은 백지의 벽에 머리를 짓찧는다 만년필은 캄캄한 백지 속으로 들어가 오랜 불면의 밤을 밝힌다-이런 수사는 모두 고통스런 지난 일들이다!
하지만 나는 책상 서랍을 여닫을 때마다 혼자 뒹굴어다니는 이 잊혀진 필기구를 보면서 가끔은 이런 상념에 젖기도 하는 것이다-거품 부글거리는 이 잉크의 늪에 한 마리 푸른 악어가 산다
2005년 문예지에 발표된 2006년 올해의 최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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