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발치

무심천의 재발견 - 노래한 詩들

샤인** 2021. 12. 12. 13:44

무심천의 재발견 - 노래한 詩들

최초의 작품은 '無心川 春夜曲'
일제 강점기 때 '박중규'라는 인물이 지어
고려 때는 누각 '공북루'에서 무심천 읊어
공북루, 망선루와 '쌍둥이 인연' 재현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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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0.08.04 18:17:34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無心川 春夜曲'이 무심천을 노래한 최초의 시로 나타났다.

청주 무심천을 직접 노래한 최초의 서정시는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無心川 春夜曲'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는 별개로 고려시대 때 무심천변에 위치, 당시 문신들이 시를 많이 지었던 공북루(拱北樓)를 고증을 거쳐 재현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상징성이 강한 지형·지물은 종종 지역문학의 소재가 돼 왔다. 청주 무심천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를 노래한 시(詩)가 최소 수십편에 이르고 있다.

이와 관련해 현존하는 근현대 사료를 조사한 결과, 무심천을 직접 노래한 서정시는 1938년 박중규(朴仲圭·당시 청주공립중학교 재직)라는 인물이 지은 '無心川 春夜曲'(사진)인 것으로 조사됐다.

매일신보 1938년 4월 17일자 5면에 실린 이 시는 국한문 혼용의 전체 3연으로 구성돼 있다. 이중 1연을 현대문에 맞게 옮기면 다음과 같다.

'으스른 달밤 냇가의 잔듸풀은 꿈꾸고 / 마을總角 호들기소리는 凄凉쿠나 / 괴로움을 잊고서 노래하여 놉시다 / 아! 明朗한 무심천의 밤이여'.

박영수 전 청주문화원 원장은 "문학적으로 볼 때 작품성이 썩 뛰어나 보이지는 않는다"며 "다만 문학사적으로 무심천을 직접 노래한 첫 서정시라는 점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밖에 이은상, 신동문, 오동일, 도종환 등이 작가 특유의 시심으로 무심천을 노래했고, 그것의 주된 주제는 하천 이름과 같은 '무심'(無心)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은상은 시 '무심천을 지나며'의 첫 연을 '그 옛날 어느 분이 애타는 무슨 일로 / 가슴을 부여잡고 이 냇가에 호소할 제 / 말없이 흘러만 가매 무심천이라 부르던가'라고 읊었다.

시인 신동문은 '머언 물굽이 / 너 떠나고 난 뒤에 / 머언 물굽이 종일토록 오늘도 / 머언 물굽이'라고 상념을 추가하고 있다. 도종환 시인은 철학·종교적 관점에서 무심천의 '무심'을 얘기하고 있다.

'바람 한 줄기 서늘히 다가와 몸을 감거든 / 어찌하여 이 물이 그토록 오랜 세월 / 무심히 흘러오고 흘러갔는지 알게 될지니 / 아무것에도 걸림이 없는 마음을 / 무심이라 하나니 // 욕심 다 버린 뒤 저녁 하늘처럼 넓어진 마음 무심이라 하나니 / 다 비워 고요히 깊어지는 마음을 / 무심이라 하나니'.

대중가요 쪽에서는 가수 이미자가 '잊으라는 그 한 마디가 너무나도 사무쳐 / 흐르는 무심천은 스치는 바람이었나'라고 무심천을 노래했다.

문학과는 별개로 일부 정치인도 무심천을 차용했다.

자유선진당 이회창 대표는 '무심천변에 두고 온 사춘기'라는 글에서 '그곳엔 나의 가장 빛나던 사춘기 시절이 고스란히 숨쉬고 있다. 무심천변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한구석이 야릇해진다'라고 회고했다.

한나라당 홍준표 최고위원은 청주지검 재임시절의 추억담을 '무심천과 정치'(부제 홍검사, 당시 실수한 거야) 제목으로 지난 1995년 책으로 출간한 바 있다.

일제 강점기 이후와 달리 고려나 조선시대에는 무심천을 직접 노래한 시가 아직까지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해동지도 청주목 지도로, 시를 읊던 공북루는 지금의 사천동 일대(●표시) 쯤으로 추정된다.

다만 고려시대에는 무심천변 공북루(拱北樓·지도참조)에 올라 일대 풍경을 읊은 서경시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다. 이와 관련, 신증동국여지승람은 공북루에 대해 '고을(청주) 북쪽 3리에 있다'고 적고 있다.

따라서 이를 종합하면 최소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지어진 조선 전기까지 지금의 사천동 쯤에 격이 매우 높은 누각인 공북루가 존재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때의 '공북'은 북극성을 향한다, 즉 임금을 공경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다음은 고려 조계방(曹繼芳)이라는 인물이 공민왕과 함께 무심천변 공북루를 찾았다가 남긴 한시다. 공민왕은 홍건적이 침입(1361년)하자 안동으로 파천했다가, 이후 개성으로 환궁하던 중 청주에 수개월간 체류한 바 있다.

