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발치

뚱딴지

샤인** 2021. 8. 13. 10:45

  '치마에 비파소리 나듯' 드나들었던 이유가 뚱딴지 때문만은 아니다.

젊음은 언제 적이냐는 듯 사라지고 하얀 서릿발이 촘촘한 나이다. 설렘을 주는 것도, 감동을 주는 것도 찾으래야 찾을 수가 없다. 언제부터일까 내 마음에 들어와 기쁨을 주고 고요하고 순하고 정숙한 듯 화려하고 다소곳하고 내 말을 다 들어주고 어느 땐 수다스러워 가벼운 현기증을 일어나게 하는 그녀. 들여다보고 있으면 왜 사는가를 일깨워주는 그녀. 내가 꽃인 듯 그녀가 나인 듯 우리는 한 몸이 되어 살아갔다.

 

  뚱딴지가 저렇게 장대만 하게 커질 줄이야.  내 어깨만큼 아담하게 자라나 노랗게 웃는 꽃송이를 고대했더니 장다리 키다리가 돼서 고개를 한 참 들어야 끝이 보인다. 뾰족뾰족 꽃봉오리가 맺혀 마디게 올라와 감질을 줘도  새벽마다 저녁마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올려다보며 기다렸다. 엄청나게 우람하게 자라 밀림을 방불케 해 내년엔 화단 뒤로 몰아 모종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꽃밭에 어울리는 꽃은 아니라며 한 수 배우고 있었다.

  비가 자주와 며칠 만에 나갔더니 장대 같은 뚱딴지들이 보도 볼록을 향해 나그네들의 갈길을 방해하는 듯상반신이 나와 걸리적거린다. 마음이 위태위태해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나 두고 관망을 했다. 아뿔싸 생각대로 경비아저씨들이 허리를 동강동강 부러트렸다. 허리를 잘랐으면 뒤처리를 해야 하는데 부러진 채로 놔두는 심술은 뭐람. 허리가 꺾여 신음하고 있는 것이 들리지 않는가? 죽은 것도 아니고 꺾인 채 꼼짝 못 하는 그 몸부림이 왜 안 보인단 말인가. 생각 같아서는 관리실을 방문해 민원을 하고 싶어도 참는다. 하찮은 돼지감자에 목메는 미치갱이 여자로 보일까 무서워 참고, 늙은 아저씨들이 무슨 죄인가 싶기도 하고 힘들게 사시는 분들을 괴롭히고 싶지 않다.

  새벽에 일어나 팔과 다리에 딸이 보내 준 모기기피제를 바른다. 고무장갑을 끼고 모자를 쓰고 긴치마를 입었다. 모진 마음을 먹고 탐스러운 뚱딴지 다리를 뚝뚝 부러트렸다. 잘게 꺾어 어두운 구석에 버리고 잡초를 뽑고 말끔하게 정리를 했다. 꽃송이 가득한 줄기를 따로 꺽어들고 애잔한 눈으로 들여다본다. 꽃을 올리기 위해 그 고생을 했는데 고지가 바로 앞인데 이렇게 모진 꼴을 당했구나. 너희들이라도 물속에서 오래오래 살아라 하며 말을 건넨다. 영문을 모르는 것인지 알아듣는 것인지 노란 눈으로 말갛게 쳐다본다.

  그새 엉덩이에 두 방, 목 언저리에 세 방을 모기한테 물렸다. 모기기피제를 바르나 마나다. 나처럼 모기에게 사랑받는 사람도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알렉산더 대왕이 모기에 물려  죽은 것을 생각하며 모기가 좋아하는 사람은 따로 있나 은근히 으쓱한다. 무료하기 짝이 없는 나날이라 별것을 다 영웅에게 결부시키는 나 자신이 못마땅하다.

  컵에 물을 가득 붓고 뚱딴지를 꽂았다. 축 늘어져 혀를 빼물고 있더니 조금 후에 생기가 돈다 고개를 우아하게 들고 방글거린다. 카메라를 들고 와 앞에서 찍고, 옆에서 찍고, 위아래서 찍으며 뚱딴지의 생명력에 감탄한다. 다른 화초들은 비실비실 크지도 않고 애를 먹이는데 뚱딴지는 가뭄에도 홍수에도 하늘을 향해 행진하는 모습은 생의 활력을 준다. 화려한 장미는 물에 꽂혀서도 금방 시든다. 뚱딴지 꽃은 오래도록 생기 있게 즐거움을 준다. 땅속에 자라는 돼지감자는 켈 생각도 안 한다. 나는 꽃을 보려는 일념 하에 기르는 것이다. 단지 화단에서는 어울리는 화초가 아니라는 것을 기르며 깨달았다.