'이 누각이 늘 좋기도 하더니, 임금 수레를 처음으로 맞았구나 /…/ 저녁 볕은 먼 산길을 비추고 / 흐르는 물은 맑은 공간을 끊었도다 / 어부와 나뭇군에게 말을 건네니 / 한가로운 무리는 그대들과 나뿐이리'

지역 또 다른 문인은 "시민들이 해당 사실을 거의 모르는 만큼 무심천변에 공북루 건축물을 재현, 역사와 교육의 공간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며 "이는 같은 시기에 존재했던 지금의 중앙공원 망선루(당시에는 취경루로 호칭)와 세트를 이루는 역사 재현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시대에는 무심천 직전 이름인 '대교천'과 관련한 시가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당시 대교천변의 누각·정자 부재가 영향인 끼친 것 아니냐는 추측을 불러오고 있다.

/ 조혁연 대기자

[땅이름] 충북 청주시 무심천(無心川)


<사진 설명> 청주시내를 가로 질러 흐르는 무심천.

청주시를 동서로 가로질러 무심하게 흐르는 내가 이른바 ‘무심천’이다. 이 무심천을 두고 노산 이은상은 ‘그 옛날 어느 분이 애타는 무슨 일로/ 가슴에 부여안고 이 물에 와 소소할제/ 말없이 흘러만 가매 무심천이라 부르던가/ 눈물이 실렸구나 보태어 흐르누나/ 원망이 잠겼구나 흐르는 듯 맺혔구나/ 이 물에와 호소하던 이/ 몇 분이나 되던고’라고 노래했다.

또, 지역의 문인 한병호는 한점 티끌없이 맑은 서정으로 청주를 하나의 생명체로 생각, 무심천 둑길을 걸으며 청주를 노래하고 있다. ‘무심천을 바라본다/ 흐르는 물빛도/ 떠다니는 유람선도 없다/ 하루종일 바라봐도 아무 것도 없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왔다 구름처럼 흘러가는/ 바람의 빈 여울목/ 10년을 바라보아도/ 100년을 바라보아도/ 보이는게 없다/ 보이는건 빈하늘 뿐이다/ 어떤 이는/ 미라보다리 밑에 흐르는 세느강을 생각한다지만/ 무심천은/ 이대로가 좋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대로가 좋다’

전설지명 연구가인 김기빈의 글을 빌리면, 옛날 청주 남천가에 다섯살된 외아들을 데리고 조그마한 오두막에서 살고 있는 한 여인이 있었다고 한다. 그녀의 집에서 청주로 들어가는 남천위로 통나무로 된 외나무다리가 있었다. 어느해, 큰 장마가 들어 물이 불어나 황토물이 통나무다리 밑으로 넘실대며 흘렀다.

그 무렵 인근의 대원사 스님이 탁발을 나왔다가 모자가 살고 있는 집에 들러 시주를 대신해서 잠시 피곤한 다리를 쉬어가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여인은 마침 성(城)안에 다녀올 일이 있었는지라 다녀올 때까지 어린아이를 돌봐 달라고 부탁하고 집을 나섰다. 스님은 피곤한 몸을 툇마루에 누윈채 어린애를 보다가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얼마쯤 지났을까 밖에서 왁자지껄하더니 애절한 여인의 통곡소리가 들려 눈을 떠보니 축 늘어진 어린아이를 안은 여인이 울부짓고 있는 것이 아닌가!

스님이 잠깐 잠이 든 사이에 어린아이가 남천 통나무 다리에 올라가 놀다가 개울에 떨어져 목숨을 잃은 것이다. 스님은 자신의 불찰을 뇌우치며 죽을 수만 있다면 목숨을 버리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 뒤 여인은 어린애를 화장하여 남천에 띄우고 삭발을 한 뒤, 어린 넋의 극락왕생을 빌며 산으로 들어갔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대원사의 스님은 크게 부끄럽게 생각하고 인근의 여러 가람에 알려 승려회의를 열었다. 그 모임에서 어린아이의 영혼이 극락왕생을 비는 큰 제를 올리고 또한, 통나무다리 대신 튼튼한 돌다리를 놓게 되니 이 다리가 ‘남석교(南石校)’요, 동네 이름이 ‘석교동’이 되었다는 전설이다. 또 다리를 놓을 때 대원사 동쪽에 있는 선도산에 장막을 쳐 돌을 캐, 다듬었다하여 ‘동막골’이란다.

이런 전설을 간직한 남천이 어느 사이엔가 오늘날 무심천(無心川)으로 바뀐 것이다. 그러나 ‘무심천’은 글쓴이 생각으로는 우리말에서 물의 본딧말인 ‘무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무수+내-무수내-무시내-무신내-무심내(無心川)’로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를테면, ‘물막이’의 뜻으로 ‘무수막-뭇막-문막(文莫:강원 원주)’으로, 또 ‘무수골-무쇠골-금호동(金湖洞:서울)’의 경우도 한자로의 뜻빌림(意譯)이 되는 경우, 이런 우(愚)를 범한다.

고을이 맑고 깨끗하여 ‘청주(靑州)’이던가! 그 청주인들의 심성도 이제는 무심하여…, 공단이 들어서고 시가가 번창, 흘러나오는 생활오수로 크게 오염되어 무심하기 이를데 없는 무심천(無心川)이 되었으니!

이홍환 현 한국땅이름학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